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외계인이 아니어서, 내가 나를 미워하게 만든 묵호. 하지만 덕분에 이렇게 숨이 답답해질 때마다 나는 외계인이어서 그렇다고, 내가 진짜 숨을 쉴 수 있는 행성은 따로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고 그런 생각이 나를 진정시키는 데 도움이 됐다.
나는 지금도 되뇐다.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다. 이곳은 내가 태어난 곳이 아니다. 여기는 잠시 머무는 곳이다. 벗어날 곳이다.
좀비로 인한 세상의 종말이 다른 종말보다 더 끔찍한 이유가 뭔 줄 알아? 겪어본 적도 없는데 아냐고 묻는 게 웃기긴 하다. 영화나 드라마를 떠올려 봐. 지금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 외계인이 침략하든, 소행성이 충돌하든, 재난이 닥쳐오든, 모든 종말의 순간에도 인물은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뛰어. 서로를 살리기 위해. 죽어가는 순간에도 애틋하게 눈을 맞추고, 입을 맞추고, 사랑을 속삭여. 슬프지만 아름답고 극적인 이별을 맞이할 수 있어. 하지만 좀비는 아니거든. 사랑하는 사람을 잊고,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기 위해 달려들고,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을 향해 총을 쏴야 해. 아름다운 마지막 모습이 아니라 시체가 되어버린 처참한 몰골을 봐야만 해. 이게 가장 끔찍한 종말이야 .
이 시시함을 지키기 위해 하루하루 얼마나 악을 쓰고 버텨야 하는지. 이 모든 시시함, 별일 없이 무난한, 어제인지 오늘인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특색 없는 날들이 반복되는 거. 시계를 보지 않아도 노을로 하루의 때를 알게 되는 거. 어떤 기척에도 불안을 느끼지 않게 되는 거. 시간이 멈춘 듯 천천히 흐른다고 여겨지게 되는 거. 그 기저에는 소용돌이를 버티는 쇠몽둥이 같은 단단함이 있어야 하잖아.
묵호의 소원을 이뤄준 다음에야 알았다. 묵호가 바랐던 소원은 나를 살리는 것이었다. 기왕이면 멋지게. 남들 눈치 보지 않고, 갇혀 있지 않아도 되게. 넓고 시원한 곳에서 마음껏 숨 쉬며 살 수 있게.
앵두는 앵두로 태어나도록. 내가 앵두 언니로 갈게. 혹시 기다리는 게 너무 지루하면, 앵두가 다시 앵두의 모습으로 한 번 더 찾아와. 어차피 너는 나보다 훨씬 짧게 사니까, 내가 앵두 언니로 태어나기 전까지 몇십 번씩 다시 태어나서 나랑 같이 놀아도 좋아. 나는 너보다 더 오래 살 거거든. 그러기로 아빠랑 약속했거든. 그러니 기다리기 심심하면 자주 와. 죽을 때마다 곁을 지켜주고 이렇게 뿌려줄게.
꼭 날아야만 새인가? 우리를 정확히 분류하려면 공룡까지 거슬러 올라 가야 해. 고작 인간 따위와는 뿌리의 깊이가 달라. 우리에겐 날개와 부리가 있어. 알을 낳지. 그런 여러 특징이 있어. 하지만 날개가 꼭 날기 위해 있다고는 할 수 없지. 모든 인간이 자기 신체를 전부 활용하며 사는가? 사용하지 못하면, 인간이 아닌가? ‘비행’은 날개의 활용일 뿐, 새의 정의가 될 수는 없지. 마찬가지로 ‘보행’도 ‘언어’도, 다리와 입의 활용일 뿐 인간 본질이 될 수 없지.
퇴화란 평화의 상징일지도 모르지. 기능 하나쯤 잃어도 생존에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았다는 의미니까. 어쩌면 나는 새들의 미래….
더 단단해지기 위해 마음에 낀 거품을 빼는 거란다. 거품을 뺄 줄 알아야 해. 그래야 밀도가 높아져. 단단해지기 위해서는 거품을 빼는 과정은 필수야.
사람들의 친절은, 그냥 친절로 받아들이면 된다고. 그 속에서 어떤 안타까움이나, 어떤 우월함이나, 어떤 기만이 들어 있다고 한들 우리가 그것까지 들여다볼 필요는 없다고.
그리고 제비야, 어떤 것이 새고, 어떤 것이 인간인지 구분하려 하지 말자. 그저 우리가 이곳에 있다는 것에만 집중하자. 우리가 눈을 맞추고, 서로를 부르고, 서로를 안을 수 있다는 것에만. 그거 하나면 충분하지 않겠니?
헤어질 때를 놓쳐서는 안 돼. 놓아주어야 할 때를 알아야 해.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안개 속에 갇히게 되니까. 싫더라도 우리는 잔인하도록 선명한 세상을 바라봐야 해.
다르고 낯선 게 꼭 부정적일 이유는 없죠. 우리가 다른 존재를 배척하는 건 상대가 본인 상식 안에서 해결되지 않는 예측 밖의 일을 벌이기 때문이에요. 상대를 알지 못하면 두려워하게 되고, 두려움은 혐오와 기피의 모습으로 바뀌죠. 인류는 알지 못하는 상대를 두려워하도록 진화했으니까요.’
진화란 것이 서서히 퍼지고 섞이는 게 아니고 이렇게 우뚝 솟아오르는 건가요?’
상담사는 친절했으므로, 수송선에는 그가 탈 자리가 있었을 것이다.
‘자연스러운 진화란 없어요. 수만 년이라는 시간이 모든 걸 매끄럽게 보이게 하지만, 사실 모든 진화는 돌연변이의 발생이고 돌연변이는 언제나 집단에서 배척되고 사냥당했죠. 진화란, 그러니까 특별하다는 것은, 다 그런 겁니다.’
하지만 친절했으므로, 상담사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자리를 양보했을지도 모른다.
‘진화는 어쩌면 도태일지도 모르겠네요. 결국 혐오로 인해 멸종하게 되니까.’
‘아뇨. 그러다 어느 순간 돌연변이가 전체를 이기는 순간이 옵니다. 그렇게 비약적인 진화 단계를 밟게 되죠. 늘 급하게, 늘 갑작스럽게, 늘 고통스럽게….’
노윤이 일을 일일이 다 사과하고 다녀서 되겠어? 뭐만 하면 지레 겁먹어서 사과부터 하는 거, 안 그래도 돼. 노윤이가 살아가는 건 미안해할 일이 아니야. 남들은 뭐 남한테 피해 한 번 안 끼치고 사는 거겠어? 나야 우리 손자들이 워낙 시끄러우니까 겸사겸사 인사하는 거지. 그리고 애들 주려고 잔뜩 사면 늘 많이 사게 돼서 노윤이도 먹으라고 주는 거고, 노윤이 엄마, 가끔 창밖을 봐. 도시에도 새가 많거든. 다 똑같은 새 같겠지만 유심히 보면 이 새, 저 새, 생김새도, 사는 방식도, 먹이도 다 달라. 깃털도 다 같지 않고, 나는 방법도 다 달라. 원래 종은 다 다양해. 아기는 미숙하고, 어린이는 시끄럽고, 청년은 혼란하고, 노인은 느리고 그런 거지. 세상살이 대부분을 보면 우리는 비정상의 범주에 속해 있지. 의사니까 더 자주 느끼지 않나? 세상에 안 아픈 사람이 어디 있나.
우리는 정부와 병원을 대상으로 노조 파업을 계획 중이었다. 시간이 꽤 걸렸다. 근무 환경을 재조정하고자 하는 의지는 모두 한마음이었지만, 쉽게 환자를 놓을 수 없었다. 회의하는 것도, 목소리를 모아 소리치는 것도 쉽게 허락되지 않는 환경이었다. 몇몇 환자들은 우리가 이기적이라 힐난했다. 자신들은 생과 사의 경계를 오가는데 고작 일 좀 더 편하게 하겠다는 과열된 모습을 우리 앞에서 보여야겠느냐며.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욕망을 병원에서 분출하는 것이 맞느냐며. 모르는 소리다. 당신들과 우리는 다르지 않다. 우리도 살려고 하는 거라고, 잘 살려고 하는 게 아니라 살고 싶어서 하는 거라고…. 아니, 그리고 사는 김에 잘 좀 살겠다는 게 뭐가 문제지? 주어진 식사 시간에 밥 좀 천천히 꼭꼭 씹어 먹고, 퇴근하고 나서는 핸드폰 좀 끄고 사는 삶을 살겠다는데 그게 뭐가 문제지? 너무 잘 사는 인간들이나 더 살날이 없는 인간들이나 결국 만만하게 보는 건 우리같이 죽는 것만도 못하게 사는 인간들이다. 잘 사는 인간들에게 우리는 움직이는 시체에 가깝고, 죽을 이들에게 우리는 마지막 분풀이 대상인 셈이다.
살아 숨 쉬는 존재는 죽음 앞에서는 그토록 평등해진다.
그게 얼마나 위안인가.
그런 게 어디 있어. 그런 건 우린 몰라. 분류하고 나누는 건 인간만 해. 쟤는 그냥 많이 먹고, 한동안 안 보였어. 기온이 엉망이라 길을 못 찾는다고 들었어. 예민한 애야. 종을 알아야만 저게 있다는 걸 인정할 거야? 모르면 쟤는 존재하는 게 아닌 거야?
너는 올리브각시바다거북이야.
나한테 필요 없는 정보야. 알려주지 마. 기억하지 않을 거야. 기억하면 외로워져.
왜?
네가 그렇게 말하지만 않으면, 나는 언젠가 저 예민한 애처럼 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도 있어. 내 몸은 나른할 땐 숲이 되기도 하고, 헤엄을 칠 땐 파도가 되기도 해. 등을 말릴 땐 바람이 되기도 하지. 나는 자유자재로 변하고, 속하고, 벗어날 수 있어. 하지만 구분 지으면, 선이 생겨. 넘을 수 없는. 내가 갇혀 있던 가짜 바다의 투명한 벽처럼. 선이 생기면 오래 살 수 없어. 넘을 수 없다는 좌절이, 마음을 늙게 해.
그게 너희의 장수 비결이야?
아니. 이게 원래 지구를 살아가는 방법이야.
아내가 말하는 사랑은 늘 그런 식이다. 혹시 존재할지도 모르는 아주 조그만 액운조차 막아주고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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