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남부에 한인들이 몰려 사는 뉴몰든이 있다. 몇 칠 전 뉴몰든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을 먹으며 한인 신문을 보았다. 최고은이라는 이름의 생소한 가수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었다. 6월 말에 영국에서 열리는 글래드스톤베리 축제에 초대받았다는 것이다. 이 축제에는 잠비나이 등도 초대받았다고 했다. 나는 둘의 이름을 기억해 두었다가 집에 와서 바로 유튜브를 찾아 보았다. 

최고은. 기타 하나 들고 노래하는 싱어 송 라이터였다. 앨라니스 모리셋이나 돌로레스 오리어던에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한 창법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내면적인 성찰을 담은 멜로디와 가사들. 나는 놀랐다. 요즘 시대에 이런 노래를 하는 가수가 있다니. 나는 최고은을 20대 초중반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더욱 놀랐던 것 같다. 사실 최고은은 31살이라고.

최고은에 대한 기사를 웹에서 찾아 보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때까지 판소리를 전공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영어로 노래하는 것에 더 편해 한단다. 이상한 이야기긴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한국어로 노래하는 것이 생경하게 느껴질 만한 주제들이 분명히 있을 테니까. 내가 처음 최고은의 노래를 들었을 때 느꼈던, 시대착오적이라 여겨질 정도의 이질감이 지금의 한국과 최고은 사이에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되니까. 

나는 최고은을 보면서 전라도 출신의 여성 작가들, 신경숙, 한강 등에게서 느끼게 되는 그런 분위기를 떠올렸다. 기본적인 바탕을 이루는, 말하자면 촌스러움,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이야기될 수 있는 내면성, 자폐적이라 생각될 정도의 내면성, 그리고 그에서 획득한 깊이, 마지막으로 그 깊이와 보편성 사이에서의 갈등과 긴장. 아마 그는 자신의 감성만으로 노래할 것이고 청자 중 일부는 그 긴장과 갈등 속에서 그 노래를 들을 것이다.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이런 경험을 제공하는 예술가는 정말 희귀하다는 것이다. 

잠비나이. 유튜브에서 그들의 음악을 처음 듣는 순간 나는 너무나 놀랐고 흥분했고, 솔직히 눈물이 날 뻔 했다. 거문고로 리프를 치고 해금으로 퍼스트 기타를 한다는 아이디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잠비나이는 바로 이런 변태같은 아이디어를 구현하고 있었는데, 그 음악은 실험적인 프로젝트 수준이 아니라, 드럼, 베이스, 기타로 오랫동안 정형화된 밴드 구성 이상으로 든든한 규범을 제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리듬 파트에 실린 해금이나 피리는 분명 전통적인 주법에서 크게 이탈한 것 같지 않은데도 현대적으로 들렸고, 때로는 어느 기타나 전자 사운드보다 더 파괴적인 소리를, 때로는 어느 보컬리스트보다 더 깊은 감성의 소리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아마 가장 중요한 것은 잠비나이 멤버들이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것이리라. 그들의 음악에는 망설임이나 주저함이 전혀 없다. 새로운 형태의 음악이니 뭔가 주저함이나 석연치 않음이 있을 만도 한데, 잠비나이는 확고함, 단호함으로 그런 허약함을 일소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의 음악은 시원하고 재미있고 힘이 있다. 긴 곡들임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전혀 느끼지 않게 한다. 잠비나이의 음악은 마치 백발로 태어난 노자처럼 완성되어 있는 것 같다. 나는 이런 것들이 너무나 놀라웠다. 그들은 아직 어린데 말이다.

한국의 곳곳에서 젊은 세대들이 끊임없는 실험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너무도 기뻤다. 그래서 글래드스톤베리 축제에 가려고 티켓을 알아봤다. 그런데 이미 매진. 아마도 1년 전에 미리 예약을 했어야 하나 보다. 어쨌든 이 팀들이 유럽에 자주 온다니, 네덜란드만 되어도 가서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다른 얘기. 현대의 한국에 보편성의 획득이라는 과제는 상당히 시급하다. 예를 들면 나는 엊그제 채리티 샵에서 산 달라이 라마의 책을 읽었다. 달라이 라마는 불교 문화의 지역적 다양성을 이야기하면서 "중국 불교, 일본 불교, 태국 불교..." 등을 언급해 나갔다.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국 불교는? 하며 섭섭해 할 것이다. 내가 접해 본, 서양 사람이 쓴 불교에 관한 책에는, 한국 불교는 중국에서 일본으로 불교를 전달해 준 다리로만 의의가 있다든지, 한국 불교는 중국 불교에 어떠한 창의적인 부가도 한 것이 없다든지 하면서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천년을 훨씬 넘는 동안 불교에 대한 아무런 창의적인 기여가 없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정말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이제 그것은 현대의 한국 사람들이 자신의 문화에 어떻게 보편성을 제공해 주느냐 하는 문제로 전환된다.

내 방 책장에는 한국에서 가져 온 한국의 예술에 관련한 책들이 몇 있다. 그런데 별로 만족스럽지는 않다. 대체로 "우리 것은 좋은 것이야, 우리 것은 이름다운 것이야"라는 관점에서 쓴 책들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내가 여기 영국 친구들에게 한국의 미에 관한 책들을 소개해 주고 싶어한다고 하자. 과연 한국에서 온 책들이 도움이 될까? 별로. 그 책들은 주로 신토불이적 관점에서 쓰여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관점에서 쓰여진 책은 한국 사람 자신에게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나는 믿는다.

잠시 잠비나이의 이야기를 더 해보면. 잠비나니의 곡에서 들리는, 베이스 기타 역할을 하는 소리에 대해 생각해 보자. 베이스 기타 소리를 내는 것 같은데 너무 두텁지 않아 온 곡을 안개로 휘씌우지 않고, 그래서 곡의 날렵함을 유지하게 해주고, 또 드럼 스틱 소리같은 것이 기가 막힌 조화를 지속적으로 이루어 내고 있는데, 이런 소리들은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 내는 것일까? 답은 우연히도 거문고라는 것이다. 이 기술은 보편적인 언어로 되어 있는데, 그 구현은 우연히도 거문고로 되어 있다. 우리가 보편성을 획득하는 방식은 항상 이와 같다. 물론, 음악 분야에서 보편성을 획득하는 것은 좀 더 쉬울 수 있겠지만.

예를 들어 한국 예술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하려면 역사적으로든 현대적인 평가에 있어서든 최소한 중국과 일본에 대한 참조가 있어야 할 것이다. 명시적 언급으로든 배경으로든 말이다. 이 경우에는 그 참조들이 우리가 타인에게 이해받을 수 있는 다리, 플랫폼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보편적 언어를 습득해야 하는데, 이 작업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의 게으름은 이 작업이 요구하는 어마어마한 노고때문이라는 변명에 고개가 살짝 끄덕여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관점, 태도일 수도 있다. 보편적 시각에서 우리 자신을 바라보려는 관점, 태도. 자신을 측정가능한 대상으로 내놓는 용기. 분명한 것은 이런 관점, 태도, 용기를 가졌었더라면 숭례문 복원 공사가 실패하는 어이없는 사태가 벌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박근혜의 대통령 당선이 한국의 현재 전반을 특징 짓듯이, 나는 숭례문 복원 공사의 실패가 한국의 고유 문화에 대한 현재 양상을 특징짓는다고 생각한다. 

이 시점에서는 세계를 향해 직접 이야기하는 방식을 방법론으로 택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잠비나이가 보여준 신념이 이런 것일 게다. 자신이 고유한 감성을 가지고 있다는 확신, 그것을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언어로 전달할 수 있다는 확신. 이런 것이 변화를 추동하는 에너지일 것이다. 나로서는 잠비나이와 같은 패기의 밴드를 발견한 것이 지방선거에서 야권이 승리하는 것보다 더 기쁠 것 같다. 자신의 독자성에 대한 확신을 갖는 것, 그것을 확고하게 표현할 줄 아는 것, 이런 것들이야 말로 현대 한국에, 특히 기성세대에게  절대적으로 결핍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끔 공유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포스팅하는 것으로 해야 겠다.)

(혹 댓글이 있어도 대댓글은 달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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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14-06-03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잠비나이 정말 대단하네요!!!! 순간 훅 빨려들어갔어요 ㅠㅠ 글래드스톤베리.. 내년엔 꼭 한번 가보심이..^^ 짱짱한 뮤지션들 거기 다 오더라구요.

qualia 2014-07-31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어떤 한국 롹 밴드들한테서도 단 한 번도 놀란 적이 없었습니다.

근데 어느날 잠비나이를 듣고는 처음으로 놀랐었죠.

배철수의 음악 캠프에 나와서 라이브하는 것을 들었더랬습니다.

잠비나이는 국악과 국악기를 현대 대중음악에 도입/접목/융합하는 데서, 전혀 새롭고도 차원이 다른 방법론/연주기법/조율/소리 디자인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역설적으로, 노란둥이인 우리들이 팝과 롹을 하려면, 음악에서 김치 냄새와 된장찌개 냄새를 완전히 제거해내는 방법부터 알아야 합니다. 예컨대 우선은 흰둥이들의 팝과 롹을 완벽에 가깝게 ‘모방’해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단계를 거치지 않은/못한 한국적 팝과 롹, 혹은 재즈는 존재할 수 없다고 봅니다. 이런 단계도 거치지 않고 한국적 팝/롹 운운하는 것은 거의 모두 얼치기에 불과할 뿐입니다.

잠비나이가 국악과 국악기를 팝/롹에 도입했지만, 역설적이게도, 잠비나이는 자신들의 음악에서 김치 냄새와 된장찌개 냄새를 (어느 정도) 제거해내는 데 성공했다는 것입니다.

 

박대통령의 담화에 관한 기사들 몇몇을 읽었다. 박근혜가 제대로 된 대책을 내놓을 것이라고는 믿지도 않았으므로 담화에 실망한 척 하지도 않겠다. 

박근혜의 담화는 현재 한국이 처한 가장 커다란 문제가 무엇인지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이나 영국에서 세월호 사태가 벌어졌다고 하자. 초동 대처가 잘 못 되어 어린 학생을 비롯한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다고 하자. 미국이나 영국은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할까? 우리는 이에 대해 수도 없이 보고 들었다. 수색과 구조 등 현장 상황을 최우선으로 관리한다, 이후 사고의 원인과 대책에 대한 광범위하고 장기적인 조사와 연구에 들어간다, 이 결과에 기초하여 대안을 만들어 낸다.

우리는 우리도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이론'은 한국의 현실에는 결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박근혜의 해경 해체 선언이 바로 그런 이론과 현실의 괴리를 보여준다. 사고 난지 한 달이 좀 지난 싯점에, 아직 수색 진행 중인 상황에서, 청와대 비서들과 몇 칠 논의한 결과를 바로 국민과 국회 앞에 내놓는 조급하고 비-시스템적인(비상식적인) 행동이 바로 세계 10위권대의 경제력에 걸맞지 않는, 한국의 정신적 빈곤함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절차를 쫀쫀하게, 혹은 찌질하게, 혹은 고지식하게, 혹은 유도리없게, 혹은 까칠하게 밟아나갔다면 세월호는 결코 물 위에 뜰 수 없었을 것이고, 숭례문 복원 공사가 수포로 되지 않았을 것이고, 박근혜는 사고 한 달 만에 해경 해체를 선언하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 말하자면 성향적이라는 것이다. 두 가지의 성향이 현재의 한국에 병존하고 있는데, 이 성향이 때로는 세대 갈등으로, 때로는 좌우 갈등으로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나는 한국에서 말하는 좌우 갈등이 무슨 대단한 이념 갈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합리적인 절차를 밟아나가는 일처리에 상대적으로 편안해 하는 성향과 그것을 답답하게 여기는 성향의 차이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정치적 함의를 다 떠나서 후자의 성향도 분명한 가치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내가 이탈리아나 터키를 여행하면서 느낀 것이다. 반면, 우리가 결국 걸어가야 할 방향은 전자라는 것도 분명하다.

나는 충남지사 안희정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의 인터뷰를 하나 읽었다. 앞서 말한 성향의 차이가 안희정과 정진석(한나라당)에서 아주 분명하게 드러난다.

문제: 충남에 복철을 놓아야 한다. 국토부는 충남의 입장에 동의한다. 그러나 재정부가 돈이 없다며 난색을 표한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정진석의 답: 나는 박근혜와 친하다. 그에게서 돈을 따오겠다.

안희정의 답: 국토부와 협의하여 보고서를 만들겠다. 장기적인 차량과 철도의 운송량 퍼센트 변화를 보여주면서 지금 복철을 건설해야 시기를 맞출 수 있다고 재정부를 설득하겠다.

자, 누구의 태도가 더 옳은가? 물론, 안희정이다. 그러나, 당신이 충남 사람이라면 이 문제에 관한 한 누구를 찍고 싶은가? 솔직히 정진석이 더 미더울 수 있다. 안희정은 허황된 말 뿐일 수 있다. 이것이 노년 세대의 입장일 것이다. 노년 세대는 절차를 차근 차근 밟아나갔다면 한국이 이만큼 발전할 수 없었으리라는 것을 삶을 통해 알고 있을 것이다. 노년 세대는 무엇보다도 정진석, 박근혜와 진심으로 뭔가를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는 세대일 것이다.

이런 성향은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10년, 20년 정도 장기적인 안목을 가져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마 이런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창의적이고 진보적인 사고를 하는 젊은 세대를 잘 지켜내는 것이리라. 그런 면에서 일베라는 사회 현상을 만들어낸 집권 세력은 정말 대단한 천재다. 그러나 우리가 질 리는 결코 없을 것이다. 

(혹시 댓글이 달려도 대댓글은 달지 않겠습니다. 이제 진짜로 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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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친구 A가 휴가를 받아 놀러왔다. 영국에서 7년 살다가 직장 접고 한국에 가서 1년여 살았고, 이제 8월달이면 다시 영국에 올 계획이란다. 영주할 생각으로. 다른 친구들도 불러서 우리 집에서 중국 요리를 시켜 먹었다.

한국 이야기, 아이 키우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친구 A의  아이는 초등학생. 2살 때 영국에 왔지만 집에서는 한국어만 썼기 때문에, 어눌하긴 하지만 한국어를 곧잘 한다. 이번에 한국에서 1년 정도 산 셈인데, 한국어 발음이 무척 좋아졌다. 아이의 부모는 아이에게 한국이라는 나라를 경험시켜 주고 싶었다고 했다. 세월호 때문에 아이가 한국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는지는 모르는 일이다. -세월호 사태에 대해서 아이가 이렇게 말했단다. "영국에서 크루즈 탈 때는 구명복 입는 법, 어디서 구명정 타는지 다 훈련 받았는데, 세월호는 그런 훈련을 안해서 사고가 난 것이다." 

친구 B의 아이는 이제 4, 5살. 영국에 온지 1, 2년 정도 되었는데, 아이가 자꾸 영어로 말하려고 한단다. 즉슨, 영국화가 진행 중이라는 것. B는 아이가 영국 시민권을 따고도 한국에서 군대를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고 있단다. B는 장교 출신이다. 내가 그 점을 지적하니 B는 꼭 그런 이유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대부분의 한인에게 영국은 남의 나라다. 영국에서 좋은 교육을 받은 한인들도 성인이 되고 나면 한인 친구들만 친구로 남는단다. 영국에서 좋은 대학을 마친 한인들도 한국 회사의 현지 법인에 취직하는 경우가 많다. 영국에서 여기 사람들에 섞여들어 주류에 진입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영국은 '이런' 사회적 이동성에 관한 한 굉장히 개방적인 나라이다. 프랑스에서 10년을 산 한 친구는 영국 테레비젼을 보고 놀란다. 앵커가 흑인이었으니까. 프랑스에서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라면서. 영국 뉴스에서는 이슬람식 머리 수건을 쓴 여성 리포터도 볼 수 있다. 

한인들도 영국 사회와 긴밀한 접촉을 지속적으로 하다보면 장기적으로 영국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게 될 날이 올지 모른다. 그러나 아직은 아닌 것 같고, 사실 앞으로도 잘 모르겠다. 

거칠게 말하면 '남'의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열외의 시민일지도 모른다. 때로는 열외의 상황이 편할 때도 있다. 그러나 항구적인 조건으로 열외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B가 자기 아들을 군대에 보내고 싶어 하는 이유가 이런 것이다. 어떤 상황이 되든, 영국 사람으로서든, 한국 사람으로서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을 아이가 구비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영국 사회가 진입하기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세월호 사태가 폭로한 가장 가공할 만한 사실은 한국 사회가 신뢰도 제로의 사회라는 것일 것이다. 도처가 다 그렇다. 심지어는 숭례문 복원 공사에 참여한 한국 전통 건축물 복원에 있어 최고라는 장인도 자기 직업에 대한 자긍심은 세월호 선장과 비슷한 수준인 것 같다. 다 돈 밖에 모른다. 그러므로 아무도 믿을 수 없고, 아무도 믿어서는 안된다. 이렇게 총체적으로 신뢰가 붕괴된 사회가 또 있을까 싶다... 

그래서, 인터넷 댓글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민을 말한다. 그러나 이민은 결단코 답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이민을 할 정도면 한국에서 성공적인 경력을 쌓은 사람들이거나 쌓을 수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한국 사회에 적극적인 기여를 하며 살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영국으로 이민을 온다면 영국 사회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정체성을 갖는데 무한히 힘들 것이다. 즉, 영국이 남의 나라로 느껴질 것이다. 한 사회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상당량의 행복감은 그런 정체성의 분열을 통해 날아가 버린다.

실력 있고 생각 있는 사람들이 한국을 많이 떠난다면 한국 사회를 분열시켜 가며 자신들의 잇속을 챙겨 온 사람들은 쌍수를 들고 기뻐할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런 꼴을 보고 싶지 않다.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 세월호 사태를 통해 우리가 알게 된 것은 우리가 할 일이 참 많다는 것 아닐까?

내가 요즘 사는 책의 90%가 채리티 샵(기부 물품을 판매하는 자선 사업 가게)에서 산 것이다. 일반 서점에서는 못 보던, 한국 관계 책들도 서너 권씩 나온다. 그러면 꼬박 꼬박 산다. 어제 산 책은 전통 사찰에 대한 책이었다. 영국 사람이 쓴 책인데 인쇄는 한국에서 했다. 숭산 스님과의 인터뷰도 실려 있다. 그러나, 오탈자도 많고 책 구성이 엉망이다. 다른 사람에게 받은 서문이 인트로덕션과 상당히 겹치는 등, 실력이 문제건 성의가 문제건 문제가 많았다. 나는 좀 창피했다... 이런 것만 봐도 느껴지는 게 분명히 있다. 한국은 아직 할 일이 많은 나라라는 것. 

정치에서건 문화에서건 한국은 손 댈 곳이 너무도 많은 나라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이 많고, 아직 정리되지 않은 것이 많고, 아직 제대로 확립되지 않는 것이 너무 많다. 젊고 창의적인 사람들에게는 무한한 기회가 있는 나라다. 물론, 무능하고 윤리의식이 결여된 기성세대가 곳곳에 눌러앉아 장애물이 되고 있다는 걸 잘 안다. 그러므로 젊은 신진 세대들은 우선 그 장애물을 우회하는 법을 익혀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같은, 이미 늙어 버린 사람은 마땅히 귀명창이 되어야 하겠지.

(우회하는 법. 이번 지방선거 기사에서 서울의 박원순, 충남의 안희정에 대한 이야기를 읽었다. 한 사람은 지명도 떨어지는 시민 운동가 출신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친노 중의 친노로 감옥까지 갔다 온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사람들이 서울 시장이 될 수 있었고, 충남 지사가 될 수 있었을까? 난 잘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지자체장이 되었고 이번에 재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한나라당 성향 사람들도 이들을 지지한다는 것. 예를 들면, 박원순은 전통적인 한나라당 강세 지역인 강남 구들에서 서울 평균보다 높은 지지율을 받고 있다는 것. 어떻게? 강남 지역에 적당한 경제적 이득을 제공함으로써. 안희정도 충남에 많은 투자를 끌어오고 소통을 강화함으로써. 그렇게 야금 야금... 우리가 노무현의 실패에서 배워야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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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동안 터키를 돌아다녔다. 간단하게 기억에 남는 것들을 적어놓자.

1. 거의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고 갔다. 그냥 먹고 놀다 올 참으로. 터키에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할 일이 참 많았는데 이 말이 어찌나 어렵던지 아직도 내 입에 붙지 않다. 나의 낡은 머리란...

2. 터키 사람들은 무척 친절하다. 아니 순수하다고 해야 할까? 특히 한국 사람들에게는 거의 천사다. 한국 사람이라고 몰려들어 같이 사진을 찍는 여학생들:) 영어가 겨우 겨우 통하는 어느 택시 아저씨는, 내가 터키와 한국은 형제의 나라라고 하니까, "블러드 브라더스"란다!

3. 터키 사람들의 순수함을 이야기하려면 한도 끝도 없다. 거리에서 홍합밥을 사먹는데, 자꾸 먹다보니까 10개를 먹었다. 하나에 1리라니까 10리라. 지갑을 꺼내니 5리라 짜리랑 20리라 짜리 지폐가 있었다. 20리라를 내려니 홍합밥 파는 아저씨가 5리라 짜리를 낚아챈다. 내가 노노노를 외쳤지만 괜찮단다~

4. 어느 사원에 가서 천정이랑 벽이랑 멍청한 표정으로 돌아보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수염이 허연 어르신이 나를 끌고 벽 쪽으로 가신다. 그리고 사십 센티 길이의 돌로 된 피스톤을 가리키신다. 지진이 나면 이 원기둥이 파르르 떨며 소리를 낸다는 것을 손발을 써가며 열심히 설명해 주셨다. 

5. 택시를 잡으려는데 잘 못잡고 있었다. 서 있는 택시들은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이 아닌지 고개를 설레 설레. 그러다가 어느 택시 기사분이 나서서 복잡한 교통을 정리하면서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다 주었다. 내가 고맙다고 "땡큐"를 외치자 0.2초 정도 씽긋 미소를 짓고는 암 것 아닌 듯한 표정으로 돌아가더라. 

6. 어느 아저씨. 오렌지를 까먹고 있다가 다가오셔서 영어로 띄엄띄엄 말씀하신다. 아들이 뉴욕에 사는데 한국 여자를 만났단다. 아들은 무슬림, 한국 여자는 카톨릭. 크리스마스때 어찌 저찌 했다고 하는데 알아 듣기 힘들었다. 어쨌든 먹던 오렌지 반쪽을 주신다. 넙죽 받아 먹었다. -6일 동안이었지만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7. 이스탄불에서 페리를 타고 인근의 프린스 아일랜드에 갔다. 거기서 자전거 일주 여행을 하고 돌아오는 배. 옆 자리에 터키 사람들이 앉았다. 서로 가볍게 인사. 베이글같은 빵을 사더니 반을 잘라 나를 준다. 갈매기 먹이로 날리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갈매기가 몇 없었다. 그래서 대신 내가 먹었다. 그랬더니 베이글같은 빵을 또 주었다. 그래서 내가 또 먹었다. 그랬더니 터키 국기를 주더라. 고맙다고 잘 간직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말문이 열려서 이스탄불에 도착해서 같이 터키식 차(차이)를 사먹었다. 주소 주면서 자기 집이 브루사에 있는데 내일 꼭 놀러 오라고. 

8. 다음날 페리타고, 미니버스 타고, 기차 타고, 트램 타고, 택시 타고 해서 그 친구 집에 갔다. 이미 저녁. 그 친구 이름은 세파인데 자고 가란다. 세파, 세파 아내, 세파네 엄마, 장모, 2살 짜리 아들과 같이 밥먹고, 세파 차로 브루사를 총알 여행하고, 어느 산꼭대기 올라가서 터키 차를 마시고 놀았다. 대화는 구글 트랜스레이터로. 산꼭대기에서 차 마실 때는 언어가 없으니 나름 어색한 침묵. -영국 돌아와서도 이 친구랑은 연락을 하고 있다. 런던 오고 싶어하는데 너무 비싸단다. 비싸다.

9. 터키에 와서 가장 먼저 간 곳은 모던 아트 갤러리. 터키의 현대를 알고 싶었기 때문. 마침 과거와 미래전이 열리고 있었다. 지정학상 터키는,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유럽이라는 화두를 가지고 있던 나라. 예를 들어 1900년대 초에 터키 정부는 화가들을 프랑스에 유학 보냈고 그들은 인상주의 화풍을 가지고 터키로 돌아왔다. 터키 화가들의 인상주의 그림들을 보는 것은 묘한 느낌이었다. 

10. 터키의 과학사 박물관. 터키는 어마어마한 문화 유산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 자신의 문화 유산을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하고 있지 않나 하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한국과 비슷한 상황. 나로서는 Abu Zayd의 "Sustenance for Body and Soul"라는 의미심장한 서명을 알게 된 것이 큰 수확이라고 말하고 싶다.

11. 숙소가 탁심 광장에 있었는데 메이 데이때 경찰들이 광장을 봉쇄해 버렸다. 저녁때 숙소로 돌어가는 길을 경찰들이 막아서 안들여보내주었다. 관광객이니 보내달라 했지만 요지부동. 어떤 터키 아가씨가 관광객이니 보내주라고 언성을 높이는 것 같았고, 경찰 대장은 아무도 통과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 같았다. 뒤에서 사람들의 야유 소리. 결국 경찰 대장은 나에게 여권을 요구했다. 여권을 보여주고 나서 경찰들의 벽을 통과할 수 있었다. 사람들의 엄청난 환호와 박수를 받으며. 

12. 터키는 엄청나게 복잡한 나라다. 탁심 광장 시위도 한가지 잣대로 꿰어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방인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사람들이 박수 칠 때 같이 박수를 치고, 메이 데이 다음날 지하철 역 앞에서, 아마 사회주의 당원들이 팔던, 내가 읽지도 못하는 터키어 신문을 1리라에 사는 것 뿐이었다. 찻집에서 계산을 하는데, 테레비에서 경찰들이 시위하는 시민들을 강제 연행하는 장면이 나왔다. 그걸 지켜 보다가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사람들을 돌아보며 저것 좀 보라고 손짓을 했는데, 찻집에 앉아 있던 사람들도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테레비를 보고 있었다. 그 정도.

14. 내가 터키에 가서 비로서 알게 된 것은 터키가 이슬람 국가라는 것이었다. 정교 분리라고는 하지만 이슬람 복식을 한 여성들이 엄청 많았다. 이스탄불 교외로 가니 대부분의 여성들이 그런 복식이었다. 터키에 있는 동안 이슬람 사원들을 많이 방문했고, 기도도 많이 드렸다. 터키 사람들은 우리네와 거의 똑같은 방식으로 절을 한다. 높은 돔 천정 아래에서 숙연히 앉아 있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아마 상당 부분은 나의 늙음을 반영하는 것이었으리라.

15. 터키에서 터키 커피와 포트, 그리고 터키 차 컵, 컵받침, 차숫가락을 사왔다. 터키식 커피는 커피 가루를 포트에 넣고 끓여서 만든다. 이탈리아식 에스프레소처럼 깔끔하고 쫀든쫀득한 맛이 나는 것이 아니라 약간은 탕약같은 맛이 난다. 나는 터키식 커피에 스스로를 길들이려 하고 있다. 터키식 차는 차이라고 부른다. 홍차잎을 중탕으로 끓여낸다. 터키의 모든 사람들이 하루에도 수 없이 이 차이를 마신다. 술은 잘 안마신다. (나는 터키의 국부라는 아타튀르크가 즐겨 마셨다는 라끄라는 술을 숙소에서 혼자 마셔보았다. 무척 비싼 40도 짜리 독한 술이다. 그런데 맛있다.) 터키에서 사온 작고 투명한 컵에 차이를 만들어 마시면서 나는 "난 투르크화되었어"라고 중얼거리고는 한다.

16. 터키를 떠나면서 세파에게 1, 2년 후 다시 보자고 했다. 그러나 한 5년 정도 후에나 다시 갈 수 있겠거니 생각하고 있다. 한국에 돌아가기 전에 꼭 다시 한번 터키에 가보고 싶다. 이스탄불에는 거지도 많고, 교통도 최악으로 혼잡하고 곳곳에 삐끼도 많다. 그럼에도 나는 터키를 떠나면서, 내가 다시 올 때까지 터키가 그 순수함을 잃지 않았으면 하고 바랬다. 그러다 문득, 예전, 아주 예전에 어느 서양 사람이 한국에 똑같은 말을 하던 것을 테레비에서 본 기억이 났다. 그 사람은 한국인의 정, 순수함을 사랑하였던 것이겠지. 내가 지금 터키 사람들의 정에 반해서, 그것이 영원히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처럼. 5년 후에 터키는 많이 세련되고 좀 더 깍쟁이같은 나라가 되어 있을지 모르겠다. 작은 상점들은 죄 없어지고 큰 쇼핑몰이 들어설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슬람이라는 종교가 좀 더 힘을 발휘하여 사회의 진화를 늦출 지도 모르겠다. 난 단지 이방인일 뿐이고, 이방인의 바램이라는 것은 단 한 줌의 무게도 가지지 않는다. 터키 사람들은 스스로의 운명을 선택할 것이고 나는 그들의 선택을 긍정하면서 터키 사람들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17. 터키에 있으면서 나는 유럽이 지구상의 한 지역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아마 터키에 발을 들여놓아 본 사람이라면 내가 말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 것이다. 말로 하려면 한없이 길어질 것이기 때문에, 간단하게 이렇게만 말하자. 터키를 방문해 보세요! - 이 한 마디를 하고 싶어 포스팅~

(혹시 댓글이 있어도 대댓글을 달지는 않겠습니다. 침묵 중(?)인지라...) 

추) 어제 한국 친구들이 놀러왔다. 터키 차를 내어 놓고 터키 여행 이야기를 많이 했다. 나는 물론 터키에 대해 좋은 이야기만 했다. 그런데 친구들 말에 따르면 터키는 조심해야 할 나라란다. 몇 년 전에 한국 대학생들이 여럿 실종되기도 했다고 하고. 나는 순간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터키가 한국인에게 특히 친절한 나라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중 일부가 범죄로 이어진다면, 그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쉬운 타겟 아닌가! 내가 포스팅을 너무 무책임하게 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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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방송 비비씨의 아침 프로그램에서 세월호 사고 소식을 처음 들었었다. 배가 완전히 뒤집혔는데 사망자가 2명이라는소리에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저녁에 네이버에 들어가 보니 이삼백 명이 실종 상태라고...

비비씨와 시엔엔에서 계속 첫 소식으로 한국의 세월호 참사 소식을 알려줬다. 염려가 가득한 낮은 목소리로 소식을 전하는 기자들과 앵커들의 태도가 무척 고맙게 느껴졌다. 희생자 대부분이 어린 학생들이라는 것, 그리고 선장이 승객들에게는 객실에서 대기하라고 해놓고 자기들만 탈출했다는 사실은 이곳 사람들에게도 (당연히) 충격적인 일이다. 그럼에도 이곳 뉴스들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사태에 접근한다. 예를 들어 해난 사고의 전문가가 나와서 배가 침몰할 경우 선장이 최후까지 승객들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세월호 사고 당시 상황이 어떠했는지 아직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선장이 먼저 배를 떠난 것에 대한 비난을 유보한다는 식으로 말을 하곤 한다.

그러나 이곳 사람들은 세월호 사고에 대해 너무 많이 알고 있다. 예를 들어 한 친구는, "신고도 학부모가 먼저 했다면서?"라며 어이없어 하기도 한다. 

몇 칠 전엔 한국의 대통령이 세월호 선장등을 가리켜 살인자와 같다고 비판했다는 소식이 한동안 머리 기사였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놀랐었다. 행정부의 수장이 그런 사법적 판단을 언급해서는 안되기 때문이었다. 이곳 언론들도 한국의 대통령을 비꼬는데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대통령의 발언을 전하고 나서 바로 대통령이 비난의 화살을 선장에게 돌리고 있다고 코멘트하였다. 아마 이곳 사람들은 세월호 참사가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는지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기회였을 것이다. -승객들의 안전을 지켜야 할 선장도, 사태 수습의 최고 책임자도, 그 누구도 자기의 책임을 떠안으려 하지 않았다.

많은 뉴스를 통해 세월호 참사는 언제고 일어날 수 있었던 일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오래된 똥배고, 증축을 한 상태고, 화물 결박 장치가 비싸다고 제대로 구비되어 있지 않았고, 당시 운항을 하고 있던 기관사와 조타수가 초보급이고, 선장이 노령에 적은 돈을 받고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선장을 욕하고 있고, 또 그것이 응당한 일이긴 하지만 다른 한 켠으로 보면 선장을 이해할 만한 부분도 있는 것 같다. 운항때마다 심하게 흔들리고 화물 결박 장치도 제대로 구비되지 않은 똥배에 상당히 적은 연봉을 받는 상태에서 무한 책임을 지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저런 상태에서는 자신의 일에 자긍심을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런 물질적 조건이 구비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선의지만을, 의무만을 강요하는 사회처럼 나쁜 사회는 없을 것이다. 한 쪽에 일방적인 희생을 요구하면서 다른 한 쪽은 일방적 권리와 부를 누리는 상태에서라면 더더욱이 그럴 것이다. 세월호와 같은 똥배를 운항하도록 한 선사나 감독 기관등은 선장에게만 승객들의 생명에 대한 무한 책임을 지우고 자신들은 그 책임에서 쏙 빠져나와 돈을 긁어 모으고 있었을 것이다. 

두 가지 긍정적인 모습을 본다. 하나는 한국의 국민들이 한국이라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적나라하게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세월호를 작은 대한민국으로 인식한다. 위기 상태가 닥치면 자력구제 말고는 답이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다. 그것이 현재의 대한민국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나는 성장에 있어 자신에 대한 객관적 인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다른 하나는 이번 세월호 참사 때 학생들이 보여준 아름다운 모습이다. 결과적으로는 참사로 이어져 버렸지만, 어쨌든 대부분의 학생들이 위기 상황에서 침착하게 방송의 지시를 잘 따랐고, 일부 학생들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한국에 안좋은 일이 벌어질 때마다, 한국의 상황에 낙담할 때마다 나에게 희망을 주는 이들은 언제나 어린 세대였다. 이번에도 그렇다.

개인적으로는... 나는 요즘 스피노자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 사태가 벌어지고 나서 스피노자에 대해 잠깐 회의를 느껴었다. 자신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배를 먼저 떠난 선장은 스피노자주의자일지언정 칸트주의자일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희생적인 학생들(그리고 어른들)의 모습을 보면서 스피노자주의 안에서 이타주의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했었다. 이런 고민은 에티카 5P23에 대한 숙고로 이어졌고, 지금은 잘 해결된 것 같다고 느끼고 있다. 한국에서 벌어진 사태, 특히 한국의 어린 세대들의 의연한 모습에 자극되어 하나의 사고가 촉발되었다는 기록을 남기기 위해 여기 이렇게 포스팅을 한다. 이제 다시 침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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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4-04-24 0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의 의료계도 세월호의 모순을 닮아가고 있습니다. 한쪽은 일방적인 권리와 부를 다른 한쪽은 조건이 구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한책임을. - 한국 사회 전체가 (아니면 세계 전체가) 자본주의를 근간으로 한 신자유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한 단면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