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아담슨의 철학사 시리즈(a history of philosophy without any gaps) 중 이슬람 철학사와 인도 철학사를 읽었다. 처음엔 이슬람 철학사만 읽으려 했는데 인도 철학사까지 읽게 되었고, 이제는 고전 그리스 철학부터 죽 읽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분량이 적지 않으므로 여기서 멈추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독이고 있다. (알라딘을 검색해 보니 철학사 첫 권이 분권으로 한국어 출간되어 있다. 그런데 품절이란다.)


저자는 아마도 중세 이전 서양 철학사와 이슬람 철학사가 전문 영역인 것 같다. 그렇다는 것은 서양 중세 철학도 그의 영역 안에 이미 들어와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또 인도 철학까지 섭렵할 수 있었을까? 그의 철학사를 읽으면서 내내 경이감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면서 혹 중국 철학사까지 가능할까 하는 기대감도 가져보게 된다. 빈틈 없는 철학사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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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일요일 점심 때 동네 근처 오데온 극장에서 듄 파트 투를 봤다. 몇 년 전에 같은 곳에서 파트 원을 봤었다.


파트 투가 더 좋다는 사람이 많지만 나는 파트 원을 더 좋게 보는 소수파에 속하는 것 같다. 나는 캐릭터에 대한 탐구를 더 좋아한다. 그래서 빌드업에 아낌없이 시간을 투자하는 작품들을 좋아한다. 듄 파트 원이 그런 영화였고, 드라마 시리즈로 보자면 와이어, 마인드헌터, 베터 콜 사울 등이 그런 작품이었던 것 같다.


소설을 아직 읽지 않았지만 여기 저기 귀동냥으로 대충 내용은 알고 있다. 내 생각에 지금은 21세기이기 때문에 원작을 준용하는 방식으로 3부가 마무리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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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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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저자가 쓴 최근작들을 읽고 싶어 책꽂이를 기웃거리다가 <니체의 인생강의>, <초인수업> 두 권을 집어들었다. 선물받은 책들이다. 금방 다 읽었다.


그저께 한국인 친구들이 집에 놀러왔다가 커피 테이블 아래 놓인 그 책들을 발견했다.

"한국어 책을 읽은지 오래 되었는데 이 책들은 어때요?"

나는 부정적 평가를 하는데 익숙하지 않아 좀 머뭇거렸다.

"여러 모로 실망스러운 책들이었네요."

"그러니까요...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갈피를 잡기가 힘들어요. 그래서 안읽게 되고요..."

"그래서 고전을 읽는 것이 제일 안전하다고들 하지요."

나는 커피 테이블 아래 놓여있는 <괴테와의 대화>를 가리켰다. 그러나 그 책의 과도한 두툼함으로 책에 대한 대화는 거기서 끝이 나고 말았다.


나는 저 두 책에 대해 부정적 품평을 한 것이 마음에 걸려서 알라딘 리뷰들을 찾아보았다. 한없이 5에 가까운 4.5의 평점들을 받고 있었다. 이 정도면 마음껏 슬퍼해도 되리라. 나는 슬펐다.


저 책을 쓴 저자들은 수십 년 동안 니체를 연구하고 번역한 전문 연구자들이다. 그들의 생산품에 저 고투의 시간이 반영되어 있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 결과물이란, 어떤 독자가 1시간 30분 만에 읽어내었다 할 정도의 깊이를 가진, 문자 그대로 얄팍한 처세술 책이었다. 오해하지 말자. 저 책들이 처세술 책이어서 슬펐다는 것이 아니다. 수십 년의 연구와 고투가 저런 얄팍함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사실에 슬퍼진 것이다. 


좀 더 독해져볼까? 니체에 따르면 바퀴벌레도 인간의 성장에 기여할 수 있다고 한다. 백번 맞는 말이다. 슬퍼진 나는 곧장 내가 (진지하게) 읽은 유일한 니체의 책, 거의 모든 문장에 연필로, 볼펜으로, 파란색으로, 까만 색으로, 빨간 색으로 줄이 그어져 있는 니체의 책, <선악을 넘어서>를 펼쳐들었다. 읽을 때마다 이 책은 충격을 주고, 화나게 하고, 멈추어 생각하게 한다. 니체 스스로의 말 그대로 이 책은 피로 쓰여져있다. 영혼과 영혼이 대화하게끔 강제한다. 그리고 다시 확인했다. 바퀴벌레도, 똥도, 간질도 인간을 성장하게 한다는 니체의 말은 무조건 옳다는 것을. 저 책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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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를 위하여
루이 알튀세르 지음, 서관모 옮김 / 후마니타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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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읽은 저자들 중 가장 크게 공감을 하며 읽었다. 정치하고 분석적이고... 


물론 정세적인 부분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구소련의 독재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성격이 만천하에 까발려졌고, 구소련에서 나온 이론들의 교조주의는 도저히 시대를 따라갈 수 없었고, 마르크스의 초기 저작들이 발굴되면서 인간화된, 혹은 알뛰세의 관점에서는, 부르주아화 된 마르크스주의가 독자를 얻고 있었고 등등.  


이에 대해 알뛰세는 인식론적 단절이니, 이데올로기와 과학의 구분이니 하는 장치들을 사용해서 실존주의적 마르크스, 헤겔주의적 마르크스, 경제주의적 마르크스 등등에서 진정한 마르크스를 떼어 놓으려 한다. 알뛰세가 이러한 작업에서 성공했는가의 여부에 대해서는 독자마다 판단이 다르겠지만 나로서는 그리 설득력을 느낄 수 없었다. 


게다가, 정세에 이끌려서이겠지만 알뛰세는 헤겔 해석에 있어 매우 폭력적이다. 예컨대, 누구나 헤겔의 성취라고 알고 있는, 우리의 인식에 직접 주어지는 것은 결코 단순체가 아니라는 이론을 알뛰세는 헤겔에게서 빼앗아 마르크스에게 주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이러한 오류들은 용서될 수 있다고 본다. 당대성에 깊이 연루되어 있는 저작들은 이런 종류의 오류들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괴테의 말처럼 고투하는 자들은 실수를 하기 마련이다. 


나에게 이 저작의 고전적 풍모는 그 총체화의 시도에 있다. 그러므로, 내가 보기에 알뛰세는 마르크스와 더불어 헤겔의 탁월한 제자이다. 즉, 알뛰세는 헤겔을 빛나게 한다.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하여"에서 다뤄지고 있는 모순의 중층결정에 대한 이론은 탁월하다고 본다. 그러나 헤겔도, 마르크스도, 알뛰세도 그 기제에 대해서는 설득력 있는 답을 내놓지 않는다. 엥겔스가, 다른 맥락에서이긴 하지만, 답을 시도했다. 그러나 알뛰세는 엥겔스의 그런 시도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엥겔스의 이론이 매우 엉성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적어도 엥겔스는 답을 하려고 노력은 했다. 알뛰세는 마르크스의 권위 뒤에 숨어 자신만의 대안을 제시하는 것을 회피한다. 알뛰세의 날카로운 지성에 감탄하며 책을 읽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회피 때문에 알뛰세의 지성을 의심하게 되지는 않는다. 아마 그것은 그가 당 이론가이기 때문에 취할 수 밖에 없는 수동적 태도의 결과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총체화의 철학은 곧 구체성의 철학이다. 이 테제는 영원하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그 구성에 구멍이 있다. 알뛰세는 거기 구멍이 있음을 의도하지 않은 방식으로 보여준다. 그러므로 고전 작가답게 하나의 문제성을 생산한다. 우리는 아직 그 문제성에서 놓여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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