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바르, 「국민형태: 그 역사와 이데올로기」, 󰡔이론󰡕 1993년 가을호에 수록.

 

제1부 용어법

국가는 국민으로 되는 경향이 있지만, 국민은 항상 국가로 되지 않는다. 그런데 국가 없는 국민이나 국가 이전의 국민이라는 생각은 용어 모순이다. 국민국가들의 통합성은 이를 위협하는 내적 갈등(지역갈등과 계급갈등)에 의해 위협을 받지만, 국민국가는 일단 정치적으로 실존하게 되면 국민국가 이전에 민족적(ethnique) 또는 인민적 통일성이 존재했다고 투사한다.

마르크스주의 역사기술의 역설- 고전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은 부르주아적 역사기술을 재생산하며 기능주의적 논지와 역사주의적 논지 사이에서 진동. 국민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의 논쟁은 전부(현실적 심층) 아니면 전무(이데올로기나 환상)라는 논리적 궁지에 이른다. 마르크스주의는 국민국가의 종언을 국가 일반의 종언과 동일시.

 

사회구성체, 국민형태, 국가체계

출발점으로서 세 가지 개념. 마르크스의 사회구성체 개념은 정치적 제도들의 본성을 무시하고 이에 상부구조라는 파생적 지위를 부여하지만, 오히려 우리는 사회구성체를 그 통일성이 의심스런 채로 있는 한 구성물, 적대적인 계급들의 형세로 이해해야 한다. 사회구성체의 실존이 제기하는 문제는 그것의 기원이나 종말만의 문제가 아니라 재생산의 문제, 그것들의 갈등적 통일성의 유지 문제이다. 곧 프랑스, 독일 등의 이름은 정치적인 것으로 국가나 국민적 동일성을 물신화시켜서는 안 된다. 우선 모든 사회구성체가 국민적이지는 않으며, 역사적으로 수많은 정치형태들이 존재했다. 국민국가의 불균등한 발전, 국민형성을 둘러싼 모든 저항과 갈등에도 유의해야 한다. 두 번째 개념은 국민형태로서 이는 갑자기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등장한 것도 아니고 무한히 가소적인 것도 아니다. 세 번째 개념은 갈등적 균형의 불안정한 관계망으로, 국민국가들의 역사는 그 경계들의 불안정성과 부단한 재규정이라는 일반적 형태를 지닌다.

 

제2부: 역사

국민의 형성은 몇 세기에 걸친 역사로 나타나는데, 국민적 동일성에 대한 회고적 환상은 이중적인 것(투사와 운명)이다. 그러나 이를 비판하는 것이 국민의 기원이라는 신화의 힘을 은폐해서는 안 된다. 예컨대 부단히 모순적인 영유의 대상이 되는 프랑스 혁명을 보라. 국민의 기원이라는 신화는 효력을 갖는 이데올로기적 형태, 국민구성체의 상상적인 단일성이 일상적으로 구성되는 이데올로기적 형태이다.

 

前국민국가에서 국민국가로

국민형성의 기원은 국가어의 제도(군주권력의 자율화와 신성화)나 절대군주제의 전진적 형성(통화독점, 행정적 재정적 집중화),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 등 경계와 영토 제도의 혁명화 등 다수의 제도들을 갖는다. 국민형성은 오랜 전사의 결과이지만, 이는 단선적이지 않다. 이는 장기에 걸친 상이한 여러 사건들로 구성되고, 특정한 한 국민의 역사에 속하지 않으며, 제국과 같은 다른 경쟁적 형태에 속한다. 어떤 사건을 국민형태의 전사 속에 자리잡게 한 것은 하나의 필연적인 진화의 선이 아니라 일련의 정세적 관계들이다. 다시 말해 전혀 다른 목표를 갖는 비국민적 국가장치들이 점진적으로 국민국가의 요소를 생산했다.

한편 모든 인간사회에 전진적으로 확산된 국민형태가 근대 자본주의의 발전에 조응한다는 테제는 두 가지 정정을 필요로 한다. 1) 우선 자본주의 생산관계들로부터 국민형태를 연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구나 자본주의 세계시장은 모든 국민적 제한을 넘어서는 내적 경향이 있다. 그렇다면 과연 국민의 형성을 여전히 ‘부르주아적 기획’으로 부를 수 있는가? 오히려 이는 마르크스주의가 자유주의 역사철학으로부터 넘겨받은 정식으로 일종의 역사적 신화이다. 국민의 형성은 자본주의 시장의 역사적 형태로서 항상 중심부와 주변부로 불균등하게 위계화된 세계경제(브로델, 월러스틴)에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정정은 마르크스의 이념적 자본주의를 ‘역사적 자본주의’로 대체한다. 어떤 점에서 근대의 모든 국민은 ‘식민화’의 산물이다. 2) 자본주의 역사에서 국민국가 형태와는 다른 국가 형태들이 출현했으며 일정기간 국민국가와 경쟁하면서 존재했다(제국형태, 초국민적 정치-산업 복합체, 한자동맹 등). 부르주아 정치형태는 한 가지가 아니라 몇 가지가 존재했던 것으로, 갓 태어난 자본주의적 부르주아지는 헤게모니의 몇 개의 형태 사이에서 주저했던 것이다. 요컨대 각자의 역사를 지닌 국민국가들의 형성과 이에 조응하여 사회구성체들이 국민구성체들로 전화한 것을 설명해주는 것은 순수 경제논리가 아니라 계급투쟁의 구체적 형세이다.

 

사회의 국민화

국민형태의 특권적 지위는 그것이 국지적으로 이질적인 계급들의 투쟁이 통제될 수 있도록 해주었으며 자본가계급뿐만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헤게모니를 행사할 수 있고 이것의 산물이기도 한 국가 부르주아지가 출현할 수 있게 해주었다는 사실에 있다. 지배적 부르주아지와 부르주아 사회구성체는 국가를 국민형태로 재구성하고 다른 모든 계급들의 지위를 수정함으로써, ‘주체없는 과정’을 통해 구성된다. 이때 국민형태의 구성 및 진화 과정은 비규정적인 것으로서, 생산양식들뿐 아니라 정치적 형태들의 단선적 진화의 도식들은 기각되어야 한다.

국민형태는 오늘날 누구에게 너무 늦은 것인가? 이러한 질문은 신생국민들 편에서뿐 아니라 구국민들 편에서도 제기되는데, 가령 구 중심부의 경우 국민적 구조들이 해체되는 국면에 들어서기도 했다. 국민구성체들의 역사의 또 다른 특성으로서 ‘사회의 지체한 국민화’. 가령 프랑스의 경우 자본주의가 초래한 모순들과 계급투쟁을 조절할 수 있도록 해주고 국민형태가 완성되기 전에 이를 다시 만들기 시작하도록 해준 것은 국민적-사회적 국가라는 제도, 경제의 재생산 및 개인의 형성, 가족구조, 사생활의 모든 공간에 개입하는 국민사회국가라는 제도이다. 국민형태의 기원에서부터 현존했으나 19~20세기에 걸쳐 지배적이게 된 이 경향은 모든 계급 개인들의 생존을 전적으로 국민국가의 시민이라는 지위, 국민성원이라는 그들의 자격에 복속시킨다.

 

인민의 생산

한 사회구성체는 장치들의 망과 일상적 실천을 통해 국민적 인간(homo nationalis)으로 형성되는 정도만큼 재생산된다. 이때 제도들의 기능작용을 통해 재생산되는 모든 사회적 공동체는 상상적이다. 곧 공동체는 개인적 실존을 집합적 서사의 맥락 안에 투사하고 공통의 이름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과거의 흔적으로 체험되는 전통들에 기초를 둔다. 오직 상상적 공동체들만이 현실적이다. 국민구성체의 경우 실재적인 것의 자리를 차지하는 상상적인 것은 인민이다. 이는 국가적 제도 안에서 스스로를 인지하는 공동체, 그 국가를 다른 국가에 대하여 자기 국가로 인지하여 자신의 계급투쟁을 그 지평 안에 기입하는 공동체이다. 인민은 자연적으로 존재하거나 단번에 구성되어 영속하는 것이 아니다. 근대의 어떤 국민도 타고난 민족적 기초를 지니고 있지 않으며, 모든 근대 국민은 아무리 평등주의적이라 할지라도 계급 갈등의 소멸에 조응하지 않는다. 본질적 문제는 인민을 생산하는 것, 인민이 자신을 국민적 공동체로서 부단히 재생산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인민은 정치권력의 토대와 기원으로서 통일성 효과를 산출한다. 루소는 이 문제를 ‘인민을 인민으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용어로 제기했으며, 이는 개인들이 어떻게 국민화되는가, 곧 국민적 소속이라는 지배적 형태로 사회화되는가 하는 질문이다. 모든 동일성은 개인적이지만 고립적 동일성이란 내재적으로 모순적인 관념이다. 개인적 동일성은 사회적 가치, 행위와 집합적 상징의 규범의 장에서 구성되는 집단적인 것이자 역사적인 것이다. 인민의 역사적 생산이라는 질문에서 인민의 통일성의 모델은 종별적인 이데올로기적 형태의 구성, 개인들을 주체로 호명하는 과정을 전제로 한다(피히테-외적 경계는 또한 내적 경계가 되어야 한다). 이 이데올로기적 형태는 애국주의 또는 국민주의이다.

 

의제적 민족체와 이상적 국민

국민국가에 의해 형성된 공동체는 의제적 민족체(ethnicité fictive)라는 용어를 통해 지칭될 수 있다. 의제라는 용어는 순수한 환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법률적 전통에서의 의인(persona ficta)에 유비함으로써 제도적 효과, 즉 제작(fabrication)의 의미로 사용된다. 어떤 국민도 자연적으로 민족적 기초를 갖지 않으며, 단지 마치 그들이 스스로 기원과 문화, 이해관계의 동일성을 지닌 자연적 공동체를 형성한 것처럼 표상하는 것이다. 의제적 민족체는 애국주의의 대상이 되는 이상적 국민에 불가결하다. 만약 그것이 없다면 국민은 다만 이념이나 자의적인 추상으로 나타나고 애국주의의 호소는 누구에게도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다.

민족체는 언어와 인종을 통해 산출된다. 양자 모두 국민의 성격이 인민에 내재한다는 관념을 표출하여 역사적 인구들을 자연이라는 사실에 뿌리박도록 하며, 이것들의 지속적 존재에 의미를 부여한다. 언어적 공동체는 최근에 와서야 정착되었는데, 국민어(langue nationale)는 일반화된 학교기능을 통해 주입된다. 이 때문에 국민형성과 인민적 제도로서 학교의 발전 사이에는 긴밀한 연관이 있다. 학교는 국민주의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장소이자 민족체를 언어적 공동체로 산출하는 일차적 제도이다. 모국어 또는 공통의 기원이라는 이상은 국민성원들이 서로 느끼는 애정의 은유가 된다. 그런데 언어적 공동체는 민족체의 생산에 불충분한 것으로, 이는 언어적 기표의 역설적 본성에 관련된다. 모든 호명은 언어의 수준에서 일어나고, 모든 개인은 언어라는 요소 속에서 호명된다. 동일성의 언어적 구성은 정의상 열려 있는 것으로 (누구도 모국어를 선택하거나 바꿀 수 없지만) 여러 언어를 영유하는 것이 항상 가능하다. 언어적 공동체는 가공할 정도로 제약적인 민족적 기억을 이끌어내지만 또한 동시에 이상한 가소성을 지닌다. 모국어는 반드시 실제 어머니의 언어는 아니다(이민 2세대의 예). 언어적 공동체는 이 공동체가 항상 존재했다는 감정을 주는 그러나 후속 세대들에게 숙명적으로 해당 언어를 사용하도록 강제하지는 않는 현재의 공동체이다. 이상적으로 그것은 누구라도 동화하지만 누구도 붙잡지 않는다. 따라서 특정 인민의 경계 안에 고착되기 위해서 언어적 공동체는 비상한 특수성 또는 폐쇄 내지 배제의 원리를 갖춰야 한다.

바로 이것이 인종공동체의 원리이다. 문제는 (언어적 공동체와 다르게) 정치적 단위를 구성하는 모든 개인들에게 공통적인 실천일 수 없다. 언어적 공동체가 언어적 실천의 사회적 불평등을 자연화함으로써만 개인들의 평등을 창출할 수 있는 반면, 인종공동체는 사회적 불평등을 더욱 양가적인 유사성 속으로 해소한다. 이는 사회적 차이에 진짜로 국민적인 것과 가짜로 국민적인 것 사이의 분할의 형태를 부여함으로써 사회적 차이를 민족화한다. 인종 관념의 상징적 핵심은 혈통의 도식, 즉 개인들의 친자관계는 세대에서 세대로 생물학적이고 정신적인 실체를 전달하고 그럼으로써 친족이라 불리는 시간적 공동체 속에 기입된다는 관념이다. 이 관념은 사적 족보들의 경향적 소멸과 상관적인 것으로, 인종공동체 관념은 친족의 경계가 상상적으로 국민의 문턱으로 이전될 때 출현한다. 즉 인종공동체는 자신을 하나의 거대가족 또는 가족관계로서 표상하는 경향이 있다.

 

학교와 가족

최근의 가족의 역사에 관한 논쟁들이 놓치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 결정적인 문제, 확대된 친족의 해소와 국민국가의 개입에 의한 가족관계의 침투 사이의 상관관계라는 문제이다. 오늘날 친척관계, 인척관계에 대한 기록을 구성하고 보관하는 것은 국가이다. 국가의 가족정책, 인구학적 기법들, 공중보건, 사회보장 등의 등장은 가족의 국민화, 곧 국민적 공동체를 상징적 친족으로 만드는 것이다. 부르주아 가족과 국민형태를 취하는 사회의 상호관계 속에 우생학이라는 관념이 잠재해 있는 것이나 국민주의가 성차별주의와 은밀한 근친성을 갖는 것, 또한 국민주의를 부족주의(traibalisme)로 표상하는 것이 기만적인 동시에 폭로적(revealing)인 것도 이 때문이다.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의 중심이 가족-교회 쌍에서 가족-학교 쌍으로 이전했다고 했을 때 옳았다. 이에 두 가지 교정이 필요하다: 특정의 한 제도가 자체로서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이라는 표현이 지시하는 것은 ‘몇몇’ 지배적 제도들의 결합된 기능수행이다. 또한 학교교육과 가족의 중요성은 단지 노동력 재생산에만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이 재생산을 의제적 민족체의 구성, 즉 인구정책(푸코가 생명권력이라고 부르는 것)에 함축된 언어적 공동체와 인종공동체의 절합에 복속시킨다는 점에 있다. 이 점에서 부르주아 사회에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적 장치는 국민주의의 헤게모니를 갖는다.

소견: 언어와 인종 사이의 절합이나 상호보완성이 조화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언어적 민족체와 인종적 민족체는 어떤 의미에서 배타적인데, 언어적 공동체는 열려 있는 반면 인종적 공동체는 원리상 닫혀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럽건설은 의제적 민족체의 산출과 관련하여 공언어주의(colinguisme)의 확립을 지향할 것인가 아니면 유럽적인 인구학적 동일성을 이상화하는 방식을 지향할 것인가. 민족화의 국민적 과정의 산물인 모든 인민은 관국민적으로 교통이 이루어지는 세계 속에서 배타주의나 동일성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날 길을 찾도록 요구되고 있다. 모든 개인은 자기 인민이라는 상상이 변형되어가는 과정에서 다른 인민들에 속하는 개인들과 교통하기 위해 이 상상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단들을 찾도록 요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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