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인간은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걸, 그 외엔 아무것도 없다는 걸. 독창적인 책이건, 보잘것없는 책이건, 그야 무슨 상관이 있나. 하지만 아무것도 쓰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잊혀질 걸세. 그런 사람은 이 세상을 흔적도 없이 스쳐지나갈 뿐이네. (2부 타인의 증거 p133)
3권은 아직 보지 못했지만 오랜만에 몰두해서 보고 있는 소설에서 따온 구절. 정말 소문대로 매혹적인 소설이다. 정말로 성긴 인상이지만, 밀란 쿤데라, 마르그리트 뒤라스, 에밀 아자르 등을 섞어놓으면 이런 소설이 나올까 싶다. 특히 위 구절에 저절로 눈이 갈 수 밖에 없었던 까닭은 도서관에서 먼저 이 책을 빌린 누군가가 이 구절에 겹낫쇠를 그려놓았기 때문이다. 공공도서관 책에 그려진 밑줄이나 낙서는 대개 짜증스럽지만, 가끔씩은 내 책이었다면 표시해두고픈 그런 구절들의 일치를 발견할 때도 있다. 그럴 때 느끼는 것은 어떤 안도감일까? 책을 읽거나 영화를 봐도 내가 '제대로' 보고 있는 건지, 또는 내 취향은 소통가능한 것인지 의심스러운 순간들의 연속 속에서 말이다(이런 데서 어떤 공통감 같은 것의 확인을 받고 싶은 감정은 어리광이라할지 두려움이라할지 모르겠지만). 또 선반 위에서 얼마나 오래도록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채로 있었을지 모르는 책들을 펼쳐볼 때의 주눅드는 마음이 가끔은 작은 낙서, 밑줄 하나에 누그러질 때도 있다. 어제 이 책을 읽고 난 뒤 아까 본 케이블 티비에서는 '빅 피쉬'를 틀어주고 있었는데 마침 이런 식의 대사가 흘러나온다. "사람이 자기 이야기를 많이 하다보면, 자신 자체가 하나의 이야기가 되어, 영원히 죽지 않는다, 운운" 이런 식으로 펼쳐지는 우연한 마주침, 하다못해 한번의 움직임으로 원하는 페이지를 펼쳤을 때의 느낌까지도. 가끔 이런 데서 책읽기의 소소한 즐거움을 발견할 때도 있다. 어쩌면 너무 오랫동안 이런 즐거움을 잊어버리고 살았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