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해봐야 시체가 되겠지만 - 유쾌하고 신랄한 여자 장의사의 좋은 죽음 안내서 시체 시리즈
케이틀린 도티 지음, 임희근 옮김 / 반비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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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본 영화 중 가장 갑분싸했던 결말은 영화 '미성년'이 아닐까.

이런 말은 백 마디 늘어놔도 모자르니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라고 표현하던 영화 속 남자주인공이 떠올랐다. 같은 뜻이라도 문학적으로 표현하는 것과 그것을 보여주는 것에는 이렇게 큰 차이가 있구나 싶었다. 남들에게 미성년의 결말이 주는 충격이 100이라면 나는 50의 충격을 받았는데, 그건 영화 '행복 목욕탕' 덕분(?)이었다. 아니 뜻은 알겠는데... 꼭 그렇게까지 보여줘야만 속이 후련했냐...! 싶은 심정이었다.

이 두 편의 영화가 내게 충격을 안겨 주었다면,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 영화도 있다. 인생 영화로 꼽는 '캡틴 판타스틱' 속 장면이 그랬다. 영화에는 한 인물의 죽음이 그려지는데, 고인의 장례 방식을 두고 두 가족이 대립한다. 산 자의 방식대로 장례를 치룰 것이냐, 고인이 생전에 요구했던 방식대로 장례를 치룰 것이냐. 나라면 전자와 후자 중에 어떤 방식을 택했을까. 나는 선뜻 택하지 못하고 그들을 지켜보았다. 저렇게 어린 아이가 죽음 앞에서 겁먹지 않고 행동할 수 있다니. 죽음을 오래 전에 접하고 고민해봤더라면 나 역시 유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이 책 『잘해봐야 시체가 되겠지만』을 택한 건 위 생각의 연장선이었다. 애정하는 김혼비 작가님의 추천사에 혹한 김에 이번에야말로 죽음에 관한 책을 읽어보겠다고 다짐했다.

저자의 이름은 케이틀린 도티. 로스앤젤레스에서 장의사로 일하고 있다. 어릴 적 쇼핑몰에 놀러갔다가 우연히 어린아이의 추락사를 목격했다. 그 아이는 귀퉁이에 부딪혀 넘어지며 10미터 아래로 떨어져, 반질반질한 카운터에 얼굴부터 닿아 소름 끼치는 쿵 소리를 냈다(p.62)고 한다. 저자는 그날 이후로 죽음이라는 주제에 사로잡혔다. 대학에선 중세사를 전공해 죽음을 둘러싼 역사와 문화에 대해 공부했다. 졸업 후 샌프란시스코의 한 화장터 업체에서 하루에 수십 구씩 시체를 태워가며 현대 장례 문화의 최전방에서 일했다.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미국의 획일화된 장례 문화에 문제를 제기하며 새로운 장례 문화를 개척해나가고 있다. 죽음을 부정하는 문화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죽음을 받아들이고 준비할 수 있도록 책을 쓰고 강연을 하는가 하면, 유튜브 채널 '장의사에게 물어보세요'를 통해 죽음에 대한 담론을 친숙하게 풀어놓는다.

나는 그녀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창구 중 책을 통해 만난 것이었다. 시체를 방부처리하는 것도 낯설었지만, 화장 업체의 웹사이트에 들어가서 가족의 시신이 있는 지역을 입력하고, 소정의 서식을 인쇄하고, 거기에 서명하고 팩스로 서류를 보내고, 신용카드 번호를 웹사이트에 입력하면 2주 후 집배원이 등기우편으로 아버지의 유해를 건네주는 서비스를 접할 땐 어안이 벙벙했다. 장의사도, 슬픈 얼굴도 필요 없고, 가족의 시체를 마주할 필요조차도 없다니. 이 모든 것을 피하는 데 저렴하게 단돈 799.99달러면 된단다. 이 부분은 책 뒷부분에 나오는 옮긴이의 말마따나 미국 장의사의 일상이겠거니 감안하고 읽었다.

비단 미국의 장례 문화와만 다르겠는가. 1960년대 이전에 와리족은 장례 과정에 식인 풍습이 존재했다.

또, 티베트 고산 지대에서는 땅에 바위가 너무 많아 매장을 하지 못하는 데다 나무마저 드물어 화장에 필요한 장작을 만들 수 없다. 티베트인들은 망자를 처리하는 색다른 방식을 발달시켰다. 직업적인 로규빠(시신을 부수는 사람)가 시신에서 살을 잘게 자르고, 남은 뼈는 보리 가루와 야크 버터와 함께 빻는다. 시체는 높고 평평한 바위 위에 놓아두어 독수리들이 먹도록 한다. 새들이 날아들어 그 시체를 파먹고 하늘로 날아올라 사방팔방으로 실어 나른다. 이렇게 남은 살을 다른 짐승들이 먹도록 놔두는 것은 시체를 처리하는 너그러운 방식(p.130)이란다.

이전의 나였다면 각국의 장례 문화를 접했을때 그저 낯설었을 테지만, 이 책을 통해 장례 문화에도 귀천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설적인 정신분석가 칼 융은 죽음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 이야기를 들어봤자 도움이 안 될 것이다."

원주민 고유의 전통으로, 종교적인 이유로, 마케팅과 소비주의 등등 그 어떤 이유로 시작되고 굳어졌든 간에 인간이 죽음과 맺는 관계는 오직 그 사람만의, 그 나라만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어린 시절에 알고 싶었던 버전의 이야기다. 어린 아이를 사랑과 죽음의 실상 앞에 노출시키는 것은 그를 해피 엔딩이라는 거짓말에 노출시키는 것보다는 훨씬 덜 위험하다. 디즈니 공주 시대의 아이들은 동물들이 조연으로 나오고 비현실적 기대로 가득 찬, 눈가림 버전을 보며 자라났다.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은 현명하게도, 해피 엔딩을 경계하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고 보는 세계는 오직 한 가지 결말만을 낳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랑했던 모습들이 멸하고 우리 심장이 죽고, 해체되고, 절단되고, 처절한 고통을 겪는다."(p.208)

이 구절을 읽는데 2년 전 인상 깊게 본 애니메이션 '코코'가 떠올랐다. 애니메이션마다 빌런을 통해 '악'을 보여주기는 했지만, '죽음'을 소재로 러닝타임 내내 꽉 채운 작품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죽음을 이야기함으로써 사랑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니. 조지프 캠벨의 말마따나 우리가 보는 세계는 오직 한 가지 결말만을 낳지만,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익숙해진 사회라면 다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죽음에 대해 언제든 이야기할 수가 있다면 해피 엔딩을 마냥 경계할 필요가 없다. 해피 엔딩 너머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 테니까.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글은 이 책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글이다. 이 글을 소개하고 싶어서 말이 길었다.

나는 한밤중 묘지에 출몰하는 존재를 두려워하라고 문화가 우리에게 가르친 것들을 생각했다. 둥둥 떠다니는 유령이 악마같이 붉은 두 눈에 활활 타오르는 듯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좀비가 그 퉁퉁 붓고 썩어가는 손을 근처의 무덤 밖으로 내민다. 오르간 소리가 점점 커지고, 부엉이들은 부엉부엉 우짖고, 문들은 삐걱댄다. 이것들은 무슨 싸구려 무대장치 같다. 그중 어느 하나만 삐끗해도 죽음의 정적과 완벽함은 무너질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바로 그런 이유로 무대장치를 만들어내는지도 모른다. 정적 자체가 가만히 응시하기 어려운 것이니까.

피가 내 혈관 속을 돌아 그 밑에 깔린 부패한 시체들 위로 흐르고 있는 지금 이 순간 나는 살아 있다, 있을 수도 있는 많은 내일을 품은 채로. 그렇다, 지금 세운 여러 계획들은 내가 죽고 나면 산산조각 나버리거나 미완성으로 남을 수도 있다. 나는 육체적으로 어떻게 죽을지만 선택할 수 있다. 죽음이 28세에 찾아오든 93세에 찾아오든, 나는 만족한 채 무(無)로 돌아가 스르르 미끄러져 죽기로 선택했다. 그래서 내 몸을 이루는 원자가 나무들을 가린, 바로 그 안개가 되도록 말이다. 죽음과 묘지의 정적은 형벌이 아니라 잘 살아낸 삶에 대한 보상인 것이다. (p.336-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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