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에프 케네디 공항에 내려서 숙소가 있는 브룩클린으로 택시를 타고 가면서 첫 번째로 느낀 것은 도로가 매우 지저분하다는 것이었다. 그닥 부유해 보이지 않는 동네들을 빠른 속도로 내달리다가, 저녁이 내리기 시작한 하늘 저편으로 맨하튼의 무수한 고층 빌딩군들이 눈에 들어왔을 때는, 어떤 기괴한 느낌, 비-현실적이라거나 초-현실적이라 할 수 있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압도적인 규모라니! "런던의 시티 빌딩들은 아기네, 아기."
다음날 아침, 맨하튼을 브룩클린 다리를 걸어서 건너가고 싶었다. 그러므로 숙소에서 브룩클린 다리까지 어떻게 갈 것인가가 문제였다. 심하게 관광객 티를 내면서 지도를 들고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누군가 차에서 경적을 울리며 물었다. "어디 가려고?" 미국 드라마 소프라노스의 등장 인물 중 하나처럼 생긴 아저씨였다. 브룩클린 다리까지 간다고 하고, 차비 등이 일사천리로 합의되었다.
기사 아저씨가 떠벌이였다. 지금은 휴가철이라 사람이 별로 없다. 곧 사람들이 직장으로, 학교로 돌아올 것이다. <스마일리의 사람들>의 첫 페이지가 떠올랐다. 여름의 열기를 피해 파리 사람들이 휴가를 떠나고 빈 곳을 가방을 멘 관광객들이 어슬렁거린다더니 우리가 그 꼴이었다. 기사 아저씨는 말을 계속 했다. 나는 자유롭다. 일하고 싶으면 하고, 하고 싶지 않으면 안한다. 누구도 내게 명령하지 않는다. 오직 나의 뇌만이 나에게 명령한다. 나는 뉴욕에서 태어났고 뉴욕을 사랑한다. 서울의 택시 기사님에게서 나는 서울을 사랑한다, 라는 말을 들을 수 있을까? 나는 놀랐고, 어쩌면 그때 미국이라는 나라의 이념성을 발견하였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중학교 때 윤리 선생님이 이야기한, "민주주의란 삶의 한 방식이다" 라는 말을 아직도 기억한다. 자유라는 이념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 예컨대 총기 소지의 자유에 대해서도?
맨하튼은 경이적인 곳이다. 남북으로 길게 늘어선 도로들(avenue라고 부른다)과 동서로 그것들을 관통하는 도로들(street)이 직조하고 있어서 눈에 띄는 자연물이 없음에도 길을 잃기 쉽지 않은 구조이다. 곳곳이 공사판이었는데, 역시나 공사가 끊이지 않던 서울이 생각났다. --- 더 이상 공사판이지 않는 도시는 죽어가는 도시라고 보면 될 테지? 사이먼 앤 가펑클의 노래 가사가 생각나서 59th 스트리트를 지도에서 찾아보았더니 센트럴 파크 쪽에서 시작하여 블루밍데일 백화점을 거쳐 맨하튼 동쪽 강까지 이어지는 길이었다. 따라 걸었는데 전혀 가사처럼 그루비해지지 않았다. 블루밍데일 근처도 온통 공사판이고, 온갖 도시의 소음에, 먼지에, 햇빛은 살인적으로 따가왔다. 블루밍데일에 에어컨 바람을 쐬러 들어가야 했다.
뉴욕에는 많은 노숙자들이 있다. 그들의 눈에서는, 마치 약을 먹은 것처럼, 아무 영혼을 느낄 수가 없었다. 모로코에서 본 많은 가난한 사람들의 그 눈빛과 같았는데, 그것을 뉴욕에서도 보게 된 것이다. 때로는 대낮에 넝마같은 외투를 입고 젖은 빨래처럼 길가에 널부러져 있는 사람도 있었다. 또, 쓰레기통을 뒤지는 사람도 있었다. 벌건 대낮에 소화전을 향해 고추를 내어놓고 오줌을 싸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흑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 사정이 이러므로 저 유명한 맨하튼에 대해 사유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맨하튼을 이루는 평면은 고저가 거의 없다. 말 그대로 평면이다. 내게는 이것이 미국적 삶의 형식성을 의미한다. --- 열흘도 안되는 관광을 다녀온 것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반면, 맨하튼을 수직으로 수놓는 고층 빌딩군들은 어떤가? 그것은 내게 압도적인 계급성으로 느껴질 수 밖에 없다. 예컨대, 누구나 몇 십 달러면 양키스 경기를 볼 수 있다. 양키스 셔츠를 입고, 아들, 딸, 또는 손녀, 손자까지 데리고 양키스 구장에 간다. 유치한 응원가에 맞춰 환호하고, 함께 입을 모아 상대팀을 조롱한다. 옆자리에 앉은 아무나와 너털거리며 손바닥을 마주치거나 포옹을 하기도 한다. 물론 관람석에는 비싼 곳도, 싼 곳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본질적인 것은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인종이건 성별이건, 심지어 세대 구분까지 포함하여 완전히 동등한 인간들이라는 것이다. 물론 사회를 이루며 사는 우리들은 경기장에 모인 사람들 사이와 같은 그런 외면적인 관계들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다. 만일, 우리의 관계가 그런 외면적인 관계들로만 구성되어 있다면, 저 초고층의 빌딩을 올린 사람은 참으로 기적을 행사한 것에 가까울 것이다. 그런데 미국 사람들은 그걸 믿는 것 같다. 저 초고층을 올린 사람은 그러므로 영웅이라 불리고, 아메리칸 드림의 구현자로 불린다. 저 대낮에 길거리에서 쓰러져 자는 사람들, 혹은 지하철 역 쓰레기를 뒤지는 사람은 자유의 한 양상일 뿐이다. 사회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개인적으로라면, 그 사람들은, 예컨대 30, 40년 전에 길거리에서 쓰러져 자는 것을 선택했을 뿐인 것이다.
나는 미국 사회의 원자성, 혹은 평면성과, 이 가공할 만한 계급성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확신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 원자성, 혹은 평면성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병적인 민감성을, 외부인으로서 느낄 수 있다고 믿는다. 예컨대, 뉴욕 지하철들은 하나같이 성조기를 달고 다닌다. 미국 영화에서는 뜬금없이 성조기가 펄럭이는 장면이 나온다. 뉴욕의 택시 기사는 뜬금없이 자신이 뉴욕과 자유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등등. 내가 보기에 이것들은 이념화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념화, 즉 내면화는 그것이 항상 외부에서 주어진 것임을 의식한다. 그 의식성이 제3자의 사람으로 하여금 거기에서 약간은 병적인 민감성을 느끼게 만든다고 나는 생각한다. 음... 이건 좀 심한 것 같은데... 이렇게 말이다. (<콰이어트>에서 읽은 것 같은데, 미국 사람들이 내향적 사람이나 내향적 태도에 대해 약간은 병적인 지적질을 마다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