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유튭 채널에서 2023년에 함께 읽을, 즉 혼자 읽기에는 좀 버겨운, 책들 리스트를 소개하는 걸 봤는데 나도 따라 읽으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은 그 채널에서 소개해 준 책들이다. 

전쟁과 평화.

카라마조프 형제들.

올란도.

알리스 먼로의 단편들.

반지의 제왕.

몽테 크리스토 백작.

투명인간.

제인 에어.

실락원.

그라버티즈 레인보우. (토마스 핀천)


(리스트 중 셋은 이미 읽은 것이다. 다시 읽으면 감상이 새로울까? 얼마전에 톨스토이의 부활을 다시 읽었다. 중학교때 읽고 얼마만인지... 다시 읽고 보니 내가 기억하고 있고 느꼈던 그대로 였다. 물론, 처음 읽었을 때의 그 충격을 다시 느끼지는 않았다. 사실주의에 익숙해져 있을 나이이므로.)


(찾아보니 벼룩 시장에서 사놓은 전쟁과 평화가 집에 있긴 하다. 그런데 900여 페이지로 만들려 해서 그런지 활자가 너무 작다. 아마 1400 페이지 짜리 문고본을 사게 될 것 같다. 이런 데서도 노안을 의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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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3-01-30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부활을 작년엔가 처음 읽었는데, 정말 좋았습니다! 톨스토이...명불허전이더라구요~~ㅎ 전쟁과평화도 사서 대기해 놓고 있습니다. 안나 카레리나도 읽어야하는데...읽을 책이 워낙 많아서요..ㅎㅎ

개인적으론 부차티의 <타타르인의 사막>이 정말 좋았습니다. 지금까지 읽었던 세계문학 중 제겐 원탑에 꼽을만했습니다..^^

weekly 2023-01-31 04:23   좋아요 0 | URL
아, 이렇게 또 리스트가 느네요.:)
전쟁과 평화를 시작했는데, 읽고 있던 레미제라블은 아직 끝이 보이지 않아서, 일단 레미제라블을 끝내야 하나 하고 생각하던 차였습니다. 타타르인의 사막이 그렇게 좋다고요? 흠...

yamoo 2023-01-31 09:51   좋아요 0 | URL
네...실존에 대한 고민을 조금이라도 했던 사람이라면 부차티의 작품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거라 확신합니다. 모든 문학작품을 통털어 제겐 부차티와 안나 제거스는 탑5에 꼽는 대문호라 생각해요...저도 하도 좋다길래 읽었는데....남들 좋다고 해서 내가 좋은 경우는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와 부차티의 <타타르인의 사막> 등 손에 꼽을 정도로 적습니다. 근데 그게 정말 대박이었다는 거에요..ㅎㅎ
 

영국에서 부자 감세로 한바탕 난리가 난 것은 전세계가 다 아는 일일 것이다. 영국의 총리나 재경부 장관은 그러한 정책들이 영국 경제의 성장을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영국 총리는 한술 더 떠서 "성장에 반대하는 연합 세력"과 맞서 싸워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갈수록 태산이다. 영국에서는 보수당이 너무 오래 집권하다보니, 또 직전 선거에서 사상 최대의 승리를 거두다 보니, 국민 여론은 안중에도 없는 것 같다. 이번 부자 감세 정책의 본질은 총리 경선에서 현 총리가 당선되도록 표를 몰아준 부자 원로에 대한 감사의 표시라고들 하는데, 뭐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아무 프로그램도 없이 내세운 "성장" 이라는 단어는 그러므로 이데올로기일 뿐인 것이다.


영국에서 브렉싯 당일 아침 발간된 "썬"이라는 대중, 황색 저널리즘 신문 헤드라인은 딱 세 단어였다. "이민자, 이민자, 이민자". 즉, 브렉싯 선거는 이민자 문제에 대한 선거라는 것이다. 브렉싯에 찬성하는 사람들의 상당 수는 이런 틀거리 안에서 자신의 의견을 정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브렉싯의 본질은 무엇인가? 내가 보기에는 유럽식 규제주의가 아니라 미국식 자유주의 시장 원리를 강화하자는 것이 그 골자이다. 어떤 사태를 한 두 개의 본질로 설명하는 것은 상당히 무리일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이 순간 마르크스주의의 진리성을 거부하기가 힘들다. 파운드화의 급락으로 숨고르기에 들어갔지만 영국 재경부의 애초 의도는 부자에게 세금을 깍아주고, 공공지출은 줄이는 것이었다. 그러면 가뜩이나 힘든 서민들은 더 힘들어지지 않겠는가? 그에 대한 영국 내각의 한 장관의 말은, 그렇게 힘들면 직업을 하나 더 가지면 되지 않는가? 하는 것이었다. --- 농담이 아니다.


지난 대선 운동 기간 나는 한국의 재경부가 방역 지원금이나 손실 보상금 등으로 재정을 확장하는 것에 적극 반대하는 것이 일견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재경부 입장에서는 재정건전성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큰 관심사일 터이니 말이다. 내가 보기에 지난 한국의 대선은 문재인이 재경부의 입장에 끌려다니는 것으로 결판이 난 것 같다.  그런데 요즘 보니 재경부의 최고 가치는 재정건전성 따위가 아닌 것 같다. 예컨대, 법인세 인하 등의 문제에 대해 한국의 재경부는 어떤 태도를 취했나? 즉슨, "재정건전성" 이란 말은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재경부가 돈을 쓰기 싫어하는 항목에 대해, 예컨대 일반 국민들에게 돈을 퍼주는 것에 대해, "그런 데에 돈을 쓰기 싫다" 라는 말을 "재정건전성이 위협을 받는다"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렇게 하면 부자들 세금을 깍아줄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자유라는 말은 멋진 말이다. 국가 단위에서 보면, 그것은 국가가 스스로에서 말미암게 된다는 것, 즉 독립한다는 것, 주권을 완전히 회복한다는 뜻이 될 것이다. 브렉싯 선거 기간 중 어떤 영국 서민 할머니는 이 자유와 독립으로 브렉싯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눈문을 흘렸다. 그런데 보자. 미국의 어떤 주에서는 한파가 몰아쳐서 전기고 가스고 다 끊겼다. 그러므로 지역에 고립된 사람들은 주정부나 중앙 정부의 긴급 대책을 간절히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에 짜증이 난 사람이 있었다. 바로 그 주의 주지사였다. 사람들이 스스로 나가서 땔감을 찾는다든지 하는 자구책을 강구하지 않고 정부만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에 한심함과 짜증을 느낀 것이다. 책임이라는 모랄 의식의 타락의 예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주의 시민들은 도덕적 각성을 추구하기보다는 엉뚱한 곳에 짜증을 낸 주지사를 사임하게 했다. 그 주지사의 짜증의 본질이 특정 모랄의 타락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도 분명하다. 주지사는 단지, 극빈층도 아니고, 장애를 가진 사람도 아닌, 사지 멀쩡한 일반 사람들을 돕고 싶지 않았던 것 뿐이다. 자기가 도울수록 사람들을 더 타락시킬 것이라는 자기기만 속에서. 자유라는 말은 멋진 말이고, 멋진 삶의 태도를 의미할 수 있다. 동시에 정부가 시민을 돕지 않으려 수작을 부릴 때 이데올로기로 사용될 수도 있다. 브렉싯은 기업에 규제를 풀어주고, 세금을 깍아주고, 일반 국민들은 웬만하면 스스로 알아서 살아라는 말로, 내가 보기에, 정리된다. 그러므로, 자유와 주권 독립과 브렉싯을 사랑하는 저 영국 서민 할머니는 보건소에 가서, 간호사가 없어서 텅빈 그 보건소가 자신의 선택의 결과였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물론 깨닫지 못할 것이다). (영국에는 엄청난 간호사 인력난이 현재 진행형이다. 엊그제 사상 처음으로 파업도 했다. 파업에 참여한 간호사들은 어떤 의미로 참 간호사라 할 수도 있다. 간호사 월급보다 마트 캐셔가 일도 더 편하고 벌이도 더 좋기 때문에 그쪽으로 전직하는 사람도 상당히 많다고 한다. 여튼 영국 정부의 입장에서는, 국립의료체계와 같은 '비생산적인 일'에 돈을 쓰고 싶지 않은 것이다.) 


우주론의 근원적 질문 중 하나는 우주가 영원히 팽창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적어도 우주의 특정 단위의 특정 시점에서는 팽창을 멈추고 있거나 수축에 돌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요컨대, 세계화로 요약되는 팽창의 시대는 이제 막을 내린 것 같다. 이러한 때에, 엊그제 영국 총리가 한 말, "이제 파이를 키워야 합니다" 는 얼마나 시대착오적인가? 이데올로기는 뭔가를 가리는 역할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기만이 가능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는 자기기만이라는 마술적인 힘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런 한에서 이데올로기는 거짓말, 위선 등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지금의 시대는, 매우 독특한 의미로 이데올로기의 종말 시대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주 수축의 여파로 어떤 이념이 이념 형태가 아닌 적나라한 현실 형태 그대로 노출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바이든의 미국을 보라. 자본주의, 자유 무역의 수호자인 척 하다가, 그네들이 그동안 떠벌린 이념에는 어떠한 필연성도 없었다는 것을, 단지 우발성이나 편의성이 적당히 포장된 채 선전되고 있었다는 것을 그들 스스로 만천하에,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 나는 항상 이것이 궁금했다. 미국 일방주의 세계 질서에서 중국이 두 번째 극으로 등장하는 체계로, 즉 이강 체계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세계사는 다시금 냉전적 시대로 갈까? 그렇게 가는 것이 필연적인가? 아니면 어떤 자유의 여지가 인간에게 남겨져 있을까? 여기서 변수는 지금이 수축의 시대라는 것이다. 그것이 상황을 호전시킬까, 아니면 더 암울하게 할까? 또 지금은 수축이 시대이기 때문에 이데올로기는 종말을 맞았다고 봐야 한다. 예컨대, 공산주의 대 자본주의의 대결 이런 것은 없다. 자본주의의 수장으로서의 미국의 정치적 지도력, 이런 것도 없다. 그냥 모두가 리얼리티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이데올로기의 종말이 세계사의 운동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너무 장황함을 인정한다. 급하게 쓰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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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에프 케네디 공항에 내려서 숙소가 있는 브룩클린으로 택시를 타고 가면서 첫 번째로 느낀 것은 도로가 매우 지저분하다는 것이었다. 그닥 부유해 보이지 않는 동네들을 빠른 속도로 내달리다가, 저녁이 내리기 시작한 하늘 저편으로 맨하튼의 무수한 고층 빌딩군들이 눈에 들어왔을 때는, 어떤 기괴한 느낌, 비-현실적이라거나 초-현실적이라 할 수 있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압도적인 규모라니! "런던의 시티 빌딩들은 아기네, 아기." 


다음날 아침, 맨하튼을 브룩클린 다리를 걸어서 건너가고 싶었다. 그러므로 숙소에서 브룩클린 다리까지 어떻게 갈 것인가가 문제였다. 심하게 관광객 티를 내면서 지도를 들고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누군가 차에서 경적을 울리며 물었다. "어디 가려고?" 미국 드라마 소프라노스의 등장 인물 중 하나처럼 생긴 아저씨였다. 브룩클린 다리까지 간다고 하고, 차비 등이 일사천리로 합의되었다.   


기사 아저씨가 떠벌이였다. 지금은 휴가철이라 사람이 별로 없다. 곧 사람들이 직장으로, 학교로 돌아올 것이다. <스마일리의 사람들>의 첫 페이지가 떠올랐다. 여름의 열기를 피해 파리 사람들이 휴가를 떠나고 빈 곳을 가방을 멘 관광객들이 어슬렁거린다더니 우리가 그 꼴이었다. 기사 아저씨는 말을 계속 했다. 나는 자유롭다. 일하고 싶으면 하고, 하고 싶지 않으면 안한다. 누구도 내게 명령하지 않는다. 오직 나의 뇌만이 나에게 명령한다. 나는 뉴욕에서 태어났고 뉴욕을 사랑한다. 서울의 택시 기사님에게서 나는 서울을 사랑한다, 라는 말을 들을 수 있을까? 나는 놀랐고, 어쩌면 그때 미국이라는 나라의 이념성을 발견하였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중학교 때 윤리 선생님이 이야기한, "민주주의란 삶의 한 방식이다" 라는 말을 아직도 기억한다. 자유라는 이념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 예컨대 총기 소지의 자유에 대해서도?  


맨하튼은 경이적인 곳이다. 남북으로 길게 늘어선 도로들(avenue라고 부른다)과 동서로 그것들을 관통하는 도로들(street)이 직조하고 있어서 눈에 띄는 자연물이 없음에도 길을 잃기 쉽지 않은 구조이다. 곳곳이 공사판이었는데, 역시나 공사가 끊이지 않던 서울이 생각났다. --- 더 이상 공사판이지 않는 도시는 죽어가는 도시라고 보면 될 테지? 사이먼 앤 가펑클의 노래 가사가 생각나서 59th 스트리트를 지도에서 찾아보았더니 센트럴 파크 쪽에서 시작하여 블루밍데일 백화점을 거쳐 맨하튼 동쪽 강까지 이어지는 길이었다. 따라 걸었는데 전혀 가사처럼 그루비해지지 않았다. 블루밍데일 근처도 온통 공사판이고, 온갖 도시의 소음에, 먼지에, 햇빛은 살인적으로 따가왔다. 블루밍데일에 에어컨 바람을 쐬러 들어가야 했다.


뉴욕에는 많은 노숙자들이 있다. 그들의 눈에서는, 마치 약을 먹은 것처럼, 아무 영혼을 느낄 수가 없었다. 모로코에서 본 많은 가난한 사람들의 그 눈빛과 같았는데, 그것을 뉴욕에서도 보게 된 것이다. 때로는 대낮에 넝마같은 외투를 입고 젖은 빨래처럼 길가에 널부러져 있는 사람도 있었다. 또, 쓰레기통을 뒤지는 사람도 있었다. 벌건 대낮에 소화전을 향해 고추를 내어놓고 오줌을 싸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흑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 사정이 이러므로 저 유명한 맨하튼에 대해 사유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맨하튼을 이루는 평면은 고저가 거의 없다. 말 그대로 평면이다. 내게는 이것이 미국적 삶의 형식성을 의미한다. --- 열흘도 안되는 관광을 다녀온 것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반면, 맨하튼을 수직으로 수놓는 고층 빌딩군들은 어떤가? 그것은 내게 압도적인 계급성으로 느껴질 수 밖에 없다. 예컨대, 누구나 몇 십 달러면 양키스 경기를 볼 수 있다. 양키스 셔츠를 입고, 아들, 딸, 또는 손녀, 손자까지 데리고 양키스 구장에 간다. 유치한 응원가에 맞춰 환호하고, 함께 입을 모아 상대팀을 조롱한다. 옆자리에 앉은 아무나와 너털거리며 손바닥을 마주치거나 포옹을 하기도 한다. 물론 관람석에는 비싼 곳도, 싼 곳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본질적인 것은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인종이건 성별이건, 심지어 세대 구분까지 포함하여 완전히 동등한 인간들이라는 것이다. 물론 사회를 이루며 사는 우리들은 경기장에 모인 사람들 사이와 같은 그런 외면적인 관계들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다. 만일, 우리의 관계가 그런 외면적인 관계들로만 구성되어 있다면, 저 초고층의 빌딩을 올린 사람은 참으로 기적을 행사한 것에 가까울 것이다. 그런데 미국 사람들은 그걸 믿는 것 같다. 저 초고층을 올린 사람은 그러므로 영웅이라 불리고, 아메리칸 드림의 구현자로 불린다. 저 대낮에 길거리에서 쓰러져 자는 사람들, 혹은 지하철 역 쓰레기를 뒤지는 사람은 자유의 한 양상일 뿐이다. 사회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개인적으로라면, 그 사람들은, 예컨대 30, 40년 전에 길거리에서 쓰러져 자는 것을 선택했을 뿐인 것이다. 


나는 미국 사회의 원자성, 혹은 평면성과, 이 가공할 만한 계급성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확신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 원자성, 혹은 평면성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병적인 민감성을, 외부인으로서 느낄 수 있다고 믿는다. 예컨대, 뉴욕 지하철들은 하나같이 성조기를 달고 다닌다. 미국 영화에서는 뜬금없이 성조기가 펄럭이는 장면이 나온다. 뉴욕의 택시 기사는 뜬금없이 자신이 뉴욕과 자유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등등. 내가 보기에 이것들은 이념화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념화, 즉 내면화는 그것이 항상 외부에서 주어진 것임을 의식한다. 그 의식성이 제3자의 사람으로 하여금 거기에서 약간은 병적인 민감성을 느끼게 만든다고 나는 생각한다. 음... 이건 좀 심한 것 같은데... 이렇게 말이다. (<콰이어트>에서 읽은 것 같은데, 미국 사람들이 내향적 사람이나 내향적 태도에 대해 약간은 병적인 지적질을 마다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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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ly 2022-09-08 1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혹시나 하는 마음에... 위의 경기장에 모인 사람들의 예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내가 사르트르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나의 의도는 사르트르의 집단 이론을 해설하거나, 그것의 예를 제시하자는 것이 전혀 아니었다. 쓰고 나서 생각하니 그것들이 사르트르적이었을 뿐이다.

이준학 2022-09-13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여러 재미있고, 유익한 글 감사합니다. 그리고 알라딘 이성비판 리뷰 잘 읽었습니다. 그러게요, 작자님은 사르트르적이시네요. 존재에 대한 무를 가진 현상학적 관찰자. 그렇게 보기를 갈망하는. 그리고 약간은 방랑하는 귀족 사상가 같은.... 그러나 그 눈길의 따스함이 느껴지는...^^

weekly 2022-09-13 17:25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감사합니다. 예, 말씀대로 <변증법적 이성 비판>이 문제의 그 참조점입니다. 알게 모르게 저를 적시고 있던... 하하, 그러나 ‘방랑하는 귀족 사상가‘ 라는 표현은 사양하고 싶어지는군요.:) 혹 제가 제 글들에서 그런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면, 저 스스로를 심각하게 되돌아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냉정하게 말해 저의 현재는 어떤 한계(재능)에 갇혀 고투하는 철학도 정도인 것 같습니다.
 

"This is not a drill" 이라는 타이틀로 미국 전역을 순회하고 있는 로저 워터스의 공연을 8월 30일에 뉴욕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보았다. 코로나 때문에 2, 3년 연기되었다가 이번에 겨우 열린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티켓을 실수로 이중 구매했다가 막판에 가까스로 되팔기도 했고, 재정적으로 쪼들리는 와중에 미국까지 가서 공연을 보아야 하나 하는 심적 갈등도 있고 해서 끝까지 맘이 편하지 않았다. 


시간에 맞춰 공연장 앞에 도착해 보니 이스라엘 국기를 든 열 명 정도의 유대인 사람들이 반-로저 워터스 시위를 하고 있었다. 한국의 태극기 부대와 비슷한 양상이다. 좋든 싫든 로저 워터스는 이스라엘 정부의 팔레스타인 억압 정책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드문 서구 인사 중의 한 명이다. 유대인 단체의 압력으로 공연이 취소되거나 공연 광고 계약이 철회되거나 하는 불이익을 지속적으로 받아야 하는 것은 그에게도 훈장으로 치부될 수 있는 일이 아닐 것이다. 핑크 플로이드 출신의 전설의 록 스타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지 않았더라면 로저 워터스도 음악계에서 쉽게 퇴출되었을 것이다. 



공연에 대한 나의 평가는 이중적이다. 첫째, 80에 가까운 나이를 생각한다면 보컬적으로 무난한 공연을 보여주었다. 둘째, 정치적 메시지가 강조될 것이라고 예고는 되었으나 좀 지나쳤다는 생각이 든다. 허다한 자막 캡션이나 이미지 등의 사용이 연주를 감상하는데 방해가 되었다는 생각을 한다.


로저 워터스의 나이로 보건대 이번이 마지막 투어가 될 것 같다. 세트 리스트의 끝 곡이 "Outside the Wall"인데, 마치 노장의 작별 인사를 암시하는 듯한 가사이다. 공연 전에 유튭으로 이 곡을 아내에게 들려줬더니, 아내 왈 벌써 눈물이 날 것 같다고 하더라. 문제는 정작 공연장에서는 전혀 눈물 날 것 같은 분위기가 연출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공연이 끝나고 찜통 같은 맨하튼 지하철 역에서 도무지 오지 않는 지하철을 기다리다, 결국 지하철을 타고, 어둡고 위험해 보이는 브룩클린 동네의 숙소에 자정을 훨씬 넘긴 시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런 것들로 짜증이 난 나는, 고집 센 노인네가 마지막 투어라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자기 하고 싶은 얘기 다 늘어놓는 식으로 공연을 했다고, 절제와 쿨함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고 투덜댔다.


그렇게 공연 리뷰를 찾아보다가 CNN 인터뷰를 발견하게 되었다.



만약 내가 매니저이고 나의 아티스트가 중요한 투어를 앞두고 이런 인터뷰를 했다고 한다면 나는 아마 심각한 좌절감에 빠졌을 것이다. 여튼, 나는 더 이상 서구를 쿨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로저 워터스는 쿨하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는, 지구 최강의 미국 군대와 한국 군대가 북한의 앞바다에서 함포를 쏘아대며 군사 훈련을 하는 것은 단순한 연습이라 하고, 북한이 똑같은 장소에서 미사일 몇 발을 쏘는 것은 도발이라고 한다. 양심상 북한의 미사일 발사 행위를 도발이라 부르기를 거부하는 아나운서가 있다면 어떨까? 마찬가지로 서방 언론에서도 이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의 한 원인으로 나토의 동진 확장 정책을 언급하는 것은 금기이다. 그리고 그 금기를 깨는 행위는 용기있는 것이거나 고집 센 것이거나 순진한 것이거나 등등 일 것이다. 사회자가 이 모두를 포괄해서 트러블 메이커로 칭하고 있듯이 말이다.


이 인터뷰를 보고나서 나는 더 이상 로저 워터스의 공연에 대해 불평하지 않기로 했다. 우리의 사회가, 어떤 사안에 대해 아무런 금기 없이 상식과 이성에 기반하여 충분한 논의가 이루어 질 수 있는 사회라면, 로저 워터스가 이렇게나 수다스러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누군가의 말처럼, 그가 젊은 시절에 썼던 암울한 내용의 가사들은 근래에 들어 더욱 더 적실성을 갖는 듯 하다. 불행하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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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삼 년 전에 로저 워터스의 미국 투어, 뉴욕 공연을 덜컥 예매해 버렸다. 코로나 때문에 두 어 번 연기되었다가 이번 여름에 드디어 투어가 시작되었고, 겸사 겸사해서 생전 처음 미국이라는 나라에 가 보게 되었다. 


8/28:

저녁에 뉴욕에 도착했다. 숙소는 브룩클린에 잡았다. 

8/29:

아침에 브룩클린에서 맨하탄으로 넘어가서 인디언 뮤지엄에 갔다. 거기서 <운디드 니에 나를 묻어주오>를 샀다. 

점심에 파이낸셜 관련 가이드 투어를 했다. 

저녁에 뭘 했을까? - 적어 놓지 않아서 기억이 안난다:<

8/30:

아침에 모던 뮤지엄에 갔다. 

점심 즈음부터는 센트럴 파크에서 놀았다. 

저녁에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로저 워터스의 공연을 보았다.

8/31:

어제 너무 무리했었기 때문에 쉬엄 쉬엄 가기로 했다.

아침에 록펠러 센터에 갔었는데 별 감흥이 없었다.

뉴욕 공공 도서관 열람실에서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며 영국에서 가져간 책들을 읽었다. 그러다가 옆에 붙어 있는 브리언트 공원에서 책도 읽고 수다도 떨면서 느슨한 하루를 보냈다.

9/1:

아침에 할렘 가이드 투어를 했다. 많은 것을 배웠다. 혹 뉴욕 여행 가시는 분들이 있으면 추천할 만한 일정이다.

오후 4시 10분 뉴욕 메츠와 엘에이 다저스의 경기가 있어서 시티 필드에 가서 관람했다. 평일 낮 경기임에도 90 퍼센트 정도 좌석이 가득 찼다. 다저스 선발 투수가 커쇼였지만 경기는 메츠의 역전승으로 끝났다.

9/2:

아침에 휘트니 뮤지엄에 갔다. 아내가 호퍼의 팬이다. 

점심 즈음에 하이 라인을 따라 걸었다. 폐쇄된 기차길을 정원처럼 꾸며놓은 고가 도로(인도)이다.

오후엔 주로 뉴욕대 근방에서 놀았다. 어떤 흑인 아저씨가 길거리에 책을 쌓아놓고 파는 데서 이러 저러한 책을 샀고, 미국의 유일한 대형 서점이라는 스트랜드에서 메를로-퐁티의 책과 스피노자에 대한 책을 샀고, 주변 일본 식당에서 라면을 먹었다.  

9/3:

아침에 그리니치 빌리지 가이드 투어를 했다. 그저 그랬다.

점심 이후에는 주로 워싱턴 스퀘어 가든에서 놀았다. 사람들 공연하는 것을 들으며 책을 읽었다.

저녁에 블루 노트라는 재즈 바에서 공연을 보았다. 낮에 보았던 길거리 뮤지션들과 프로페셔널들 사이의 차이란!

9/4:

아침에 유대인 관련 뮤지엄에 갔다. 마스크를 써야 해서 근처 차이나 타운을 헤매며 마스크를 사갔는데, 관람은 가이드 투어 형식으로만 진행된다 하고, 등등으로 나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들이 좀 있어서 관람을 않기로 하고 그냥 나왔다.

빈 시간을 메우려 구겐하임 뮤지엄에 갔다. 세실리아라는 페루 아티스트와 칸딘스키의 작품이 나선형 회랑을 따라 전시되어 있었는데, 특히 전자는 나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 아다시피, 어떤 미지의 문화권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열쇠를 제공해 주는 사람들을 우리는 예술가라고 부른다. 

밤거리를 헤매다가 어떤 중고 서점에서 <2014: The Best American Short Stories>라는 책을 샀다. 당대적 고민에 대한 미국의 사정을 듣고 싶었다고나 할까?(즉, 소설의 종말에 대한?) 윈도우 전시대에 휴버트 셀비의 <브룩클린으로 가는 출구>가 전시되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책을 샀어야 했다. 그렇게 전시되어 있는 책들은 비쌀 것이라고 생각하고 아예 살 생각을 안한 것이 아쉽다. 

9/5:

마지막 날. 비행기 시간이 저녁 8:10이기 때문에 시간이 꽤 있다.

오전에 스트랜드 서점에 갔다. 그 동안 미국 여행하면서 배우고, 느낀 것과 관련된 주제의 책을 사고자 했다. 휴버트 셀비의 <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출구>를 찾았으나 없었다. 대신 같은 저자의 다른 책을 샀다. 랭스턴 휴즈의 책 등등을 샀다.

나머지 시간은 브리언트 공원에서 책을 읽으며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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