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꼬맹이 덕에 작품을 둘러싼 분위기라는 것이 생기는 거라고,.맞는 말일세, 페르낭. 우리가 바라보는 것을 둘러싼 공간, 우리에게 작품을 보여주는 것은 바로 그 소우주인 셈이지.
노동자가 작품을 창조하고 상상할 수 있다면 예술가가 될 수 있는 걸까요?네, 바로 그거예요!
새가 그런 형태를 가진 이유는 날아오르기 때문이지, ‘새‘라고 이름 붙였기 때문이 아니라고!
재판부는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법적으로 해석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에 직면했지만 월 26일 마침내 브랑쿠시의 손을 들어주었다. 판결문에서 법원은 "‘아름다움에 대한 좁은 관점은 더 이상 용인될수 없다고 선언했다. 판사는 자연물을 모방하기보다는 추상적인 아이디어를 묘사하려는" 이른바 새로운 예술 인정하며 "이들의 생각에 공감하든 그렇지 않든, 법원이 인정한 그들의 존재와 예술계에 미친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예술을 구성하는 요소에 대한 정의가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판단한 것이다. "It‘s a bird!"판결 다음 날, 브랑쿠시의 작품 사진이 승리의 캠션과 함께 언론에 공개되었다. 한 작품에 대한 법리적 판단을 넘어, 현대 예술 전반에 대한 사회적 인정을 의미하는 이 판결은 현대 미술과 그 지지자들에게 큰 승리로 다가왔다.
‘미스터 션샤인’이라는 드라마를 좋아합니다. 김태리라는 어여쁜 배우가 나오는 것도, 흥미진진한 이야기도 좋아하지만 기존의 역사드라마(특히 독립군이 이야기가 그려진)와는 달랐기 때문입니다. 이전의 독립군들은 대부분 남성이었으며 여성은 그저 그 남자들의 뒷바라지를 하는 역할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집에서 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며 아이들을 다독이고, 독립군에 들어가기는 했어도 남자들의 식사를 챙겨야 하고 빨래를 하고 때로는 적군을 성적으로 유인하는 역할도 있었지요. 하지만 ‘미스터 션샤인’에서 여성은 주도적이며 무리를 이끄는 역할이었습니다. 두명의 여주인공도 그저 한 남자 앞에서 서로를 질투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목표를 위해 연대하고 그 주변의 다른 여성들 (함안댁, 조씨부인, 홍파 ...)과도 감정적인 얽힘보다는 객관적인 거리와 서로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하는 관계를 보여주어 극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 드라마에서도 여성이 기존의 방식으로 이용되는 장면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그런 부분은 너무나도 익숙하여 눈에 띄지 않습니다. 최근 드라마나 영화에서 여성은 더 이상 실장님을 짝사랑하지도 않고, 남편의 외도에 홀로 숨죽여 가슴아파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이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야 사람들이 현실을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요?그림이나 드라마, 소설등을 접하면서 표면적인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도 있지만 그 시대에 맞추어 한 번 더 생각해보고 비판할 수 있는 능력을 쌓아 간다면 내가 만나는 세계는 더욱 다양하고 넓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른바 예술가, 특히 문학가들은 주제넘은 생각을 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 우리는 그 누구에게서도 그 어떠한 권리도 위임받지 못했는데 마치 위임을 받은 것처럼 작업을 착수한다. 제멋대로 자신에게 작가로서의 권한을 스스로 부여하고 행여 다른 사람들이 "당신이 저지른 이 일에 나는 관심이 없어요. 아니 신경에 거슬려요. 대체 무슨 권리로 이런 짓을 한 건가요?"라고 하면 속상해한다.
전부 다 먹고 나니 배덕감이 치밀어 올라서 나쓰키한테는 비밀로 해야지 생각했는데, 깨끗이 자백해버렸다. 그래서 산이 무서운 거다.
여자가 장인이 되기 어려운 이유는 남자보다 능력이 딸려서가아니라 그냥 그 세계가 남자의 성역이라고 믿고 여자가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야.
어제는 비가오고 아침까지 안개가 자욱하더니 해질무렵에는 ‘봄밤’이라는 감상이 드는 날씨가 되었습니다. 모두 퇴근한 사무실에서 고요한 글을 읽었습니다. 책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단정한 삶의 일부분이 저에게도 옮겨 지게 된 것 같아 혼자 있는 이 저녁이 따듯해 집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작지만 분명한 놀라움이 그녀의 늙고 지친 몸 깊은 곳에서부터 서서히 번져나갔다. 수없이 많은 것을 잃어온 그녀에게 그런 일이 또 일어났다니. 사람들은 기어코 사랑에 빠졌다. 상실한 이후의고통을 조금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렇게 되고 마는데 나이를 먹는 일 따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타인이 느꼈던 방식 그대로 세상을 느껴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얼마나 헛된가. 우리는 오직 우리가 느낄 수 있는 대로만 느낄 뿐이다.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그렇다.
그건 얼마나 달콤한 일이었을까. 얼마나 고통스러운일이었을까. 이미 오래전 지나왔으나, 그런 시기가 틀림없이 내게도 있었다. 그리고 그건 언제 누구에게 찾아오든 존중받아야 마땅했다.
고독으로 진저리가 쳐질 것 같은 이 세상에, 딸에게 누군가가 있다니. 결혼이란 형태든 아니든, 상대가 누구고, 어떤 인종이든 어떤가. 그리고 그 순간 그는 딸에게 그런 말을 해주고 싶었다. 상처를 받지 않고 산 사람만이 사랑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누군가에게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사랑을 주는 법에 대해 오래 생각해본 사람뿐 일지도 모른다고.
거듭될수록 소희의 상상은 익숙한 서사를 게으르게 변주한 형태를 띠었는데, 그건 악의 때문이 아니라 소희에게는 죽음이 아직 너무나 추상적인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단 한 번도 말을 나눠본 적 없는 사람의 죽음을 슬퍼해야 할 이유는 없지, 소희는 생각했다. 그건 이상한 일이었다.그는 범죄자일 수도 있었고 자식들에게 버림받을 만한 일을 한 부도덕한 아버지였거나 사기꾼, 자발적인 고독을 택한 은둔자일 수도 있었다. 만약 한 번이라도 대화를 나눴다면 소희가 싫어하게 되었을 만한 인간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어떤 사람이었든 한때 존재했던 생生이 이제 더 이상 여기에 없었다. 그런데 여기에 없다니. 그건 대체 무슨 말이지?그에게도 좋은 날이 있었을 테지. 늘 억제하려 애썼던 무용한 상상력이 소희를 슬픔에 잠기게 했다. 상상이 모르는 사람이었던 그를 아는 사람으로 둔갑시켰다. 언젠가 노인처럼 사라지고 말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떠올리게 했다. 아,죽음은 얼마나 커다란 사건인가. 그것이 누구의 죽음이든.소희는 그 진실을 이제 겨우 어렴풋이 막 깨달은 참이었고,그래서 눈을 꼭 감았다. 한밤중에 홀로 눈을 떠버려 무서운아이처럼. 가까스로 울음을 참는 어린아이처럼. 그렇게 눈을 감은 채 소희는 한동안 더 어둠 속에 누워 있었다. 존재했던 삶의 부재가 마음속에 그려놓는 드라마를 조용히 응시했다.
한밤중 과제를 하다가 듣게 되는 그 소리는 다혜를 진저리치게 만들었다. 보아서는 결코 안 될 광경을 보기라도 한것처럼. 모과나무집에 살게 된 이래 다혜가 새롭게 발견한것은 늙는 일이었다. 자신의 몸을 통제할 수 없게 되는 것. 품위를 잃고, 수치를 망각하는 것. 타인의 눈에 스스로 어떻게 비칠지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이야말로 노년의 삶에주어진 실로 놀라운 특권 같다고 다혜는 생각했다.
진실은 이런 것이었다. 연애해보고 싶다는 호기심. 누군가가 자기를 좋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어서 확인받고싶은 조바심. 그때까지 알던 것과 전혀 다른 감정을 경험해보고픈 욕망.
스무 살 때 다혜는 자신이 언젠가는 늙을 것이라는 사실을 조금도 믿지 못했다. 겨우 스물여덟 살이었을 때는 이제늙어버린 노인의 마음을 알 것만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노인의 마음을 안다고 믿었다니. 주제넘은 오만. 어리석은소리. 다혜는 아무것도 몰랐다. 여전히, 지금도.
그러고 나서 주미는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최악을상상하며 얼마나 쓸데없이 인생을 낭비하며 살고 있는지마침내 깨달았다고 덧붙였다. 어떤 얼굴로 다가올지 짐작할 수조차 없는 미래와 끝에 대해서 대비할 능력이 마치 우리에게 있는 것처럼 헛되게 믿으면서. 그렇게 말한 후 우리는 주미의 이제 일곱 살이 된 아이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한없이 잔혹한 인생이 얼마나 변덕스러운 방식으로 우리에게 또다시 기쁨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 조금 더 말했다. 이미다 환해졌다고 생각한 연노란색 하늘과 부드러운 윤곽을 지닌 산등성이가 맞닿은 부분을 따라 아주 가느다란 선이 생기고 그것을 우리가 발견할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