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 사려 깊고 과묵하지만 일단 입을 열면 그 누구보다 재밌는 친구

창가 책상에 놓인 그것들을 무심히 바라보다가 문득

‘아, 참 아름답다’ 느낀 적이 있습니다.

가로와 세로의 이상적인 비율.

저 단호한 직각의 고요와 단정함.

사려 깊은 함구와 믿음직스러운 과묵함.

그러나 일단 입만 열면 그 누구보다 재밌는 걸 알고 있죠.

그중 하나를 집어 들어봅니다.

손안에 들어와 맞춤하게 잡히는 느낌이나

솜처럼 가볍지도, 돌처럼 무겁지도 않은 존재감도 적당합니다.

그것을 넘길 때 내 손가락 끝은

얇은 단면을 쓰다듬으며 내려와, 단 한 장을 가려 쥡니다.

배운 적 없는 그 동작을 손은 어떻게 그렇게 잘하는 걸까요.

어느 밤에는

나의 지문과 종이의 살결이 마찰할 때의 그 느낌,

그 소리까지도 좋아집니다.

그런 순간에는 깨닫게 되죠.

아, 내가 정말 사랑하게 됐구나!

글자들은 줄지어 기어가는 개미들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 작고 검은 몸들이 꼬물거리며 나에게 오고 있는 것처럼요.

그러니 좋아하지 않고 배길 수 있나요.

그래서 커트 보니것도 이렇게 썼나봅니다.

“책을 절대 포기하지 마세요. 책은 느낌이 아주 좋으니까요.”

- 허은실 『그날 당신이 내게 말을 걸어서』 P.2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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