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쓰 베네딕트는 수치심 기반 문화와 죄의식 기반 문화를 구분한다. 전자는 "rely on external sanctions for good behavior", 후자는 "rely on an internalized conviction of sin." 여기서 오리엔탈리즘적인 관심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리고 이러한 구분은 정도차의 문제일 것이다.
위의 구분에서 수치심이니 죄의식이니 하는 것은 문화적인 것, 혹은 문화에 상대적인 것이 되고 만다. 이는 개념의 혼란, 혹은 차원의 혼란을 야기케 한다. 바로 말하자면 이러한 개념들이 놓이게 되는 심리학적 차원, 존재론적 차원, 사회학적 혹은 인류학적 차원을 구분해야 한다.
존재론적 차원에서 수치심은 내가 다른 주관성(타자)에 의해 사물화되는 경험을 의미한다. 사르트르의 시선 이론이 그렇다. 이를 다시 말하면 수치심은 타자의 존재가 드러나는 현상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수치심은 인식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 인식이 사물들의 세계를 드러내는 것이라면 수치심은 주관성들의 세계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치심 등을 위한 용어가 따로 있어야 한다. 사르트르는 감정을 세계에 대한 어떤 태도로 정리한다. 그렇다면 감정은 행동과 같은 평면에 있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수치심을 감정의 하나로 분류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하면 내가 호랑이 앞에서 공포에 떠는 것과, 공공 앞에서 나의 치부가 까발려져 수치심에 몸을 떠는 것은 다른 현상이다. 후자를 위한 적당한 용어로, 한국어로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affect라는 말을 사용하기로 한다. 그리고 이때 사물화되는 그 나의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고찰이 요구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데카르트적인 단순한 코기토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런 존재론적 차원에서 보았을 때 죄의식이라는 개념을 독자적인 것으로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일차적인 것은 수치심 등일 것이고 죄의식 등은 이차적인 것에 속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베네딕트의 분류를 평가해 볼 수 있다.
존재론을 심리학에 그대로 투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전자가 제시해 주는 길을 하나의 아이디어로 받아들이고 이를 통합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이러한 통합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존재론의 문제일 수 있다. 인류학적 혹은 사회학적 차원에로의 확장에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만일 존재론에서 수치심이나 자부심을 근원적인 범주의 하나로 제시한다면 심리학에서는 이를 모델로 하나의 이론을 만들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얼핏 보기에 이런 이론은 프로이트보다는 아들러 쪽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혹은, 근원적으로 다분히 스피노자적인 아이디어로 보인다. 예컨대, 수치/자부심 모델은 억압 가설 이상의 설명력을 보일 수 있을까? 그러면서, 예컨대 이 모델은 특정 시대의 특정 사회에 매우 종속적인 프로이트 이론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이런 이론의 구축은 한 사람이 한 사람의 인생 동안 책상 머리에 앉아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이런 방향을 따라 탐구해 볼 가치는 있을 것이다. 만일 그 도정에 깔려 있는 엄청나게 복잡한 문제들을 충분히 의식할 수만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