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말한 사르트르적 구도는 지지될 수 있을까? 불행하게도 그렇지 못한 것 같다. 덜 확정적으로는 많은 보완이 필요하리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예를 들면, 감정을 행동과 동일한 평면에 두는 이론은, 사르트르의 철학에 일관성을 부여할 수는 있을지언정, 감정 현상의 다양성을 포괄하는데 커다란 한계를 보일 수 밖에 없다. 예컨대, 뇌의 특정 영역에 생겨난 종양의 영향으로 사람의 인격(퍼스낼리티, 아이덴티티) 자체가 변한 사례가 수 없이 많은데, 사르트르적 이론으로는 이를 설명할 수 없다. 심리학자, 생리학자, 혹은 신경생리학자들이 의식에 관한 철학자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데에는 이유가 있으며, 이 영역에서만 보건대도 철학이 그 수명을 다했거나 다해가고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철학이 언어 분석의 영역에서만 겨우 연명하고 있는 사정을 대강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다른 측면을 보자. 사르트르적 구도에서는 수치심을 인식과 동일한 평면에 둔다. 그러나 사실 수치심은 사회적 감정이라 불리는 것 아닌가? 이것에 그토록 중대한 존재론적 위상을 부여하는 것은 과도한 것 아닐까? 수치심을 타자의 존재, 혹은 자신이 아닌 주관성에 대한 직관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쨌든 좋다. 그러면 이 직관은 본유적인가? 예컨대, 아기가 그러한 직관을 갖고 태어나는가? 분명 그렇지 않다. 수치심은 자아의 성장과 관련되는, 인간 아이의 발달의 한 계기일 뿐이다. 데카르트가 철학적 회의를 실행했을 때 그는 그러한 실험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한 한 성인을 전제하고 있었다. 그러나 성인이란 무엇인가? 인간 성장의 한 단계라는 우연성일 뿐이다. 동시에, 데카르트가 추구하고 있었던 것은 확실성이라는 개념이었는데, 이 개념 역시 어떤 시대, 어떤 사회라는 우연성에 속한다. 그렇다면 데카르트 이후 수 백년이 흐른 지금 우리가, 더 정확히는 내가 본질적으로 데카르트적인 것에 속하는 사유를 계속하고 있는 것은 어찌 된 일인가? 가장 흔한 대답은 우리가 데카르트가 속해 있던 그 우연성에 여전히 속해 있거나, 혹은 그것을 습관적으로 계속 고집하고 있다는 것일 테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우리가 수 많은 우연성들 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이러한 우연성을 어떻게 사유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물론 우연성의 사유라는 말에는 어폐가 있다. 우연성은 비질서를, 사유는 질서를 뜻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헤겔은 우연성에 방향과 형식을 주기 위해 이성을 절대화시켰다. 이러한 헤겔의 방법을 그대로 따라간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그러나 개념의 자연사에 대한 탐구와 개념의 사회사에 대한 탐구가 헤겔적 아이디어, 혹은 스피노자적 아이디어와 전혀 별개인 것은 아닐 것이다. 적어도 우리는 발생사라는 관점을 무시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 관점을 안고 사유하는 것이 무척 어렵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매우 쉬운 방법에 정착하고 마는 경우들이 왕왕 있다. 예를 들면 진화론적, 자연주의적 관점에 머무는 경우. 또다시 난관에 봉착한 것 같다. 그러나 계속 나아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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