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에디터를 이맥스로 바꾸었다. 안녕, JEdit. 제이에딧은 프래그래머용 에디터다. 그래서인지 들여쓰기에 문제가 있다. 문단 구별을 빈 줄로 할 때는 상관이 없었지만 이제는 들여쓰기를 사용해야만 한다. 이리 저리 해결을 찾아 보았지만 실패. Openoffice의 Writer를 시험해 보았만 나의 넷북에는 너무 무거웠다. 나는 끊임없이 Crtl + S를 누르는데 Writer의 반응은 두려울 정도로 느렸다. 결국 이맥스. 다이 하드.

2. 학원 가는 길. 나의 몸은, 마치 충직한 말처럼 등 위에 올라앉아 졸고 있는 주인을 목적지까지 무사히 데려다 주었다. 어느 역에선가 지하철을 갈아타 입구 바로 앞에 섰고 그 문이 열릴 때 내렸다. 발 가는 데로 걷다 문득 정신이 들어보니 지금 집에 가는 길인지 어디 가는 길인지 모르겠더라. 구내에 붙어 있는 안내표지판을 보니 나는 킹크로스를 향해 걷고 있었다. 그렇다면. 습관은 생존에 도움이 된다.

3. 소논문을 해결할 좋은 방법을 생각해 냈다. 이에 필요한 자료를 모으다 머리 안에 공동을 느껴 잠시 쉰다고 누운게 오늘 아침이다. 잘 잤다. 솔직히 이 소논문이 소용에 닿을지조차 나는 확신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 이것이 전부인양 붙들고 있다. 우습기도 하다. 그러나 분명한 건 이것이 전부인냥 붙들고 있지 않는다면 이 소논문은 결국 포기되고 말리라는 것이다. 소논문은 나의 충직한 말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그것의 충직한 말이 되어야 한다. 습관처럼 그것을 생각해야만 한다. 나는 그것을 뮤즈 여신의 왕림이라고 부른다.

4. 어제 기차 간에서 비트겐쉬타이의 노트북을 읽다가 다음과 같은 말을 발견했다. 웬지 나에게 힘을 주더라.

I am almost inclined to give up all my effo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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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념론... 물론 철학사적 의미로 하는 말은 아니다.

"It is indeed possible to make up words, but I cannot associate a thought with them."
                                                                    -비트겐쉬타인(현자와의 대화에서)

나는 전기 비트겐쉬타인에게서 이러한 얼굴을 더 일찍 발견했어야 했다!!!

(나는 5.542와 논고 초반부의 온톨로지에 대해 좀 더 깊이 있는 해석을 찾아야 한다. 답은 헤르쯔의 역학 모델에 있는 것 같다. -이렇게 기록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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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에 나의 소논문의 오류가 드러나고 있다. 총체적으로 말하자면 한정된 자료를 갖고 급히 써낸 글의 전형을 보고 있는 것 같다. 우길 수 있는 만큼은 논리가 선명하고 문헌 근거도 충분하다. 그러나 문제는 해답이 너무 쉬워 보인다는 것이다.

럿셀의 판단 이론-명제의 뜻-그림 이론으로 연결되는 구도는 맞다. 그러나 나는 그 과정에서 패러다임 간의 충돌을 과장했다. 그러므로 5.542에 대한 나의 해석은 너무 일방적인 것으로 보인다. 또 형이상학적 주체에 대한 강조도 과도하다. 분명한 것은, 비트겐쉬타인이 형이상학적 주체를 통해 논리 공간 개념을 도입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비트겐쉬타인은 논리 공간 개념을 형이상학적 주체(혹은 영원의 상 아래서 바라봄)와 연결시킴으로써 건축술적인 기교를 발휘한 것 뿐이다. -이런 장치에 속아넘어가는 사람을 무엇이라고 부르는가?

나는 비트겐쉬타인을 너무 관념적인 철학자로 만들어 버렸다. 너무 쉬운 해답을 고안한 철학자로 만들어 버렸다. 그 의미는 내가 그의 사고의 깊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리라. 그 징표를 나는 나의 소논문의 조잡함에서 발견한다. -기분 좋은 아침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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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다 썼다. 내가 생각하던 논리대로 글을 완결지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친구에게 프린트해 달라고 해서 첫 페이지를 읽어보고는 기분이 안좋아졌다. 엉망이었다. 참고 문헌을 이용할 시간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에 심히 불안해 졌다. 일단 다 썼다는 사실을 기록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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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에게 준 소논문 마감 시한이 오늘까지다. 그런데 아직도 500 단어 정도를 더 써야 한다. 오늘 안에 끝낼 수 있는 분량이기 때문에 오늘까지는 끝날 것 같다.

오늘 할 일은 논고의 초반부 존재론과 후반부 형이상학에 일관된 해석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명제가 뜻을 갖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밝히면 내가 할 일은 다 끝난다. 시작이 럿셀의 판단 이론이었으므로 마무리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

형이상학적 주체라는 개념은 명백히 쇼펜하우어적 영향 아래 윤리적 가치의 담지자로 비트겐쉬타인의 철학 안으로 유입되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이러한 동기와 이러한 유입은 마땅치 않아 보인다. 나는 형이상학적 주체라는 개념 아래, 말하자면 명제 이론적 주체가 포섭될 수 있을지를 탐색해 보았고 마침 문헌적 증거를 찾았다. 나는 이러한 관점(말하자면 세계관)이 물리학적 관점, 예를 들면 비트겐쉬타인이 자주 인용하는 헤르츠의 역학적 세계관과 융합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으며 그렇게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문득 쟁점이 옮겨짐을 느낀다. 나는 비트겐쉬타인이 자신의 철학적 정체성을 확립해 가는 과정을, 말하자면 럿셀식의 인식 주체-객체 구도에서 탈피하는 과정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이 과정을 19 세기 과학사의 한 논쟁의 연장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럿셀 철학의 가장 강력한 동기는 헤겔식 관념론에 대한 반발이었다. 과학사에서는 그러한 반발이 마흐에게서 발견된다. 둘의 성향과 관점은 다르지만 인식 대상(주로는 감각 자료) 위에 자신들의 전체 체계를 쌓아 올리려 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

마흐의 격한 경험론적 성향에 반대한 주요한 인사 중 하나가 헤르쯔인 것 같다. 마찬가지로 럿셀의 순진한 경험론에 진저리를 낸 사람이 바로 비트겐쉬타인일 것이다. 그렇게 헤르쯔와 비트겐쉬타인이 만나는 것 같다.

주체-객체의 구도는 이들에게 사라진다. 그 직접적인 귀결은 사고의 자율성이다. 우리는 우리자신에게 그림을 그릴 수 있다. 명제는 뜻을 가질 수 있다. 럿셀에게서 명제의 의미는 완전히 실재에 귀속된다. 그러나 비트겐쉬타인에 있어 명제는 완전한 의미에서 실재와 동등하다. 다만 실천에 있어 명제가 세계에 대한 그림이 될 수 있으려면 둘 사이에 어떤 공통적인 구조를 가져야 한다는 제한이 있을 뿐이다.

사고는 실재와 구별될 수 없다. 이것은 무슨 신비롭고 형이상학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그저 물리학이 전제하고 있는 세계가 그렇다. 모든 예술은 음악을 궁극으로 삼는다고 쇼펜하우어가 말했던가? 물리학은 마치 수학을 궁극으로 삼는 것 같다. 완전히 비물질적인 세계. 내 눈 앞의 이 사과보다 물리학자들이 말하는 그 원자들이 더 실재적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런 식의, 어떤 것이 더 실재적이냐는 질문은 시대착오적으로 무의미한 질문이다. 답을 한다면 종이 위에 적힌 수식 하나가 우주 전체만큼이나 실재적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아무런 환상이나 미신없이 이런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 우리는 그만큼 진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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