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집공사를 하고 있다. 빌더들 일은 내일로 끝날 예정이고, 페인트 등 남은 부분은 우리가 해야 한다. 크리스마스 전까지, 늦어도 새해가 오기 전까지 끝내는 게 목표다.
(돈이 모자라므로 벽지 뜯는 작업같은 것은 우리가 직접 하기로 했다. 사진 속의 인물은 내가 아니다.)
(업자들의 작업 종료 예정일 하루 전 상태. 그러니까 오늘 우리 집 상태.)
사진에서 보다시피 부엌 유닛이 컨트리하다. 다른 한국 분들 집에 초대받아 가서, 그분들 부엌 해놓은 것을 보면 대부분 '모던'하던데, 우리는 그냥 컨트리하게 살기로 했다. 집의 형태 자체가 올드 패션이기 때문에 그에 맞추기로 한 것이다. 여기에 모던을 섞으면 이상할 것 같으니까.
그래 놓고 보니 신포도에 대해 생각을 해보게 되더라. 모던이란 무엇인가? 가능한 한 곡선을 지우고, 장식적인 요소들을 배제해서 사물을 순전히 그 기능으로 환원시키고자 하는 것. 이런 의미에서 보면 아파트는 모던의 대표적인 예이다. 더 크게 말하자면 모던이란 현대적 삶, 현대적 인간에 대한 정의일 것이다. 예를 들면, 현대적 공산품이 그러하듯, 우리들 자신도 언제나 대체가능하다는, 즉 잠재적 잉여라는 저변의 의식, 의미는 항상 기능 너머에서 찾아지므로, 현대적 삶에서 삶의 의미는 항상 삶 그 밖에서 찾아진다는 것 등등... 비극은 아니지만 종종 코메디로 느껴지는 것들... (예를 들면 다음 일화. 어느 금융인이 은퇴하여 휴양지 해변에서 바다를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근처 옆에 어떤 꾀죄죄한 남자가 누워 똑같이 바다를 즐기고 있었다. 은퇴한 금융인이 어이가 없어 한 마디 했다. "당신은 왜 그렇게 게으름을 피우는 거요? 젊었을 때 열심히 벌어야 나처럼 일찍 은퇴하여 늙어서 여유를 즐길 수 있을 텐데!" 그러자 그 남자가 대꾸했다. "내가 지금 뭐 하는 걸로 보이요?" 아무렴, 스피노자처럼 영원의 상에서 바라보는 사람에게 우리의 삶이란 그저 인간 희극일 뿐...)
집 컨셉에 맞는 물건들을 찾아보자 해서 안틱 마켓에 갔다. 어마 어마하게 많은 물건에 어마 어마하게 많은 사람들. 거기에 우리에겐 너무 비싼 가격. 스탠드 하나가 마음에 들었다. 하단이 무겁게 되어 있어서 안정감이 있고 디자인도 심플하고... 그러나 너무 비싸서 포기해야 했다. 수십년 전 공산품의 품질과 센스...
사르트르에 따르면 인간존재의 기획의 근본적인 성격은 소유 욕망이라는 것이다. 그의 이론의 윤리적 전망은 크게 봐서 2500년 전 고타마와 다를 바가 없다. 고타마는 출가 후 아마 평생 한 벌의 옷만 지녔을 것이다. 사르트르는 인기 작가답게 많은 돈을 벌었지만 번 돈을 주변 사람들에게 후하게 나눠줬다고 한다. 아파트에서만 살았고, 개인 소유물은 거의 없이, 책도 읽고 나면 다 나눠 줬다고... 모던에 대처하는 사르트르의 방법이라고 해야 할까? 고타마가 현대에 살았다면? 그는 유마 대사가 되어야 했을까? 아마 이들의 공통점으로, 이들은 소진되지 않는 뭔가, 말하자면 자기 중심이라든지 하는 것을 갖고 있었으리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런 한에서 물질은, 혹은 외부적인 것은, 혹은 우연성에 속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으리... 그러나 공평하게 말하면 이러한 '경계 없음'은 경계 없음, 즉 어떤 뛰어넘음, 혹은 성취라기보다는 성격일 수도 있으려니...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는 어디로 향하고 있으며, 지금 어디쯤에 있는지? (아마 실존주의자들의 실책은 우리 주변의 사물을 사물로 보았다는 것일 수도 있겠다. 사물이 의미를 가지려면 우리가 그것에 의미를 부여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내 앞의 꽃에, 아름다움, 연약함, 평화 등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진정 나인가? 그러한 의미는 꽃이 나에게 강제하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예컨대, 집은 실증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어떤 물질적 실체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혹은 실존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나라는 존재의 의미가 반영된, 나의 한 연장도 아니다. 아마 그것은 성장하고 쇠약해지기도 하는, 요구하기도 하고 야단하기도 하는, 말하자면 숨을 쉬는 어떤 것일 수도 있다. 옛날 사람들이 물건에도 귀신이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물론 사물에 어떤 생명성 같은 것을 상정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아마 그것은 하나의 태도일 것이며, 세계관일 것이다. 물론 세계관은 우연성에 불과한 것 아니냐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다시금 실존주의자들의 실책을 되풀이 하는 것 아닌가, 라는. 그러나 문제는, 적어도 내게는 이 우연성 너머로 나가는 길이 있을지가 매우 의심스럽다는 것. 어쨌든, 가든의 부름에 내가 응한다는 것과 가든과 나의 관계가 '그것은 나의 것'이라는 관계 이상일 수 있다는 것은 모순이 아닐 것이다. --이는 자아에 대한 문제이고, 동양 종교들의 주된 주제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자아란 존재치 않는다는 진실을 살 수 있는가?)
아마 이 모든 잡상의 근원에는 시간이라는 것이 놓여 있을 것이다. 나는 가볍게 살고 싶다고 말해왔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딱 두 세대가 90년 가까이 살던, 크고 아름다운 가든이 딸린 집이 우리 집이 되었다. 나는 이 집의 이름을, 이 가든을 아름답게 가꾼 할머니의 이름을 따서 "쉴라스 가든"이라고 부를 생각이다(아직 팻말을 만들지는 않았다). 이때 내 앞에 놓이게 되는 사상은 "연속성"이라는 것이다. 즉, 나는 연속성 안에서 나를 파악해야 한다는 강제를 느낀다. 모든 종교는, 내게는 연속성에 대한 사상으로 보인다. 그리고 모던은 비연속성의 삶의 태도라고 본다. 비연속성, 예컨대, 이전 사용자와 현재 사용자 사이에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도록 하는 것, 이전 사용자의 사용 양태가 나의 사용 양태에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못하도록 장치를 강구하는 것, 그것이 내가 보기에 모던적인 삶이다. 이런 의미에서 적어도 후기 이전의 푸코는 모던의 사상가이다. 무엇보다도 현대 철학자, 사상가들은 대부분 비연속성의 사상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아마도 모던의 삶에 편안해 할 것이다. 내 생각에, 흔히 말하는 포스트 모던이란, 모던의 극단으로 보인다. 모던에 대한 모던적 사고 = 포스트 모던. 그러나, 이렇게 부를 수 있다면,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비연속성을 믿는 것 같지 않다. 아이가 있고 집이 있고, 부모님이 있다. 사상가들은 이런 요소들을 고려에 잘 넣지 않는다. 이런 부분에 삶의 의미를 두려는 보통 사람들의 태도를, 철학자들은 자기기만의 일종으로 폄하하려 한다. 현대적 철학자들이 틀렸다고만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 그 이상을 보려는 노력도 필요할 것 같다. 모던 이후를 사고한다는 것은 연속성에 대해 사고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연속성에 대한 사고가 모던 이전과 같은 양상일 수 없으리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어떤 양상인가? 답은 이미 나와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