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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양말 - 양말이 88켤레인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 ㅣ 아무튼 시리즈 18
구달 지음 / 제철소 / 2018년 12월
평점 :
일요일 아침 8시면 벌떡 일어나 텔레비전 앞으로 달려가 <디즈니 만화동산>을 시청하던 어린이는 귀여운 캐릭터라면 환장하는 어른으로 자랐다. 나이를 먹으면 시들해질 줄 알았는데 오산이었다. 외려 월급이라는 총알을 장전해 화력이 더 세진 느낌이랄까. 회사에서 인간관계에 치여서 그런지 귀여운 무생물에 대한 집착은 날로 심해졌다. 라이언 마우스 패드는 날 배신하지 않으니까. 올라프 볼펜은 본인 일을 내게 떠넘기지 않으니까. 보노보노 탁상용 선풍기는 입방정을 안 떠니까. 그렇게 하나둘씩 온갖 귀여운 얼굴들이 사무실 책상 위를 점령했다. (p.73)
회사에서 인간관계에 치여서 그런 건지, 그냥 귀여운 캐릭터가 좋아서 그런 건지 몰라도 나는 캐릭터 양말이 참 많다.
(사진에 3배 정도 되는 양말을 가지고 있다. 1-2켤레를 제외하면 전부 캐릭터 양말이라는 게 함정)
이런 식으로 캐릭터 양말 덕후임을 고백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 책 『아무튼, 양말』을 읽기 전까지 말이다.
나의 이런 캐릭터 양말 사랑은 비정기적으로 무비올나잇(메가박스에서 진행하는 이 세상 모든 올빼미족을 위한 심야영화패키지로 21,000원에 3편의 영화를 감상할 수 있다. 금,토요일 밤 11시~12시 경 시작하는데, 마지막 영화가 새벽 6시반-7시 즈음에 종료된다. 영화를 보고 돌아가면 주말의 반나절이 빛의 속도로 삭제되는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다)을 함께하는 친구 원이만이 알고 있다. 메가박스 동대문점에서 하는 무비올나잇을 보기 때문에 날을 잡으면 어김없이 동대문에서 만나는데, 그때마다 내 손에는 새로 산 양말이 들려있었기 때문이다.
많고 많은 양말 중에 왜 캐릭터 양말만 고집하냐고 묻는다면 귀여움이 세상을 구원하기 때문...... 아니 적어도 나만큼은 구원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캐릭터를 소비해도 크게 구속받지 않는 아이템이라 그렇다. 캐릭터가 발목 위에 프린트된 양말의 경우, 바짓단을 걷지 않는 이상 단색의 양말로 보일 때가 많아서 평범한 양말을 신은 非덕후로 보여서 일석이조다. 나는 아침저녁으로 귀여움을 신고 벗으며 양말로부터 에너지를 얻고, 지인들은 나의 캐릭터 양말에 대해 굳이 한 마디 거들 일이 없으니 말이다.
양말에 대한 많은 에피소드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지네 콘테스트’였다. 작가님이 꽤 오래전부터 애정해 온 양말 브랜드, 이름부터 마음에 쏙 드는 아이헤이트먼데이에서 어느 날 재밌는 이벤트를 열었다. 가지고 있는 아이헤이트먼데이의 양말을 찍어 SNS에 인증하면 개수로 순위를 매겨 선물을 증정하는데, 1등에게는 겨울 신상 양말 14종을 몽땅 주는 이벤트였다. 작가님은 생각했다. 1등은 못 해도 20등 안에는 들겠지. 내 발(양말)이 88갠데 아무렴! 책을 읽는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웬걸. 1등을 차지한 분은 169켤레를 인증했단다. 심지어 작가님은 20등 안에도 들지 못했다니. 캐릭터 면양말 밖에 모르던 내게 이렇게나 많은 양말의 종류와 브랜드를 알려주신 분이 우물 안 지네였다고 하면, 나는 지네의 ㅈ자 근처에도 못 따라가는 덕후, 아니 일반인이었다.
하지만 인생은 산수가 아니었다. 지네 콘테스트에서 1등을 차지한 분이 왼발 더하기 오른발이 169발이 될 수도 있음을 증명했듯이 말이다. 인간의 욕구는 너무나 복잡하고 다종다양한 방면으로 뻗어 나가서 누군가가 대신 나서 명쾌하게 더하거나 빼줄 수 없었다. 그러니 내 집 마련을 꿈꾸든, 세계 최고의 지네발을 꿈꾸든, 옳네 그르네 정신을 못 차렸네 마네 훈수를 둘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는 거였다. 모두가 1+1=2만을 추구하는 세상이었다면, 애초에 각자 가진 양말을 꺼내 순위를 겨루어보자는 즐거운 이벤트 아이디어 같은 건 떠올리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 재미난 걸. (p.43)
1+1=2만을 추구하는 세상이었다면 이런 재미난 이벤트를 여는 사람도 참가하는 사람도 없었을 것이고, 어떤 영화를 너무 재밌게 본 나머지 영화관에서 수십번을 넘게 봤다는 사람도 없었을 것이고, 어떤 드라마가 너무 좋았던 나머지 드라마 DVD를 하나는 감상용으로 또 하나는 소장용으로 구매한 나의 과거도 없었을 것이다. 작가님이 지네 콘테스트로 얻은 깨달음처럼 인생은 산수가 아니니 말이다.
외출이 즐겁다. 오로지 양말을 사기 위한 목적만으로 나선 외출이 즐겁다. 이 원고를 쓰기 위해 미뤄둔 밥벌이를 재개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이렇게 별것 아닌 일로 잠깐이나마 외출을 감행하니 세상 행복하다. 아무리 바빠도 이런 마음을 잃어버린 채 살고 싶진 않다. 제철 양말을 고르는 티끌만 한 행복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 행복은 양말이다. 양말과 함께라면 행복은 언제나 제철이다. 경복궁을 따라 걸으며 마지막 가을 단풍을 감상하고, 삼청동 양말 가게에서 올해 첫 겨울 양말을 고르는 지금 이 순간이 참 행복하다.
그래서 오늘 사버린 티끌이 도합 얼마냐 하면….
(p.158-159)
지금까지 이런 양말 덕후는 없었다, 이것은 양말 이야기인가 행복 이야기인가. 위 구절에 따르면 행복이 된 양말 이야기가 될 것이다.
‘행복은 양말이다.’는 문장에서 양말의 자리에, 나는 어떤 것으로 채워 넣게 될지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며 책장을 덮으려고 했는데 마지막 문장에 발목을 잡혔다. 작가님이 그날 사버린 티끌의 도합이 얼마였을까. 끝까지 유머를 잃지 않는 글 덕분에 읽는 내내 참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