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 왔다. 날씨는 한국과 별로 다르지 않다. 그러나 낮게 떠 있는 구름은 한국에서 보던 풍경이 아니다. 8시가 넘었는데도 그리 어둡지 않다.


첫 음식으로 피쉬 앤 칲스를 먹었다. 이번만 먹고 끊어야지. 피쉬 앤 칲스는 기름에 물고기와 감자를 통째로 튀겨낸 것이다. 결코 몸에 좋을 리가 없을 것이다.


식사를 마치고 커피를 먹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문을 열어 보니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예쁜 아가씨가 웃고 있다. 옆 집에 사는 데 내 소포를 맡아 놓고 있단다. 한국에서 책 한 박스를 부쳤었다. 그 친구가 내 책 박스를 들어 올리려 허리를 굽힌다. "어, 무거울 텐데!" "아주, 아주 무겁네요." 그 친구네 집 안으로 들어가 책 박스를 들고 나왔다.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굿나잇" "해브 어 굿나잇"


한국에서 막 영국에 도착한 차였다. 작은 문화적 충격을 느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한국에서라면, 배달원이 다세대 주택자에게 이웃 집 소포를 맡기지 않으리라. 다세대 주택자도 짐을 맡으려 하지 않으리라. 기꺼이(함부로) 이웃 집 문을 두드릴 사람도 없으리라. 문을 두드리고 용건을 말하고 소포를 건네주는 그 모든 과정에 미소와 여유가 함께 하지 않으리라. 한국인의 입장에서 봤을 때 그 아가씨는 아주 순진한 사람인 것이다.


한국인은 대단히 가족지향적이다. 가족은 한국인의 행동과, 같은 말이지만, 사고의 가장 강력한 기반이다. 그리고 "남"이란 직접적이고 지속적인 대면 접촉에 의해 맺어진 관계 너머에 있는 사람이다. 한국인은 "남"과 관계를 형성하는 별개의 방법을 계발하지 않았다. 나의 어머니, 혹은 여동생, 혹은 남편, 혹은 자식과 내가 맺은 관계를 "남"에 투사할 수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남"이란 아무 것도 아니거나, 나에게 잠재적인 위협을 주는 무엇일 뿐이다. 한국인의 이런 윤리관은 요즘 같이 사회가 흉흉할 때 더욱 커다란 실용적 가치를 갖는다. 그러나 그 실용적 가치의 이면은 각박함이다. 나는 영국 아가씨의 순진함에서 한국의 각박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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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12-04-28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합니다. 저는 도시에서 당연하게 생각되었던 것들이 알고보니 각박한 것이었구나..라는 걸 시골 고향에 내려와서 알게 된 게 많아요. 제 가게에는 손님들이 맡겨달라는 짐들이 여기저기 쌓여있구요. 택배기사가 손님 부탁으로 가게에 택배를 맡기기도 하지요. 그래서 누구 짐인지 모르고 맡는 경우도 생기더라구요. 정이 담뿍담뿍 느껴지는 그런 시골정취인데요.

그러나, 시골은 도시의 각박함과 달리 '정'으로 인해 생기는 과도함이 때론 당황스럽기도 해요. 시골 인정과는 다른 그 무엇 말이죠. 이 정체에 대해 의아함이 많은데요. weekly님 글을 읽고나니 가족지향적, '남'이란 존재에 대한 이해부족이 그 원인일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드네요.


첫 댓글인데요. 영국에서 같은 페이퍼를 읽고 있다 생각하니 왠지 노마드적인 느낌이.. ^^ 반갑습니다.

weekly 2012-04-29 11:27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여기 영국은 새벽 세 시가 넘었네요. 제가 시차적응을 못하고 있어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이란 절대적으로 긍정적인 단어였던 것 같아요. 그런데 요즘엔 슬슬 다른 목소리도 나오고 있는 것 같네요. 저도, 달사르님도 그런 소수(!)에 속하는 것 같습니다...^^

잉크냄새 2012-04-28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저도 한국이 아닌 중국에 살다보니 그런 면들을 비교해 생각해보게 되곤 합니다.
외국에 있다보면 한국 사회가 참 폐쇄적이란 생각이 듭니다. 한국의 독특한 문화인 "정"도 폐쇄적인 사회에서 파생된 하나의 독특한 문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그걸 글로 설명하기도 참 난해하네요.

weekly 2012-04-29 12:01   좋아요 0 | URL
예, 안녕하세요.
저도 듣고 겪고 하다보니 한국 사회가 참 폐쇄적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어제가 토요일이라 근처에 있는 쇼핑가에 갔었는데 사람들의 복장이 죄다 수수하고 실용적이었습니다. 바지는 거의 다 청바지고요. 한국인들의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타인을 함부러 판단하는 태도도 그 폐쇄성에서 파생된 것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못하고 우리/남으로 나누어 대하는 태도가 폐쇄성일 것이니, "남"은 경계, 경쟁, 처세의 대상인 경우가 왕왕 있을 테니까요. 긍정적인 측면도 있겠지만 그 폐쇄성이 과도한 스트레스를 강요한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