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실없는 이야기로 치부할 테지만, 나는 삶에 환상의 몫이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진실을 회피하지 않고 대면하려는 삶에서도 내밀한 상상을 간직하는 일은 필요하다. 상상은 도망이 아니라, 믿음을 넓히는 일이다.

(p.18)

에른스트 얀들의 시에 "낱말들이 네게 행하는 것이 아닌 네가 낱말에 행하는 것, 그것이 무엇인가 된다"는 구절이 있다. '행복'이 우리에게 가하는 영향력에 휘둘리는 대신, 우리가 '행복'에 무언가를 행해야 한다. 그리고 나는 그 무언가가 바로 망각이기를 바란다. 그 낱말은 죽은 조상에게 맡기고 그만 잊자고. 할 수 있다면 '불행'도 잊자고.

기쁘고 슬플 것이나 다만 노래하자고.

(p.35)

영화에서 알렉산더가 두 번이나 언급하는 말―그러니 다분히 의도적인―이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틀면, 잠시 후 앞집에서 같은 음악을 튼다는 것. 누구인지 알아볼까 싶기도 했지만, 모르는 채 두는 편이 낫겠다는 결론을 내린다. 화답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아채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느꼈기 때문일 테다.

나 역시 이것을 위안으로 삼는다. 어딘가에 나의 메아리가 있다. 내가 혼자라고 해도, 나의 시간에 동반하는 당신의 시간이 있다. 우리는 같은 영원 속에 산다.

(p.73)

하지만 전공을 물어 '문창과'라고 대답하면 상대방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과 창문을 만드는 학과라고 생각해버렸다. 그걸 대학에서 배울 필요가 있는지 의심하면서. 혹은 묻지도 않고 무용과나 연극과라고 짐작하다가 뒤늦게 알고는 "문창과처럼 안 생겼다"고 말했다. 어떤 얼굴이어야 '문창과처럼' 생긴 건지 모르겠지만, 그 말은 하여간 억울했다. 그때 나는 문학에 대한 순정이 있었고, 누구든 내 얼굴에서 그것을 알아채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p.107)

문학은 결국 문과 창문을 만드는 일과 다르지 않나보다. 단단한 벽을 뚫어 통로를 내고, 거기 무엇을 드나들게 하고, 때로 드나들지 못하게 하고, 안에서 밖을 밖에서 안을 살피는 일.

(p.111)





문창과 이야기하는 글까지 넣으면 인상 깊은 구절을 옮기는 정도를 넘는 것 같아 고민했는데, 문창과가 문창과 이야기하는 글을 그냥 지나간다는 건 참새가 방앗간 그냥 지나가는 거랑 같은 거다. 그럴 수 없지.

이외에도 좋은 글이 정-말 많았다. 내가 가장 좋아한 글은 ‘행복을 믿으세요?’다. 사랑은 단지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지 영혼의 상태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고, 그것을 모르면 불행이 닥치는 순간 절망에 빠지게 된다는 시몬 베유의 글에서 ‘사랑’의 자리에 ‘행복’을 넣어 다시 읽는다는 부분이 인상 깊었다. 행복은 단지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지 영혼의 상태가 아니다. 우리는 행복을 향해 가지만, 그 길이 행복하진 않을 수 있고 그렇게 다다른 길 역시 행복하지 않을 수 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니까.

상반기 최애 뮤지컬 ‘렛미플라이’에서 내가 좋아하는 대사가 떠올랐다.

“너 언젠가 후회하면 어떡해?”

“어떻게 살아도 후회는 해. 난 선택을 했을 뿐이야. 네가 그랬지? 선택하는 게 중요한 거라고.”

“We choose to go to the moon.”

“우리만의 달에서 살자. 우린 그걸 선택하는 거야!”

이 부분에 다다르면 왜 그렇게 눈물이 나던지. 정분이와 남원이는 행복이 가하는 영향력에 휘둘리는 대신, 선택함으로써 행복에 무언가를 행했다고 생각한다. 에른스트 얀들의 시 “낱말들이 네게 행하는 것이 아닌 네가 낱말에 행하는 것, 그것이 무언가가 된다”는 말이 이것이구나 싶었다.

결국 나의 내면을 만든 『시와 산책』을 떠올릴 때면 사랑스러운 이 뮤지컬도 함께 떠올릴 것이라는 기분 좋은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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