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하나 건너면 벼랑 끝 - 성매매라는 착취와 폭력에서 살아남은 한 여성의 용감한 기록
봄날 지음 / 반비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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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9일자, 그것이 알고 싶다의 클로징 멘트를 기억한다.

세상에 꺾어져도 좋은 꽃은 어디에도 없고, 외면 받아 마땅한 존재 역시 어디에도 없다고 우리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알고 싶다' 제작진은 앞으로도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 또 편견이 가득한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도 계속해서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그것이 알고 싶다'를 보며 얼어붙은 도끼를 깨는 느낌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1007회 뉴질랜드에서 온 SOS 쪽지와 1008회 몽키하우스와 비밀의 방을 다룬, '꽃'들에 관한 인권보고서 시리즈였다. 뉴질랜드에서 감금당한 상태로 성매매를 해야했던 여성들, 국내에서 인신매매나 납치를 당한 뒤 성매매를 해야했던 동두천 기지촌의 여성들의 이야기. 클로징 멘트의 서두에서 이 시리즈를 보며 불편함 감정을 표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말했다. 세상에 억울한 사연들이 얼마나 많은데, 굳이 성매매 여성들의 억울한 얘기까지 들어야 하느냐고.

여러분들은 어떻게 보셨습니까? 라는 멘트를 듣는데, 머리가 멍했고 이어지는 멘트를 놓치고 말았다. 나는 이 시리즈를 어떤 마음으로 챙겨 보았던가.
그리고 2년이 지나 영화 '죽여주는 여자'를 보았다. 2년 전 나를 흔든 멘트는 영화 속 소영의 대사로 돌아왔다. "저 사람도 무슨 사연이 있겠지. 아무도 진짜 속사정은 모르는 거거든." 사연만으로 어떤 이의 일을 합리화할 수는 없지만, 아무도 진짜 속사정은 모르는 거라고 늘 생각해왔다. 이 책 『길 하나 건너면 벼랑 끝』을 만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다.

민음북클럽 '밑줄긋고 생각잇기' 9회 – 주변부의 삶, 그리고 인간 존엄성으로 선택하게 된 이 책은 받아든 순간부터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밖에선 법 없이도 산다는 아버지는 집에서는 절대 권력의 폭군이었고, 동네 삼촌은 그림책을 읽고 있던 저자를 강간하고 100원짜리 동전 두개를 손에 쥐어주며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다. 아버지가 관할 경찰서를 잘못 찾아가는 바람에 그놈은 뺨을 몇 대 맞고 아버지와 헤어졌다는 해프닝으로 끝난 열여섯 살에 겪은 강간 사건. 임신한 저자를 버리고 떠난 군인 남자친구. 공장에서 친하게 지내던 친구를 따라 시작한 가라오케 아르바이트. 열여덟 살에 유입된 업소, 바다 건너 낯선 섬 제주의 업소들, 낯선 도시에서 저자를 기다리던 유리방, 보도방과 시골의 티켓다방까지 20여 년 동안 저자가 지나온 시간의 기록들.

몇 번이고 다른 책을 고를걸 후회했지만 끝까지 읽어낼 수 있었던 건 2부 '나를 다시 찾아가는 시간'이 뒤에서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성인권지원센터의 도움을 받아 각종 법률 지원과 심리상담은 저자의 탈성매매에 큰 힘이 되었다. 도움을 받은 것으로 끝내지 않고, 성매매 경험 당사자로서 상담원과 내담자가 되어 언니(여성인권지원센터에서 내담자를 부르는 호칭이다. 업소에서 쓰는 '언니'라는 호칭이 아니라, 여성으로서 함께 연대한다는 의미를 가진다.)들을 돕는 일을 하고 있다고. 쉽지 않은 일이었을텐데 용기를 낸 저자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돈이 있다고, 권력이 있다고 남의 성을 사는 행위를 쉬쉬하고 덮어주는 것, 더 어린 여자의 성을 구매하기 위해 어플을 만들고, 성행위 영상을 불법으로 촬영해서 돌려보며 웃는 구매자들을 심판하지 않는 행위에 대해서는 이 사회 모두가 방관자다. 성매매의 경험을 성찰하는 것은 경험 당사자만의 몫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성을 구매하는 행위에 대해 '필요악'이라는 궤변으로 포장하는 문화가 사라지기를 바란다. 뿌리 깊은 성매매에 대한 깊은 성찰과 반성이 있어야 이 사회가 비로소 안전해지지 않을까?
성매매 경험을 했던 20여 년의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아무리 성찰한다고 해도 나에게 휘둘러진 폭력의 잔상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나는 내가, 내 친구가, 내 가족이 안전한 세상을 원한다. 그러기 위해 계속해서 '나답게' 목소리를 내고 행동할 것이다. 앞으로 펼쳐질 내 인생이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흘러갈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상상하고 꿈꾸면서 살아갈 것이다.
(p.425)

언제나 상상하고 꿈꾸며 살아갈 '봄날'님께 며칠전 읽은 구절 하나를 소개하고 싶다. "한 여성이 자기 자신을 옹호할 때, 그는 사실 자신도 모르게, 어떤 주장도 펼치지 않으면서 모든 여성을 옹호하고 있는 것이다"
-《여자다운 게 어딨어》 (에머 오튜 지음, 박다솔 옮김, 창비, 2016)에서 재인용.

2000년, 2002년 군산 화재사건으로 별이 된 언니들을 추모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용기내어 글을 쓰고 책을 내주신 봄날님과 반비에 심심(甚深)한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이 책과 함께한 지난 4주간의 조각들


밑줄긋고 생각잇기 9회 – 주변부의 삶, 그리고 인간 존엄성
내가 선택한 『길 하나 건너면 벼랑 끝』도착.
책 소개
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문제인지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이 책은 20여 년간 성매매를 경험한 여성이 써내려간 삶의 기록이다. 저자 봄날은 열여덟 살에 성매매 업소에 유입되기까지, 그리고 그 후 업소에서 빠져나오기까지의 기나긴 여정을 증언한다.

저자가 기록한 삶의 경험은 많은 한국 여성들이 보편적으로 처하게 되는 상황과 다르지 않다. 가난한 집의 장녀로서 어린 나이에 학업을 중단하고 가계를 짊어져야 했던 상황, 가족 내 성차별과 아버지의 가정폭력, 청소년 여성 노동자로서 겪은 부당한 노동착취, 저개발된 지방 도시, 직장 내 성폭력과 잘못된 사건 처리, 자원이 없는 젊은 여성이 당하게 되는 성 착취. 하나하나 떼어놓고 보면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거의 모든 여성들이 생애단계마다 겪게 되는 전형적인 피해의 경험들이다. 저자는 이런 경험들이 한 여성의 삶에서 어떻게 서로 얽히고 교차하면서 성매매에 유입되고 또 빠져나오기 힘들어지는지, 그 과정을 고통스러울 만큼 생생하고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

이 책은 개인의 생애사를 통해서 성매매가 결코 특수하고 개별적인 문제가 아니며, 한국 사회의 수많은 젠더 이슈들이 첨예하게 만나는 지대임을 보여준다. 저자가 세밀하게 기록한 삶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빈곤, 성차별, 노동 문제, 지역 간 격차, 남성들의 성폭력적 놀이문화 등이 성매매와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된다.
책 소개 출처 : 예스24

쉽지 않은 책이지만 끝까지 읽어보겠다. 




입술이 예쁜 마담은 나더러 어디서 일했냐고 물어보았다. 다 말할 필요는 없어서 충청남도 D시에서 일했다고 했다. 사우나에서 나눈 이야기는 간단했다. 이 목욕탕은 여러 업소 아가씨들이 이용한다고 하면서 다른 업소 마담이나 아가씨들이 보는데 혼자 때를 미는 천박한 짓은 하지 말라고 했다. 목욕탕 이모에게 세신을 받으며 몸매 관리를 하라고 했다. 이 마담도 보통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나중에 마담은 겉옷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자는 속옷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속옷은 꼭 세트로 입으라고 했다. 속옷을 세트로 입지 않은 아가씨들에게는 "네가 때밀이 이모냐?"라면서 면박을 주었다. 속옷조차도 업주나 마담이 간섭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나의 존재는 뼛속까지 성매매 여성임을 알려주었다.
- 봄날 『길 하나 건너면 벼랑 끝』 p.70-71
저자를 때린 아버지와 어린 저자를 성추행했던 삼촌과 저자를 강간하며 웃던 그놈, 임신한 저자를 버리고 간 군인에 대해 쓴 1장 "어떻게 성매매를 하게 되었나요?"를 지나면, 2장 열여덟 살에 유입된 업소 이야기가 그려진다. 1장을 읽으며 몇번이고 이게 경험담이 아니었으면 했다. 2장도 쉽지 않은데, 겨우 1부―긴 터널의 2장을 읽고 있으며 4장이 남았고, 2부는 시작도 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에필로그의 제목처럼 이 책을 덮기 전까지 나는 계속해서 이 책 위에 서 있을 것이다.


그 남자를 잊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다. 잊으려 하면 할수록 더 그리웠다. 거리의 모든 남자가 그 남자로 보였고 같이 보낸 시간들이 어제 일처럼 또렷이 기억이 나 나를 괴롭혔다.
나는 다시 업소로 돌아왔다. 마음을 다잡지 못하는 시간들은 술로 달랬고 하루하루를 견뎌내기 위해 더 모질게 스스로를 학대했다.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내가 어떻게 지내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남자를 영원히 내 가슴에서 떠나보내기 위해 나는 많은 것을 포기했고 많은 것을 버렸다.
그 남자와의 기억을 지울 수 없었던 이유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배우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나를 이용하고 돈벌이 수단으로만 여기던 주변 사람들에게서는 절망과 좌절을 배웠다. 그러나 상대를 존중하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바라보는 사랑을 그 남자로 인해 알게 되었다. 이제는 다른 사람을 만나더라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기회는 오지 않았다.
(p.124)
화가 나고, 숨이 턱 막히고, 읽는 것에 속도가 나지 않을 즈음에 이 이야기의 차례가 왔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똑같은 나날이 계속되던 어느 날 저자 봄날에게 찾아온 그 남자.

우리가 자주 찾던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한 잔 입에 털어 넣었을 때 그 남자는 나를 바라보며 "어떻게 하면 업소에서 일을 그만둘 수 있어?"라고 물었다. 그 말에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차라리 빚을 갚아달라고 할까? 그러면 여기서 나갈 수 있다고 할까? 그런데 나는 왜 망설이고 말을 못 하지? 답답하고 갑갑했다. 내가 어떤 요구를 하더라도 이 남자는 들어줄 능력이 된다는 것을 알고있었다. 하지만 이 남자 앞에서는 사람과 사람으로 대등한 관계가 되길 바랐다.
(p.117)

읽는 나도 무너져 내렸는데 저자는 이 시간을 어떻게 건넜고, 글로 써내려갔을까. '그러나 그런 기회는 오지 않았다'는 구절에 마음이 쓰여 눈을 떼지 못했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흐르고 그때의 기억은 그 시간에만 못박아두는 것만 같아서.



업소 생활을 하면서 화재 사고를 목격한 적이 없는 나는 도대체 몇 명의 아가씨가 죽었기에 여기까지 이 난리가 나는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훗날 청소 이모가 말하던 그 화재 사건이 군산 대명동 화재 사건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2년 뒤 현재 시행되고있는 성매매방지법의 촉매제 역할을 했던 군산 개복동 화재 참사가 일어났다. 업소 창문의 창살을 없애면 성매매 여성들은 안전해질까? 소화기만 설치하면 끝일까? 여성들이 겪는 착취는 문제가 아닌 것일까? 하지만 당시의 나에게는 화재 사건보다 잠이 더 중요햏고, 오늘은 매상을 얼마나 올릴 수 있는지, 진상을 만나지는 않을지가 유일한 관심사였다. (p.211)
어제 업로드하지 못하고 잠들었다. 이 구절에 담긴 '군산 대명동 화재 사건'과 '군산 개복동 화재 참사'를 찾아보고 글을 쓰려는데 손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2000년 9월 19일, 군산시 대명동의 속칭 '쉬파리골목'의 유흥업소에서 불이 나 성매매 여성 5명이 사망하고 1명이 구출되었다. 피해자들은 모두 20대 여성으로, 10대에 가출하였다가 포주에게 붙잡혀 인신매매되어 감금된 채 성매매를 강요당하고 있었다. 화재시 탈출하지 못한 이유가 성매매여성들의 탈출을 방지하기 위하여 창문엔 쇠창살을 달아놓았었고, 출입구는 두꺼운 철제문으로 잠궈놓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여성들은 그 안에서 나가지 못하고 모두 질식해서 사망하였다.

더욱 충격적인 일은 고작 100m 거리에 파출소가 있었으나 경찰들이 포주들에게 뇌물을 받고 이를 눈 감아주고 있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사건 이후에도 포주들에게 뇌물을 받고 수사정보를 유출한 경찰들이 적발되어 구속되기도 하였다.
*
2002년 1월 19일, 앞서 화재가 있었던 '쉬파리골목'과 인접한 개복동 유흥주점 '대가'에서 다시 화재가 발생하여 14명의 성매매 여성과 남자업주 1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의 피해자들 역시 인신매매로 팔려와 감금당한 채 성매매를 강요당하고 있었다.
이 사건에서도 업소 30m 거리에 파출소가 있었으나 경찰들은 뇌물을 받고 이를 눈감아주었고, 소방공무원들도 제대로 안전 점검을 하지 않았다. 대명동 화재 참사 이후 1년 반도 지나지 않아 비슷한 곳에서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 충격은 컸다.

내가 이 책을 선택하게 된 이유가 맞닿아있는 사건을 접하니 머리가 멍해졌다.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 또 편견이 가득한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던 그해의 군산. 명복을 비는데 때란 없다고 생각한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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