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에 대한 하이데거의 강의록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했고, 다음과 같은 말이 그 마지막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었다. 


"... one can trust Kant fully. In Kant as in no other thinker one has the immediate certainty that he does not cheat. And the most monstrous danger in philosophy consists in cheating, because all efforts do not have the massive character of a natural scientific experiment or that of an historical source. But where the greatest danger of cheating is, there is also the ultimate possibility for the genuineness of thinking and questioning. The meaning of doing philosophy consists in awakening the need for this genuineness and in keeping it awake." 


여기에 복잡한 말을 얹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예컨대, 자기 기만과 같은 현상이 없지 않다는 것을 모르지 않지만 지금 어떤 절대적 의미에서의 믿음에 대해 논하고 있는 것은 아니니까. 하이데거가 말하고 있는 것은 철학함에 있어 어떤 기준점일 것이다. 깊이와 담백함. 깊이와 담백함이 꼭 같이 가는 것은 아니지만, 깊이가 없는 담백함이란 적어도 철학함에 있어서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리라. 여튼 하이데거는 이를 솔직함이라는 한 마디로 표현하고 있다. 이때의 솔직함이란, 사태가 너무도 복잡하여 거짓으로 꾸며 말하나 솔직하게 말하나 누구 하나 눈치 챌 수 없는 상황에서도 솔직함을 유지하는 것을 뜻할 것이다. 칸트가 그런 철학자에 속한다는 점에 나도 동의한다. 그럼 하이데거는 어떠한가? 그와 당대의 사람 중에는 그를 속을 모르겠는 사람, 심지어는 음흉한 사람으로까지 치부하는 이까지 있었다. 그의 그러한 성격이 그의 철학에 반영되지 않을 방법은 없을 것이다. 더구나 나는 그의 철학에 그리 동정적이지도 않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성격적 결함과 스타일상의 허세, 혹은 과장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에게서 어떤 담백함, 물론 깊이가 수반되는 담백함을 발견한다. 그것이 그를 거듭 거듭 읽게 만든다. 


매우 가문 2022년의 여름에 내가 주로 어떤 책들을 읽고 있었나를 나중에 기억하기 위해 이렇게 적어둔다. 내가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두 명의 철학자, 하이데거와 모한티의 책들을 주로 읽고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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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김정희 기념관에서 산 세한도 다포. 애초부터 다포로 쓸 일은 없을 것 같았지만 종이보다는 오래 가겠지 싶어 그냥 다포로 샀다. 어디다 쓸까 하다가 책장에 휘장처럼 걸어놓고 있다. 글쎄... 나의 정신 세계(그런 것이 있다면!)의 어떤 상태같은 것을 이 그림이 반영하고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왜 샀을까... 이 위화감을 어찌 할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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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만이었고, 아마 이만한 기간 동안 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한국이 아니라 나 자신일 것이다. 어느 곳을 가든 누추한 곳이 없을 정도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모습에... 흠 이렇게 말해도 될런지... 나는 어느새 지루함을 느끼고 있었다. 송광사에서 지눌의 '진심직설'을 샀고, 제주 김정희 유배관에서 세한도 다포도 샀지만... 영국 집에 돌아오자마자 이런 고도로 형식화한 물건들에 살짝 정이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형식화에 이미 지쳐버렸는데 고도로 형식화한 것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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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이기상이 번역한 하이데거의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라는 책을 펴보았는데 그 안에 책갈피처럼, 대학 때 들었던 김태경 교수님의 플라톤, 혹은 그리스 철학에 대한 강의 노트 한 페이지가 끼워져 있었다. 나도 처음 보는 것인데, 어쨌든 내용이 나쁘지 않아 기록 삼아 올려 놓는다. (저기 노트된 것이 진짜로 다 강의된 것인지는 나도 확신할 수 없다. 이런 의심을 하는 이유는, 아랫 부분의 내용은 내가 기억하기로 거스리의 <희랍 철학사>에 나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김태경 교수님의 강의를 노트하다가, 내가 그 책에서 읽은 부분을 함부로 (즉, 출전 표시 없이) 뒤섞어 놓은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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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마르크스가 그랬다던가, "나이가 들어가면 사람이 유해진다고 하던데, 그게 맞는 소리인가?" 마르크스가 자신의 말을 긍정하고 있는 것인지, 부정하고 있는 것인지, 혹은 그것에 당혹해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나도 어제 아내에게 비슷한 소리를 했다가, 내가 나이가 들면서 유해진 것인지 어떤지 확정할 수 없어서 작은 당혹에 빠졌었으니까... 어쨌든 내 말의 의도는 이랬다. 예컨대, 나는 예전에 뮤지컬을 가장 저열한 예술 쟝르라고 생각했다. 스펙타클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예술이므로. 그래서 그동안 보았던 위키드, 레미제라블, 파우스트 등등은 내게 죄다 시간 낭비이자 돈낭비에 불과했다. 지금 나는 내가 그런 고정관념에 빠져 있었다는 점을 아쉬워 한다. 그냥 마음을 열어 놓고 즐기면 되었을 일을... 이런 강박을 찾으려면, 슬프게도, 너무 많다. 예를 들면, 모로코 여행 같을 때, 그곳 사람들에게 당하지 않으려고 자신을 너무 꽁꽁 싸맸었다든지 등등... 


하이데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철학의 희화화를 경계한다. 즉, 그 말장난을. 나는 하이데거를 서양 철학사에 대한 가장 탁월한 교사라고 생각하지만, 그의 후기 저작들에 대해서는, 그것들을 읽어보지도 않고, 말장난일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었다. 사르트르적 의미에서 말하는 코기토를, 혹은 어떤 경험적 기초를, 혹은 여하한의 검증 방법을 떠나 있는 영역(흔히, transcendental하다고 하는) 주변에선 무성한 말들이 자유방임적으로 자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나름 꼼꼼하게 하이데거를 읽으면서(<예술 작품의 기원>), 나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고 있다고 느낀다. 그것은 사실 <존재와 시간>과 단절적으로 놓여 있지 않다. 똑같은 관점에서 보면서 다른 강조점을 주고 있을 뿐이다. 그 둘 사이에 연속성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나는 하이데거의 이 작품을 이해할 수 있다고 느낀다. 내가 배운 것은 기술description에 절대적 가치를 두는 것이 우둔한 방법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내가 고집하던 또 하나의 편견이 스그러져 가는 것 같다. 


경험의 확장은 시간 속에서 벌어진다. 그래서, 이제 나도 나이를 먹어서... 라는 말과, 좀 더 경험을 해보니... 라는 말이 비슷한 용례로 쓰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 관건은, 이런 평균적인 의미에서의 시간과 전혀 다른 데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열려있음'이라는 말로 잘 표현될 것이다. 아이는 가장 잘 열려있다. 그러므로, 어쩌면 나이가 듦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아이의 시간성으로의 회귀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운명이라는 것은 (내가 과거의 나에 대해 한탄하는 것은 운명의 흔한 에피소드이다), 바로 그 열림과 닫힘의 변증법적 운동을 지시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아마 그 상대적으로 견고한 닫힘 속에 놓여있음을, 생물학적 죽음 등과 상관없이, 우리는 죽음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까뮈는 <패스트>라는 책에서, 아침마다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어떤 노인에 대해 기술한다. 그리고 묻는다. 그는 성인일까? 이 질문은 까뮈를 당혹케 하고 독자를 당혹케 한다. 아마 우리는 이제 이렇게 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지 않아, 성인은 살아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니까. 우리는 지금 객관적인, 평균적인 시간성과 전혀 다른 의미에서의 시간성이라는 개념 위에서 이런 잡담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쉽게 영원에 대한 논의로 이끌어져 들어가게 된다. 영원이란 삶이고 열려있음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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