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분과의 대화. 영원히 살 수 있다면 어떨까? 나. 건강과 지력 등이 유지된다고 한다면 나쁠 것 없을 것 같다. 그. 정말? 난 정말 끔찍할 것 같은데! 나는 그가 몸서리를 치면서 혐오를 표하는 것을 보고, 그가 지금 과장을 하고 있거나, 자신의 현재 삶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겠거니 하는 생각을 했다. 


죽음은 우리에게 그냥 주어지는 우연성에 속한다. 그리하여 나는 진정으로 죽음을 실감하지는 못한다. 예컨대, 나는 나의 나이 먹음을 실감할 수 없다. 나는 나의 나이 먹음을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보이는 반응을 통해서 느끼게 된다. 그리고 나는 나의 나이 먹음을 연기하게 된다. 죽음도 꼭 마찬가지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죽음은 우리가 삶에서 이루어 놓은 것을 대부분 무효화시킨다. 이런 관점에서라면 나의 모든 행위들은 무의미하다. 그것은 곧 무효화될 것이므로. 그러나 어쨌든 우리는 계속 삶을 살아간다. 어떤 철학자는 그것은 우리가 죽음을 은폐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죽음이란 실감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사르트르)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스티브 잡스는 인간의 유한성에서 매우 참신한 생각을 해냈다. 만일 인간이 영원히 살 수 있다면 일에는 우선순위가 없을 것이며, 이 일은 해도, 안해도 그만이 될 것이며, 그러므로 어떤 일을 한다는 것의 독자성, 고유성은 사라져 버릴 것이라는 것이다. 유한성 속에서 선택된 것만이 의미를 갖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인간이 영원히 살 수 있다면, 그 역시 인간에게 우연성으로 주어지게 될 것이다. 즉, 인간의 삶이 유한하든, 무한하든, 그러한 것은 인간에게 실감이 될 수 없으리라는 것이다. 인간은 그저 살아가게 될 것이다.


내가 교사라면 내가 교사의 역을 연기하는 것은 실천적 의의를 갖는다. 예컨대, 학생들에게 숙제를 시킬 수 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해 사고하는 것은 거의 아무런 실천적 의의를 갖지 않는다. 그것은 대부분의 상황에서 무의미하다.


그러므로 공자님이, 군자는 죽음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진리에 적중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존 스타인벡의 "에덴의 동쪽" 마지막 페이지들에는 놀라운 이야기들이 그려져 있다. 90이 넘은 중국 노인들이 구약 성경을 읽기 위해 히브리 언어를 붓으로 그리며 배우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보통 놀라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 연세에, 차라리 다른 걸 하시는 게... 그러나 다른 어떤 것을? 그리고 왜 하필 그것을? 이 중국 노인들의 위대한 점은 죽음이 실감되지 않는 것이라는 점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분들은 90 노인 역을 연기하지 않는다. 


나는 죽음에 대한 동양적 사고에 대해 그 분에게 이야기했지만, 뜻밖에도 그 분은 죽음의 현전, 유일신 개념 등이 심오한 사고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동양적 사고가 실제적인 의의를 갖고 있을 수는 있지만 또한 뭔가를 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말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서구 중심주의라는 푯말을 붙여놓기 좋은 주장임에는 분명하다(터키 출신이다). --어쨌든 이제는 동양 중심주의라는 말도 나올 때가 되었으므로.


철학이 대단한 무언가를 전해 줄 수는 없다. 철학은 단지 정돈할 뿐이다. 우리는, 그래 그것이 맞다, 라고 느낄 수 있다. 그때 철학은 지혜에 속해 있던 것을 다시 진술한 것의 모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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