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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바웃 슈미트
알렉산더 페인 감독, 더모트 멀로니 외 출연 / 기타 (DVD) / 2003년 11월
평점 :
품절
<어바웃 슈미트>는 잭 니콜슨의 열연이 단연 돋보이는 영화라는 게 세간의 평이다 옳다. 아닌게 아니라 잭 니콜슨의 단독 드리블은 현란하기 그지없다. 캐시 베이츠도 이에 못지 않지만 영화를 시종일관 쥐고 흔드는 것은 니콜슨이다. 니콜슨이 없는 <어바웃 슈미트>는 상상하기 어렵다. 이렇게 한 명의 스타에 지나치게 의존한다는 것은 그만큼 영화의 내러티브의 구조가 탄탄하지 못하다는 증좌. <어바웃 슈미트>는 왔다갔다한다. 니콜슨의 드리블에 따라.
니콜슨의 표정을 상기해보시라. 강렬하게 쏘는 눈빛, 교활하게 치켜 올라간 눈썹, 이지적이고 탐욕스런 입술(이 입술은 영화 <배트맨>에서 악당 조커의 안면에서 그 최대치를 연출한다.), 묵직한 중량감을 전해주는 튼실한 몸피, 신중하게 뱉어내는 대사 한 마디, 이 모든 것이 카리스마에 기여한다. 확실히 그의 카리스마는 대단하다. 이 도저한 카리스마는 미국의 패권주의를 연상시킨다.(감독 알렉산더 페인이 정치색을 배제했든 하지 않았든 이 영화는 곳곳에서 미국의 색깔을 드러낸다.)
카리스마는 반성을 시작한다. 이 반성을 냉정하게 몰아칠 생각은 없다. 반성은 많을수록 좋다. 그러나 반성도 버릇이 되면 포즈로 끝날 위험이 있다. 그렇다면 잭 니콜슨의 골격과 거죽을 입은 슈미트의 반성은 충분히 진지한가. 그의 반성에 우린 아무런 조건 없이 감정이입을 할 수 있을까. 애매하다. 슈미트의 반성은 진지하면서 또한 경박하고, 정직하면서도 또한 부도덕하다. 연출이 잭 니컬슨을 따라 왔다갔다했다는 증거다.
니컬슨이 분한 슈미트는 반성을 한다.(하기는 반성이 없는 늙은이는 동정의 여지도 없다. 오늘날, 영화 관객의 대부분이 젊은이들일진대 어떤 영화생산자가 반성도 없는, 뻔뻔한 늙은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랴.) 슈미트의 반성은 이렇게 말한다. 여보, 미안해. 난 당신의 가치를 몰랐어. 난 당신을 식민지로만 알았어. 난 당신의 타자성을 깡그리 무시했어. 당신을, 빨래하고, 청소하고, 요리하고, 새끼 낳아주고, 밥해주는 기계로만 알았어. 계절의 변화처럼 반복되는 그 순환적 노동을 나는 무시했어. 나는 출세가도를 향해 일직선으로만 달려왔어. 그런데 그게 아니지 뭐야. 당신이 없는 날들은 너무 쓸쓸해. 피곤해. 매일 먹는 패스트푸드도 지겨워. 당신이 끓여준 스프를 먹고싶어. 당신이 구워준 빵을 먹고 싶어. 탄력을 잃은 가슴이지만 그곳에 안기고 싶어. 숨결이, 체온이, 대화가 그리워, 나는 혼자야. 그러나 혼자를 자초한 것은 누구도 아니었어. 그것은 나의 에고였어. 나는 위로 받고 싶어. 이렇게 사죄하고 있잖아.
반성하는 카리스마는 동정심을 유발하기 딱 좋은 소재다. 영웅이 속인으로 격하될 때 인간적으로 공감하지 않는 냉혈한은 많지 않다. 니콜슨의 카리스마에 녹아있는 이런 호소는 관객들을 공감시킨다. 실제로 손수건을 적시는 관객들도 있다. 나는 그들이 착한 관객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부모님들이 그렇고, 나의 아내도 그렇다. 반성하고 있는데 무얼 따지느냐, 그들의 소박한 동정심은 슈미트를 심정적으로 보듬으려고 한다. 하지만 쉽게 안아주면 반성은 얕아지기 마련. 참회는 간절할수록 좋은 것이다. 쉬운 용서는 안이한 반성을 나을 뿐이다. 용서하자. 그러나 용서의 시간을 지연시켜 보자. 늙었다고, 퇴직자라고, 자식에게 버림을 받았다고, 쉽게 용서하지는 말자는 이야기다.
타자를 타자로서 인정하겠다는 것, 내 욕망의 대상으로서만 타자를 바라보지 않고, 타자를 욕망하는 주체로서 인정해주겠다는 것, 내 관점과 이데올로기로서 타자를 바라보고 평가하지 않겠다는 것, 이런 것들이 카리스마들이 결여하고 있는 약점이다. 카리스마는 냉정해야 한다. 단호해야 한다. 때로는 타자를 깡그리 무시하는 위압적인 힘이 카리스마를 강화해주는 법이다. 시시콜콜하게 개체성을 인정해주다간 전체를 놓친다. 전체를 휘어잡기 위해서는 하나쯤은 없어도 그만이라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 그것이 패권주의의 상식이다.
슈미트의 아내는, 그리고 슈미트의 딸은, 슈미트의 반성 안에서 충분히 개체성을 인정받고 있는가. 제국으로부터 충분히 독자성을 인정받고 있는가. 슈미트는 여전히 자신의 패권을 행사하려 한다. 딸의 결혼을 방해하고(딸의 결혼까지 좌지우지하겠다니!), 넘볼 걸 넘봐야지, 아내의 옛친구를 구타하고,(망자의 추억마저도 독점하겠다는 슈미트의 욕망이라니!), 그러나 뭐든 되는 게 없다. 그는 늙은 것이다. 그의 시대는 간 것이다. 록 허드슨, 그레고리 팩, 챨톤 헤스톤, 그들이 연출하던 카리스마의 시대는 갔다. 컴퓨터를 능숙히 다루는 세대 앞에서 카리스마는 안절부절한다. 제국주의의 역사를 경험했던, 아니 몸소 전개했던 그들은 신세대들 앞에서 전전긍긍한다. 시급히 반성하지 않으면 흉물이 될 위험이 있다. 번영의 역사를 일구어 놓은 게 누군가. 바로 그들이 아닌가. 그러나 이제 흉물이 되어 망각의 역사 속으로 허무하게 사라질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참회한다. 슈미트의 간절한 목소리를 빌어. ‘아메리카의 역사’라는 조금 더 강력한 카리스마를 빌어.
슈미트는 제3세계의 굶주리는 아이, 엔구두에게 편지를 쓴다. 슈미트와 엔구두와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이 영화의 연출진영들은 이런 메지지를 전하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만이 희망이다’. 상식으로 보면 틀리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메시지는 지나치게 추상적이다.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라는 거다. 물론 하루 22센트를 기부할 수 있다면 추상적 메시지에 좀더 실천적인 힘을 실을 수 있겠다. 그러나 구조의 문제를 개인적 선행의 차원으로 해결하겠다는 것은 할리우드의 뻔한 말하기 방식이다. 영국식으로 하면 ‘씨티 오브 조이’에서 롤랑 조페가 말하는 방식쯤 될까. 역사는 사라지고 드라마만 남는다. 굶주림만 남고 굶주림의 배경은 사라지게 하는 것, 이것이 제국이 노리는 미디어의 힘이다.
슈미트가 먹어 치우는 패스트푸드, 그가 몰고 다니는 대형버스, 호화로운 결혼 피로연, 바로 그것들을 위해 필요한 것이 식민지다. 제국은 자신의 식욕을 반성하지 않는다. 욕망을 반성하지 않는 동정은 비도덕적이다. 욕망을 반성하는 길, 그것은 역사를 보여준 일이다. 굶주림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굶주림의 배경을 보여주는 일이다.
그러나 제국은 드라마를 만들지만 역사는 보여주지 않는다. 드라마는 감동이 되지만 역사는 분노의 단초가 된다. 그 드라마에 감동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이렇게 애매한 심정으로 쩔쩔매는 나 또한 죄가 아니다. 그러나 대충 적절한 지점에서 참회하는 이 영화의 연출은 그 기회주의로 해서 대단히 비도덕적이다. 암만 생각해도 반성은 대충하는 게 아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귀가길은 내내 찜찜했다. 참으로 반성은 어려운 일이다. 공적으로 발언한다는 것의 지난함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