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부자 감세로 한바탕 난리가 난 것은 전세계가 다 아는 일일 것이다. 영국의 총리나 재경부 장관은 그러한 정책들이 영국 경제의 성장을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영국 총리는 한술 더 떠서 "성장에 반대하는 연합 세력"과 맞서 싸워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갈수록 태산이다. 영국에서는 보수당이 너무 오래 집권하다보니, 또 직전 선거에서 사상 최대의 승리를 거두다 보니, 국민 여론은 안중에도 없는 것 같다. 이번 부자 감세 정책의 본질은 총리 경선에서 현 총리가 당선되도록 표를 몰아준 부자 원로에 대한 감사의 표시라고들 하는데, 뭐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아무 프로그램도 없이 내세운 "성장" 이라는 단어는 그러므로 이데올로기일 뿐인 것이다.


영국에서 브렉싯 당일 아침 발간된 "썬"이라는 대중, 황색 저널리즘 신문 헤드라인은 딱 세 단어였다. "이민자, 이민자, 이민자". 즉, 브렉싯 선거는 이민자 문제에 대한 선거라는 것이다. 브렉싯에 찬성하는 사람들의 상당 수는 이런 틀거리 안에서 자신의 의견을 정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브렉싯의 본질은 무엇인가? 내가 보기에는 유럽식 규제주의가 아니라 미국식 자유주의 시장 원리를 강화하자는 것이 그 골자이다. 어떤 사태를 한 두 개의 본질로 설명하는 것은 상당히 무리일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이 순간 마르크스주의의 진리성을 거부하기가 힘들다. 파운드화의 급락으로 숨고르기에 들어갔지만 영국 재경부의 애초 의도는 부자에게 세금을 깍아주고, 공공지출은 줄이는 것이었다. 그러면 가뜩이나 힘든 서민들은 더 힘들어지지 않겠는가? 그에 대한 영국 내각의 한 장관의 말은, 그렇게 힘들면 직업을 하나 더 가지면 되지 않는가? 하는 것이었다. --- 농담이 아니다.


지난 대선 운동 기간 나는 한국의 재경부가 방역 지원금이나 손실 보상금 등으로 재정을 확장하는 것에 적극 반대하는 것이 일견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재경부 입장에서는 재정건전성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큰 관심사일 터이니 말이다. 내가 보기에 지난 한국의 대선은 문재인이 재경부의 입장에 끌려다니는 것으로 결판이 난 것 같다.  그런데 요즘 보니 재경부의 최고 가치는 재정건전성 따위가 아닌 것 같다. 예컨대, 법인세 인하 등의 문제에 대해 한국의 재경부는 어떤 태도를 취했나? 즉슨, "재정건전성" 이란 말은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재경부가 돈을 쓰기 싫어하는 항목에 대해, 예컨대 일반 국민들에게 돈을 퍼주는 것에 대해, "그런 데에 돈을 쓰기 싫다" 라는 말을 "재정건전성이 위협을 받는다"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렇게 하면 부자들 세금을 깍아줄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자유라는 말은 멋진 말이다. 국가 단위에서 보면, 그것은 국가가 스스로에서 말미암게 된다는 것, 즉 독립한다는 것, 주권을 완전히 회복한다는 뜻이 될 것이다. 브렉싯 선거 기간 중 어떤 영국 서민 할머니는 이 자유와 독립으로 브렉싯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눈문을 흘렸다. 그런데 보자. 미국의 어떤 주에서는 한파가 몰아쳐서 전기고 가스고 다 끊겼다. 그러므로 지역에 고립된 사람들은 주정부나 중앙 정부의 긴급 대책을 간절히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에 짜증이 난 사람이 있었다. 바로 그 주의 주지사였다. 사람들이 스스로 나가서 땔감을 찾는다든지 하는 자구책을 강구하지 않고 정부만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에 한심함과 짜증을 느낀 것이다. 책임이라는 모랄 의식의 타락의 예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주의 시민들은 도덕적 각성을 추구하기보다는 엉뚱한 곳에 짜증을 낸 주지사를 사임하게 했다. 그 주지사의 짜증의 본질이 특정 모랄의 타락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도 분명하다. 주지사는 단지, 극빈층도 아니고, 장애를 가진 사람도 아닌, 사지 멀쩡한 일반 사람들을 돕고 싶지 않았던 것 뿐이다. 자기가 도울수록 사람들을 더 타락시킬 것이라는 자기기만 속에서. 자유라는 말은 멋진 말이고, 멋진 삶의 태도를 의미할 수 있다. 동시에 정부가 시민을 돕지 않으려 수작을 부릴 때 이데올로기로 사용될 수도 있다. 브렉싯은 기업에 규제를 풀어주고, 세금을 깍아주고, 일반 국민들은 웬만하면 스스로 알아서 살아라는 말로, 내가 보기에, 정리된다. 그러므로, 자유와 주권 독립과 브렉싯을 사랑하는 저 영국 서민 할머니는 보건소에 가서, 간호사가 없어서 텅빈 그 보건소가 자신의 선택의 결과였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물론 깨닫지 못할 것이다). (영국에는 엄청난 간호사 인력난이 현재 진행형이다. 엊그제 사상 처음으로 파업도 했다. 파업에 참여한 간호사들은 어떤 의미로 참 간호사라 할 수도 있다. 간호사 월급보다 마트 캐셔가 일도 더 편하고 벌이도 더 좋기 때문에 그쪽으로 전직하는 사람도 상당히 많다고 한다. 여튼 영국 정부의 입장에서는, 국립의료체계와 같은 '비생산적인 일'에 돈을 쓰고 싶지 않은 것이다.) 


우주론의 근원적 질문 중 하나는 우주가 영원히 팽창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적어도 우주의 특정 단위의 특정 시점에서는 팽창을 멈추고 있거나 수축에 돌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요컨대, 세계화로 요약되는 팽창의 시대는 이제 막을 내린 것 같다. 이러한 때에, 엊그제 영국 총리가 한 말, "이제 파이를 키워야 합니다" 는 얼마나 시대착오적인가? 이데올로기는 뭔가를 가리는 역할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기만이 가능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는 자기기만이라는 마술적인 힘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런 한에서 이데올로기는 거짓말, 위선 등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지금의 시대는, 매우 독특한 의미로 이데올로기의 종말 시대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주 수축의 여파로 어떤 이념이 이념 형태가 아닌 적나라한 현실 형태 그대로 노출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바이든의 미국을 보라. 자본주의, 자유 무역의 수호자인 척 하다가, 그네들이 그동안 떠벌린 이념에는 어떠한 필연성도 없었다는 것을, 단지 우발성이나 편의성이 적당히 포장된 채 선전되고 있었다는 것을 그들 스스로 만천하에,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 나는 항상 이것이 궁금했다. 미국 일방주의 세계 질서에서 중국이 두 번째 극으로 등장하는 체계로, 즉 이강 체계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세계사는 다시금 냉전적 시대로 갈까? 그렇게 가는 것이 필연적인가? 아니면 어떤 자유의 여지가 인간에게 남겨져 있을까? 여기서 변수는 지금이 수축의 시대라는 것이다. 그것이 상황을 호전시킬까, 아니면 더 암울하게 할까? 또 지금은 수축이 시대이기 때문에 이데올로기는 종말을 맞았다고 봐야 한다. 예컨대, 공산주의 대 자본주의의 대결 이런 것은 없다. 자본주의의 수장으로서의 미국의 정치적 지도력, 이런 것도 없다. 그냥 모두가 리얼리티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이데올로기의 종말이 세계사의 운동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너무 장황함을 인정한다. 급하게 쓰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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