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메모에서 시간 간격이 꽤 있다. 집 공사를 하느라 정신이 없고(아직도 완료되지 않았다), 이 주제가 너무 크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주관성의 실질이 무엇인가? 자아인가? (물론 오늘날 누구도 이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철학사적으로는 칸트-흄, 더 아래로 내려오면 후설-사르트르의 논쟁이 이 주제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이것들을 다시 차분히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 일은 너무 지루하다. 비슷한 길을 좀 더 재미있게 걸을 수도 있지 않을까?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자아에 대한 사르트르의 착상의 근원에는 흄이 있다. 들뢰즈의 경우는, 사르트르의 자아 이론에서 시작한 것이 분명하지만 흄까지 소급하여 들어가서 흄에서 다시 시작한다. 두 개의 계열을 그릴 수 있겠다. 흄-사르트르, 흄-(니체)-들뢰즈. 그리하여 문제를 이렇게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사르트르와 들뢰즈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아마 대단히 큰 일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요 몇 칠 집중적으로는 아니어도 조금 조금씩 들뢰즈 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를 읽고 있다. 이렇게 화려하고 시원한 철학책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아주 옛날에 읽었던 니체의 "선악의 피안을 넘어서"를 제외하면?).
들뢰즈 가타리의 책은 종합의 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식상한 표현이지만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를 종합하려 하고 있으므로. 또, 분열적인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서두의 그 유명한 귀절에서 알 수 있듯이 분열증적인, 분열자의 긍정적 관점 하에서 전체 기획이 수행되고 있으므로. 그리고 서문에서 푸코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윤리적인, 실천적인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분열자의 긍정적 관점을 실천 요강으로 내세우고 있으므로.
내가 관심을 갖는 부분은 그 실천적 부분과 존재론 사이의 관계이다. 예를 들어 사르트르에게는 몸이 근원적 우연성으로 주어진다. 그리고 인간실재의 기획의 대상은, 이러 저러한 사물 대상이 아니라 인간실재의 존재 그 자체가 된다. 다시 말하면 사르트르는 자아 이전의 비인격적 장에서 출발하면서도 개체성, 총체성의 방향으로 사고하는 것이다(사르트르적 관점에 따르자면 개체성은 없어서는 안되는 것, 즉 주어진 것이고, 총체성은 있을 수 밖에 없는 것, 즉 사실적 필연성이라는 것이다).
들뢰즈 가타리는 훨씬 더 급진적이다. 기계라는 개념은 우주의 모든 것을 동질화시키는 것 같다. 모든 것이 기계이다. 나의 손도, 저 태양도. 흐름이 있고, 흐름을 이어 주는, 흐름을 발생시키는, 흐름을 끊는 기계들, 그 기계들의 단속적 연결들만이 있을 뿐이다. 개체성도 총체성도 없다. 아니, 그러한 것들은 환상으로만 존재할 뿐이다(엄격히는 환상 역시 실재라고 할 수 있지만).
매우 흥미있는 모델지만 즉각 드는 생각은, 그것은 마치 튜링 머신처럼 매우 추상적인 사고방식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각 층위에서의 자율성을 믿는다. 예를 들면 물리적 층위와 생물학적 층위에서는 다른 법칙들이 등장하며 이들은 환원불가능하다고 믿는다(원자단을 들여다 보는 물리학자들이 진화론을 발견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들뢰즈 가타리의 책은 논증적이라기보다는 선언적으로 읽힌다(혹, 푸코가 서문에서 이 점을 지적한 것은 아니었는지?). 논리적 간격은 선언으로 밖에 매울 수 없으므로.
정리하자면 내가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비인격적 장의 환원 불가능한 부분을 어디까지 잡아야 하는가 하는 것과, 그러한 존재론적 단위가 실천적 차원과 어떤 관계에 놓이는가 하는 것이다. 구체적 예를 들어보면, 예컨대, 원시 사회가 고대 국가로 접어들 때, 혹은 현대의 우리 시대에 있어서도 일정 조건이 충족되면 사회는 끊임없이 위계화, 관료화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은 데, 이러한 현상을 사유하는 기본 틀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힘인가, 욕망인가, 혹은 희소성인가? 그리고 이러한 항들은 주관성을 어떤 것으로 암시하고 있는가?
당분간 들뢰즈 가타리를 읽게 될 것 같고, 덕분에 존재론-인식론적 차원에서, 말하자면 사회 존재론적 차원으로 관점이 순식간에 이동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