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나 자신이 너무 가식적으로 느껴져서 견디기 힘든 날이 있는가? 누군가 나에게 가식적이라고 비난해서 모멸감을 느낀 날이 있는가? 괜찮다. 정말 괜찮다. 아직은 내가 부족해서 눈 밝은 내 자아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내 '가식의 상태'를 들키고 말았지만, 나는 지금 가식의 상태를 통과하며 선한 곳을 향해 잘 걸어가고 있는 중이다. 노력하지 않는 사람보다 최선을 다해 가식을 부리는 사람이 그곳에 닿을 확률이 훨씬 높을 것이다. '척'한다는 것에는 어쩔 수 없이 떳떳하지 못하고 다소 찜찜한 구석도 있지만, 그런 척들이 척척 모여 결국 원하는대로의 내가 되는 게 아닐까. 그런 점에서 가식은 가장 속된 방식으로 품어보는 선한 꿈인 것 같다.

(p.64)


남에게 충고를 안 함으로써 자신이 꼰대가 아니라고 믿지만, 남의 충고를 듣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꼰대가 되어가는 걸 모르고 사는 것. 나는 이게 반복해서 말해도 부족할 만큼 두렵다. 내가 보고 싶은 것, 듣고 싶은 것, 입맛에 맞는 것들로만 만들어낸, 투명해서 갇힌 줄도 모르는 유리 상자 안에 갇혀 있을 때, 누군가 이제 거기서 잠깐 나와 보라고, 여기가 바로 출구라고 문을 두드려주길 바란다. 때로는 거센 두드림이 유리 벽에 균열을 내길 바란다. 내가 무조건적인 지지와 격려와 위로로 만들어진 평온하고 따듯한 방 안에서 지나치게 오래 쉬고 있을 때, 누군가 '환기 타임!'을 외치며 창문을 열고 매섭고 차가운 바깥 공기를 흘려 보내주기를 바란다.
(p.75)


가부장제가 흩뿌리는 유해한 메시지들은 이렇게 명절을 통해 강화된다. 교육의 장으로서도 최악이다. 어린이들에게 절할 자격은 남자에게만 있고 일할 의무는 여자에게만 있는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하지? 남자들은 편히 놀고 여자들은 뒤치다꺼리하는 모습은? 나에게 만약 아이가 있다면 지금과 똑같은 방식의 제사를 지내는 집에는 절대 발 들이지 못하게 하고 싶을 지경이다. (그들이 그런 일에 나설 리도 없지만) 정부가 '제사효율화오개년계획'이나 '제사혁신TF팀'을 만들어 앞으로 5년간 제사의 모든 것을 남자들만 준비해야 한다는 법을 만들면 어떻게 될까. 여자네 집안 제사 음식까지 남자가 다 준비해야 하는 강력한 규정으로. 그러면 3년도 못 가 어지간한 제사는 다 사라질 것이다.
(p.82)


말을 할 때도 글을 쓸 때도 조심한다. 상대방에게 애인이 있다는 걸 알지만 애인의 성별을 모른 채로 그 애인을 지칭해야 할 경우, 상대방이 여자라고 해서 "남자친구"라고 지레 말하지 않는다('애인'이라고 한다). 어떤 남성을 묘사하면서 "마치 사랑하는 여자에게 건넬 꽃이라도 고르듯이" 같은 표현도 서사적으로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쓰지 않는다('사랑하는 사람에게'라고 쓴다). 그것들은 그들이 어떤 성적 지향인지 전혀 고려하지 않은, 그러니까 당연히 이성애자일 거라고 은연중에 전제하는 말들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존재를 지워버리는 말. 전제가 지워버리는 존재.
(p.118)


그밖에도 더는 쓰지 않는 말이 많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부르듯 읊을 수 있을 것 같다. '결정 장애'처럼, 무언가를 잘 못 정하는 상황, 어떤 능력이 결여된 상태에 '장애'라는 단어를 빗댐으로써 장애를 비하하는 말을 쓰지 않는다. 질병을 희화화하는 표현인 '발암 축구' '암 걸리겠다' 같은 말도 쓰지 않는다. 같은 맥락에서 '확찐자'라는 신조어가 정말 싫었다. 실제 코로나 감염 확진자들이 겪고 있는 커다란 고통과 공포를 생각하면, 그중 누군가는 목숨을 잃기까지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결코 쉽게 쓸 수 없는 말이다. '급식충' '설명충'처럼 사람을 곤충에 비교하며 사람과 곤충 모두에게 실례를 범하고 있는 '-충'이라는 말도 쓰지 않는다. '고아가 된 기분이다'와 비슷한 이유에서 '거지 같다'는 말도 쓰지 않는다. '유모차' 대신에 '유아차'를, '낙태' 대신에 임신 주체인 여성의 결정권을 우선한 표현인 '임신 중단' 혹은 '임신 중지'를 쓴다. 그 누구도 단어에 갇히고 말에 상처받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p.123)


믿고 보는 김혼비 작가님의 『다정소감』을 읽었다. 토요일에 외출하는 길에 챙겨서 가는 길에 읽기 시작했는데, 어제 잠들기 전에 완독했다. 간만에 죽이 잘 맞는 친구와 밤새 대화하는 기분이었다. 다음 대화도 기다려지는 작가님의 책. 또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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