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창 밖을 보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영국에서는 날씨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어짜피 비가 좀 오다 바람이 좀 불다 햇볕이 좀 나다... 할 테니까. 언제나 그렇듯이.

시내로 나갔다. 비가 가랑비 수준은 충분히 넘는 데도 우산을 쓴 사람이 별로 없다. 비를 피하느라 서둘러 걷는 사람도 없다. 나와 내 친구는 우산을 받쳐 들고 토요일 오후를 여유롭게 걸었다. 

이탈리아식 카페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나는 에소프레소를 시켜 놓고 조금 긴장했다. 에소프레소 본고장의 맛은 어떠할까? 내 온 몸의 세포에 자극을 주는 깊고 강한 맛일 거야. 그런데 첫 모금을 넘기는 순간 조금 실망스러웠다. 향미는 독특했지만 강한 느낌은 없었다. "나도 타락했나 보다. 커피를 마시면서 맛을 논하고, 하루에 십여 잔씩 마셔대던 믹스 커피는 쳐다도 안보고..." 그렇지만 맘 속으로 커피는 이탈리아 가서 먹어봐야 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근처 쇼핑가로 아이패드를 사러 갔다. 토요일이니 차로 사람으로 온 거리가 북적였다. 애플 매장에 갔더니 손님 반 점원 반이다. 아이패드를 만져 보았다. 생각보다 좀 무겁고 좀 버벅댄다는 느낌이었다. 해상도는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가격이 한국 것보다 조금 비쌌다. 한국에서 사갖고 올 걸... 하고 후회를 했다. 결국은 샀다. 사면서 약간 죄책감이 들었다. 없어도 좋을 물건이긴 했으니까...-.-  

집에 돌아와서 모모노트, pdf notes 등 몇 가지 앱을 설치했다. 총 앱 구매액이 1 달러가 조금 안되었다(자막 나오는 TED 앱만 유료였다. 내가 고대하던 아이패드용 텍스트 에디터 앱은 아직 개발 중이란다). pdf 논문을 하나 시험 삼아 읽으면서 밑줄을 치고 메모를 달아 보았다. 좋군. 과소비를 조금은 정당화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마음이 편해졌다. 나는 책이나 논문을 읽으면서 많은 곳에 밑 줄을 치고 많은 곳에 주석을 달고, 노트에 옮겨 적고 코멘트를 적고는 한다. 아이패드를 이용하면 이러한 작업을 더 효율적으로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한국에서 한글 자판이 있는 블루투스 키보드를 사갖고 왔다^^)

나는 이맥스라는 매우 유서 깊은 통합 환경을 경험해 보았었다. 이맥스 안에서 사람들은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글을 쓰고, 게임을 하고, 서핑을 하고, 이메일을 쓰고, 블로그 포스팅을 하고, 일정을 관리하고 등등을 한다. 나는 아이패드가 현대판 이맥스같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둘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즉, 이맥스는 본질적으로 개발 환경인 반면, 아이패드는 소비 환경이다. 그럼에도 둘은 모두 플랫폼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이 두 플랫폼에서 돌아가는 프로그램들은 대체로 특정 사용 목적에 맞게 간소화된 것들이다(즉, 범용적인 것이 아니다). 랩탑이나 데스크탑이 좀 더 범용적이라면, 이맥스나 아이패드는 좀 더 개인적이다. 그것은 노트나 일기장에 좀 더 가깝다. 

나는 아이패드를 앞에 두고, 아서 클라크의 "스페이스 오딧세이"에 나오는 별의 아이처럼, 이제 뭐 하지 하며 명상을 한다. 무엇이든!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는 많이 쓸 것이다. 나는 이렇게 명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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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 왔다. 날씨는 한국과 별로 다르지 않다. 그러나 낮게 떠 있는 구름은 한국에서 보던 풍경이 아니다. 8시가 넘었는데도 그리 어둡지 않다.


첫 음식으로 피쉬 앤 칲스를 먹었다. 이번만 먹고 끊어야지. 피쉬 앤 칲스는 기름에 물고기와 감자를 통째로 튀겨낸 것이다. 결코 몸에 좋을 리가 없을 것이다.


식사를 마치고 커피를 먹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문을 열어 보니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예쁜 아가씨가 웃고 있다. 옆 집에 사는 데 내 소포를 맡아 놓고 있단다. 한국에서 책 한 박스를 부쳤었다. 그 친구가 내 책 박스를 들어 올리려 허리를 굽힌다. "어, 무거울 텐데!" "아주, 아주 무겁네요." 그 친구네 집 안으로 들어가 책 박스를 들고 나왔다.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굿나잇" "해브 어 굿나잇"


한국에서 막 영국에 도착한 차였다. 작은 문화적 충격을 느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한국에서라면, 배달원이 다세대 주택자에게 이웃 집 소포를 맡기지 않으리라. 다세대 주택자도 짐을 맡으려 하지 않으리라. 기꺼이(함부로) 이웃 집 문을 두드릴 사람도 없으리라. 문을 두드리고 용건을 말하고 소포를 건네주는 그 모든 과정에 미소와 여유가 함께 하지 않으리라. 한국인의 입장에서 봤을 때 그 아가씨는 아주 순진한 사람인 것이다.


한국인은 대단히 가족지향적이다. 가족은 한국인의 행동과, 같은 말이지만, 사고의 가장 강력한 기반이다. 그리고 "남"이란 직접적이고 지속적인 대면 접촉에 의해 맺어진 관계 너머에 있는 사람이다. 한국인은 "남"과 관계를 형성하는 별개의 방법을 계발하지 않았다. 나의 어머니, 혹은 여동생, 혹은 남편, 혹은 자식과 내가 맺은 관계를 "남"에 투사할 수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남"이란 아무 것도 아니거나, 나에게 잠재적인 위협을 주는 무엇일 뿐이다. 한국인의 이런 윤리관은 요즘 같이 사회가 흉흉할 때 더욱 커다란 실용적 가치를 갖는다. 그러나 그 실용적 가치의 이면은 각박함이다. 나는 영국 아가씨의 순진함에서 한국의 각박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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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12-04-28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합니다. 저는 도시에서 당연하게 생각되었던 것들이 알고보니 각박한 것이었구나..라는 걸 시골 고향에 내려와서 알게 된 게 많아요. 제 가게에는 손님들이 맡겨달라는 짐들이 여기저기 쌓여있구요. 택배기사가 손님 부탁으로 가게에 택배를 맡기기도 하지요. 그래서 누구 짐인지 모르고 맡는 경우도 생기더라구요. 정이 담뿍담뿍 느껴지는 그런 시골정취인데요.

그러나, 시골은 도시의 각박함과 달리 '정'으로 인해 생기는 과도함이 때론 당황스럽기도 해요. 시골 인정과는 다른 그 무엇 말이죠. 이 정체에 대해 의아함이 많은데요. weekly님 글을 읽고나니 가족지향적, '남'이란 존재에 대한 이해부족이 그 원인일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드네요.


첫 댓글인데요. 영국에서 같은 페이퍼를 읽고 있다 생각하니 왠지 노마드적인 느낌이.. ^^ 반갑습니다.

weekly 2012-04-29 11:27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여기 영국은 새벽 세 시가 넘었네요. 제가 시차적응을 못하고 있어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이란 절대적으로 긍정적인 단어였던 것 같아요. 그런데 요즘엔 슬슬 다른 목소리도 나오고 있는 것 같네요. 저도, 달사르님도 그런 소수(!)에 속하는 것 같습니다...^^

잉크냄새 2012-04-28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저도 한국이 아닌 중국에 살다보니 그런 면들을 비교해 생각해보게 되곤 합니다.
외국에 있다보면 한국 사회가 참 폐쇄적이란 생각이 듭니다. 한국의 독특한 문화인 "정"도 폐쇄적인 사회에서 파생된 하나의 독특한 문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그걸 글로 설명하기도 참 난해하네요.

weekly 2012-04-29 12:01   좋아요 0 | URL
예, 안녕하세요.
저도 듣고 겪고 하다보니 한국 사회가 참 폐쇄적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어제가 토요일이라 근처에 있는 쇼핑가에 갔었는데 사람들의 복장이 죄다 수수하고 실용적이었습니다. 바지는 거의 다 청바지고요. 한국인들의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타인을 함부러 판단하는 태도도 그 폐쇄성에서 파생된 것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못하고 우리/남으로 나누어 대하는 태도가 폐쇄성일 것이니, "남"은 경계, 경쟁, 처세의 대상인 경우가 왕왕 있을 테니까요. 긍정적인 측면도 있겠지만 그 폐쇄성이 과도한 스트레스를 강요한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서울이다. 비가 무지하게 내린다. 한국의 봄 날씨가 이랬던가?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내일 영국으로 출국한다. 영국에서 아내와 합류하게 된다. 아직 진학 문제는 매듭짓지 못했다.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종로 경찰서에서 운전경력 증명서를 떼고 맞은 편 스타벅스에 커피를 마시러 갔다. 카드 잔액이 아직 남아 있어 비워 버릴 생각이었다. 평소와 같이 에스프레소 더블을 시켰다. 보너스 샷을 주더라. "스타일이 바뀌셨네요?" 하며 카페 직원이 웃는다. 머리 관리하기가 귀찮아 머리를 볶아 버린 차였다. "괜찮아 보여요?" 나도 웃으며 커피를 받아들고 창가쪽 탁자로 갔다. 선 채로 천천히 커피를 마셨다. 컵을 반납하고 카페를 나섰다. 당분간 이 곳에 다시 올 일은 없겠지. 빗발은 조금 가늘어진 것 같았다.


귀국해서 한동안 폭풍과 같은 시간들을 보냈다. 나는 집중을 해야 했다. 노트북을 들고 스타벅스에 가서 퍼스널 스테이트먼트를 썼다. 첫날 오전에 절반을 썼고, 다음날 오전에 나머지 절반을 써서 더블 스페이스로 3 페이지가 조금 넘는 퍼스널 스테이트먼트를 완성했다. 오전 일을 마치고 햇살이 쏟아지는 도로를 흐뭇한 마음으로 걷던 기억이 행복처럼 떠오른다. 이런 기적이 계속되기를... 나는 그때 이렇게 소망했었지.


"공부할 마음이 확고하다면 적절한 좋은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대학 때 나를 가르치셨던 교수님께서 해주신 말씀이다. 나의 마음은 확고하고 나의 미래는 완전히 열려 있다. 나는 뾰족한 바늘 위에 서 있는 것 같다. 어느 쪽으로든 떨어지겠지. 어느 쪽일런지는 현재로부터 완전히 가려져 있다. 과연 어느 쪽일까? 어쨌든 내일 출국하는 것만큼은 확실히 결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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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박이일로 지방을 돌았다. 버스와 기차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이 많았다. 인터넷 연결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서핑 대신 아이폰에서 모모노트로 메모를 작성하거나 영어 단어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서울에 돌아와서 인터넷이 가능한 카페에 앉아 메모들을 모모노트 사이트 상에서 노트북으로 편집했다. 전문용어로(?) 모모노트는 심리스하고 트랜스페어런트한 환경을 제공해 준다. 여행 기간 동안 꽤 두터운 단어 책을 절반 가량 독파한 걸 보니 흐뭇해졌다. 여행 때 영어 단어 책을 읽는 것보다 머리에 부하를 덜 주면서 생산성있는 일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ps. 4/23 첫 단락 삭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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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욱 지음의 "윤이상"을 읽었다. 드라마틱한 인물이다. 서양의 현대성과 동양의 전통성이 거기서 만난다. 한국의 각박한 정치 현실과 현대 음악의 추상성이 거기서 만난다. 박정희 군사 정권에 고문당하여 피폐해진 몸으로 차가운 형무소 바닥에 엎드려 고대의 장자에게서 아이디어를 얻은 희극 오페라 "나비의 미망인"을 쓰고 있는 윤이상을 상상해 보라.

예전에 윤이상의 흔적을 찾아 통영에 갔었다. 상시적으로 국제 음악회가 열리는 음악당 길 맞은 편에는 철공소들이 줄지어 있었다. 기묘한 부조화지만 윤이상의 존재 이상으로 역설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윤이상의 음악은 어렵다. 어디서 숨을 죽여야 하고 어디서 풀어야 할지 모르겠다. 멜로디도 화성도 리듬도 없고 길고 불안하게 이어지는 음향만 있는 것 같다. 내가 그 문법을 알지 못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것이 한국의 전통적인 무엇에 관한 것인지, 아니면 현대 음악의 무엇에 관한 것인지도 나는 모른다. 그러나 무지를 부끄러워 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좋은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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