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n Sallis, "Nietzsche's platonism", Platonic legacy, New York: SUNY, 2004의 요약.
니체의 플라톤주의. 니체와 플라톤 양자 사이에는 형이상학의 역사 전체가 놓여있다는 점에서 거대한 간격이 존재한다. 하이데거의 경우 니체를 최후의 형이상학자라고 해석한 바 있다. 문제는 이들 사이의 간격 자체가 아니라 이러한 간격을 가로지르는 운동의 다양한 형상들이다. 플라톤주의의 첫 번째 형상은 결정적으로 니체의 사유를 규정하는데, 니체 자신도 인정하듯이 그의 사유는 플라톤주의의 일종으로 생각될 수 있다. 두 번째 형상은 니체가 플라톤 이후에도 존속하는 플라톤주의라고 간주하는 것으로, 철학적 전통으로서 플라톤주의이다. 세 번째 형상은 이러한 간격을 가로지르는 니체 자신의 해석, 문헌학적 전통에 의해 매개된 것이 아닌 플라톤의 텍스트 자체로의 회귀이다. 네 번째 형상은 플라톤의 은폐된 역사로의 회귀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러한 네 가지 형상은 ‘니체의 플라톤주의’의 다양한 의미를 규정한다.
1.
첫 번째 형상은 결정적으로 니체의 사유를 규정한 것으로 니체의 사유를 플라톤주의의 일종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는 니체가 그의 사유 초기부터 후기까지 인정하고 긍정했던 유대관계로서, 가령 <비극의 탄생>에서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의 철학은 전도된 플라톤주의이다. (...) 목표로서 가상Schein 속에서 살기.”(Ⅲ 3:207) 여기서 가상이라는 말은 플라톤주의가 ‘진정한 존재’로부터 구별하는 유사성 또는 현상/외관appearance를 명명하기 위한 것이다. 니체의 전략은 플라톤주의가 설정한 위계적 대립을 전도시키고, 가상을 보다 순수하고 더 아름다우며, 더 나은 것으로 간주하면서 플라톤주의가 ‘진정한 존재’라고 부르는 것을 더 열등한 것으로 강등시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니체가 <우상의 황혼>에서 또한 보여주는 것인데, 이는 역사의 형태, 오류의 역사라는 형태를 취하는 것이다. ‘어떻게 참된 세계가 마침내 우화가 되었는가?’라는 제목의 글에서 그는 플라톤주의가 전도되는 과정의 연속을 보여준다. 이 구절은 하이데거의 니체 해석에서 결정적인 것이며, 데리다 등의 해석에서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이다. 이 구절은 참된 세계가 점점 더 획득할 수 없는 것이 되는 단계를 추적하면서, 참된 세계의 제거로 끝맺는다. 니체는 플라톤주의의 가장 근본적인 전도의 순간이 “가장 짧은 그림자의 순간”이라고 말한다. 플라톤주의의 그림자가 물러나는 순간, 플라톤주의의 근본적 전도가 빛 속으로 나타나게 되는 순간이 바로 태양이 가장 높은 곳에 이르는 순간인 정오이다. 이는 여전히 전도된 플라톤주의로 남아있다.
2.
플라톤주의의 두 번째 형상은 니체가 플라톤 이후로도 서양의 사유와 실천의 역사 속에서 존속해왔다고 간주하는 플라톤주의이다. 이는 니체가 기독교를 “인민을 위한 플라톤주의”(Ⅵ 3: 74)라고 부를 때의 플라톤주의이다. 이는 참된 세계는 회개하는 죄인들에게 약속되어있다는 생각의 가장 오래된 형태이다.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플라톤을 ‘이미 존재했던preexistently 기독교인’(Ⅴ 3: 149)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플라톤의 이름을 기독교와 결합시키면서 니체는 만약 신이 오류, 맹목, 거짓말이라면 어찌하겠는가라고 묻는다.
3.
니체의 플라톤 강의 텍스트 전체는 1995년 간행되었다(Ⅱ 4: 1~88). 이는 바질대학에서 고전문헌학을 가르쳤던 시기 니체의 강의를 담고 있다. 최초의 제목은 ‘플라톤 대화편 연구 입문’이었는데, 이는 다양한 제목으로 1873~4년 겨울 학기, 1876년 여름 학기, 1878~9년 겨울 학기의 강의에서 반복되었다. 이 강의는 바질 대학에서의 시기에서부터, <비극의 탄생>, 그리고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의 첫 번째 권이 출간될 때까지의 시기를 포괄한다. 이 강의는 최근의 플라톤 문헌과 플라톤의 생애를 다루고, 각 대화편의 요약 설명을 제공하며, 플라톤 사상의 주제를 제시한다. 입문적인 문단에서 니체는 전체 강의를 정향하는 일반적인 언급을 준다. 무엇보다도, 그는 플라톤이 항상 젊은이를 위한 진정한 철학적인 지도자 또는 가이드로 고려되어왔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이미 명백하듯이, 니체가 여기서 플라톤의 이름으로 지시하는 것은 나중에 그가 때때로 언급하는 ‘인민을 위한 플라톤주의’에서와는 완전히 다른 의미의 플라톤이다. 다른 한편, 니체는 플라톤적 사유와 칸트의 관념론과의 연관성을 지적한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칸트적 관념론에 대한 준비 과정이었던 것으로 말해지는데, 이데아론이 이미 사물 자체와 현상 사이의 대립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니체는 플라톤적 사유를 형이상학의 이후 역사와 연결시킨다.
그러나 <비극의 탄생>의 맥락에서, 칸트와 쇼펜하우어가 정확히 진리에의 충동을 한계까지 밀어붙이고 예술의 재탄생을 준비한 인물임을 고려한다면, 플라톤적 사유와 칸트적 관념론 사이의 연관성은 마찬가지로 플라톤을 형이상학의 한계에 위치시키는 것, 니체적 전도에 가깝게 플라톤의 사유를 간주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니체는 플라톤의 산문 작가로서의 재능을 강조하며, 또한 플라톤이 위대한 극작의 재능을 지녔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니체는 플라톤에게 주요한 것은 작가 플라톤이 아니라 선생 플라톤이라고 주장한다. 작가는 단지 선생의 유령일 뿐이며, 그의 작품은 단지 아카데미에서 행해졌던 말의 상기rememberance일 뿐이다.
니체는 당대의 플라톤 문헌에 의지한다. 다양한 학자들 가운데 니체의 플라톤 독해에 중요성을 갖는 학자는 두 명인데, 그 중 한 명은 텐느만Tennemann으로, 희랍 철학을 연구하는 칸트주의자이다. 니체는 특히 플라톤이 ‘이중의 철학’, 명백한 철학과 은밀한 철학을 가지고 있다는 텐느만의 관점에 대해 언급한다. 또 다른 학자는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프리드리히 슐라이마허로, 그가 강조한 것은 플라톤의 작품에서 형식과 내용은 분리불가능하다는 것, 철학자 플라톤 곁에는 또한 예술가 플라톤이 있다는 것이다. 니체는 플라톤의 예술적 재능을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화편에서 예술적 요소의 중요성에 관해서는 슐라이어마허와 의견을 달리 한다.
니체는 예술작품으로서의 대화편과 예술가 플라톤에게 단지 이차적인 중요성을 돌릴 뿐이다. 니체는 “대화편은 어떤 극적인 것으로서가 아니라, 상기의 형태로, 변증술의 과정으로서 간주되도록 의도된 것이다”(Ⅱ 4:14)라고 말한다. 이후의 강의에서 니체는 “플라톤의 극이 가진 힘은 놀랍게도 과대평가되었다”(Ⅱ 4:161)면서 플라톤의 작품에서 극적인 요소의 중요성을 제한해야 한다고 더욱 강하게 주장하게 된다.
니체는 플라톤의 편지를 비롯한 다양한 문헌을 가지고서 플라톤의 생애에 대해 확장된 논의를 펼친다. 특히 두 가지 점이 언급될 가치가 있는데, 먼저 플라톤의 교육 과정에 관한 것이다. 니체는 플라톤이 젊은 시절 주신찬가의 시들을 지었으나 나중에는 그 시들을 태워버렸다고 말하면서, 플라톤이 갖는 시적 경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둘째로, 니체는 플라톤을 소크라테스의 죽음 이후에도 소크라테스적인 방식으로 존속했던 다른 소크라테스적 철학자들과 분리시키려고 한다. 한편으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이미지를 이상화했으나, 다른 한편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적 경향은 그가 가졌던 초기의 헤라클레토스주의에 의해 제한된다. 니체는 플라톤이 “애초에는 헤라클레이토스주의자였고 결코 순수하게 소크라테스적이지 않았다”(Ⅱ 4:45)고 말한다.
니체가 개별적인 플라톤 대화편에 관해서 하는 설명은 대개 요약적이다. 그러나 어떤 설명은 최근의 학술적 기준에서 볼 때도 매우 예리한 점이 있다. 예컨대 <티마이오스>에서 세계-영혼의 혼합blending에 관한 문단에 대한 니체의 해석은 A. E Taylor나 Serge Margel의 것과 밀접히 상응하는 것이다. 니체는 이러한 혼합의 두 단계를 구분하고, 혼합의 첫 번째 단계에서 섞인 두 요소로부터 나오는 것이 두 번째 단계에서의 두 요소와 섞이는 세 번째 구성 요소가 됨을 인지한다.
다른 한편 때때로 니체의 해석이, 텍스트가 말하는 것을 전통적인 공식으로 대체하면서, 플라톤 텍스트의 언어로부터 벗어나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예컨대, <티마이오스>에서 그릇receptacle과 코라를 언급하는 대목을 보자. 그러나 니체가 그릇과 가지적 존재 사이의 구분을 끌어올 때, 그는 전자를 이데아 곁에 있는 원초적 물질로, 이데아의 영원성을 분유하지 않는 비존재non-being로 간주한다. 그러나 <티마이오스>에서 그릇은 결코 질료라는 말로 지시되지 않으며, 니체의 설명과는 반대로 그릇은 그것이 매우 복잡한 방식일지언정 가지적인 것에 참여하는 것으로, 명시적으로 영속적인 것으로서 간주된다(<티마이오스>, 51a-b, 52a-b).
니체가 그의 강의의 두 번째 부분에서 제공하는 플라톤 사상의 주제적 설명은 플라톤 텍스트에 대한 최소한의 언급과 함께 전개된다. 특기할 만한 것은 니체가 빙켈만, 괴테, 독일 헬레니즘의 전체 전통으로부터 계승된 그리스 문화에 대한 관점과 가장 급진적인 방식으로 단절하고 있을 바로 그 시기동안, 그의 플라톤 해석은 그처럼 좁은 경계에서 남아있었다는 사실이다.
니체의 설명은 우선 플라톤의 이데아에 대한 설명에서 시작한다. 그는 개념 및 개념적 규정Begriffsbestimmung에서 시작하며, 무엇보다도 이데아를 개념적 규정의 대상과 동일시한다. 그는 또한 “일반적 개념적 규정의 대상은 감각적인 사물이 아니라, 존재자의 다른 종류eine andere Gattung des Seienden”라고 설명한다. “이데아를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이유는 그가 감각적인 것을 영속적인 흐름과 변화 속에서 보았고 따라서 이를 지식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와 더불어 그는 윤리적인 것은 개념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Ⅱ 4: 149)
니체는 우리의 개별적인 감각 지각이 개별 대상들에 상응하듯이, 우리의 일반적 개념은 개념들 자체와 마찬가지로 불변하는 대상에 상응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니체가 말하듯이 이데아론은 매우 놀라운 것이다. 그러나 가장 놀라운 것은 그러한 설명이 진리가 가상이라고 주장하는 ‘비도덕적 의미에서의 진리와 거짓말에 관하여’와 같은 텍스트가 쓰였던 바로 그 시기에 주어졌다는 것이다.
니체는 반복해서 플라톤에게 윤리적인 것이 가졌던 우선성을 주장한다. 따라서 이데아를 정립함에 있어 플라톤의 출발점은 선, 미, 정의였고, 그의 목적은 이러한 윤리적 추상물들을 감각적인 것이 갖는 영속적인 흐름, 변화로부터 보호하는 것이었다. 니체는 플라톤이 가시적 세계에 대한 고려를 기초로 해서 이데아를 정립할 수도 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플라톤은 이러한 방식으로 나아가지 않았으며, 이데아론의 생성은 가시적 세계에 대한 고려 속에 있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론의 기원은 감성적/미학적aesthetic인 것이 아니다. 즉 이데아는 감성적 관조 또는 직관에 기초해서 정립되지 않았다.
이에 니체는 이전에 주장했던 요점, 즉 플라톤의 예술적 충동은 이차적이며 또 다른 충동, 도덕적 충동에 의해 철저히 지배되었다는 것으로 돌아온다. 니체가 말하듯이 “그는 철저히 윤리학자이다.”(Ⅱ 4: 161) 이 지점으로부터 니체는 (신체는 영혼의 감옥이고, 철학의 과업은 감각적인 것으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결론, 플라톤 사상이 ‘인민을 위한 플라톤주의’ - 이후 니체의 계보학적 비판의 주요한 표적이 될 - 으로 변하게 되었다는 결론으로 나아간다.
4.
니체의 플라톤주의의 네 번째 형상. 이는 니체의 바질 강의를 지배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다. 니체는 보기 드문 능력으로 가장 결정적인 모호성과 이 모호성 내에서 일어나는 사유의 끊임없는 순환을 식별한다. 바로 이러한 독해를 통해서 니체는 플라톤의 사유를 그 독특성을 개방하는 방식으로 마주한다. 헤라클레이토스주의자로서 플라톤은 단순히 소크라테스적인 것으로 변했다고 말해지지 않으며, 예술가 플라톤이 아무런 잔여도 없이 도덕주의자 소크라테스로 변형되어왔다고 일관적으로 제시될 수도 없는 것이다.
물론, 니체는 그의 강의에서 플라톤의 예술적 충동이 소크라테스의 도덕적 충동에 의해 제한되었음을 강조한다. 또한 니체가 <비극의 탄생>에서 쓰듯이,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학생이 되었고, 그의 시를 태워버렸다. 그러나 플라톤이 그의 시를 태워버렸을지라도, 그는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으며, 소크라테스처럼 쓰지 않는 자가 되지 않았다. 물론 그가 소크라테스의 매력에 빠지지 않았다면, 그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썼을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매력 하에서도 플라톤은 글쓰기를 지속했고 예술가로서 남았다.
‘그리스 국가’라는 제목이 붙은 초기의 텍스트에서 니체는 남아있는 투쟁, 모호성에 대해서 강조한다. “그가 그의 국가에서 천재적 예술가를 배제했다는 것은 예술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평결의 엄밀한 결과였는데, 이는 플라톤이 그 자신과의 싸움에서 그 자신의 것으로 만든 것이었다.”(Ⅲ 2: 270f) 그러나 이 자신과의 싸움은 플라톤이 예술에 관한 소크라테스의 평결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을 때도 중지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때는 그 싸움이 가장 강렬해졌을 때이다. 스스로와 싸우는 플라톤의 이미지, 역동적이며 또한 활발한 모호성의 이미지와 더불어, 니체는 플라톤 사유가 갖는 독특성에 대해 언급한다.
이외에도 플라톤이 그 자신과 영속적인 싸움, 자신과의 분열 속에 있는 인물, 모호성 내부에서 순환하는 인물로 그려지는 다른 문단들도 있다. <선악을 넘어서>에서 플라톤은 “어떤 철학자도 지금까지 그 마음대로 이용했던 가장 위대한 힘”(Ⅵ 2: 114)으로 선언된다. 또한 니체는 플라톤의 비밀, 그의 스핑크스적 본성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우리가 그의 임종의 베개 밑에서 발견한 것은 성서도, 이집트의 책도, 피타고라스의 책도, 플라톤의 책도 아닌, - 아리스토파네스의 책이다. 플라톤 또한 삶을 - 그가 부정햇던 그리스적인 삶을 - 아리스토파네스없이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Ⅵ 2: 43) 또한 니체는 소크라테스주의가 플라톤의 것이 아니고 단지 그의 철학에서만 발견되며, 이러한 소크라테스주의를 신봉하기에는 플라톤이 너무도 고귀하다고 말한다.
<우상의 황혼>에서의 플라톤에 대한 가혹한 비판 외에도 니체는 또한 플라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쓴다. “그는 ‘그리스도교인’이 아니라 그리스인만이 지닐 수 있는 순진무구함을 가지고, 아테네에 그처럼 아름다운 청년이 없었다면 플라톤 철학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을 거라고 말한다: (...) 플라톤식의 철학은 차라리 에로틱한 경쟁이라고, 옛 체육 경기와 그 전제들을 연수하고 내면화한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으리라. 플라톤의 철학적 에로티시즘으로부터 마침내 무엇이 나왔는가? 그리스적 경쟁의 새로운 예술적 형식인 변증법”(Ⅵ 3: 120)
<즐거운 지식>에서도 니체는 플라톤의 건강함과 강력한 감각에 대해서 쓴다. 마지막으로 1880년 중반에 쓰인 수고에서 니체는 플라톤에 의해 행해진 전도에 대해서 쓰는데, 플라톤은 여전히 예술가로 남아있다. “기본적으로, 그가 예술가였던 것처럼 플라톤은 현상보다 존재를 선호했다.”(Ⅷ 1: 261)
특기할 만한 것은 어떻게 플라톤적 전도의 이미지가, 형이상학의 발생조차 소크라테스적 도덕주의자 플라톤보다도 예술가 플라톤의 손에 더 많은 것을 부여하는가 하는 것이다. 결국 극한에서, 이러한 니체의 플라톤주의의 형상은 첫 번째 형상 - 즉 존재보다 현상을 선호하는, 또는 최소한 존재와의 대립 하에서 규정되어 항상 현상이라고 불려왔던 것을 선호하는 - 니체 자신의 사유의 전도된 플라톤주의와 소통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최종적으로 니체가 그리스인으로 남은 이유, 또는 처음부터 그리스로 돌아오려고 시도했던 이유이다. “오 저 그리스인들! 그들은 어떻게 사는지 이해했다. (...) 저 그리스인들은 피상적이었다 - 심오함이 없었다.”(Ⅴ 2: 20, 또한 Ⅵ 3: 4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