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인간은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걸, 그 외엔 아무것도 없다는 걸. 독창적인 책이건, 보잘것없는 책이건, 그야 무슨 상관이 있나. 하지만 아무것도 쓰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잊혀질 걸세. 그런 사람은 이 세상을 흔적도 없이 스쳐지나갈 뿐이네. (2부 타인의 증거 p133)

3권은 아직 보지 못했지만 오랜만에 몰두해서 보고 있는 소설에서 따온 구절. 정말 소문대로 매혹적인 소설이다. 정말로 성긴 인상이지만, 밀란 쿤데라, 마르그리트 뒤라스, 에밀 아자르 등을 섞어놓으면 이런 소설이 나올까 싶다. 특히 위 구절에 저절로 눈이 갈 수 밖에 없었던 까닭은 도서관에서 먼저 이 책을 빌린 누군가가 이 구절에 겹낫쇠를 그려놓았기 때문이다. 공공도서관 책에 그려진 밑줄이나 낙서는 대개 짜증스럽지만, 가끔씩은 내 책이었다면 표시해두고픈 그런 구절들의 일치를 발견할 때도 있다. 그럴 때 느끼는 것은 어떤 안도감일까? 책을 읽거나 영화를 봐도 내가 '제대로' 보고 있는 건지, 또는 내 취향은 소통가능한 것인지 의심스러운 순간들의 연속 속에서 말이다(이런 데서 어떤 공통감 같은 것의 확인을 받고 싶은 감정은 어리광이라할지 두려움이라할지 모르겠지만). 또 선반 위에서 얼마나 오래도록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채로 있었을지 모르는 책들을 펼쳐볼 때의 주눅드는 마음이 가끔은 작은 낙서, 밑줄 하나에 누그러질 때도 있다. 어제 이 책을 읽고 난 뒤 아까 본 케이블 티비에서는 '빅 피쉬'를 틀어주고 있었는데 마침 이런 식의 대사가 흘러나온다. "사람이 자기 이야기를 많이 하다보면, 자신 자체가 하나의 이야기가 되어, 영원히 죽지 않는다, 운운" 이런 식으로 펼쳐지는 우연한 마주침, 하다못해 한번의 움직임으로 원하는 페이지를 펼쳤을 때의 느낌까지도. 가끔 이런 데서 책읽기의 소소한 즐거움을 발견할 때도 있다. 어쩌면 너무 오랫동안 이런 즐거움을 잊어버리고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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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시도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에 생긴 문화상품권으로 황인숙의 자명한 산책을 샀고, 얼마전에는 구두솔, 휴지, 수건 따위를 사야되는 개인용품비를 김경주와 문태준의 최신 시집을 사는 데 쓰기로 했다. 사실 이건 강요된 선택일 수 밖에 없었는데, 명색이 문화관광부 매점이란 곳이 서점은 또 엄청 초라하여 시집이라고는 달랑 이 두 권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팔리는 시집이란 뜻일까?) 그래도 한번쯤 읽고 싶었던 시집이여서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침상 옆에 이 세 권의 시집을 놓고 나니 남은 몇 달간의 잠자리가 조금은 덜 쓸쓸해지지 않을까 싶어 흐뭇하다. 사실 이건 사족이고...

 

 

 

 

 

흠 우연히 여기를 지나가시는 여러분, 혹시 두고두고 읽어도 좋을만한 괜찮은 시집 아시는 거 있으면 추천 좀 부탁드릴게요 (<-사실 이 말을 하고 싶어서 잡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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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02 0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8-02 08: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기인 2007-08-02 0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손택수 '호랑이 발자국' 추천입니다. :)

sandcat 2007-08-02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정례의 시집들을 추천합니다.

바라 2007-08-03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남겨주신 분들 모두 감사드립니다. 제가 시를 별로 못 읽어봐서 취향이라고 할 만한 게 아직 없네요 ㅎㅎ;; 말씀해주신 목록들 보관해뒀다가 나중에 꼭 읽어볼게요
 



이 영화 개봉한다는 소리 듣고, 보고싶긴 했지만 여느 때처럼 혼자서 보는 일이 자신이 없어 망설이던 차에 한 친구가 마침 이 영화를 보잔다. 왜 보고싶냐니까 그냥 의무감에 본다는 그 친구는 고등학교까지 광주에서 살았다. 부끄럽게도 난 여태 광주 근처까지만 가 봤다. 치약 같은 건 따로 준비하지 않았는데 영화는 최루성이었고, 그 탓에 영화를 보면서 거의 울어본 적이 없는 나도 (펑펑 통곡을 할 정도는 아니지만) 자꾸만 눈물이 흐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에어콘 때문이기도 했지만 몸은 계속 부들부들 떨렸고 잠시도 등 대고 편안히 앉아서 볼 수가 없었다. 애국가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시민들이 총격을 받는 장면, 잠시의 평화가 찾아왔을 때, 실은 광주 전체가 고립된 후 서로 음식을 만들어먹고 김상경과 이요원이 사과를 나눠먹는 장면, 그리고 마지막, 영혼결혼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퍼지는 장면들이 인상깊었다. 화생방 훈련을 받았을 때처럼 눈, 코에서 물이 자꾸 나와서 마치 훈련 때 가스실에서 갓 나왔을 때처럼 극장 밖으로 두 팔 벌린 채로 뛰쳐나가고 싶었다. 몽둥이질과 총탄과 피칠갑이 난무하는 영화 내내 겁도 나고 화도 나고 나중엔 멍해졌다.

감독이 말하는 것처럼 영화에서 특정한 정치색이 드러나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임진곡도 가사는 나오지 않는다. 이유없이 총격을 당하고,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그것만으로도 싸울 이유는 충분할지도 모른다. 우리를 잊지 말아달라는, 우리를 기억해달라는 말 한마디에서 모든 것이 시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안성기는 "총보다 무서운 건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100억이 넘는 자본의 스펙타클이 두 시간동안 사람들을 뒤흔들어놓은 뒤, 그 감정들의 출구는 어디일까? 한 편의 액션활극, 전쟁영화를 감상하는 듯, 쉴 새없이 떠들던 뒷 자리에 누군가는 둘째치고, 불과 몇 시간만에 점점 둔해지는 나의 신경과 가슴이 더욱 가증스러워 던지게 되는 질문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 총 든 군인이 눈 앞에서 쏘아대는 총알에는 누구나 쉽게 분노하고 시민들에 동일화할 수 있지만, 그보다 중대하고 더욱 분별하기 어려운 폭력들이 27년이 흐른 오늘날에는 과연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오늘에 대해서는 또 27년이, 100억이, 그 이상의 시간과 돈이 필요한 것일까? 그리고 우리는 팝콘과 콜라를 들고 영화관에서 회고조로, 저마다의 참회를, 고해를... 다만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불편한 현실인만큼 쉽게 잊고 억누르고 일상에 젖어들어가는 이 망각증을 어떻게 넘어설까? 어쨌거나 이건 단지 영화일 뿐이라 보람없는 질문일 뿐인가? (데리야마 슈지를 살짝 비틀어) '영화'를 버리고 거리로 나가자?

김상경은 좋았는데 거의 10등신인 거 같은 간호사 이요원과 퇴역 후 택시회사 사장을 하고 있는 왕년의 별 네 개짜리 안성기는 좀 현실감이 떨어지긴 했다. 친구나 조폭마누라 따위보다 많은 사람들이 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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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에 있었던 소통/연대/변혁 사회운동포럼 사회운동시민강좌의 일환이었던 2강의

강연문이다. 이런 강연이 있었는지도 이제 알았는데 요새도 하고 있다. 관심있는 분들은

http://www.pssp.org/bbs/view.php?board=issue&id=462에 가보시면 될 듯.  

시민과 계급 - 87년 이후 한국 정치의 이념과 주체

: 복수의 보편적 적대들의 절합을 사고하기

                                                      서관모(충북대)







1. 시민운동 담론의 계급적 성격




한국의 사회운동에서 80년대에 번성하던 계급 담론은 90년대에 들어 쇠락하였고, 계급적대의 문제설정은 주변화하였다. 목하 시민사회 담론은 세계적으로 번성하고 있지만, 그 번성은 특히 미국에서 두드러지는 현상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대의 시민사회 담론의 발생지로서 70, 80년대에 그 담론이 만개했던 동유럽에서는 1990년대 중반에 이르면 비판적인 시민사회 담론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90년대에 시민사회 담론이 폭발한 곳은 다름 아닌 미국이었다. 미국에서 “시민사회 개념은 지식인, 언론인, 전문가, 정치가, 종교지도자, 노동조합원 그리고 최고경영인들 모두의 관심을 끄는 부분이 되었다”(에렌버그, 2002: 23; 365).

미국에서와 달리 한국에서 ‘시민사회의 확산을 요청’한 것은 정치지도자들이 아니라 ‘시민운동’이라는 사회운동의 활동가와 지식인이며, 따라서 시민사회 담론의 성격을 주로 결정하는 것은 이 시민운동들의 성격이라 할 수 있다. 이 시민운동에서 통용되는 시민사회 담론들은 미국식의 (신)자유주의적 시민사회 담론으로 환원되지 않는 진보적인 요소들을 내장하고 있다. 그러나 시민운동들이 제도화되어 가고 국가에 포섭되어 가면서 한국의 시민사회 담론도 자연히 미국식의 자유주의적 시민사회 담론에 수렴해 왔다.




“시민의 힘이 세상을 바꿉니다”(참여연대).

그러나 세상을 바꾸는 시민은 누구인가? 한국의 시민운동은 처음부터 ‘신사회운동들’도 얼마간 포괄하고 있지만, 그 주요부분은 구미에서는 많은 경우 정당들을 비롯한 정치조직들에 의해 수행되어 온 운동들을 포함한 전통적 사회운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이 시민운동의 주요부분은 미완의 부르주아 혁명(‘시민혁명’)의 과제를 정당정치적 운동이 아닌 방식으로 완수하고자 한 60년대 이래의 일본의 市民運動과 통하는 바가 있다. 일본의 市民運動은 본래 부르주아 민주주의 즉 자유민주주의를 제대로 달성하자는 운동이었고 이러한 이념적, 정치적 기조 위에서 여러 영역으로 확장되어 온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시민[bourgeois]혁명’을 거치지 않고 하루아침에 ‘신민[subject]’에서 ‘시민[citizen]’이 되어버린 일본국민이 진정한 ‘시민’으로 거듭나는 것은 곧 서구의 ‘시민혁명’과도 같은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여겨졌다”(한영혜, 2001) 한국의 시민운동의 기조도 이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시민운동이 이렇게 정치적으로 자유민주주의를, 경제적으로 합리적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데 ‘시민사회’ 개념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다만 특정한 정세 속에서 계급운동과 구별정립하기 위하여 시민운동이 이 용어를 활용한 것이다.

시민운동은 스스로를 ‘시민들의 운동’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한국과 일본에서 ‘시민’은 다의적인 용어이다. bourgeois, civic/(of) citizen, civil이 구별되지 않고 모두 ‘시민’으로 지칭되니 혼란을 낳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이 시민들의 사회를 ‘시민사회’로 이해하니 혼란은 극에 달한다.

citizen은 ‘정치적 주체’, 즉 정치에 대한 보편적 권리의 소유자, 정치체의 구성자이다. 시민운동이 이 ‘citizen으로서의 시민’의 운동이라면, 그것은 예컨대 자유, 평등, 소유 등을 비롯한 ‘시민의 권리’(rights of citizens, civic rights/droits du citoyen)를 위한 정치적 운동, 즉 국가영역 외부의 운동이 아니라 정확히 국가영역 내부의 운동이 된다. 한국의 ‘시민운동’ 진영은 ‘시민사회’를 ‘시민들의 사회’로 파악하고, 따라서 자신을 국가 외부의 시민사회의 운동, 비정치적 운동, 초계급적인 운동인 것처럼 규정한다.

우파 시민운동을 대표하는 경실련은 “지금까지의 재야운동이 설정해 왔던 주체와 운동방식이 달라져야 한다”고 종래의 ‘민중운동’ 내지 ‘민족민주운동’을 비판하면서 “특정한 계급, 계층이나 집단의 이기주의를 떠나서 공공선을 추구하는 시민”들이 “주체”가 되는 운동을 표방하였다(신철영, 1995). 즉 운동의 성격을 그 운동의 ‘주체’의 속성을 통하여 규정한 것이다. 이렇게 민중운동을 계급 이기주의적 운동으로, 자신을 초계급적인 공공선을 추구하는 운동으로 규정하는 시민운동의 담론은 정확히 부르주아적 담론, 맑스와 엥엘스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지배적 형태로 간주하는 ‘법적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담론, 그것도 극도로 반동적이고 퇴행적인 담론이다. 법적 이데올로기의 핵심은 사회계약의 이데올로기요, 자유ㆍ평등ㆍ소유 등 인권의 이데올로기이거니와(발리바르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지배적 형태를 경제의 자동성 관념을 핵심으로 하는 ‘경제적 이데올로기’라 보지만, 이것은 일단 논외로 한다), 시민운동의 담론은 이러한 부르주아 인권 담론조차 퇴행시키고 축소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운동, 농민운동을 비롯한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이 그 운동의 이른바 “주체”(운동의 현실적 및 잠재적 참여자)의 계급ㆍ계층적 소속에 따라 계급적 성격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근본적으로, 계급은 계급성원들의 합이 아니다. 계급(의 동일성)은 계급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계급적 실천의 효과이다. 민중운동의 ‘민중’은 계급적 범주이지만 시민운동의 ‘시민’은 계급적 범주가 아니기에 두 운동의 “주체들”의 계급ㆍ계층귀속이 확연히 구분될 수도 없다. 중요한 것은 각 운동의 노선의 계급적 내용이며, 각 운동을 장악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이다.

시민운동의 주체로서의 ‘시민’, 즉 시민운동 참여자나 잠재적 참여자로서의 ‘시민’(‘시민’①)은 정치적 주체로서의 시민(시민②)과 동일한 범주가 아니다. 대한민국 국민은 모두 시민이며, 정치적 권리의 형식적 제한과 관련하여 이른바 프랑스 혁명 이후 분류되던 ‘능동적 시민’과 ‘수동적 시민’의 법적 분할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시민운동 진영의 담론에서 시민운동의 주체로서의 ‘시민’과 정치적 주체(권리 주체)로서의 시민이라는 범주적으로 전혀 다른 시민이 같은 “시민”으로 취급되며, 자신의 필요에 따라 왔다갔다하며 사용된다. 이러한 용어법 속에서 시민운동의 주체(참여자)로서의 ‘시민’(‘시민’①)이 정치적 주체로서의 시민, 시민성(citizenship[시민권])의 담지자로서의 시민(시민②)과 사실상 동일시된다. 그리하여 노동운동의 ‘주체’로서의 노동자는 시민운동의 ‘주체’가 아니라는 이유로 사실상 ‘시민’ 자체가 아닌 것으로 된다. 시민운동 참여자를 뺀 민중 일반에게서 시민권/시민성이 사실상 박탈되는 것이다. 이것은 부르주아적 한계를 벗어나는 사회운동들은 물론이고, 부르주아적 한계 내에 있지만 그 한계와 항상 충돌할 수밖에 없는 사회운동들의 ‘시민권’ 박탈, 즉 정치적 권리 박탈을 뜻한다. 적어도 이러한 면에서는, 그러한 시민운동 담론은 구자유주의의 기준에도 미달하는 퇴행적인 것이다.

이러한 시민운동 담론은 심대한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낳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한국사회에서 노동자, 민중의 시민성/시민권을 억압하는 효과, 민중운동을 억압하는 효과를 낳는다. 시민권/시민성 개념의 확장이 사회운동의 근본적인 과제의 하나가 되는 현재의 정세에서 이러한 시민 개념을 둘러싼 투쟁은 첨예한 계급투쟁의 요소이다. 그러한 ‘시민’ 개념을 구사하는 시민운동 담론은 구자유주의적 기준에도 미달하지만, 독점 부르주아지의 첨단의 신자유주의적 기획의 관철에 대단히 유효하게 복무한다. (cf. RB, LB, PtB 개념).

물론 이러한 효과의 상당부분은 언어적 제약에 의한 비의도적, 비의식적인 것일 수 있다. 부르주아적 운동을 ‘시민’의 운동과 동일화하고 민중과 민중운동의 시민권을 박탈하는 것이 적어도 시민운동 지도부의 본래의 의도에 의한 것이 아니라, bourgeois와 citizen을 함께 ‘시민’으로, bourgeois와 civic을 함께 ‘시민적’으로 표기하는 용어법에 의한 것일 수 있다는 말이다. 이 점에서 책임은 시민운동 진영에만 돌아가지 않는다. ‘시민’이라는 용어가 이렇게 터무니없이 착취되도록 허용한 민중운동의 책임과 역량의 문제를 인정해야 한다. 단, 새로운 개념을 발명하고 통용시키지 못한 책임의 주된 부분은 진보적 지식인들에게 돌아간다.




2. 시민사회 용어법의 기만과 의의




1970, 80년대 동유럽 반체제이론가들에게 시민사회는 “그 안에서 자주관리와 민주주의가 작동할 수 있고 국가로부터 자율적인 사회활동 공간”이었다. 그러나 1989년 이래 동유럽에서 부활한 것은 그러한 시민사회가 아니라 자본주의였고, 그리하여 진보적 시민사회 담론은 자연히 소실되었다. 1989년 이후 시민사회의 개념적 지위는 더 이상 국가권력에 항거하는 “민주적 참여의 본거지”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의 단순한 보조역”으로 달라졌다. 시민사회의 역할은 이제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와 자유시장경제를 구성하고 보존하는 것”으로 된 것이다(베이커, 2000: 220-221). 시민사회는 이제 주로 여러 가지 비국가기구를 묘사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1980년대 말 이래 번성해 온 미국의 시민사회 담론에서도 이와 흡사한 시민사회 개념이 사용된다. 여기서는 “국가와 시민 사이에 존재하는 중간조직(intermediate organization)”으로 이해되는 토크빌주의적 시민사회 개념이 사용된다(에렌버그, 2002: 13).

근래의 동유럽이나 미국의 경우와 유사하게, 한국의 시민운동 진영도 시민사회를 사실상 시민운동 조직들로, 시민운동 참여자나 잠재적 참여자들의 집합체로 이해한다. 시민사회(civil society)를 말하자면 특정한 시민들(시민 일반이 아니라 ‘시민운동’에 참여하는 시민들)의 집합체로 이해하는 것이다.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자율적 행위의 ‘영역’이라는 전통적인 시민사회 개념이 사용된다. 행위자로서의 시민사회 개념과 행위영역으로서의 시민사회 개념이 동시에 사용되는 것이다. 이렇게 시민사회를 행위영역으로만 이해한다면, 이 시민사회에서 시민운동들, 시민운동 참여자들이 특권적인 지위를 갖기 어렵다. 시민사회를 집합적 행위자로, 즉 일종의 ‘시민들의 사회(집합체)’와 같은 것으로 규정함으로써 시민운동 진영은 자신에게 사회의 대표자라는 특권적 지위를 부여하고, 동시에 시민사회를 비국가적이고 따라서 비계급적인 자율적인 행위 영역으로 규정함으로써 자신들에게 초계급적 보편성을 부여한다.

시민사회를 집합적 행위자로, 즉 시민운동 단체들, 시민운동 참여자들의 의미로 사용하면 시민사회에는 자연히 자율성, 공공성 등 긍정적인 ‘시민적’ 속성 내지 덕목이 지배하는 것으로 이해되게 마련이다. 다수의 시민사회론자들은 ‘시민사회’를 이렇게 긍정적인 것으로 만든 다음에 슬그머니 이 시민사회 개념을 행위영역으로서의 시민사회 개념에 결합시킨다. 그리하여 예컨대 국가영역, 경제영역과 구분되는 저 행복한 시민사회 영역, 즉 자유, 평등, 자율, 공공성이 지배하고 이해대립도, 강제도, 적대도 없는 영역이 발명된다. 자본주의 국가와 경제가 불가불 얼마간 문제가 있는 것이라 해도 이러한 시민사회가 있으니 세상은 살 만한 곳이 된다. 이러한 이중적, 양의적인 시민사회 개념은 계급대립을 가리는 효과적인 장치가 된다.

이러한 시민사회 개념에 앞서 80년대 한국의 진보학계에서는 그람시의 시민사회 개념이 소개되었다. 이어 80년대말 시민운동, 시민사회 담론이 민중운동, 민중운동 담론과 구별정립하며 등장할 때 널리 수용된 시민사회 모델이 ‘국가/시민사회/경제’의 3분법을 채택하는 코언(J. Cohen)과 아라토(A. Arato)의 모델이다. 시민사회 개념의 수요자인 시민운동 진영이 추구한 것이 쇄신된 자유주의, 자본주의였기 때문에 동유럽 시민사회 이론의 초기 유형인 ‘사회주의적 시민사회론’은 자연히 관심대상이 되지 못하였다.

시민사회에 대한 이론적 논의에서 당초에 미국식의 시민사회 개념(‘국가와 시민 사이에 존재하는 중간조직’ 내지 ‘비국가기구’)이 처음부터 자리잡지 못한 이유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시민사회 개념이 일정하게 진보적인 시민운동과의 관련 속에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민운동의 제도화, 우경화 과정에서 미국식 시민사회 개념이 지배적인 것으로 되었다.

한국의 시민운동 진영 내에서 좌파에 속하는 논자들, 즉 좌파 시민사회론자들은 대부분 코언ㆍ아라토류의 국가/시민사회/경제의 3분법을 채택한다. 코언ㆍ아라토는 이러한 이론틀은 “경제적 자유주의냐 국가주의냐라는 양자택일을 벗어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주장은 주장일 뿐이다. 스스로를 민중운동과 구별정립하려 한 한국의 시민운동이, 다시 말해 맑스주의 이론과 사회주의 이념에 대해 선을 긋지만 단번에 신자유주의로 넘어갈 수도 없었던 시민운동의 활동가들과 이론가들이 이러한 ‘3분법적 이론틀’에 매료된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전통적인 시민사회 개념은 홉스와 로크(정치사회로서의 시민사회), 스미스(경제사회로서의 시민사회), 헤겔(욕구의 체계로서의 시민사회), 초기 맑스, 특정 시점의 그람시(헤게모니의 장소로서의 시민사회), 하버마스, 킨, 코언․아라토 등 그 누구의 경우에도 사회적 영역을 지시하는 것이지 행위자, 세력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국의 시민운동 진영의 시민사회론자들은 이러한 행위자로서의 시민사회 개념을 일반적으로 사용한다. 시민사회를 행위자로 파악할 경우 민주화의 전략으로서의 ‘시민사회의 발전, 활성화’라는 것은 ‘시민운동의 발전, 활성화’와 같은 의미가 된다. 한 걸음 나아가 ‘시민사회의 활성화’는 ‘비정부기구(NGOs)의 활성화’와 동일한 것이 된다.

state/civil society의 2분법 속에서든, state/civil society/economy의 3분법에서든 정치적 주체로서의 citizen이 속한 곳은 city(civitas), 즉 state(civitas)이다. state는 city의 다른 이름이다. 그리고 정의상 우리의 시민사회론자들은 반대로 시민, 시민세력을 시민사회(civil society)에 귀속시킨다.

시민운동 진영이 왜 집합적 행위자로서의 시민사회, 즉 ‘특별한 시민들의 단체로서의 시민사회’라는 미국식 개념을 수미일관하게 쓰지 않고, 그 개념과 전통적인 civil society 개념 사이를 편의에 따라 오가는 곡예를 부리는 이유는 자명하다. 그것은 앞에서 말한 대로 시민운동을 단지 ‘국가로부터도 자유로울’ 뿐 아니다 또한 경제로부터도 자유로운 운동’, 즉 ‘공동선’을 지향하는 초계급적 운동으로 이상화시키기 위함이다. 민중운동이 계급적, 당파적임에 비해 시민운동은 초계급적, 초당파적임을 주장하는 데 시민사회 개념의 이러한 이중적 사용은 더할 나위 없이 유용하다.

이러한 용어법 상의 기만(의도 여부와 무관한 현실적 기만)은 체제내 포섭의 진전에 따라 부분적으로 약화되어 간다. 시민사회를 국가 및 경제와는 별도의 영역으로 범주화시키는 것은 자본주의 국가 및 경제에 대하여 얼마간은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을 뜻한다. 시민운동이 점점 더 신자유주의에 포섭됨에 따라 그러한 문제제기는 약화되어 가며 따라서 국가/시민사회/경제라는 도식 자체가 점차 불필요하게 된다. 그리하여 논리상 문제가 있는 종래의 양의적인 시민사회 개념 대신에 시민사회를 ‘국가와 시민 사이에 존재하는 중간조직’으로 설정하는 미국식 시민사회 개념이 점차 지배적이게 된다. 즉 시민사회가 ‘저항적, 자율적’일 필요가 없게 됨에 따라 시민사회는 사실상 NGO와 같은 의미로 이해된다. 이 과정이 진전될수록 시민사회 담론은 더 이상 진보와 무관한 것으로, 신자유주의적 담론으로 된다. 다만 기만적 필요에 따라 영역으로서의 시민사회 개념이 계속 착취될 뿐이다.

시민사회 개념이 여전히 진보진영에서 사용될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경우 그 개념은 근본적인 의미 전화, 문제설정의 전환을 거쳐야 할 것이다. 그람시의 예가 그 중 하나이다. 맑스 자신은 초기에 ‘국가/시민사회’의 장소론(토픽)을 사용하다가 곧 ‘토대/상부구조’라는 장소론으로 이행한다. 시민사회라는 용어는 더러 사용했지만 ‘국가/시민사회’의 토픽 자체는 기각한 것이다. 그람시는 맑스의 도식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헤게모니의 문제설정을 도입하여(헤게모니=강제+동의) 국가 개념을 확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고전 맑스주의자 중에서 가장 나아간, 사실상 유일하게 나아간 그람시의 헤게모니의 문제설정 자체가 여전히 ‘의식의 철학’과 따라서 ‘주체의 철학’에 머물러 있음에 비해 알튀세르는 무의식적인 것으로서의 이데올로기의 문제설정 위에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개념을 도입한다)1).

현재 한국에서 몇 명 남지 않은 좌파 시민사회론자들은 다른 각도에서 시민사회 개념의 비판적 의의를 찾는다. 그들은 시민사회가 계급적대로부터 자유로운 영역이 아니라고 파악한다는 점에서 출발점에서는 자유주의적 시민사회론자들과 준별된다. 그들은 맑스주의의 계급적대의 총체화(사회적 관계들의 계급관계로의 환원)를 비판하고 사회적 적대들 내지 갈등들의 복수성을 파악하기 위한 수단으로 시민사회 개념을 사용한다.

전통적 맑스주의의 맹목이었던 이러한 현실을 파악하고자 한 그들의 의도 자체에는 훌륭한 점이 있다. 문제는 그들이 이러한 갈등들의 발생의 영역을 시민사회로 국지화시키고, 따라서 시민사회를 그 해결의 영역으로 특권화시킨다는 데에 있다. 그 결과 갈등들의 해결을 위한 운동들은 시민사회 내의 운동들, 시민운동들이 된다.




“시민사회는 경제로 환원될 수 없는 다양한 사회적 관계들을 내포하고 있다. … 시민사회는 단순히 계급적대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쟁점들을 둘러싸고 다양한 세력들 간의 다양한 적대들 ― 예를 들어 지역, 환경, 성, 민족, 소수자 등 -― 이 형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계급환원론적 시각으로 포괄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영역이다.”(조희연․정태석, 2001)

“… 시민사회는 내적으로 다양한 적대와 갈등을 내포하고 있는 다원적이고 복합적인 시민적 삶의 공간이다. … 다양한 적대의 존재는 시민사회에서 다양한 사회운동을 발생시키며 민주주의 의식과 계급의식 등의 발전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사회를 변화시킨다고 할 수 있다”(조현연․조희연, 2001: 358).

 

맑스주의가 이들의 이러한 문제제기의 긍정적인 측면에 답변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여기에 답한다는 것은 계급적대를 총체화시키지 않으면서, 다시 말해 보편적인 적대의 복수성을 승인하면서 계급적대의 문제설정을 견지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의 이론구조를 단순히 비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회적 관계에 대한 이들의 이해는 고전적인 맑스주의에도 현저히 미달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주장은 경제가 계급관계만을 내포하고 따라서 계급운동만을 발생시킴에 비해 시민사회는 계급적대와 함께 여타의 다양한 사회적 적대를 내포하므로 다양한 사회운동을 발생시킨다는 것이다. 이 다양한 사회운동이란 결국 “시민사회의” 이러저러한 사회운동들, 즉 “시민운동들”을 지칭한다. 요컨대 그들은 계급적대를 부정하지 않지만, “시민사회에서 전개되고 있는” “운동정치”, 즉 “시민운동의 정치로서의 시민정치”를 특권화시키기 위하여 이러한 시민사회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렇게 시민사회에 국지화되는 운동은 결국 퇴행적인 자유주의적 시민운동 진영이 그리는 시민운동과 수렴하게 된다.

과연 다양한 적대들은 시민사회에만 ‘형성되어’ 있고 반면 경제에는 계급적대만이 형성되어 있는가? 가령 성별 적대는 국가 영역, 경제 영역에서는 작동하지 않는가? ‘지역, 환경, 민족, 소수자’와 관련된 적대들 역시 시민사회에서만 작동할 뿐 국가 영역, 경제 영역에서는 작동하지 않는가? 그리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다양한 사회운동은 시민사회에서 시민운동으로서만 발생하고, 국가 영역, 경제 영역은 이러한 사회운동이 발생하지 않는 영역인가? 계급관계, 성별관계, 소수자-다수자관계, 지역 및 환경과 관련이 있는 사회적 관계 등은, 따라서 계급적대를 위시한 사회적 적대들 내지 갈등적 관계들은, 사회 전영역을 가로지르며 전영역을 통하여 작동하는 것이지 국가, 시민사회, 경제와 같은 사회의 어떤 부분영역에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사회운동들은 사회 전영역에서 일어나는 것이지 예컨대 시민사회라는 사회의 특정 영역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시민운동들을 시민사회에 국지화된 운동으로 사고할 수 있는 것은 첫째, 그들이 사회적 관계는 사회의 전영역을 가로질러 형성된다는 것을 무시하거나 몰이해하기 때문이고, 둘째, 그들이 시민사회를 행위 영역으로서 파악하면서, 동시에 그것과 양립불가능하게, 행위자로서 파악하기 때문이다.

아주 쉽게 말해 보자. 국가/시민사회/경제이든, 경제/정치/이데올로기이든, 이들은 사회적 행위의 일정한 기준에 따라 구획해 놓은 영역들이다. 모든 개인은 이중 특정 영역의 행위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영역의 행위를 한다. 누구나 경제적 행위, 정치적 행위, 이데올로기적 행위를 수행한다(노동자-자본가, 여자-남자, 유식자-무식자, 동성애자-이성애자, 한국민-이주민 등등). 즉 어떤 개인은 경제영역에 속하고 어떤 개인은 정치영역에 속하고, 어떤 개인은 이데올로기적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가령 한국의 5천만 인구중 1천만명은 국가영역에, 1천만명은 시민사회 영역에, 3천만명은 경제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5천만명 모두가 이들 영역 모두에 속하다. 마찬가지로 사회적 적대 내지 갈등의 관계는 이들 구분된 특정 영역에 한정되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들 전영역을 관통하여 형성되고, 적대와 갈등은 이들 전영역에서 발생한다. 한국의 시민운동, 시민사회 담론은 행위영역과 행위자라는 기본적인 구분을 지키지 않고 자의적으로 양쪽을 오간다.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의 핵심을 이루는 사상의 하나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따라서 계급관계가, 무구별하게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관계라는 것,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서 수용되고 있는 의미에서라면 ‘경제적’이지도 ‘정치적’이지도 않다는 것이다. 계급관계가 곧 착취관계라 할 때 이른바 ‘정치적’인 지배와 교직(交織)되어 있지 않은 순수히 ‘경제적’인 착취과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계급관계는 ‘경제적’ 관계가 아니며, 계급투쟁은 ‘경제’ 영역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계급관계는 경제적이며 동시에 정치적, 이데올로기적인 관계이며, 계급투쟁은 경제투쟁이며 동시에 정치투쟁, 이데올로기투쟁이다. 시민사회 영역을 따로 설정한다 하더라도 계급관계, 계급투쟁은 마찬가지로 이 영역을 관통한다.

그리하여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간의 계급관계/계급투쟁은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부르주아 정치인들과 일반 민중 간에, 부르주아 정치세력과 좌파 정치세력 간에, 자유주의적 지식인과 사회주의적 지식인 간에, 운동권 학생과 반운동권 학생 간에, 개발업자와 급진적 환경운동가 간에, 보수적 언론과 그에 저항하는 구독자들 간에, 엘리트주의적 문인과 민중주의적 비평가 간에 형성된다.

마찬가지로 예컨대 성별관계 및 따라서 성별적대는 시민사회에서만 형성되고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영역에 걸쳐서 형성되고 작동한다. 그리하여 예컨대 여성운동은 사회 전영역에서 발생하는 것이지 시민사회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환경문제와 관련된 사회적 적대들도 사회 전영역에 걸쳐서 작동한다. 성적 소수자에 대한 억압 역시 시민사회만이 아니라 국가, 경제를 포함한 사회 전영역에 걸쳐서 이루어진다. 이렇게 시민사회를 영역으로 이해하면, 그것은 시민사회는 계급운동 이외의 사회운동들의 특권적 영역이 될 수 없다.

반대로 시민사회를 행위자(들의 조직으)로 수미일관하게 이해하고(토크빌식, 미국식 시민사회 이해), 그리고 이들의 운동을 시민운동으로 이해할 경우에도, 그러한 시민사회/시민운동은 진보진영에게 전혀 특권적 지위를 갖지 못한다. 오직 시민사회의 두 개념 사이를 자의적으로 왕복할 경우에만 그것들에 특권적 지위가 부여될 수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시민사회론/시민운동론은 계급적대 이외의 사회적 적대들도 부르주아 국가와 자본주의 경제의 전화(변혁) 없이는 변혁될 수 없다는 진실을 억압하며, 사회적 관계들을 전화시키고자 하는 진보적인 사회운동들을 억압한다.

요컨대, 맑스의 독창적인 사회적 관계 개념(적대에 의해 구조화되는 사회적 관계, 사회 전영역을 관통하는 사회적 관계)에 입각할 때에 근본적으로 부르주아적인 국가/시민사회라는 도식 또는 국가/시민사회/경제의 도식에서 벗어나 계급적대와 여타의 사회적 적대들의 절합(節合)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 발리바르는 ‘국가/시민사회’의 이원론이 “프롤레타리아 정치의 무덤”이라고 말한 바 있다. 우리는, 그것은 또한 급진적인 여성운동, 환경운동, 소수자운동 등 모든 사회운동들의 무덤이라 덧붙일 수 있다. 국가/시민사회/경제의 삼원론도 본질적으로는 마찬가지이다. 이 삼원론이 곧장 나쁜 국가ㆍ경제와 좋은 시민사회의 이원론으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게 환원되지 않는 삼원론이 있는데, 그것은 부르주아 국가와 자본주의 경제를 개량하자는 자유주의적 삼원론이다. 그 자유주의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3분도식의 일정한 긍정성을 부인하면 안 된다. 반동적 자유주의와 개량적 자유주의를 같이 취급할 수 없다. 한국의 좌파 시민사회론자들이 영역으로서의 시민사회 개념을 수미일관하게 사용하면서 이러한 3분도식을 사용한다면 사회발전에 기여하는 바가 클 것이다.




3. 시민성(citizenship)의 개조와 해방




진보세력이 추구하는 것은 사회적 관계들의 근본적 전화(변혁)이다. 계급적 입장에 따라 사회적 관계를 보는 관점, 다시 말해, 사회적 존재론은 달라진다. 부르주아 진영의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프롤레타리아 진영의 맑스주의의 사회적 존재론을 다음과 같이 간단히 대비시킬 수 있다.




자유주의의 사회적 존재론: 개인주의individualism/원자론atomism

  개인이 사회를 구성. 개인들이 先在하고 이들이 맺는 것이 사회적 관계.

  주체(subject) 개념: 개인 (자유로운 인식자ㆍ행위자ㆍ소유자)

   (인간 개인의 근본적 변혁은 불가능하다.)




보수주의의 사회적 존재론: 유기체론organicism/전체론holism

  개인은 사회의 산물.

  사회가, 즉 사회적 관계가 先在하며, 개인은 이 관계 속에 들어간다. 

  주체 개념에 대립하는 유기적 전체 개념

    (사회의 본성상 근본적 변혁은 불가능하다.)




맑스의 사회적 존재론: ① 관계의 존재론, 또는 관(貫)개체성(trans-individuality)의

         존재론 - “인간의 본질이란 사회적 관계들의 앙상블”.

                     ② 적대의 존재론(사회적 관계는 적대에 의해 구조화된다)

          “계급의 동일성은 계급투쟁의 효과”(알튀세르)

     주체는 주체화(종속화)과정의 산물(cf. 맑스의 법적 이데올로기 비판)

      (역사적 변혁은 필연이다.)        




맑스는 인간사회란 일반적 이익에 토대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적대의 조절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본다(적대의 존재론). 사회적 관계를 사회적 유대로 파악하는 종래의 모든 관점에 대립하여 사회적 관계를 적대적 내지 갈등적 관계로 파악한다. 이 관점은 역사를 만드는 것은 엘리트가 아니라 대중이라는 맑스의 혁명적 입장의 논리적 근거가 된다.

문제는 왜 이러한 이론에 준거한 실천 즉 대중정치가 반대물로 전화했는가, 단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가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독재로 귀결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이론적 요인만 본다면, 대중정치를 봉쇄하고 맑스주의를 파국으로 이끈 이론의 문제는 총체화론적, 목적론적 역사관의 문제로 집약된다. 맑스는 사회적 관계, 사회적 적대를 계급관계, 계급적대로 환원시킨다. 물론 그 반대 경향이 있지만, 지배적인 것은 전자이다. 계급투쟁 내지 계급적대를 총체화시킴으로써, 그는 화해불가능한 적대라는 자신의 구조적 사상의 전개를 스스로 봉쇄한다. 그의 역사변증법 속에서 모순들 또는 적대들은 ‘부정의 부정’의 법칙에 따라 공산주의 속에서 최종적으로 화해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진리/허위의 반정립과, 그것에 토대를 둔 이른바 ‘당의 목적론’이 도출된다. 당이 계급투쟁의 정세적 조직형태가 아니라 본질적 조직형태로 간주되는 것이다.

복수의 보편적 적대의 존재와 그것들의 절합을 이론화시키지 못한 맑스주의 이론의 무능력의 귀결이 유럽에서 반맑스주의적 신사회운동론의 에피소드였다면, 한국에서는 기이한 반이론적 시민사회론/시민운동론의 에피소드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이론화를 시도한 이론가가 에티엔 발리바르이다. 그는 계급적대와 전혀 다른 유형의 보편적인 모순들 혹은 분할들로서의 성의 차이와 지적인 차이라는 근본적인 인간학적 차이를 식별하고, 이 차이들과 계급적대의 절합을 사고하고자 한다.2)

맑스로 하여금 계급적대를 총체화시키도록 한 것은 그가 고전 정치철학으로부터 물려받은 ‘노동의 인간학’이라는 철학적 인간학이다. 노동의 인간학은 노동을 인간의 본질적 실천으로 간주하는 관념이다. 맑스는 노동을 인간과 사회적 관계들의 본질로, 유일하게 적대를 결정하는 근본적 실천으로 간주하기를 멈추지 않음으로써 계급투쟁을 총체화시키기에 이른다. 前期 알튀세르는 모든 ‘철학적 인간학’ 또는 ‘이론적 인간주의’를 비판하고 거기에 ‘인식론적 단절’ 이후의 맑스의 이론적 반인간주의를 대립시킨다. 그에 의하면 이론적 인간주의는 경제주의(발리바르가 말하는 경제적 이데올로기에 근사한 것)와 짝을 이루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핵심을 이룬다. 이러한 입장에 설 경우 문제는 노동과 관련된 적대 즉 계급적대에 맑스주의가 부여하는 특권적 지위가 이론적으로 해명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발리바르는 철학적 인간학의 문제를 다시 제기한다. 노동의 인간학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 없이 맑스주의의 계급적대의 문제설정(노동본질주의+적대의 사상)은 있을 수 없다. 반대로 거기에 머무르면 계급적대의 총체화로 나아가게 된다. 발리바르는 맑스의 노동의 인간학을 기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스피노자적인 ‘교통의 인간학’(인간의 본질=교통communication)으로 보완함으로써, 맑스적 생산양식의 이론과 스피노자적 주체화양식의 이론을 결합함으로써 계급적대의 총체화를 피하면서 계급적대의 문제설정을 유효화시키는 역사이론을 구성하고자 한다. 그것은 경제적 적대와 이데올로기적 적대의 절합 위에 구성되는 새로운 역사유물론 내지 역사적 인과성의 도식이다. 여기서 경제(부르주아적 경제 개념이 아니라 정치와 통하는 것으로서의 일반화된 경제 개념)와 이데올로기(일반화된 이데올로기 개념)는 각각 상대편을 통하여 작동하는, 정치의 두 개의 토대가 된다.

맑스와 스피노자의 결합의 가능성의 토대는 양자가 공유하는, 관계의 존재론의 하나로서의 사회적 관계의 존재론과 적대 내지 갈등의 사상이다. 이것들은 ‘정치에 관한 대중의 관점’의 전제조건이다. 스피노자에게서 사고는 교통과정 안에서만 이루어지며, 진리와 개인 및 대중의 동일성은 이 교통과정 속에서 형성된다. 따라서 지적 해방(진리의 인식)과 관련된 스피노자의 분석의 대상은 사회적 관계가 된다. 그것은 “자신들의 감정들을 통한 개인들의 교통관계”이다. 스피노자에게 사회생활은 교통의 활동인데, 이 교통은 무지의 관계, 미신의 관계, 곧 이데올로기적 적대의 관계에 의해 구조화된다.

발리바르는 적대들에 대한 통합적 이론의 구성이라는 무망한 시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두 개의 보편적 적대의 절합 위에, 계급모순과 지적 차이의 절합 위에 맑스주의를 확장 내지 “일반화”시키고자 한다. 

여기에서 한국의 시민운동들의 실천 내에서 사회주의 이념과 맑스주의 이론이 본질적으로는 맹목이었던 부분들에 대해 성찰해 보자. 이들 여러 운동은 종래 제기되지 못했던 다양한 인권들의 문제를 정치의 영역으로 끌어들인다는 중요한 긍정성을 보인다. 예컨대 여성, 이주민, 성적소수자, 에이즈환자의 권리 등등. 이들의 인권을 위한 투쟁은 맑스가 말하는 ‘사회계약, 인권 등등의 이데올로기’로서의 부르주아 법적 이데올로기에의, 하물며 부르주아적 실천에의 종속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중요한 것은 인권들에 대한 추상적 선언 자체가 아니라, 인권들을 정치적 공동체 속에서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따라서 정치적 공동체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정치적 실천의 차원에서도 ‘인권의 정치’라는 것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것은 부르주아지가 수세기 동안 실천해 온 것이다. 중요한 것은 혁명적인 ‘인권의 정치’이다.

정치적 공동체 속에서 실현되는 인권, 시민으로서 누릴 수 있는 인권, 그것이 citizenship이다. 그러나 그러한 시민권을 누리기 위해서는 먼저 정치적 공동체의 구성원, 시민이어야 한다. 이것 역시 citizenship이라 불린다. 시민됨 내지 시민자격과, 시민으로서의 권리라는 두 차원을 포괄하기 위해 citizenship을 ‘시민권’으로 번역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시민권’이라는 우리말은 이미 시민인 자의 권리라는 뜻을 지니기 때문이다. 가령 ‘시민성’과 같이 양자를 포괄하는 개념이 사용되어야 하고 그리하여 citizenship을 ‘시민권’으로 축소이해하도록 하는 용어법을 지양해야 한다.

이 권리 개념을 무제한 확장하는 것, 이렇게 이해된 권리를 정치적 공동체 속에서 유효하게 실현하는 것, 즉 시민성을 무한히 확장하는 것, 다시 말해 ‘민주주의의 경계의 무한한 확장’, 이것이 바로 해방(liberation)의 내용이요 공산주의의 다른 이름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실제로 사회주의 이념의 주요한 구성요소의 하나가 시민성에 대한, 즉 정치에 대한 보편적 권리에 대한 발본적으로 민주주의적인 이해이다(부르주아적 헌정들에 의해 법률적으로 혹은 사실적으로 그러한 권리로부터 배제되는 사람들에게까지 확대되는 그러한 권리).

프랑스 인권선언(「인간의 권리들과 시민의 권리들의 선언」, 1793)은, 적어도 선언적으로, 인간과 시민을 동일화시킨다. 이 동일화 속에서 모든 인간이 구별 없이 시민성(정치에 대한 보편적 권리)을 갖는다. 그러나 우선 민족국가들로 구획된 현실에서 citizenship은 nationality의 틀에 즉각 갇혔다.

근대 세계에서 계급은 무엇보다도 민족에 의해 과잉결정된다. 근대 정치의 이데올로기적 구도는 한편 추구되는 소유형태에 따라, 다른 한편 추구되는 공동체에 따라 다음과 같이 편성된다.




  부르주아     진영 : 자유주의(자본 소유)        + 민족주의(민족적 공동체)

  프롤레타리아 진영 : 사회주의(노동에 의한 노유) + 공산주의(계급적 공동체)




현실의 역사에서 사회주의는 공산주의라기보다 오히려 민족주의와 결합하였고, 민족주의에 복속하였다. 사회주의자들이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지 못한 것은 전혀 아니며, ‘국제주의인가, 야만인가’라는 슬로건은 1960년대에 새로 등장한 것이 아니다. 민족적 틀 내에 갇힌 시민성을 해방하여 권리의 영역에서 인간과 시민의 동일성을 실현하는 것, 이것은 지금도 변함없이 사회주의의 근본과제이다. 이와 관련하여 사회주의가 자유주의와 공유해 온 국가주의와 일국중심주의의 문제(월러스틴), 경제주의와 민족주의 등 이데올로기에 대한 관념론적 이해의 문제(알튀세르, 발리바르)와 같은 근본적인 이론적 쟁점이 제기된다. 이 두 가지 거대한 이론적 문제를 맑스주의는 전혀 해결하지 못하였다. 이것만으로도 맑스주의를 포함한 종래의 변혁의 이론들은 환골탈태의 개조를 요한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이 선언한 그 자체로 혁명적인 ‘평등한 자유’(인간과 시민의 동일화와 짝을 이루는 평등과 자유의 동일화)라는, 권리에 대한 근대정치적 이념만으로는 부족하다. “근대 정치를 괴롭히는 억압된 모순들”, “평등의 확립에 의해 폐지될 수 없는 차이(모순)”로서의 성적 차이, 지적 차이가 권리 개념에, 시민성 개념에 각인되어야 한다. 해방(자유화)의 내용은 이제 권리의 평등 속에서의 차이의 무화가 아니라 ‘평등 속에서의 차이의 권리’의 생산으로서 전진해야 한다고 본다. 권리 개념의 이러한 전화는 인간학적 차이를 부정하거나 형식적으로 중화시키는 시민성이 아니라 그러한 차이에 의해 과잉결정되고 그러한 차이를 전화시키는 명시적 경향을 갖는, 새로운 시민성 개념을 요구한다. 물론 시민성의 개조에서 적대들을 구성하는 성적 차이와 지적 차이만이 문제인 것은 아니다. 부차적일지라도 중요한 다른 인간학적 차이들이 권리 개념에, 시민성 개념에 각인되어야 한다.

권리 개념과 따라서 정치 개념이 이렇게 재구성될 때 계급 개념, 더 정확히 말해서 계급적대의 문제설정은 그 변치 않는 생명력을 실현할 것이다. 그럴 때에만 시민 개념, 시민성 개념 역시 부르주아 정치의 협소하고 억압적인 제약을 벗어나 해방의 정치의 유효한 무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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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속 FTA 저지 총파업, 모두의 ‘밥상’을 지키는 투쟁
한미FTA 반대 운동의 파업 지지와 지원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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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6월 말로 예정된 민주노총 금속노조의 파업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정부와 보수언론의 공세가 개시되었다. 8일 금속노조가 중앙위원회를 열어 대의원대회의 방침을 재차 확인하자 지배세력도 본격적으로 공세의 수위를 높이고 있다.
특히 정부와 보수언론은 조합원과 노동조합, 완성차 노동자들과 다른 금속노동자들을 분리시켜 노동자들의 단결을 가로막는데 주력하고 있다. 그들은 매년 임단투를 앞두고 정규직 노동자들의 “밥그릇 지키기”라고 비난하더니 이번에는 자동차산업은 한미FTA 수혜산업인데 왜 “밥그릇을 깨냐”며 정규직 노동자들을 위하는 척 한다. 결국 주는 대로 받아 먹어야지 파업은 절대 안 된다는 이야기다. 또한 그들은 파업 찬반 투표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이번 파업이 절차적으로 문제가 있고 조합원의 의사를 반영하지 않은 파업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현행법상 한미FTA 저지를 내걸고 파업을 하는 순간 이는 내부의 어떤 의사결정과정과는 상관없이 ‘정치파업’으로 불법이 되어 버린다. 총회를 갈음할 수 있는 대의원대회에서 파업이 결정된 이후 중앙집행위원회에서 '한미FTA-중앙교섭을 연계한 조합원 찬반투표 방안'으로 변경되었다가 최종적으로 6월 8일 중앙위원회에서 다시 부결되는 과정은 파업을 실질화하기 위한 내부 토론의 과정이었다. 이를 두고 비민주니 뭐니 하기 전에 노동자들의 파업을 ‘정치적’이라는 딱지를 붙여 불법으로 규정하고 탄압하는 스스로의 반민주성부터 돌아 볼 일이다.

한미FTA로 이득을 보는 것은 자동차산업 자본이지 노동자가 아니다

정부와 언론은 한미FTA로 인해 한국의 자동차산업의 수출이 대폭 확대될 터이고 당연히 해당 산업의 노동자들에게 그 이득이 분배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하지만 한미FTA로 한국 자동차의 수출이 큰 폭으로 증가할지도 의문이지만 한국의 자동차 수출 증가가 노동자들의 몫의 확대로 이어질 가능성은 매우 적다. 오히려 한미FTA로 인한 국내외 자동차산업 자본의 세계적 이동의 자유의 확대와 소유권의 안전한 보장은 모든 자동차산업의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하락시키고 권리를 파괴한다. 이미 세계적으로 과잉투자 된 자동차산업의 기업들은 생존을 위해 생산기지를 세계화하여 저임금 노동력을 활용하고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을 강화하고 고용 불안을 자극하여 노동조건을 악화시켜 왔다. 한미FTA, 나아가 모든 FTA는 이러한 흐름을 더욱 강화한다.
현대자동차를 예로 들어 보자. 현대자동차그룹은 2010년 해외공장 생산 규모를 현행 25%에서 50%인 310만대까지 확장하고 국내 공장은 내수를 해외 공장은 현지 판매를 전문화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현재 북미 지역에 수출되는 자동차 중 현지 생산 비율은 이미 절반을 넘었고 더 증가할 전망이다. 한미FTA는 국내 자동차 자본의 미국 진출에 더욱 좋은 환경을 제공할 것이다. 결국 대미 수출의 증가로 인한 한국 현지에서의 자동차 생산의 증가분은 매우 적은 수준일 것이다. 당연히 추가적인 투자, 새로운 고용의 창출분도 매우 적다. 또한 대미 수입의 증가로 인한 내수시장 중심의 국내 공장의 생산량 감소를 고려하면 전체적으로 국내 공장의 물량의 감소와 이에 따른 구조조정이나 인력 감축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더 크다.
한편 쌍용자동차의 사례는 외국인 직접투자의 확대가 노동자에게 미치는 파국적 결과를 잘 보여준다. 중국계 자본인 상하이 자동차에 매각된 이후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은 사측의 지속적인 구조조정을 겪으며 비정규직의 정리해고와 현장 배치전환 등 극심한 고용불안에 시달려 왔다. 파업투쟁은 사측의 자본철수의 위협 속에 어려움을 겪었고 자연스럽게 노동조합 전반의 실리적, 타협적인 경향은 강화되어 결국 현 집행부가 “회사 측이 고용안정과 투자의 약속을 지킨다면 파업을 하지 않겠다”며 굴욕적 합의를 하는데 까지 이르렀다. 한미FTA의 체결로 인한 이러한 초민족적 자본의 권력은 더욱 강력해 진다. ‘이행의무부과금지조항’ 하나만으로도 고용승계 의무, 내국인 일정 비율 고용 의무, 기술이전, 현지생산품 사용 의무 등의 사회적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
이처럼 한미FTA로 인해 더욱 강화될 자본의 세계화는 노동자들의 파업권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유력한 수단을 자본에게 제공한다. 일국에서의 노동자들의 파업이 계속되고 노동조합의 힘이 커지면 생산물량을 해외로 조정해버리면 그만이다. FTA를 통한 투자의 자유화 확대와 투자한 자본의 소유권에 대한 보장은 이러한 자본의 전략을 제도적으로 보장한다. 일부 수출확대 등으로 인한 이득은 노동자 사이의 세계적 경쟁을 활용할 수 있는 자본가에게 돌아갈 뿐이다.

정치 총파업 남발한다? 정치적 투쟁이 부족하다!

물론 농민들이나 경쟁력이 취약한 산업의 노동자들에 비해 자동차산업의 노동자들에게 한미FTA 끼칠 영향이 상대적으로 ‘덜 나쁜’ 수 있다. 비정규직이 늘어나고 노동자대중의 전반적인 소득이 하락하고 있으며 계속되는 노동운동에 대한 공격으로 자신감을 잃은 조합원들에게 FTA에 맞서 싸우는 것보다 당장의 고용안정과 소득의 확보라는 실리적 선택이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 있다. 민주노총의 정치투쟁에 금속노동자들이 또다시 동원되는 것 아니냐는 불만도 있다.
지배세력은 이러한 약점을 적극적으로 파고들고 있다. 일부 조합원들이 노조 게시판에 올린 총파업 반대 글을 근거로 전체 조합원을 동요시키고 완성차 4사의 지부장들이 “금속노조에 투쟁계획을 변경 또는 축소할 것을 건의키로 했다"며 완성차 조합원과 비 완성차 조합원을, 노조와 조합원을 분열시키려 하고 있다. 금속노조는 이러한 보도가 명백한 왜곡보도라며 강력 대응하겠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공세를 막아 내려면, 한미FTA가 노동자들에 미칠 영향을 90년대 이후 본격화된 자본의 세계화 전략과 이에 따른 구조조정의 문제와 결합시켜 보다 구체적으로 선전하고 조합원들을 설득시키고 투쟁의 의지를 고양시켜야 한다. 현대차․기아차의 국내 자본의 세계화 전략, 쌍용차와 GM대우와 같은 외국 자본의 세계화 전략이 노동자들의 노동조건과 고용을 위협하고 노동조합의 힘을 약화시켜 왔음을 생생하게 폭로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자본의 세계화와 해외 노동자들의 착취를 용인하는 대신 국내 노동자들의 고용의 안정과 임금을 방어하고자 했던 독일이나 미국의 자동차 노동자들이 결국은 자신들의 고용과 임금마저 지킬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 현실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자본의 세계화와 이를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FTA나 WTO 등에 대한 전 세계 노동자들의 단결된 투쟁만이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개선하고 단결과 파업에 대한 권리를 지킬 수 있음을 설득해야 한다.
이렇게 한미FTA 반대 투쟁이 가지는 정치적, 경제적 의미를 결합시켜 이른바 정치 총파업에 대한 기층 조합원들의 불만을 넘어서야 한다. 파업투쟁의 요구에 조합원의 보다 직접적인 이해를 대변하는 요구를 끼어 넣는다거나 정치투쟁을 자제하는 것은 답이 아니다. 조합원들의 사기저하와 사회적인 이슈에 대한 관심 하락의 원인은 노조가 ‘정치’적 투쟁을 너무 많이 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조합원들의 이해와 정치적 요구를 결합시키기 위한 교육과 선전, 실천투쟁이라는 ‘정치적’ 과정의 부족, 다시 말해 ‘정치’적 투쟁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6월 총파업 전선에서 밀리면 산별교섭도 없다

파업전선을 교란하는 또 하나의 요소는 산별중앙교섭이다. 지난 12일 열린 금속노조 4차 중앙교섭에서 사용자대표는 “(한미FTA 파업투쟁이) 노사간 불신을 조장하여 향후 악영향을 줄 수 있다. 하루속히 산별교섭의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서라도” 파업을 중단할 것을 요청하였다. 산별중앙교섭 성사를 미끼로 노동조합을 길들이겠다는 속셈이다.
금속노조의 현 집행부는 산별중앙교섭의 성사를 올 해 투쟁의 사활적인 과제로 잡고 이에 모든 힘을 기울여 왔다. 정갑득 위원장은 노동부 장관을 만나고 대기업 임원을 만나면서까지 중앙교섭의 성사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기울여 왔다. 하지만 여전히 대기업들이 꿈쩍도 안 하고 있는 현실은 산별중앙교섭의 성사가 정권이나 자본과의 적당한 타협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없음을 증명하고 있다. 자본은 노동조합을 확실히 길들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거나 아니면 교섭을 요구하는 노동조합의 투쟁으로 인한 이윤의 손실을 감당할 수 없을 때만 교섭에 응할 것이다. 전자는 운동적 관점에서 받아들일 수 없을뿐더러 오늘날과 같은 자본주의의 위기 상황에서 노동자들이 얻을 수 있는 실리도 없다. 답은 당연히 후자다.
문제는 현재의 금속노조가 후자와 같은 투쟁을 조직할 충분한 조직적 역량을 갖추고 있는가에 대해 아무도 자신 있게 답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데 있다. 그러다보니 중앙교섭 성사를 제1의 목표로 삼고 있는 지도부는 적절한 타협을 통해 교섭을 성사시키고자 하는 유혹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중앙교섭 성사의 목표를 현장 투쟁의 활성화, 조합원의 단결과 연대의 강화라는 운동적 목표에 종속시키는 것이다. 또한 한미FTA 총파업이 산별교섭성사를 더 어렵게 할 것이라는 일각의 주장은 산별교섭성사를 절대화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일뿐더러 현실 근거도 없다. 이미 산별교섭성사는 정부와 자본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가가 아니라 산별노조의 투쟁이 그들을 압도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6월 말 한미FTA 저지 총파업은 임단투 승리와 산별노조의 미래를 좌우할 그 첫 번째 싸움터이다. 6월말 한미FTA 저지 파업투쟁의 대중적 성사는 7월 투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가져다 줄 것이다. 반면 지배세력의 공세에 주저앉는다면 산별교섭을 미끼로 노조를 길들이려는 자본의 전략은 한층 더 힘을 받을 것이고 노동조합 내에서도 타협적인 경향이 더욱 강화될 것이다.

금속노조 파업에 대한 사회운동의 지지와 연대가 시급하다

한미FTA 저지 총파업은 노동자들의 이해와 무관한 정치 총파업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이해를 달성하기위한 ‘정치’적 행동이다. 한미FTA 저지 총파업은 일부 노동자의 배타적 이익을 지키는 파업이 아니라 노동자 전체의 보편적 권리를 지키기 위한 파업이다. 한미FTA 저지 총파업은 산별교섭의 ‘폭탄’이 아니라 산별을 통한 노동자들의 단결과 연대를 강화한다는 산별노조의 진정성을 확인하는 시험대이다. 한미FTA 저지 총파업은 일부 노동자의 ‘밥그릇 지키니’나 혹은 ‘밥그릇 깨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밥상’을 지키는 투쟁이다.
지배세력의 공세에 지도부와 활동가들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 더 많은 교육과 선전을 통해 조합원들의 동요를 막고 파업대오를 든든하게 꾸려야 한다. 그동안의 수많은 총파업 투쟁처럼 형식적 조직화, 동원식 조직화가 아니라 그야 말로 ‘정치적’인 조직화가 필요하다.
또한 정부와 언론의 공세에 대한 한미FTA 반대 운동 전체의 적극적인 대응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정부와 언론의 금속노조 총파업 때리기를 비판하고 금속노조를 방어하는 흐름이 미약한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심지어 한미FTA 저지에 앞장서 왔던 프레시안조차 “산별교섭에 실질적인 '폭탄'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내용의 기사를 냈다.("금속노조의 'FTA 총파업', 산별교섭에 걸림돌 되나", 6월 12일자) 하지만 진정 한미FTA를 반대한다면 금속노조의 한미FTA 저지 총파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정부의 공세를 비판하는데 앞장서야 한다. 정부의 칼 끝은 단지 금속노조 만이 아니라 한미FTA 반대 운동 전체를 향하고 있다. 정부의 대대적인 이데올로기 공세 속에서 다소 주춤하고 있는 한미FTA 반대 운동이 이번 총파업 투쟁을 계기로 다시 활성화될 것을 저들은 두려워하고 있다.
금속노조 총파업 투쟁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적극적인 지지와 연대의 의사를 표명하자. 정부를 상대로 금속노조와 한미FTA 투쟁에 대한 탄압을 중단할 것을 요구하자. 민주노총 조합원 나아가 노동자 전체가 한미FTA 반대 운동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자. 노동자와 시민, 정규직과 비정규직, 금속 노동자와 비금속 노동자의 분할을 넘어 6월 한미FTA 저지를 위해 단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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