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한번 쓰고 나면 되돌릴 수 없게 되고 마는 것은, 비단 딜리트도 리부트도 없던 시절에 국한된 이야기만은 아닐겁니다.
무언가를 초과하고자 하는 마음, 잉여를 축적하고자 하는 욕망이 인간을 다른 동물과 다르게 만듭니다.
음악을 듣고 마음이 아름다워지는 게 절대적인 사실이라면, 학살은 일어날 수없었을 겁니다. 인간의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만들어주는 스포츠 경기 종목에서 몸도 마음도 망가뜨리는 약물을 복용하는선수들이 꾸준히 적발되는 건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유독 책을 읽는 자, 책을 읽고 감명받은 자는 으레 극적인 변화를 겪고 거듭나서 제대로 된 인간으로 살아감이 마땅하다는믿음은 꽤 오랜 시간 이어져온 듯합니다. 책을 읽고 감명은 감명대로 받고 그것은 그 순간의 더할 나위 없는 진심이자 진실이며, 책을 덮은 뒤 돌아서서 이루어지는 방화 약탈 폭행은 별개인데 말입니다.
독서가 무용하다고 하여 그것을 하지않을 이유는 없다고 기본적으로 생각합니다. 대학에 진학할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모든 학생이 중고등학교를 때려치우지는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요. 책을 읽었다 하여 훌륭한 인간이된다는 보장은 없으며, 때로는 뱀의 몸통을 손으로 붙잡는 식으로 책을 이상하게 읽고서 오히려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인간이 되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보통은 책을 읽고 난 뒤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 그게 가장 일어나기 쉬운 일입니다. 무용하면 무용한 대로 다만 이어가는 것, 그것이 읽기 아닐까요. 읽기의 자리에 살기를 넣으면 어떻습니까.
공감? 그저 옳지 옳아 끄덕끄덕하려면 책 같은 거 왜 읽는데. 그러니 네가 이상하다고 느끼는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고 그 이상함을 제공하는 것이 책의 일이며, 이상함의 원인을 분석하거나 때론 원인 따위 결국 알아내지 못하더라도 자기 자신만큼은 이상해지지 않겠다는 마음에 이르는 것이 읽는 사람의 일이야. 한 권의 책을 펼칠 때 잊지 말아야 할 게 있다면, 세상의 코어를 이루는 것이 반드시희망 내지 사랑만은 아니며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인간들과혹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나 자신과 필연적으로 상종하거나공존하는 것이 인간의 삶이자 태초부터 운명지어진 비극이라는 사실이지. 그리고 그 비극을 견디는 게 인생의 거의 전부야. 그렇다면 인생에는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인생의 목표라는게 다 무슨 소용인지 되물을 필요는 없다. 자연은 우리에게 목표를 부여하지 않았고, 우주는 우리의 의미 따위 알지도 못할뿐더러, 신은 우리에게 별 관심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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