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학원 가는 데 기차가 연착해서 많이 지각을 했다. 집에 올때도 플랫폼마다 죄다 연착 사태였다. 어쨌든 나는 덕분에 7시 10분쯤에 워털루역에 도착해서 연착된 6시 50분 급행 차를 타고 집에 올 수 있었다(차는 7시 40분 가까이 되어서 출발했다). 차 안은 북새통이었지만 영국인들은 그런 사태에 익숙한 탓인지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다. 혹은 집에 도착해서야 짜증을 느낄지도~
영어 강사가 나의 작은 논문에 대해 아무 말도 안한다. 1). 내가 지각을 해서 화가 났다. 2). 아직 다 검토하지 못했다. 3). 그냥 넘어가려는 수작이다. 친구 말은 2번일 거란다. 하긴 분량이 그렇게 많은 줄은 몰랐을 거다. 그런데 친구 말이 원래는 강사들이 논문 교정 같은 거 절대로 안해 준단다. 이곳 사람들은 공사가 확실하니까. -암튼 오늘은 늦지 않게 집에서 일찍 출발할 생각이다.
소논문에 대해서는 거의 잊고 지내고 있다. 더 읽어보지도 않는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지도 않는다. 어느 정도는 내가 다루고 있는 주제에 대해 확신을 하고 있다. 확신의 계기는 구글 북스 등을 통해 비트겐쉬타인이 직접 "논고"의 이러 저러한 부분에 대해 해설한 것을 일부 읽었기 때문이다. 나의 논지는 "논고"와도 일치하고 비트겐쉬타인의 해설과도 일치한다. -현재는 이렇게 느끼고 있다.
잠깐 설명하면 이렇다. 비트겐쉬타인은 "노트북"에서 주-술 관계니 2항 관계니 하는 것은 없다고 말한다. 나는 비트겐쉬타인이 뭘 의도하는지 알 것 같다. 예를 들어 "this is white"는 주-술 관계로 이해된다. 그런데 이 명제는 'this is identical in colour with that"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때 that이 white 색상을 정의하는 것이라면 말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일항 관계니 이항 관계니 하는 것이 자의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럼 이런 명제들이 표현하는 사실들의 존재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을 수 밖에 없다.
비트겐쉬타인은, 그러므로, 이런 자의적인 명제 형태가 아닌 완전히 일반화될 수 있는 명제 형태를 찾게 된다. 그게 내가 보기에는 "논고"의 궁극적인 작업이다. 그 작업을 위해 선행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논고" 서두의 온톨로지다. "논고"의 나머지 부분은 이 작업의 단순 적용이다. 그 단순 적용의 예 중 하나가 5.542다. 이 명제는 정말로 단순하게 이해되어야 한다!
이것이 나의 "논고"에 대한 이해의 핵심이다. 재밌는 건 "this is white" 운운하는 예를 나는 럿셀의 책에서 찾았다는 것이다. 럿셀의 책("The philosophy of logical atomism")에 럿셀의 강의 중에 저런 질문들이 나온다. 럿셀은 이런 질문들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비트겐쉬타인은 심각하게 다룬 셈이고.
비트겐쉬타인이 "논고"에서 한 작업이 궁극적인 진리인지 아닌지는 나도 모른다. 물론 당연히 아닐 것이다. 비트겐쉬타인 스스로 자아 비판하고 있는 판이니까. 그럼에도 "논고"가 대단히 중요하고 어려운 지적 작업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은 틀림없다(럿셀의 말 그대로 말이다). 거기엔 하나의 사상이 완비된 상태로 체계화되어 있다. 마치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