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가(2015.8.28):
[아래 글에서, 김용옥의 번역물은 도덕경 하나 뿐인 것 같다는 나의 기술은 완전한 오류인 것 같다. 이 포스트를 폐기해야 할 정도로 커다란 오류인데... 그냥 놔두기로 한다.
왜냐하면 내가 김용옥의 노고와 성취에 무지했던 것에 별로 미안한 생각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김용옥이 약속했던 노자 철학, 불교 철학, 자신의 기철학, 최한기의 기철학, 조선 철학사 기획 등은 어떻게 되었는가? 나는, 이 웅대한 기획들의 결과물을 기다리다 방송 강의 등에 안주해 버린 듯한 김용옥에 실망하고, 더 이상 기다릴 것 없다고 떠나버린 많은 사람 중의 하나다.
솔직히 나는 김용옥의 13경 번역에 대해서도 별 느낌이 없다. 지금 꼭 그걸 다시 번역해 내야 하는가? 그걸 꼭 김용옥이 해야 하는가? 김용옥이 해줘야 할 좀 더 어렵고 선구적인 일들이 있지 않은가? 왕부지, 이탁오의 번역, 그리고 무엇보다도 조선 철학사. 특히 조선 철학사에 대해서는 정말이지 김용옥이 해줘야 하는 작업 아닌가? (이 세 주제에 대해 알라딘 검색을 한 결과 찾아진 것은 없었다.)]
김용옥이란 분이 있다. 동양 고전, 한국 고전 번역의 중요성에 대해 큰 목소리를 내시던 분이었다. 덕분에 한국 사회에서 동양학에 대한 관심이 무척 높아졌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알기로 김용옥의 고전 번역은 노자의 도덕경 번역 하나 뿐이다. 이 번역서에 한정해 읽어 본 소감을 말한다면 아주 실망스러웠다는 것이다. 해제도 없고 각주도 없고 마치 시처럼 번역된 한국어 번역문이 책의 거의 전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런 번역이 김용옥이 그토록 강조하던 완전 번역의 예일까? 노자 연구자가 노자에 대해 논문을 쓸 때 김용옥의 이 책을 인용, 참고 서적으로 이용할 수 있을까? 전혀 가능성 없는 일이다. 김용옥의 번역에는 아무런 이론도 논증도 논거도 없기 때문이다. 일은 결코 이렇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박종현이라는 분이 있다. 플라톤 번역의 대가다. 박종현 번역의 질이 어떠한지는 전문 학자들이 우선적으로 검토할 일이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도 그렇게 검토할 만한 플랫폼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플라톤 번역이 왕성할 수 있는 이유가 박종현의 번역이 토대가 되어 주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박종현은 플라톤의 법률도 번역했다. 박종현이 법률을 번역해 놓았기 때문에 한국에서 플라톤 저작의 완역은 이제 시간 문제일 것이라고 생각한다(아직 완역이 안되었다면). 그만큼 법률이 양도 방대하고, 현대의 관심에서 외진 곳에 있기 때문이다.
일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한국에는 들뢰즈가 완역되어 있는 한편으로 플라톤 완역은 요원하다는 식으로 비판만 해서는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비판만 해서 우리가 스피노자의 에티카 한국어 표준판 한 권이라도 얻을 수 있었던가?
로쟈라는 분이 있다. 번역 비평으로 인기를 끄셨다. 번역 비평이라는 유행도 만들어 내신 것 같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아무런 일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분은 우리가 얼마나 표피적인지를 잘 보여주는 것 같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장 창피해 하는 일이 읽지도 않은 책을 죽 진열해 보여주는 것 아니었던가? 우리는 얼마나 뻔뻔해 진 것인가? 읽지도 않은 책을 죽 진열해 보이는 것을 자랑스러워 할 정도로?
내 생각에 번역 비평은 진지하게 받아들여 질 수 없는 것 같다. 1000권의 책에 대해 번역 비평하는 것보다 한 권의 책을, 허투르게라도 번역해 내는 것이 우리의 인문 환경을 더 풍요롭게 할 것이다. 1000권의 책에 대해 번역 비평하는 것보다 단 한권의 책이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제대로 된 소개글을 쓰는 것이 일반 독자들에게 더욱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번역 비평이 가치 있는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번역자, 출판사, 그리고 관심 독자)이 번역 비평이라는 것을 진지한 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번역 서평자가 최소한 해야 할 일이 있다. 즉, 해당하는 책"만이라도" 통독하고 그에 대한 자기 이해를 서술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사람들은 적어도 번역 비평하는 분이 번역서에서 트집을 잡기 위해 문제를 제기하는 건 아닐 거라고 경계를 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내 생각에는, 대부분의 경우 번역에 대한 문제 제기 자체보다는 해당 책에 대한 보고가 우리의 인문 환경에 더욱 도움이 될 것 같다. 왜냐하면 책을 통독하고 그에 대해 자기 생각을 정리한다는 것은 표피에서 깊이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할 것이기 때문이다. 독서의 깊은 의미는 결국 이것이 아니던가? 인문 환경이란 깊이에 대한 추구를 쑥스러워 하지 않도록 고양하는 분위기를 말하는 것 아닌가? 자신이 읽지도 않은 책을 죽 진열하고 그 일부에서 번역문을 뽑아 그것이 제대로 되었는지 안되었는지를 왈가왈부하는 것은 독서라는 행위의 본질에서 얼마나 벗어난 것인가?
최소한 읽자. 그래야 그에 대해 뭐라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긴다. 이것이 최소한의 요구다. 그런데 우리 시대에는 정녕 너무 지나친 요구인가?
(조금 있으면 한국에서 친구들이 놀러 온다. 막간을 이용해서 생각나는 대로 적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