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칠 전에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근처로 신발을 사러 갔었다. 예전에 동대문운동장이 있던 곳인데 많이 바뀌었더라. 대형 구조물들이 공사 중에 있었고 못보던 쇼핑몰 빌딩이 여럿 들어서 있었다. 혹시나 싶어 헌책방 거리로 가봤는데 헌책방들이 변함없이 그곳에 죽 늘어 서 있다. 천천히 걸으며 아이 쇼핑을 하다가 할머니 주인장한테 끌려 들어갔다. 딱히 살 책이 있는 게 아니라서 서가 이곳 저곳을 목표없이 두리번거리는데 파란색의 익숙한 장정이 눈에 확 들어왔다. 꺼내 들고 보니 최재희 번역의 "실천이성비판". 한번도 펼쳐 보지 않은 듯 깨끗했다. 살 책이 생겨서 기뻤고 할머니, 할아버지 주인장에 면목이 서서 또 기뻤다. 1992년에 16000원 정가를 달고 중판으로 나온 책. 할아버지 주인장이 8000원을 불러서 쾌히 책을 사들고 서점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찬찬히 살펴보니 "실천이성비판", "철학서설(프롤레고메나)" 등 칸트의 주저와 칸트 철학의 이해를 위한 묵직해 보이는 논문들이 합본되어 있었다. 이걸 횡재라고 해야 하나!

요즘 주로 스피노자를 읽으면서 칸트의 비판철학을 살펴 봐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예를 들면 스피노자는 시간을 정신의 구조물이라고 말한다. 반면 연장은 정신 밖의 무한한 실재다. 예를 들면 보통의 물체는 3개의 차원으로 파악될 수 있다는 규정성을 갖는다. 연장이 무한이라는 말의 의미는 연장이 무한 차원을 갖는다는 뜻일까? 물론 아닐 것이다. 연장은 무규정적이다. 그런데 이 말은 연장이 보통의 물체와 다른 존재론적 위상을 갖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그렇다. 그런데 내가 여기서 하고자 하는 말은 그렇다면 연장을 일종의 범주로 생각할 수는 없을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연장도 정신의 구조물이 될 것이라는 얘기다.

스피노자는 이런 고민을 했을까? 그에게 어떤 것은 정신의 구조물이라고, 어떤 것은 실재라고 판별하는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스피노자를 읽으면서 든 의문들이다. 혹은 칸트를 읽어봐야 겠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들이다.

"프롤레고메나"는 칸트가 쓴 "순수이성비판"의 해설서 격이라고 한다. 잘 되었다 싶어 머리말을 천천히 읽어보았다. 최재희 번역이 초판을 찍은 것이 1975년이라는 사실을 환기시켜 주는 옛스러운 문장들 사이로 철학사에서 중요한 이정표 역할을 했다는 자각에서 비롯된 것임에 틀림없는 칸트의 터질 듯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머리말은 "순수이성비판"이 출판되고 그에 대해 숱한 비판이 있었음을, 그리고 그러한 비판들에 대한 칸트의 반응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다. 칸트는 칸트이고 그러므로 철학자인지라 그러한 비판에 대한 감정적 반응들을 보편적인 통찰로 바꾸어 머리말에 가득 실어놓았다.

"[소위] 학자는, 이성 자신의 샘에서 길러내려고 노력하는 철인이 할 일을 끝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런 이후에 철인이 한 일을 세간에 보고하는 순번이 학자에게 생긴다."

(아, 철학책을 읽으면서 웃음보를 터뜨릴 수 있다니! 이렇듯 날키로운 냉소를 고급한 통찰인 듯 말할 수 있다니!)

"사실 형이상학의 나라에서는 심원한 지식과 피상의 요설을 준별할 확고한 표준이 없기 때문에, 딴 방면의 일에서도 무지한 자가 결정적인 단안을 내리는 불손이 있다."

(음... 웃음으로 시작했지만 점점 정색을 하게 되는 나.)

"형이상학에 대한 인간의 소질은 도저히 없어질 수 없다. 인간의 일반적 이성이 형이상학과 아주 밀접하게 짜여져 있기 때문이다."

(평심하게 말하는 듯 하지만 심원한 통찰. 나는 자세를 바로 잡는다.)

"준재(흄 - weekly의 주)는 여기서 사변적 이성의 월권적 요구를 억제함에서 얻게 되는, 소극적 효과에만 착안했고, 인류를 사도에 인도하는 끝없는 집요한 논쟁을 완전히 폐기하였다. 그러나 그는 소극적 효과 이상의 적극적 손해를 간과했다. 이 적극적 손해는 의지에 그 전노력의 최고 목표를 제시할 수 있는 유일의 가장 중요한 희망[전망]을 이성에서 박탈할 때 생기는 것이다."

(칸트의 진지함 혹은 무거움 혹은 깊음.)

"무릇 계획을 세운다는 것은 [자신이 못하는 일을 타인에게 요구하고, 자신이 그보다 더 잘하지 못하면서 남을 비난하며, 자신은 어디서 그것을 발견해야 할지 모르는 일을 타인에게 신청함에 의해서], 자신은 마치 독창성이 있는 천재인 척 하는 그런 사치스럽고 과장적인 인간이 흔히 하는 일이다."

(강조는 칸트 자신이 한 것이다. 나는 칸트에게 심하게 야단맞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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