지금 생각해보면 흔하고 당연한 일이며 영화라는 매체의 전형적인 속성에 불과한 일이지만 당시에는 놀라웠다. 배우라는 인간의 동일성이 시간의 흐름(문화적이고 사회적인 맥락의 변천과 연결된 의미에서)과 배역에 따라 현재에 재편성되어 도래한다는 사실이 특별하게 느껴졌다(이런 즐거움은 지금도 여전하다, 그 배우가 그 배우야, 그 배우가 그 배우였어, 라는 식의 대화를 멈출 수 없고 그것이 영화의 의미를 분석하는 것보다 훨씬 의미 있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p.14)

나보코프는 정말로 진지한 소설에서는 진정한 갈등이 여러 인물 사이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독자와 작가 사이에서 벌어진다고 말했다.

(p.25)

그러므로 우리는 예술을 생각할 때 전체를 생각해야 한다. 작품은 늘 전체와 함께하며 또한 이것이 단순히 삶의 특정 사건과 작품을 연결시켜 의미를 해석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작품을 쓸 때 우리는 삶을 쓰는 것이며 그 삶은 다시 작품을 쓰고 작품은 다시 삶을 쓰며 삶은 다시 작품을…….

(p.26)

미식은 즐거운 일이지만 귀찮은 일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들에게 미식은 행복의 척도다. 그들의 선택은 존중한다. 다만 미식을 즐기는 사람들은 너무 거만하거나 오지랖이 넓은 경우가 많다. 미식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을 삶의 진정한 즐거움을 모르는 양 취급한다. 이건 여행을 즐기는 사람들에게도 나타나는 특징이다. 여행을 싫어한다구요? 오, 어쩜…… 저런……. 나는 여행에도 미식에도 취미가 없다. 내가 관심 있는 건 오로지 예술뿐이다…….

(p.60)

출처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이런 이야기도 있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은 긴 강연 시간으로 유명하다. 한번은 부산의 백화점 문화센터에 강연을 갔다. 영화의 전당도 생기기 전, 영화를 사랑하지만 기회가 많지 않았던 반백 명 내외의 시네필들은 강연을 듣기 위해 문화센터에 모였다. 이른 저녁에 시작된 강연은 예정된 시간을 훌쩍 넘겨 진행됐고 백화점 건물 전체의 마감 시간인 11시가 되었다. 경비원이 말했다. 이제 셔터 문을 내려야 한다고, 지금 문을 내리면 내일 아침 6시까지 아무도 나가지 못한다고. 정성일은 말했다. 저는 아직 영화에 대해 할 이야기가 남아 있습니다. 저와 함께할 동지가 하나라도 있다면 강연을 계속 하겠습니다. 우정의 이름으로. 한 명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경비원은 셔터 문을 내렸고 강연은 계속 됐다.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청중 한 명은 후에 그 사건을 이렇게 회고한다. 새벽 4시쯤 되었을까요, 사람들 대부분 곯아떨어졌고 저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잠이 들었습니다. 얼마나 잤는지 모르겠네요. 동이 텄고 문화센터의 창문을 통해 햇빛이 들어왔습니다. 저는 겨우 눈을 뜨고 앞을 바라봤습니다. 모든 사람이 잠든 방 안에서 오직 한 사람, 정성일만이 강연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머리 위로 아침 해가 만든 후광이 빛났습니다…….

(p.75)

최근에는 바디 럽이라는 베개 회사에서 상금 1000만 원이 걸린 잠 안 자고 오래 버티기 대회를 열었다. 주최 측은 대회가 시작되고 10시간 뒤 버티는 참가자들을 보내버리기 위해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노스탤지어>를 상영했다. 영화가 상영되는 순간 대회장에서는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고. 망할 롱테이크!

(p.77)


미식과 여행 이야기 완~전 공감하며 읽었다. 살면서 거긴 꼭 가봐야 한다느니 그건 꼭 먹어야 한다느니... 그들에게 나는 여러모로 삶의 진정한 즐거움을 모르는 사람이 된다. 회도 안 먹어서 횟집으로 회식 갈 때도 오, 어쩜...저런...을 회식 끝날 때까지 듣는 사람이 나야 나(›´-`‹ )💦

누군가에게 이 책을 안 읽었다고, 이 연극을 보지 않았다고 오, 어쩜... 저런 이런 갓소설을 이런 갓극을 왜 보지 않았냐고 타박하진 않잖아요... 그거랑 이게 같냐고요? 다르다고 하면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정성일 평론가님 얘기는 눈에 그려지는 것 같아서 재밌었다. 무비 올나잇으로 새벽 내내 영화 보는 것도 쉽지 않은데 강연을 동이 틀 때까지 하다니... 무슨 영화였을까 궁금하다.ㅎㅎ

시와 산책으로 시작해서 말들의 흐름 시리즈를 4편 달렸다. 덕분에 즐거운 6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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