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한국 뉴스들에도 많이 나오고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유럽은 지금 난민 문제가 가장 큰 이슈다. 그리고 이 문제에 관한 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나라가 독일이다. 그리고 가장 찌질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나라가 영국이다.

독일은 자신의 나라에 들어오는 시리아 난민을 무조건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했었다. 이유 규정에 의하면 그럴 필요가 없는데 말이다. 이런 선언을 하면 더 많은 난민이 몰려 들텐데 말이다.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가벼운 농담으로 대응했다. 메르켈이 더 이상 정권을 연장하고 싶지 않은가 보군, 독일은 출생율이 낮으니까 세금을 내 줄 젊은 노동력이 급하게 필요했을 거야...

여론 조사에 의하면 독일에 들어오는 시리아 난민은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독일 국민은 93%에 달한다. 물론 이에 반대하면서 경찰과 싸우는 네오 나치도 있다. 그러나 국민의 93%라면 사실상 독일 국민 전부 다가 아닌가? 놀랍고 대단했다. 독일 국민들은 세계로부터 존경을 받아야 한다. 적어도 나는 독일을 존경한다. 그래서 곧 쏘세지에 맥주를 먹으러 가기로 했다.  

독일과 달리 영국은 유럽의 강국으로서 자기 역할을 하지 않으려 한다. 기본 입장은 난민은 못 받겠고 돈은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영국은 영국 내부적으로 문제가 있다. 지난 총선에서 극우 정당이 20% 정도의 지지를 받았고 이 정당의 주된 타겟이 바로 이민자 문제였다. 집권 보수당이 이 극우 정당과 경쟁하려니 이번 난민 사태에 유연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걸로 경쟁한다는 것은 둘이 똑같다는 것이다.)

관망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렇게 영국이라는 해는 완전히 졌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새삼스러운 이야기지만 유럽의 리더는 독일이고 유럽의 수상은 메르켈이다. 독일이 수행하는 역할이 바로 이를 증명한다. 독일이 수행하는 역할이 독일에게 자기 희생을 요구할 수도 있다. 그러할 때도 독일은 그 역할을 피하지 않았다. 자기 이익의 추구라는 골든 룰보다는 보편적인 가치(이번 경우에는 휴머니즘)라는 틀 안에서 사태를 보려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독일은 세계인들로부터 존경을 벌었고 스스로에 대해서는 독일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느끼게 되었다. (탁월한 정치인은 탁월한 교사다. 메르켈을 포함한 독일 국민들은 보편적 가치에 대해 세계인들에게 훌륭한 수업을 해주었다.)
  
난민 사태와 관련해서 네이버에 들어가 댓글들을 좀 읽었다. 물론 실망했다. 독일에는 기꺼이 존경을 표하면서도 스스로가 독일처럼 행동하여 존경을 받을 가능성은 닫아 놓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언제나 현실 원리다. 동양 고전을 빌어 말하면 소인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적어도 끝까지 생존해 낼 수는 있을 것이다. 생존만이 우리의 지상 과제이다.

얼마 전에 쿠바와 미국이 국교 정상화를 했다. 대단한 뉴스였다. 저 조그만 섬 나라가 한때 제3세계 운동의 구심점이기도 했다. 여기 사람들이, 예를 들어 예술가를 평가하는 최고의 기준은 그 사람이 자기 세계를 갖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면 쿠바는 자기만의 뭔가를 갖고 있나? 그렇다. 베트남은? 알제리는? 북한은? 태국은? 등등. 이 모든 나라들의 고유성에 대해 우리는 긍정할 수 있다. 그것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말이다. 그러면 한국은? 한국에서는 걸린다. 한국은 최근 북한의 압박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을 끌어들여 저 가난하고 낙후된 나라에 대해 공동 군사 시위를 한 나라 아니던가? 직장인이든, 예술가든, 한 나라든 자기 소리를 내지 못하고 주류에 파묻히려고 하는 것을 찌질하다고 한다. 찌질하다는 것은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존경을 버는 것을 포기한다는 의미이다. 아쉽게도 우리의 최근 역사가 우리에게 부단히 가르쳐주는 것은 찌질하게라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인 듯 하다. (다행히 요즘 영국도 충분히 찌질해서 내게 위안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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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어떤 (한국) 아이에게 철학 수업을 해주었다. 현재 사립 초등학교 5학년이고 내년에 이튼 학교 진학이 확정된 아이다. 많은 부분 아이 엄마의 엄청난 노력의 결과다.

주제는 faith. 아이가 신앙인인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belief와 knowledge를 구분하고 knowledge의 기반이 belief일 가능성을 점검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풀어갈 생각이었다(말하자면 신앙의 가능 근거를 미리 마련해 주고 싶었다). 놀랍게도 아이는 둘을 구별해 낼 줄 알았다. 놀리지는 솔리드한 푸르프를 제공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게다. 물론 이야기가 더 진행되면서 내가 이 아이를 데리고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걸까 하는 회의가 강하게 엄습해 오긴 했다. 초등학생이 도대체 왜 안셀름의 신의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증명에 대해 토론 해야 하는가? 그럭 저럭 토론을 끝마칠 수 있었지만 아이가 얼마나 소화해 냈는지는 모르겠다. (아이에게 키에르케고르의 아브라함 사례를 가지고 키에르케고르와 신앙지상주의와의 관계를 논하라는 숙제를 내주었다. 키에르케고르를 신앙지상주의자로 분류한 교재에 대한 내 나름의 복수였다. 그러나, 물론 키에르케고르를 이런 식으로 다루어선 안된다는 등등으로 내가 교재에 불만족을 표한 적은 한번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수업이 끝나고 아이가 학교 선생님한테 온 이메일을 보여주었다. 방학 동안 놀지 말고("anything is better than nothing") 뭐든 읽고 공부하라는 이야기였다. 그리스어, 라틴어 단어 공부할 것, 시사 뉴스 흐름을 결코 놓치지 말 것 등등. 12살부터 16살까지의 필독 리스트도 첨부되어 있었다. 하루키의 소설도 있었고 "풍요의 사회"도 있었고 사무엘 헌팅턴도 있었다. 할 말이 없었다... 저녁을 먹는데 아이가 밥 먹는 내내 (내가 밥 먹을 때 보는) 시사 주간지에서 눈을 떼지를 않았다. 보통 같으면 한 마디 했을 텐데 어느 순간 나도 아이에게 특권을 인정해 주고 있었다. 아이와 오스테러티 정책에 대해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다. 박물관 요금을 유료화하는 것은 싫다는, 다행히도 아이스러운 의견을 내주었다.

이런 것이 이른바 영국의 엘리트 교육이구나 싶었다. 영국은 엘리트 학교와 일반 공립 학교의 수준이 하늘과 땅 차이다. 우리 동네에는 강이 흐르는데 일요일마다 요트, 커누로 분주하다. 강 주변에 어떤 사립 초등학교 요트부 요트 격납고가 있다. "공립" 학교 다니는 어떤 아이에게 물어 보았다. "너도 요트부에 들었니?" 아이는 대답했다. "요트부는 사립 학교에나 있어요." 공립 "중"학교에서는 "프랑켄슈타인"에 대해 배운다(나는 그걸 두고 장래 황색 저널리즘의 독자를 만들어내려는 수작이라고 비아냥 거렸었다). 반면 사립 "초등" 학교에서는 니체의 짜라투스투라에서 인용한 문구가 시험 문제로 등장한다. 공립 중학교에 다니는 아이의 공부를 하루 정도 봐 준 적이 있었다. 사다리꼴의 면적을 구하라는 문제가 있었고 아이는 공식을 이용해서 잘 풀었다. 그러나 그 공식을 유도할 줄은 몰랐다. 아니, 삼각형의 면적을 구하는 공식도 유도할 줄 몰랐다.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고도 수학은 언제나 100점이다. (한국 사람이니까.) 수학만 그런 것이 아니지만 예를 들자면 길기 때문에 각설하기로 하겠다. 내가 영국의 공립 교육 제도에 지극한 불신을 갖고 있다는 결론만 이야기해 두자. 바보 만드는 교육...

영국의 이런 극심한 엘리트 교육과 공립 교육의 격차에 비하면 한국은 격차가 그다지 심하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교육 제도가 훨씬 낫다고 나는 생각한다. 여기에는 영국은 계급 사회고 한국은 그렇지 않다는 배경이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한국은 보편 교육을 지향하기 때문에 한국 학생들은 보편적으로 고학력이 요구되는 수업을 받을 수 밖에 없다. 말하자면 한국 학생들 고생이 심하다. 그런데 엘리트들의 수준에서 보면 일부 선별된 영국의 엘리트 학생들의 수준이 당연히 한국 학생들을 압도할 것이다. 영국의 엘리트 학생들은 어릴 때부터 이미 아이가 아니라 사회의 지성인으로 대우받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면 한국도 엘리트 교육을 강화해야 할까? 글쎄... 나는 여전히 제도적 엘리트 교육에 반대하는 쪽에 생각이 기운다. 초등학교때부터 안셀름의 존재론적 논증을 논할 수 있었던 사람이 반드시 대학교때 처음 안셀름을 접한 사람보다 안셀름에 대해 더 나은 논문을 쓴다는 보장은 없다. 영국 엘리트 교육의 표준과 같은 사람이랄 수 있는 존 스튜어트 밀이 거둔 성취는 엘리트 교육을 밟지 않은 사람에게는 접근 불능의 수준인 것일까? 아마 이에 동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나는 스스로 소화하지 않은 유산은 단순히 짐일 뿐이라는 괴테의 말에 동의한다. 아직 자신의 관심과 입장이 서지 않은 상태에서 과도하게 입력되는 자료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설사 그 과정을 통해 자기 사고를 계발하도록 지도받는다고 해도 그렇게 해서 출력되는 사고는 현실과의 연계성이 없기 때문에 한낱 연습에 불과할 것이다. 그렇다면 연습을 그렇게 오래해야 할 필요가 도대체 무엇인가?

더 해야 할 얘기가 있으나 줄여야 겠다. 결론만 말해두면 내 생각에는 엘리트 교육은 어떤 문화권들(영국이나 프랑스 등)이 이러 저러다 보니 (역사성과 사회성 속에서) 만들어낸 제도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 것이 꼭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 더구나 보통 교육을 상당히 낮은 수준에 방치한 채 이루어지는 엘리트 교육은 일종의 죄악이라고 본다. 엘리트 교육을 수행하는 사람도 이런 것을 잘 아는 것 같다. 아까 말한 사립 초등 학교 엄마에 의하면 이튼에서 제일 먼저 가르치는 것, 언제나 제1순위의 덕으로 가르치는 것은 "겸손"이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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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주문한 '존재와 무'가 지금 내 손에 놓여 있다. 사르트르의 양녀 아를레트가 색인을 단 tel판이고 독일에서 건너왔다. 거기가 제일 쌌다. 아를레트가 재출간했던 사르트르의 다른 저작들과는 달리 외부 서문을 받지 못했나 보다. 아쉬웠다. 사르트르의 서문부터 바로 시작한다. 작은 판형에 깨알같은 활자가 빼곡하다.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쳇, 휴대하기에 나쁘지는 않겠군... 책을 주문하기 전에 인터넷에서 PDF로 돌아다니는 사르트르의 서문 원문을 보았었다. 나의 빈약한 불어 실력으로 읽을 수 있을까? 뜻밖에도 재미있게 읽었다. (신난 나는 '구토'도 불어판으로 주문해 버렸다.) 그러나 676 페이지를 가득 채운 작은 활자들이 주는 압도감은 전혀 다른 풍경을 그린다. 그 험한 산에... 왜 올라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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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2015.8.28):
[아래 글에서, 김용옥의 번역물은 도덕경 하나 뿐인 것 같다는 나의 기술은 완전한 오류인 것 같다. 이 포스트를 폐기해야 할 정도로 커다란 오류인데... 그냥 놔두기로 한다.

왜냐하면 내가 김용옥의 노고와 성취에 무지했던 것에 별로 미안한 생각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김용옥이 약속했던 노자 철학, 불교 철학, 자신의 기철학, 최한기의 기철학, 조선 철학사 기획 등은 어떻게 되었는가? 나는, 이 웅대한 기획들의 결과물을 기다리다 방송 강의 등에 안주해 버린 듯한 김용옥에 실망하고, 더 이상 기다릴 것 없다고 떠나버린 많은 사람 중의 하나다. 

솔직히 나는 김용옥의 13경 번역에 대해서도 별 느낌이 없다. 지금 꼭 그걸 다시 번역해 내야 하는가? 그걸 꼭 김용옥이 해야 하는가? 김용옥이 해줘야 할 좀 더 어렵고 선구적인 일들이 있지 않은가? 왕부지, 이탁오의 번역, 그리고 무엇보다도 조선 철학사. 특히 조선 철학사에 대해서는 정말이지 김용옥이 해줘야 하는 작업 아닌가? (이 세 주제에 대해 알라딘 검색을 한 결과 찾아진 것은 없었다.)]


김용옥이란 분이 있다. 동양 고전, 한국 고전 번역의 중요성에 대해 큰 목소리를 내시던 분이었다. 덕분에 한국 사회에서 동양학에 대한 관심이 무척 높아졌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알기로 김용옥의 고전 번역은 노자의 도덕경 번역 하나 뿐이다. 이 번역서에 한정해 읽어 본 소감을 말한다면 아주 실망스러웠다는 것이다. 해제도 없고 각주도 없고 마치 시처럼 번역된 한국어 번역문이 책의 거의 전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런 번역이 김용옥이 그토록 강조하던 완전 번역의 예일까? 노자 연구자가 노자에 대해 논문을 쓸 때 김용옥의 이 책을 인용, 참고 서적으로 이용할 수 있을까? 전혀 가능성 없는 일이다. 김용옥의 번역에는 아무런 이론도 논증도 논거도 없기 때문이다. 일은 결코 이렇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박종현이라는 분이 있다. 플라톤 번역의 대가다. 박종현 번역의 질이 어떠한지는 전문 학자들이 우선적으로 검토할 일이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도 그렇게 검토할 만한 플랫폼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플라톤 번역이 왕성할 수 있는 이유가 박종현의 번역이 토대가 되어 주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박종현은 플라톤의 법률도 번역했다. 박종현이 법률을 번역해 놓았기 때문에 한국에서 플라톤 저작의 완역은 이제 시간 문제일 것이라고 생각한다(아직 완역이 안되었다면). 그만큼 법률이 양도 방대하고, 현대의 관심에서 외진 곳에 있기 때문이다. 

일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한국에는 들뢰즈가 완역되어 있는 한편으로 플라톤 완역은 요원하다는 식으로 비판만 해서는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비판만 해서 우리가 스피노자의 에티카 한국어 표준판 한 권이라도 얻을 수 있었던가? 

로쟈라는 분이 있다. 번역 비평으로 인기를 끄셨다. 번역 비평이라는 유행도 만들어 내신 것 같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아무런 일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분은 우리가 얼마나 표피적인지를 잘 보여주는 것 같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장 창피해 하는 일이 읽지도 않은 책을 죽 진열해 보여주는 것 아니었던가? 우리는 얼마나 뻔뻔해 진 것인가? 읽지도 않은 책을 죽 진열해 보이는 것을 자랑스러워 할 정도로?

내 생각에 번역 비평은 진지하게 받아들여 질 수 없는 것 같다. 1000권의 책에 대해 번역 비평하는 것보다 한 권의 책을, 허투르게라도 번역해 내는 것이 우리의 인문 환경을 더 풍요롭게 할 것이다. 1000권의 책에 대해 번역 비평하는 것보다 단 한권의 책이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제대로 된 소개글을 쓰는 것이 일반 독자들에게 더욱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번역 비평이 가치 있는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번역자, 출판사, 그리고 관심 독자)이 번역 비평이라는 것을 진지한 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번역 서평자가 최소한 해야 할 일이 있다. 즉, 해당하는 책"만이라도" 통독하고 그에 대한 자기 이해를 서술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사람들은 적어도 번역 비평하는 분이 번역서에서 트집을 잡기 위해 문제를 제기하는 건 아닐 거라고 경계를 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내 생각에는, 대부분의 경우 번역에 대한 문제 제기 자체보다는 해당 책에 대한 보고가 우리의 인문 환경에 더욱 도움이 될 것 같다. 왜냐하면 책을 통독하고 그에 대해 자기 생각을 정리한다는 것은 표피에서 깊이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할 것이기 때문이다. 독서의 깊은 의미는 결국 이것이 아니던가? 인문 환경이란 깊이에 대한 추구를 쑥스러워 하지 않도록 고양하는 분위기를 말하는 것 아닌가? 자신이 읽지도 않은 책을 죽 진열하고 그 일부에서 번역문을 뽑아 그것이 제대로 되었는지 안되었는지를 왈가왈부하는 것은 독서라는 행위의 본질에서 얼마나 벗어난 것인가? 

최소한 읽자. 그래야 그에 대해 뭐라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긴다. 이것이 최소한의 요구다. 그런데 우리 시대에는 정녕 너무 지나친 요구인가? 

(조금 있으면 한국에서 친구들이 놀러 온다. 막간을 이용해서 생각나는 대로 적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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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두콩 2015-08-28 0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김용옥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는 것 같습니다. 벌써 몇 해전에 나이는 먹어가는데 자신이 이룩해 놓은 것이 없다고 반성하면서 13경 번역에 착수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논어, 중용, 대학, 효경, 맹자를 번역해 냈습니다. 그리고 아주 오래 전에 <석도화론>이라는 책도 번역했고, <벽암록>의 일부를 <화두, 혜능과 세익스피어>라는 제목으로 번역했습니다. 장경각에서 나온 <벽암록>과
비교해 보니 김용옥의 번역이 훨씬 나았습니다.

저는 번역비평이 더 활발히 많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엉터리 번역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에 올라온 오역지적이 해당번역본을 새로 찍을 때 많이 반영되기 때문에
분명 순기능이 있습니다. 그리고 요즘은 번역하는 사람중에 오역지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한가지 말씁드릴 것은 오역지적에만 머무를 수 밖에 없는 사정인데 저작권 때문에 문제가 많은 번역본을 다른 사람들이 번역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습니다.

weekly 2015-08-28 18:53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1. 제가 어마어마한 실수를 한 것 같습니다. 알라딘에서 검색하니 김용옥의 논어한글역주 세트 등의 책이 보이네요. 제가 김용옥의 노고와 성취에 대해서 철저하게 무지했던 것 같습니다... 지적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2. 번역비평에 순기능이 있느냐 하는 문제는 순전히 번역비평이란 말이 무얼 의미하느냐에 달린 것 같습니다. 번역하시는 분들 사이에서 번역에 대한 논쟁이 일거나 일반 독자들이 오역을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 등등은 모두 건강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의미의 번역비평은 활발할 수록 좋을 것입니다.

제가 못마땅해 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가 아니라, 번역,그리고 독서와 별개의 차원에서 비평이 수행될 수 있다는 입장에서의 번역비평입니다. 저는 이런, 정확히 말하면 번역 평론은 인정될 수 없다고 봅니다. 아니, 이런 번역 평론을 인정해 주어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예전에 로쟈님이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번역 논쟁에 끼여들어 자신의 대안을 제시하는 것을 봤습니다. 문제는, 제가 느끼기에, 로쟈님이 해당 대목의 앞 뒤 한 페이지조차 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전문가주의를 논하자는 것이 아니라, 번역비평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진지한 독서와 그에 관한 토론의 한 형태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또 예전에 어떤 사이트에서 어떤 책에 대한 소개글에 어떤 분이 번역이 제대로 되었느냐고 묻자 다른 분이 책은 안읽고 걸핏하면 번역 번역 한다고 비꼬는 댓글을 단 것을 보았습니다. 번역 품질에 대한 관심과 지적이 번역 품질을 높이는데 기여를 한다는 데 저도 동의합니다. 그러나, 번역서 일반에 대한 불신을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인문서, 인문 철학서의 번역에 들어가는 어마 어마한 공력에 비해 역자(그리고 출판사)가 얻는 경제적 보상이 너무도 초라한 것을 알기에(예를 들어 들뢰즈를 번역한 분의 경우), 저같이 소심한 사람은 감히 책의 판매량을 저하시킬 수 있는 공공연한 비판은 하지 못하겠더군요... 역자든 출판사든 보상은 거의 없는데 오역 논란만 무성한 인문 철학서 번역을 기획하려 할까요?

그러나, 정말로 우리가 번역 품질을 높이는데 관심이 있다면, 진정 정말로 그러하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해당 책을 진지하게 읽고 그에 대한 토론을 활성화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지하게 읽는 독자들이 많을 때 번역하는 분들도 경제적으로는 거의 아무런 의미가 없는 자신의 번역물을 한번 더 들여다 보게 되겠지요. 이런 식으로 번역의 품질이 높아지지 않을까요?

한가지 예를 말하자면, 제가 독후감을 쓴 ˝상상력˝이란 번역서가 있습니다. 저는 나름 진지한 독서를 했고 그 결과를 글로 써올렸습니다. 아마 역자와 저의 관심은 같았을 것입니다. 즉, 한국에서 사르트르의 책이 좀 더 많이 읽혔으면 한다는 것. 그래서 역자는 사르트르를 번역했고, 저는 매우 긍정적인 입장에서 독후감을 썼습니다. (물론, 역자분의 어마어마한 노고와 저의 하찮은 생색은 비교 대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보니 그 ˝상상력˝이란 책에 대해 역자분 자신이 일부 번역에 대한 수정의 글을 올리셨더군요. 물론, 역자분의 그 글과 저의 독후감은 전혀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역자분이 자신의 번역물을 을 진지하게 읽어주고, 그 책을 선전해 주어서 흐믓하게 생각하고, 그에 대해 다시 긍정적인 피드백을 보낸 것이라고 강렬하게 믿고 싶습니다.
 

 

 

 

 

 

 

 

 

 

 

맨 위의 것이 엊그제 찍어 놓은 정원의 모습이다. 예쁘지는 않다. 기록해 놓기 위해... 

 

(옆집 할머니가 잔디 기르는 일이 쉽지 않을 거라고 했었다. 정원이 손바닥만하고 담이 높아서, 햇빛이 잘 들지 않기 때문이다. 가을녁부터는 쥐구멍만한 햇빛이 잠깐 스쳐지나간다. 그래도 겨울을 넘기고 나니 그럭 저럭 언잖지 않을 정도는 되었다. 내년에는 더 두툼하고 상쾌한 모습이기를.)

 

(추: 위에서 두번째 사진의 잔디가 아주 파랗고 좋다. 막 깔았을 때의 모습이다. 그런데 그 겨울 엄청 장마가 져서 잔디도 거의 폐허가 됐었다. 지금 모습이 그나마 많이 나아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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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5-06-30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큰 나무 지금도 있나요?
나무가 단 한 그루라도 있으면 꼭 새가 날아와서 노래해주던데요~.
새벽에 새들이 종알종알 노래해주는 게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weekly 2015-07-29 14:20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셨지요? 댓글이 너무 늦었습니다. (댓글 알림 메일이 오지 않았네요...)

나무는... 잘라 버렸습니다. 다행히도(?) 이미 죽은 나무였구요.

제 사는 곳이 시골이기도 해서 그래도 새들은 자주 와 줍니다. 까망새가 지렁이도 잡아 먹고 다람쥐가 와서 도토리 심어 놓고 가기도 하고 동네 고양이가 화단을 지 화장실로 이용하기도 한답니다.:)

좋은 하루 되시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