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실체가 아니므로 지속적인 자기 동기화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끊임없는 모색. 내용에 대한, 그리고 방법에 대한. - 어쩌면 결국 같은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잘 할 수 없다고, 즉 나랑 잘 맞지 않는다고 결론내린 방법: 관련된 책 수십 권을 쌓아놓고 독파하고 노트하고... 등등 하면서 진행하는 것.


나는 문제 중심적인 사람이라는 것. 하나의 작은 주제가 걸리면 거기서 시작하고, 거기서 다른 작은 주제가 파생되면, 그 작은 주제를 다른 장으로 옮겨서 거기서 다시 파고들고... 그래서 이러 저러한 작은 주제들을 "병행적으로" 진행하는 방식이 나에게 맞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어쩌면 위험한 방식일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 배가 산으로 가는? 동시에, 어떤 방식이든 오랜 기간 하나의 주제에 주의를 집중하면서 자료를 모으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게 사고를 생산하게 한다는 점에서 다를 것이 없을 것이라는 기대. 끝까지 가봐야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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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지성개선론>을 막 읽고나서, 이 책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는지 궁금해졌다. 찾아보니 2020년에 스피노자 전문 연구자의 손으로  번역 출간된 것이 있었다. <지성교정론>이라는 제목이고 라틴어 대역본이고 기다란 해제를 달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판본을 구하고 싶어졌다. 한국 스피노자 연구의 현황, 수준(?), 그리고 나 자신의 이해를 확인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책값보다 비싼 배송료에 주저주저하면서도 책을 주문했다. 


나는 책이 오기 전에 내 나름의 <지성개선론 해제>를 써서 책의 해제와 비교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책은 일주일도 안되어 도착했고, 내 버전의 <해제>는 겨우 8 페이지 밖에 쓰지 못한 상태였다. (지금도 계속 쓰고는 있다. 지금은 19 페이지 정도를 썼다.) 


나는 한국어판 <지성개선론>에 만족했는가? 100% 만족했더라면 '페이퍼' 카테고리가 아니라 '리뷰' 카테고리에 이 책에 대한 감상을 썼을 것이다. 나는 내 나름의 좋은 번역과 좋은 해제에 대한 기준을 갖고 있다. 해제나 주석, 그리고 본문 번역이 그 책을 읽는데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가? 그렇다면 좋은 번역이고 좋은 해제이다. 그렇지 않다면, 번역의 노고를 치하하고 해당 책이 번역되었다는 사실에만 의의를 둘 뿐이다.  


독자가 저작을 읽는 데 도움이 되는 번역, 주석, 해제란 어떤 것인가? 한 마디로 말할 수 있다. 책의 가장 난해한 부분에 주의를 집중하여 그 부분을 쉽게 풀어주는 번역, 주석, 해제 등등이, 특히 철학서에 있어서는 좋은 번역, 주석, 해제이다. 아무런 강세없이, 혹은 질서 없이 온갖 정보를 풀어놓는 것은, 내 관점에서는 해제도 아니다. 단지 연구자의 연구 노트일 뿐이다. <지성개선론>의 경우 이 저작에 대한 이해에 핵심적인 것은 형상적 본질/객관적 본질이라는 개념쌍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고 본다. 나로서는 이 개념쌍 등에 대한 역자의 접근 방법에 도저히 만족할 수 없었다. (이렇게 강하게 말하는 이유는 역자가 번역어로 선택한 '표상적 본질'이라는 단어는, 내가 보기에는 이 판본을 <지성개선론>의 한국어판 표준 번역으로 내세울 수 없게 할 정도로 치명적인 오류라고 보기 때문이다.)      


(서명의 '개선론'이냐 '교정론'이냐는 내 관점에서는 별로 중요한 논제가 아닌 것 같다. 급한 것도 아니고. 그래서 기존에 불리던 방식대로 그냥 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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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만 던져놓고 아무 것도 실행한 것은 없기 때문에 이런 말을 또 하는 것도 우습지만, 여튼 스피노자에 대한 책을 한 권 쓰자고 맘을 먹고 천천히 작업을 하는 중이다. 작년 11월 경에, 어떤 계기였는지 모르겠지만 스피노자에 대한 책을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말하면, 스피노자에 대한 수 많은 책들이 아직 하지 않은 스피노자에 대한 이야기가 남아 있다고 느꼈다. 반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는, 그리 흉하지 않은 전체 그림이 어느 정도 구체성을 갖춰가고 있는 것 같다. 지금 생각대로라면 첫 장은, 스피노자의 죽음과 영국의 시인 셸리의 익사를 병치시키는 것으로 시작할 것 같다. 앞으로 일년 반을 첫 번째 데드라인으로, 그로부터 육개월을 마지막 데드라인으로 설정해 두고 있다.    


아래는 한국의 김해에서 공장 노동자로 일할 때 일요일마다 김해 도서관에 가서 읽었던, 컬리 번역의 스피노자 전집에 한 낙서이다. 비위가 약하므로 그것들을 다시 읽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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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쌍의 한국인 부부가 함께 프랑스 여행을 다녀왔다. 이렇게 함께 놀러 다닌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 집이 숙소 예약, 비용 정산 등 모든 잡다한 일을 도맡았고, 다른 한 집은 테슬라 차로 여행 내내 운전을 했고, 다른 한 집은 엘에이 갈비 두 팩을 산 것 말고는 몸만 따라다녔다. 물론 이 마지막 집이 우리 부부다.


첫째 날. 해저 터널로 영국에서 프랑스로 넘어갔다. 루앙을 경우했는데, 잔 다르크와 관련 있는 곳 등등을 돌아봤다. 숙소에 도착해보니 숙소가 너무도 아름답고 좋았다. 숙박비는 놀랍도록 쌌다.


둘째 날. 모네의 집에 갔다. 유명한 호수 정원이 있는 곳. 아름다웠다. 모네가 모아놓은 작품들 중 일본 민화 작품들과 세잔의 작품들이 눈에 들어왔다. 일본의 화가 호쿠사이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프랑스 여행을 마치고 나는 친일파가 되었다.)


셋째 날. 고흐가 마지막까지 살던 동네에 갔다. 그가 묵었던 숙소와, 그와 그의 동생 테오의 무덤까지를 돌아보았다. 솔직히 나는 고흐의 작품들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의 인생 이야기는 언제나 사람을 울린다. 처절히 고뇌했고 투쟁하다 산화한 사람... 


농반진반으로 나중에 더 늙으면 스페인이나 포루투갈에 세 부부가 함께 집을 사자고 얘기하곤 한다. 그런데 나는 그런 경우라면 프랑스에 집을 사자라는 주의다. 이번에 프랑스를 둘러보면서 느낌을 좀 보자 했다. 사실 프랑스를 다녀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프랑스 사람들에 대해 불평을 하곤 했다. 그런데 이번 프랑스 여행에서 우리가 만난 프랑스 사람들은 모두 너무 너무 친절하고 좋았다. 나의 친불주의는 강화되었다. 


숙소 정원 한 가운데로 꽤 큰 개천이 흐른다. 딸기와, 마트에서 산 달팽이, 그리고 와인으로 분위기를 즐겼다.


숙소. 


모네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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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척 아이가 입대를 하여 군에 가 있다. 제대하기 전에 뭔가 소포로 보내주고 싶어 생각하다 최병현 교수의 <징비록> 영역본이 떠올랐다. 지난 번 한국에 갔을 때 이 친구가 <사기 열전>을 읽고 있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독학으로 피아노와 기타를 익힌 친구이기도 해서, 지금 전공은 전혀 다른 것을 하고 있지만, 국학에 딱 맞는 재질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 풍진 세상에 태어나서 세속에 휩쓸리지 않고 살 수 있는 훌륭한 방도 중의 하나가 고전 학자가 되는 것이라고 나는 늘 생각해왔다. 더구나, 유럽의 도시 곳곳에 한국 가게들이 우후죽순격으로 생기는 이 한류의 시대에, 한국학이란 무한한 가능성의 영역 아닌가? 물론 이 의도를 그 친구에게는 꼭꼭 가리고 있어야만 할 것이다. 


<징비록> 영역본이 어제 도착해서 오늘 아침에 이리 저리 둘러 보았다. 그러다 한국학 주제로 영어로 출간된 책들이 꽤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쪽 영역이 아직 미개발지라고 생각하여 징징대곤 했었는데 순간 창피해졌다. 그렇게 알게 된 저자 중 미국에서 주로 활동하는 한국미술사학자 김성림 교수의 책 하나를 주문했다. 조선 후기 미술을 주제로 하고 있다. 다음 주 중에 올 것 같다. 개요를 잠깐 읽었는데 흥미로왔다. 조선 후기는 흥미로운 시대다. 적당한 단어가 없으므로 그 시대를 세속화의 시대라고 칭하도록 하자. 초기 자본주의적 경향이 나타난 시기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시대에는 상승하는, 도드라지는 사람들의 무리, 즉 계급이 나타나야 하는데, 조선에서는 중인이 그 역할을 맡았다. 중인은 스스로를 표현한다. 혹은 이렇게 저렇게 표현된 것들을 총칭하여 중인이라 한다. 그 표현된 영역 중 하나가 예술이다. 내가 이해하기로 김성림 교수는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조선 후기의 미술, 그 미술의 대상들을 다루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이야기를 듣자 마자 네덜란드 황금 시대의 네덜란드 미술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김성림 교수가 그 시기 네덜란드 미술에 대해서도 언급할지 어떨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한국을 모르는 제삼자에 있어 저 책이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부분이 바로 이러한 것이다. 즉, 조선 후기 미술이 전체사라 불릴 수 있는 공간의 일정한 곳에 좌표지어져서 다른 문화권의 미술과 비교될 수 있고, 그 일반성과 독특성이 아울러 평가될 수 있다는 바로 그 가능성 말이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그 전체사라는 공간은, 근대화, 세속화, 자본주의화 등등으로 특징지워질 수 있을 것이지만, 본질은 그 안에 일정한 단절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일 것이다. 여튼 나는 시원한 한줄기 바람을 맛본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 라는 갑갑하고 상투적이고 게으른 말에 만족해서는 절대 안될 것이다.  


아래는 유튭에서 찾은 김성림 교수의 인터뷰다. 같은 인터뷰를 하나는 1분 짜리로 짧게, 다른 하나는 십 여분 이상으로 길게 편집해 놓았다. (김성림 교수의 책에 대해서는 알라딘에 검색하니, 아마 책거리 전시 도록만을 판매하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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