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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내들러의 "스피노자" 제7장, 8장을 읽었다.
스티븐 베이커의 "뉴머러티"를 읽기 시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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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ting

공장 철제 기둥에 붙어 있던 포스터다. 어제 점심 시간에 아이폰으로 찍어 놓았다. 포스터 아래의 손자국은 물론 나의 것이다. 포스터 아래가 말려 있어서 펴느라고 손을 좀 댔다.

포스터 문구를 보면 영어로 되어 있는 것은 매우 구체적인데 한국어로 되어 있는 것은 두리 뭉실하고 추상적이다. 한국어 문구를 읽고 나서는 사고를 한번 더 해야 한다. "어떻게 드는 것이 바른 자세로 드는 거지요?" 비경제적이다. 왜 저렇게 번역했는지 이해를 못하겠다.

난 한국인들은 매우 추상적인 종족이라고 생각한다. 여러 예를 들 수 있겠으나 딱 하나만 들겠다. 지금 내 앞에 놓여 있는 책의 한국어판 제목은 "구글노믹스"다. 그리고 원서 제목은 "What would Google do?"다. 더 얘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작가 박상륭도 비슷한 얘기를 한 것 같다. 동양의 고전은 너무 추상적이라서 읽기가 매우 어렵다. 그래서 영문판으로 읽었더니 이해하기가 쉽더라. 공감.

추상이란 약어이며 기호이다. 그것은 사태들을 조망할 때, 그리하여 새로운 연결을 발견할 때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그러나 추상이 의미가 있으려면 언제든 구체적인 사태를 가리킬 수 있어야 한다. "바른 자세로 든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하고 물었을 때 언제든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무릎을 구부려 물건을 들라는 얘기입니다."라고 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구체화될 수 없는 추상이란 완전히 무용하다. 사태와의 연결을 찾을 수 없는 개념은 말장난일 뿐이고 말장난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리학자 파인만도 비슷한 말을 했다. 파인만은 어떤 개념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점검할 때 물리학의 문외한(예컨대 나이는 들었지만 여전히 혈기왕성한 숙모)에게 그 개념을 알기 쉽게 설명할 수 있는지를 기준으로 삼았다고 한다. 파인만의 설명을 듣고 그 문외한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눈길을 살살 피하면 파인만은 "내 차라리 난로에 대고 이야기하는 게 낫겠구먼..."이라고 혀를 차는 것이 아니라 "이 개념에 대한 나의 이해가 아직 부족한가 보군..." 하고 결론 내렸다는 것이다.

추상을 최대한 일상의 영역으로 끌고 내려온다. 다시 말하면 일상어로 번역한다. 그렇게 해서 살아남은 개념은 힘을 갖고 있는, 적법한 개념이다.

후기 비트겐쉬타인이 왕성하게 토해내던 실험들이 그런것 아니었는지?

추상은 벼랑끝에 걸린 바위와 같다. 그것은 언제든 땅으로 떨어져 내리려 한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구체로 향한다. 추상이 내려 앉을 저 땅, 그것이 진리의 영역이다. 그러나 추상을 좋아하는 사람은 진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자신이 움켜쥐고 있는 추상이 구체와 아무런 연결을 맺고 있지 않아서 그런 것인지, 사람들과 함께 진리를 향유하는 것이 싫어서 그러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추상을 좋아하는 사람은 진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추상이 벼랑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걸 막으려 한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이런 말을 좋아한다. "질문 금지!"

제도 교육이 고도로 발전시킨 기술은 바로 "질문 금지!"를 명시적이지 않게 학생들에게 주입하는 것이었다.

정치에 있어서도 똑같은 얘기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추상이란 주제로 시작한 이 이야기는 하나의 삶의 방식, 즉 민주주의라는 삶의 방식을 결정적으로 가리키게 될 것이다. 그것은 자유롭게 의심하는 것이며 질문하는 것이며 진리의 바닥까지 내려가 보는 것이며 진리의 바닥에서 몸소 길어온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권위는 오로지 진리의 바닥에 기반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아래는 들뢰즈의 어떤 단편의 첫 문단이다.

   
 

Philosophy is the theory of multiplicities, each of which is composed of actual and virtual elements.

철학은 다양체들(multiplicities)에 관한 이론이다. 다양체들은 (현상)현실적인 요소들과 잠재(활력)적인 요소들로 구성된다.

Purely actual objects do not exist. Every actual surrounds itself with a cloud of virtual images.

현실적이기만 한 대상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현실적인 것은 그 주위를 잠재적인 이미지들의 구름이 둘러싸고 있다.

This cloud is composed of a series of more or less extensive coexisting circuits, along which the virtual images are distributed, and around which they run.

이 구름들은 그 외연의 크기가 다른, 일련의 공존하는 회로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회로들을 따라 잠재적인 이미지들이 분포되어 있으며 이 이미지들은 그 회로들을 돈다.

These virtuals vary in kind as well as in their degree of proximity from the actual particles by which they are both emitted and absorbed.

이 잠재적인 것들은 그 종류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현실적인 입자들과의 거리에 있어서 서로 다르다. 현실적인 입자들은 잠재적인 것들을 방출하는 동시에 흡수한다.

They are called virtual in so far as their emission and absorption, creation and destruction, occur in a period of time shorter than the shortest continuous period imaginable; it is this very brevity that keeps them subject to a principle of uncertainty or indetermination.

이 방출과 흡수, 창조와 파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짧은 연속적 시간보다 짧은 시간에 일어나는 한에서 이것들은 잠재적이라고 불린다. 잠재적인 것들을 불확실성 혹은 비결정(indetermination)의 원리에 종속된 상태에 놓는 것은 바로 이 짧음이다.

The virtuals, encircling the actual, perpetually renew themselves by emitting yet others, with which they are in turn surrounded and which go on in turn to react upon the actual: 'in the heart of the cloud of the virtual there is a virtual of a yet higher order...every vitual particle surrounds itself with a virtual cosmos and each in its turn does likewise indefinitely.‘

현실적인 것을 둘러싸고 있는 잠재적인 것들은 또 다른 잠재적인 것들을 방출함으로써 스스로를 영속적으로 갱신한다. 이 새로이 방출된 것들이 다시 [원래의] 잠재적인 것들을 둘러싸며 그 다음으로 현실적인 것에 작용하게 된다. ‘잠재적인 것의 구름의 중심부에 더 높은 등급의 잠재적인 것이 있다...모든 잠재적인 입자는 그 주위를 잠재적인 우주가 둘러싸고 있으며, 이런 식으로 무한하게 이루어져 있다.’

It is the dramatic identity of their dynamics that makes a perception resemble a particle: images, distributed on increasingly remote, increasingly large, moving circuits, which both make and unmake each other.

지각(perception)으로 하여금 입자를 닮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 동력학의 극적인 동일성이다. 현실적인 지각은 그 주위를 잠재적인 이미지들의 구름이 둘러싸고 있는데, 이 이미지들은 갈수록 멀어지고 점점 더 커지는 움직이는 회로들 위에 분포되어있으며, 이 회로들은 서로를 만들었다, 없앴다 한다.

These are memories of different sorts, but they are still called virtual images in that their speed or brevity subjects them too to a principle of the unconsciousness.

이것들은 서로 다른 종류의 기억들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그 속도와 짧음으로 인해서 무의식의 원리에도 종속된다는 점에서 여전히 잠재적 이미지들이라고 불린다.

 
   
(출처는 http://trustsun.net/xe/?mid=bookreading&page=2&document_srl=811이며 내가 이 포스팅에서 하고 있는 말은 원글 작성자에 대한 비평을 전혀 포함하지 않는다)

저 글을 읽고 혐오감을 느꼈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지 않다. 들뢰즈는 저런 식의 표현을 쓴 것에 대해서 정당성을 추궁받아야 할 것이다. 나로서는 이러한 경우를 생각해 줄 수 있다. "나는 원래 현대 물리를 전공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의 사고가 과도하게 현대 물리적 언어로 표현되는 경향이 있다는 걸 잘 인식하고 있습니다. 저런 표현을 쓴 것은 제게 발생한 사고를 빠르게 포착하기 위한 방편이었다는 점을 양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들뢰즈가 이러한 경우에 속하는지?

우리에게 분명한 것은 들뢰즈의 저러한 표현들이 어떤 사태를 가리키는지 매우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가능성은 두가지다. 들뢰즈 사상의 심오함, 아니면 말장난. (물론 심오함과 말장난은 종이 한 장 차이일 수 있고 나는 그러한 예들을 더러 알고 있다고 말하겠다.)

심오함과 말장난 사이를 가르는 기준을 우리는 갖고 있다. 바로 앞서 소개한 파인만의 원칙이다. 들뢰즈의 해설자이든지 스피노자의 해설자이든지 학교 교사이든지 기업 사장이든지 그게 누구든 어떤 주장을 말하는 사람이라면 파인만의 원칙을 기꺼이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내 생각에는 그것만이 우리의 안전을 보장해 줄 수 있다. 즉, 탈선과 위선, 오도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줄 수 있다.

횡설수설은 여기까지 하자. 방법론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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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여로 2015-03-07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추상적인 말을 풀어서 설명하지 못하면 이해를 못한게 아닌가 에세이를 쓰면서 고민하던 생각이었는데 명료해졌습니다 감사해요

weekly 2015-03-10 03:20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말씀 감사합니다. 덕분에 저도 예전에 제가 쓴 글을 다시 읽어 보게 되었네요.:)

지금 다시 읽어 보니... 무엇보다도 들뢰즈에 대한 언급이 조금 걸립니다. 어쩌면 들뢰즈의 철학을 가장 응축적으로, 가장 효과있게 표현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