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쓰는 것. 그 거부된 자의 쓰기가 시이기 때문이다. 소설이픽션만이 아니듯, 시는 암시만이 아니다. 시는 평론가와 숨바꼭질하는 장르가 아니다. 시는 목소리다. 아직 언어화되어본 적 없는 것, 언어화할 수 없는 것을 보이고, 들리게 하는 목소리다. 이 목소리 속에서 의미는 증발하고 없다. 목소리는 언어를 습득하지 못한 사람처럼 개념이 형성되기 이전이다. 이 시가 도대체 무슨 의미인 거야? 네 이데올로기가 뭐야? 네 정체성이 뭐야? 하는 독자를 더욱 교란하려고 시는써진다. 시에서는 시 언어가 그 사물의 속성을 지칭하지 않는다. 사물은 한 언어로 말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사물도 메아리로 말하고, 시인도 메아리로 말한다. 두 메아리가 만나섞여든 목소리가 시의 언어다. 사물이 이식되어 확장된 몸으로서의 시인의 몸. 그러나 시는 한 인간의 인지능력으로 사물 하나를 다 헤아릴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사물 하나에 귀를 기울여보라. 그 사물은 다성악처럼 여러 층위의 목소리를낸다. 그래서 시는 일종의 무언의 대화이고, 다수가 웅얼거리고, 중얼거리고, 요동하는 일종의 소음이다. 이럴 때 시인은 분열적이고, 비합리적이고, 정동으로밖에는 그 ‘목소리‘를 견디어낼 수 없다.

정상과 비정상, 존재와 비존재 사이의 자세를 발견하는 것. 내 몸을 내가 시간 속에서 파괴해보고, 넘어지게 하는 것. 나는 이것이춤하기와 시하기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정상적이라고 명명된 언어 사용에 대해 다른 기준을 적용해보는 작용이 문학언어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무엇보다 문학은 차별의 시선에 대한 심한 딸꾹질일 것이다. 정말 세상에 ‘정상‘이니 ‘순결‘이니 하는 것들이 있기는 한 걸까? 단어는 있는데 실제로는 없는 것들에 시달릴 필요는 없는데 말이다.

예술은 이런 것을 허용하고 있다. 이런 기괴한 생명체, 돌연변이를 허용하고 있다. 광기와 광기가 만나 세상을 기형으로 만드는 것을보여주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인간이 개입한 진화의 실상을발가벗기도록 허용하고 있다. 고발하고 있다. 고통하고 있다. 우리의 기형을 증거하고 있다. 이렇게 기형으로 우리가,우리 아닌 것들과 함께 살아 있음을 증거하고 있다. 이제 이렇게 되었다며 복합 생물종인 우리 몸을 선보이고 있다. 이렇게 기형인 우리가 모여서 하나의 몸을 이루었다고 증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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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세계의 주인 각본집
윤가은 / 안온북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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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고속버스를 타고 먼 길을 내려가던 중에 차안의 화면에 대사의 소리도 없이 자막만 나오는 드라마의 한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처음 보는 드라마라 줄거리는 알 수 없었지만
나중에 찾아 본 그 드라마의 제목은 ‘아너스’ 이며 대사는 이러했습니다.

‘제가 20년전 피해자에게 성폭행을 당한 것은 사실입니다. 또한 제가 피해자를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해 왔다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는 동시에 그 일을 극복하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해 왔습니다. 제가 겪은 일이 제 남은 인생을 전부 갉아 먹지 않도록요.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제 20년의 고통은 살인의 동기가 아니라 제가 왜 살인을 할수 없는 지에 대한 가장 강력한 증거입니다. 제겐 결코 피해자를 살해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어 렵게 지켜 낸 제 삶을 제 손으로 무너트릴 수는 없으니까요. 필사적으로 살아야 했던 제 시간들을 부디 고작 복수라는 말로 더럽히지 말아 주시 길 부탁드립니다.‘

이 대사를 보니 바로 ’주인‘이 생각났습니다. 우리의 기쁨도 행복한 순간도 금방 휘발되고 우리의 인생을 크게 흔들어 놓지 않는 것처럼 불운한 일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물며 그러한 일은 빨리 잊기 위해 더욱 노력하니 더욱 큰 의미를 두지 않을 수 있겠지요. 나는 슬픔으로만 이루어진 사람이 아니듯이 한 사건으로만 기억되지 않을 것입니다.

주인
"어릴 때 일이고, 그땐 진짜 힘들긴 했는데요.
어쨌든 지나갔고, 그게 제 인생의 전부도 아니에요.
보다시피 저 나름 열심히 잘 살고 있고.....
(수호에게) 내 인생 아직 망가지지 않았어.
그러니까 함부로 얘기하지 말아줘.
부탁할게."

이주인. 미안해.
나는 그냥 진실이 알고 싶었어.
사실 나도 너랑 같아. 나도 어릴 때 그런 일을 겪었어.
그런데 나는 너랑 달라. 나는 지금도 그런 일을 겪고 있어.
너를 지켜보면서 나는 문득 궁금해졌어.
나도 진실을 말하면 어떻게 될지.
나도 너처럼 진짜로 살아갈 수 있을까?
난 이제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됐어.
그래서 더 늦기 전에 내 얘기를 해보려고 해.
너는 내가 누군지 영영 모르겠지만,
나는 너를 영원히 기억할 거야.
고마워. 이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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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C.S.루이스 지음, 김선형 옮김 / 홍성사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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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동안 악마의 말이 너무 찰떡같이 들려 따라야 할듯 헷갈리고 말아 버립니다. 악마인주제에 조카인 웜우드를 사랑하고 세심하게 가르치는 스크류테이프에게서 인류애를 느길 뻔 할 정도이니까요.
악마가 제일 두려워 하는 것은 인간이 악마의 존재를 인정하되 무시해버리는 것 아닐까요? 이렇게 인간의 선한면과 악한면을 속속들이 알고 교묘하게 조종할 수 있는 악마의 가르침이야말로 따르기 쉬울뿐더러 벗어나기도 어렵겠지요. 늘 눈앞에서 나를 유혹하는 악마를 내치기만 할 것이 아니라 제대로 파악하고 이용한다면 인생이 더욱 즐거울 듯 합니다.

악마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 인류가 빠지기 쉬운 두 가지 오류가 있습니다. 그 내용은 서로 정반대이지만 심각하기는 마찬가지인 오류들이지요. 하나는 악마의 존재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악마를 믿되 불건전한 관심을 지나치게 많이 쏟는 것입니다. 악마들은 이 두 가지 오류를 똑같이 기뻐하며, 유물론자와 마술사를 가리지 않고 열렬히 환영합니다.

수세기 동안 우리가 쉬지 않고 공작해 온 덕분에, 이제 사람들은 눈앞에 펼쳐지는 친숙한 일상에 눈이 팔려, 생소하기만 한 미지의 존재는 믿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그러니 계속해서 사물의 일상성을 환자한테 주입해야 해.

명백한 것을 무서워하며 소홀히 여기는 인간의 특성은 정말 쓸모가 있지.

인간들은 자신이 동물이며, 따라서 육체가 하는 짓들이 반드시 영혼에 영향을 주게 되어 있다는 점을 노상 잊고 산다. 그들은 악마가 자기네 마음 속에 이런저런 것들을 불어넣는 모습을 그리곤 한다만, 그야말로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오히려 우리의 최대 과업은 그들의 마음에 이런저런 것들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는 게 아니냐.

네 임무는 환자가 현재의 두려움이야말로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라는 생각을 절대 못 하게 하는 한편, 오로지 자신이 두려워하고 있는 미래의 일들에만 줄창 매달려 있도록 조처하는 거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그 일들이야말로 제 십자가라고 믿게 만들거라. 그렇게 서로 어긋나는 일들이 한꺼번에 일어날 리 만무하다는 사실은 환자의 뇌리에서 싹 지워 버리고, 다 일어나지도 않을 미래의 일에만 미리 마음을 굳게 다지며 인내심을 발휘하려고 애쓰게 하거라. 열 가지도 넘게 가정해 놓은 서로 다른 운명들을 진짜로 동시에 받아들인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인데다가, 그런 일을 하려고 덤비는 인간들에게는 원수도 큰 도움을 주지 않는다. 현재 실제로 겪고 있는 고난이라면야 아무리 두렵다 해도 받아들이기가 더 쉬울 뿐 아니라 대개는 원수도 직접 개입해서 도와 주지만 말이지.

제일 좋은 방법은 매일 만나는 이웃들에게는 악의를 품게 하면서, 멀리 떨어져 있는 미지의 사람들에게는 선의를 갖게 하는 것이지. 그러면 악의는 완전히 실제적인 게 되고, 선의는 주로 상상의 차원에 머무르게 되거든.

지금처럼 균형을 잃고 편 가르기 좋아하는 시대에는 불을 더 붙여야 한다.

네가 경계해야 할 것은 환자가 현세의 일들을 원수에게 순종할 기회로 삼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세상을 목적으로 만들고 믿음을 수단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면 환자를 다 잡은 거나 마찬가지지. 세속적 명분이야 어떤 걸 추구하든지 상관없다. 집회, 팜플렛, 강령, 운동, 대의명분, 개혁운동 따위를 기도나 성례나 사랑보다 중요시하는 인간은 우리 밥이나 다름없어. ‘종교적’이 되면 될수록(이런 조건에서는) 더 그렇지. 이 아래에는 그런 인간들이 우리 한가득 득실거리는 판이니 원한다면 언제든지 보여 주마.

쾌락은 감소시키고 그에 대한 갈망은 증대시키는 게 우리가 쓰는 방식이야.

그렇게만 되면 내가 언젠가 맡았던 환자가 이 곳 지옥에 도착했을 때처럼 네 환자도 이렇게 말하게 될걸. "이제 보니 나는 해야 할 일도 하나 못 하고 좋아하는 일도 하나 못 한 채 인생의 대부분을 보내 버렸구나."

인간은 달콤한 죄도 못 되는 것, 도대체 뭔지도 모르고 왜 하는지도 모를 것에 미적지근하니 관심을 보이다말다 하거나 자기도 잘 모르는 어렴풋한 호기심을 채워 보다가, 손장난이나 발장난을 하거나 좋아하지도 않는 곡조를 흥얼거리다가, 혹은 흥미로운 욕망이나 야망이 자극된 것이 아닌데도 일단 우연히라도 발을 디디고 나면 도저히 빠져 나오기 힘든, 그 길고도 어둑한 몽상의 미로에서 헤매다가 인생을 낭비한다. 인간이란 그만큼 혼미해지기 쉬운 약한 족속들이야.

사실 가장 안전한 지옥행 길은 한 걸음 한 걸음 가게 되어 있다. 그것은 경사도 완만하고 걷기도 쉬운데다가, 갈랫길도, 이정표도, 표지판도 없는 길이지.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취향과 충동은 원수가 준 원재료이자 출발점이다. 그러므로 그런 취향과 충동에서 멀어지게 만들 수만 있다면 우리로선 먼저 한 점을 따고 들어가는 셈이다. 그러니 아무리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도 자기가 정말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를 제쳐놓은 채, 세상의 기준과 관습과 유행에 따르게 하는 편이 좋은 게야.

상상과 감정이 아무리 경건해도 의지와 연결되지 않는 한 해로울 게 없다. 어떤 인간이 말했듯이, 적극적인 습관은 반복할수록 강화되지만 수동적 습관은 반복할수록 약화되는 법이거든. 느끼기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질수록, 점점 더 행동할 수 없게 될 뿐 아니라 결국에는 느낄 수도 없게 되지.

정말 중요한 건 어떤 자질에 대한 진실보다 평가를 더 중요시하게 함으로써, 미덕의 싹이 나타나는 족족 거짓과 가식의 요소를 그 중심에 주입하는 것이지. 이 방법을 통해 수천 명에 이르는 인간들이 ‘겸손이란 아름다운 여자가 스스로 못난이라고 믿으려고 애쓰며, 명석한 남자가 스스로 멍청이라고 믿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래서 뻔히 사실과 다른 걸 믿으려고 애들을 쓰는 경우가 생기는데, 그런 시도가 성공할 리가 있나. 게다가 우린 인간이 이렇게 불가능한 일을 해 보려고 노력하는 사이에 끊임없이 저 자신만 생각하도록 붙들어 둘 기회를 얻을 수 있지.

너는 환자가 겸손의 진정한 목적을 보지 못하게 해야 한다. 겸손이란 자기 자신을 아예 잊어버리는 게 아니라, 자신의 능력과 성격에 대해 특정한 형태의 의견(즉 낮은 평가)을 갖는 거라고 생각하게 만들라구. 환자도 물론 몇 가지 재능쯤은 가지고 있겠지. ‘겸손이란 내 재능의 가치를 내가 실제로 믿고 있는 수준보다 낮게 보려고 애쓰는 것’이라는 생각을 마음 속에 꼭꼭 박아 주거라.

우리가 바라는 건 전인류가 무지개를 잡으려고 끝없이 쫓아가느라 지금 이 순간에는 정직하지도, 친절하지도, 행복하지도 못하게 사는 것이며, 인간들이 현재 제공되는 진정한 선물들을 미래의 제단에 몽땅 쌓아 놓고 한갓 땔감으로 다 태워 버리는 것이다.

이제는 유럽 전체를 위아래로 아무리 훑어보아도 탐식에 대해 설교한다거나 탐식 때문에 가책을 느끼는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지. 이게 다, 많이 먹는 데 욕심을 부리기보다는 맛있는 걸 찾아먹는 데 욕심을 부리도록 총력을 집중한 결과다.

. 다른 전선에서도 물론 최선을 다해 똑바로 일해야겠지만, 탐식이라는 영역에 간간이 침투하는 것도 게을리하지는 말아라. 환자는 남자다 보니 ‘그저 내가 원하는 건’이라는 위장술에 걸려들 가능성이 별로 없다. 하지만 남자들의 경우에는 허영심의 도움을 받아 탐식가로 만드는 길이 있지. 스스로 음식에 관한 한 일가견이 있다고 믿게 하고, 스테이크를 ‘제대로’ 만드는 유일한 식당을 발견했다고 으스대게 만들거라. 처음엔 허영심으로 시작했다 해도 결국에는 습관으로 굳어지는 법이다. 어떻게 접근하든지 간에 중요한 점은, 제가 좋아하는 어떤 것 ─ 샴페인이든 홍차든 생선요리든 담배든 아무거나 ─ 이 주어지지 않았을 때 ‘짜증을 부리게’ 해야 한다는 거야. 그러면 그의 자비도, 정의도, 순종도 모조리 네 손 안에 들어올 게다.

그러니 너는 열심을 다해 ‘내 시간은 나의 것’이라는 그 기묘한 전제가 환자의 마음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도록 꼭 틀어막아야 한다. 마치 자신이 하루 24시간의 합법적인 소유자로서 매일의 삶을 시작하는 것처럼 느끼게 하라구. 직장에서 일하는 시간은 자기 재산에서 억지로 떼어 주어야 하는 부담스런 세금으로 여기게 하고, 종교적 의무들에 할애하는 시간은 너그러운 기부금으로 여기게 하거라. 단, 이런 차액들을 제하기 전의 전체 시간은 ‘어떤 불가해한 의미에서 내가 타고난 개인적 권리’라는 믿음에는 의문을 제기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내가 주인’이라는 생각은 어떤 경우에도 부추길 만한 가치가 있지. 인간들은 노상 제가 주인이라고 주장하는데, 천국에서 듣든 지옥에서 듣든 우습기 짝이 없는 소리다. 인간이 그런 우스운 소릴 계속 떠들게 하는 게 우리 일이야.

기독교가 진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무언가 다른 이유 때문에 믿으라는 것, 이게 바로 우리 수법이야.

우리는 먹는 즐거움만 따로 부풀려 탐식을 만들어 낸 것처럼, 변화가 주는 자연스런 즐거움만 따로 뒤틀어 완벽하게 새 것만 원하는 욕구로 바꾸고 있다.

명심하거라. 중요한 것은 공포 자체가 아니라 비겁한 행동이야. 공포의 감정 그 자체는 죄가 아닐 뿐더러, 보기엔 즐거워도 소득은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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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도피하는 사람은 도피를 꿈꾸지 않는다. 그냥 도피한다. 도망치고 싶지만 울면서 맞서는 사람들이 늘 도피를 열망한다. 그렇게 도망치고 싶었으면서도 나는 차마 그것을 결행하지 못했다. 머물기의 괴로움. 이것이 내 삶의 핵심 주제였다.
발목을 붙잡는 것은 그때그때 달랐다. 물러서면 안 된다는 세상의 규칙, 그것을 납득하는 나의 오성. 넘쳐야 마땅한 책임감.
도피 이후의 대책 없음. 남겨지는 사람들의 슬픔 같은 것들. 그래서 늘 우물쭈물 맞섰고, 자주 패배했다.

누가 이 일 안하면 벌을 내린다고 한 것도 아닌데 내 발로 걸어들어와 왜 이 모양 이 꼴로 살고 있을까, 스스로가 미워지는 순간들. 일은 많고, 힘은 달리고, 그렇다고 억만금을 버는 것도 아니고, 집에서는 새끼들이 악악거리고. 보람이고 나발이고 다 때려치우고 싶은 그런 순간들. 그러나 나는 또한 알고 있다. 그런 자신이 미워 울 줄 아는 사람이라면 다시 돌아가게 된다는 걸. 완전히 처음으로는 아니더라도, 몇 걸음 정도는 되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걸. 그렇게 몇 걸음씩 되돌아 걷다 보면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은 될 수가 없다는 걸.

미학의 정점에는 윤리가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것은 윤리적이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게까지 윤리적이지 못한 존재들이 그래도 윤리적이고자 온 힘을 쥐어짤 때, 부끄럽기 싫어서, 차마 부끄러울 수 없어서, 눈질끈 감고 옳은 일에 자신을 내던지는 어떤 숭고의 순간들을나는 사랑한다.

어떤 곳을 더 이상 갈망하지 않기 위해선 그곳에 한 번은 다녀와봐야 한다. 별것 없더라도 한 번은 가봐야 한다. 나는 베토벤에게 다녀와봤다. 좋았다. 내가 가여울 때, 이제 나는「엘리제를 위하여」를 연주한다. 연주는 나날이 좋아지고 있다.

인간이 가진 가장 아름다운 능력 중 하나는 자신을 교정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도 고정된 악인이 아니다. 우리는 더 좋은 사람이 된다. 사람 고쳐 쓰는 것 아니라는말이 맞는 말처럼 보이는 것은 사람들이 자신을 바꿀 결심을품지 않기 때문이고, 달라질 결심을 품지 않는 것은 굳이 힘들게 달라져봐야 얻을 실익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더 좋은사람이 되는 일의 아름다움을 잠깐이라도 엿보게 된다면, 그런 사람들이 빚어내는 변화의 아름다움을 잠시라도 겪게 된다면, 생각을 고쳐먹게 될 것이다. 자기가 속한 작은 곳에서부터, 가정과 학교, 직장, 나 사는 마을에서부터 옳지 않은 것을 보면정색해보자. 뒤에서만 쑥덕공론하다가 한 번에 보내버리지 말고, 시시때때로 정색하면서도 서로에게 관대했으면 좋겠다. 더좋은 사람이 될 기회를 서로가 서로에게 주었으면 좋겠다.

그 무한의 숭고,영겁의 공포를 이겨내는 유일한 방법은 지금 여기에서 그저 옳은 일을 하는 것이다. 옳은 일을 하다가 낙담하지 않는 것이다. 알량한 도덕군자로 명랑하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나의 장래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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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모든 연애의 90%는 이해가 아닌 오해란 사실을…

이 포크를 봐. 앞에 세 개의 창이 있어. 하나는 동정이고 하나는 호의, 나머지 하나는 연민이야. 지금 너의 마음은 포크의 손잡이를 쥔 손과 같은 거지. 봐, 이렇게 찔렀을 때 그래서 모호해지는 거야. 과연 어떤 창이 맨 먼저 대상을 파고 들었는지... 호의냐 물으면 그것만은 아닌 거 같고, 동정이냐 물으면 그것도 아니란 거지. 뭐, 맞는 말이긴 해. 손잡이를 쥔 손으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상대도 마찬가지가 아닐 수 없어. 처음엔 어떤 창이 자신을 파고든 건지 모호해. 고통과 마찬가지로 감정이란 것 역시 통째로 전달되기 마련이지. 특히나 여자는 더 그래. 왜 그런지 모르면서도... 그래서 일단 전반적으로 좋거나 싫어지는 거야.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하나의 창을 더듬어보게 돼. 손잡이를 쥔 손은 여전히 그 무엇도 알 수가 없는 거지. 알아? 적어도 세 개의 창 중에서 하나는 사랑이어야 해.

인간은 대부분 자기(自己)와, 자신(自身)일 뿐이니까. 그래서 이익과 건강이 최고인 거야. 하지만 좀처럼 자아(自我)는 가지려 들지 않아. 그렇게 견고한 자기, 자신을 가지고서도 늘 남과 비교를 하는 이유는 자아가 없기 때문이지. 그래서 끝없이 가지려 드는 거야. 끝없이 오래 살려 하고... 그래서 끝끝내 행복할 수 없는 거지.

빛을 발하는 인간은 언제나 아름다워. 빛이 강해질수록 유리의 곡선도 전구의 형태도 그 빛에 묻혀버리지. 실은 대부분의 여자들... 그러니까 그저 그렇다는 느낌이거나... 좀 아닌데 싶은 여자들... 아니, 여자든 남자든 그런 대부분의 인간들은 아직 전기가 들어오지 않은 전구와 같은 거야. 전기만 들어오면 누구라도 빛을 발하지, 그건 빛을 잃은 어떤 전구보다도 아름답고 눈부신 거야. 그게 사랑이지. 인간은 누구나 하나의 극(極)을 가진 전선과 같은 거야. 서로가 서로를 만나 서로의 영혼에 불을 밝히는 거지. 누구나 사랑을 원하면서도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까닭은, 서로가 서로의 불 꺼진 모습만을 보고 있기 때문이야. 그래서 무시하는 거야. 불을 밝혔을 때의 서로를... 또 서로를 밝히는 것이 서로서로임을 모르기 때문이지.

결국 열등감이란 가지지 못했거나 존재감이 없는 인간들의 몫이야.

꿈같은 사랑이란 것도 별다른 게 아니지. 그냥 살아가듯이 그냥 사랑하는 거야. 기적 같은 사랑이란 그런 거라구. 보잘것없는 인간이 보잘것없는 인간과 더불어... 누구에게 보이지도, 보여줄 일도 없는 사랑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나가는 거야. 이쁘지도 않은 서로를, 잘난 것도 없는 서로를... 평생을 가도 신문에 기사 한 줄 실릴 일 없는 사랑을... 그런데도 불구하고 해나가는 거지. 왜, 도대체 왜 그런 일을 하느냐 이 얘기야. 기적은 바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해. 한 줌의 드라마도 없이... 어디 좋은 곳 한번 가보지 못한 채... 어딜 가봐야 눈에 띄지도 않고, 딱히 내세울 것도 없이..

사랑이 없는 삶은 삶이 아니라 생활이었다.

평균을 올리는 것은 누구인가. 그것을 부추기는 것은 누구이며, 그로 인해 힘들어지는 것은 누구인가... 또 그로 인해... 이익을 보는 것은 누구인가, 나는 생각했었다. 자본주의의 바퀴는 부끄러움이고, 자본주의의 동력은 부러움이었다. 닮으려 애를 쓰고 갖추려 기를 쓰는 여자애들을 보며 게다가 이것은 자가발전이다, 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부끄러움과 부러움이 있는 한 인간은 결코 자본주의의 굴레를 빠져나가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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