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31

처음에는 문 닫고 들어가는 맨 뒷자리라도 내 한 몸 비빌 구석이 있다면 바랄 것이 없겠다는 마음이었다. 자식들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한두 번도 아니고 매번 애걸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자식들은 포도알이 눈밭이 되어버리면(좌석 표시가 보라색이었다가 예매되면 하얀 색으로 변한다. 매진되었다는 뜻) 그걸로 끝이다. 하지만 나는 끝낼 수 없다. 어떻게든 티켓을 구해야 한다. 세상에 내 편이 없다고 헛살았다고 신세 한탄하는 것도 잠시, 절박한 것은 나였기 때문에 새벽에 알람을 맞춰 기어이 취켓팅(취소된 티켓을 다시 티켓팅하는 것)에 도전한다. 신분상승을 위해 예매 대기를 한다.

p.123

덕질은 어쩌면 단순하고 직관적이다. 예술에 반응하는 일차원적인 감정일 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감정은 무엇보다 복합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태초에 인간은 살아남기 위한 일차원적인 본능으로 살아남았지만 살아남는 것과는 상관없어 보이는 벽화를 그렸고 그릇에 질감을 살렸으며 돌탑을 깎았다. 소설 《임꺽정》을 보면 민초들은 쓸데없이 짚신을 기막히게 잘 꼬았고 파리를 한 방에 잡았으며 천릿길을 한달음에 달렸다. 연봉에 매여 살아남아야 하고 가족도 먹여 살려야 하는 현대인들로서는 참으로 쓸데없는 짓에 생존을 걸고 살았던 셈이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덕질을 한다. 삶 속에는 할 수 있는 쓸데없는 짓이 없어서 인간의 정신에서 일어나는 복합적인 감정을 쏟아낼 대상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래야 사는 거니까.

p.127

SNS에서 이런 글을 봤다. 인간은 예술과 멀어지면 작은 일에도 훨씬 크게 좌절한다고, 행복을 느낄 촉수가 사라지는 것이라고. 그래서 우리는 마음이 무너지는 순간 살기 위해 예술을 끌어안는 것이다. 웃음을 주고 기쁨을 주는 것, 내 처지와 무관하게 지금 이 순간 행복을 느끼는 곳으로 힘껏 도망치는 것이다. 예술에 기대어 조금 쉬고 나면 다시 자신의 삶으로 돌아가는 문이 열리곤 한다.

p.141

그 누구도 아닌 나

덕질은 내가 하는 것이다. 나에게 묻고 내가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국카스텐의 가사를 보면 너와 나, 1인칭과 2인칭뿐이다. 3인칭이 없다. 2인칭인 너도 내 안의 나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한 덕질이어야 한다. 덕주도 나를 위해 존재한다.

나에 의한 덕질이어야 한다. 내 안에서 기인하는 어떠한 동기가 나를 덕후로 만들고 절실하게 만든 것이다. 덕주에 의해 덕후가 된 것이 아님을 명심하자 물론 ‘대상이 하현우라면 덕질하지 않기 어렵지’라는 자부심은 가져도 좋지만 그 또한 나의 자부심이다. 덕질하면서 더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더 평온해지고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그것은 내가 만들어온 것이다. 나의 일상, 나의 태도, 나의 마음가짐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덕후는 덕을 쌓게 된다. 덕은 돌고 돈다(덕 쌓은 자에게는 못 구한 티켓도 굴러들어온다). 도대체 이게 무엇인가 하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때마다(너무 좋아서 또는 너무 하잘것없어서)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들여다보고 다스리고 구제하는 덕력을 키워나가야 한다.

덕후들이 카메라를 사고 굿즈를 사니까 덕질은 돈 있고 시간 있는 것들이나 하는 짓(!)이라는 편견이 있다. 후배가 가난한 유학 시절을 보냈는데 그 와중에 작은 인형을 모으는 취미가 있다는 이야기를 건너 들었다.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은 아무리 가난해져도 취미라는 걸 가지고 사는구나 냉소적으로 바라봤었다. 그만큼 나에게 여유를 주지 않고 살았다는 사실을 덕후가 된 이후에 알았다. 그 말은 동시에 취미가 없어도 될 만큼 내가 살 만했다는 것이다. 덕질은 돈이 있어서 하는 게 아니라 다른 것을 줄이고 줄여서라도 할 만큼 간절한 것이다. 주변의 시선이 어떠하든 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한 덕질이 되길!

천둥, 『요즘 덕후의 덕질로 철학하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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