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바웃 슈미트
알렉산더 페인 감독, 더모트 멀로니 외 출연 / 기타 (DVD)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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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바웃 슈미트>는 잭 니콜슨의 열연이 단연 돋보이는 영화라는 게 세간의 평이다 옳다. 아닌게 아니라 잭 니콜슨의 단독 드리블은 현란하기 그지없다. 캐시 베이츠도 이에 못지 않지만 영화를 시종일관 쥐고 흔드는 것은 니콜슨이다. 니콜슨이 없는 <어바웃 슈미트>는 상상하기 어렵다. 이렇게 한 명의 스타에 지나치게 의존한다는 것은 그만큼 영화의 내러티브의 구조가 탄탄하지 못하다는 증좌. <어바웃 슈미트>는 왔다갔다한다. 니콜슨의 드리블에 따라.

콜슨의 표정을 상기해보시라. 강렬하게 쏘는 눈빛, 교활하게 치켜 올라간 눈썹, 이지적이고 탐욕스런 입술(이 입술은 영화 <배트맨>에서 악당 조커의 안면에서 그 최대치를 연출한다.), 묵직한 중량감을 전해주는 튼실한 몸피, 신중하게 뱉어내는 대사 한 마디, 이 모든 것이 카리스마에 기여한다. 확실히 그의 카리스마는 대단하다. 이 도저한 카리스마는 미국의 패권주의를 연상시킨다.(감독 알렉산더 페인이 정치색을 배제했든 하지 않았든 이 영화는 곳곳에서 미국의 색깔을 드러낸다.)

리스마는 반성을 시작한다. 이 반성을 냉정하게 몰아칠 생각은 없다. 반성은 많을수록 좋다. 그러나 반성도 버릇이 되면 포즈로 끝날 위험이 있다. 그렇다면 잭 니콜슨의 골격과 거죽을 입은 슈미트의 반성은 충분히 진지한가. 그의 반성에 우린 아무런 조건 없이 감정이입을 할 수 있을까. 애매하다. 슈미트의 반성은 진지하면서 또한 경박하고, 정직하면서도 또한 부도덕하다. 연출이 잭 니컬슨을 따라 왔다갔다했다는 증거다.

컬슨이 분한 슈미트는 반성을 한다.(하기는 반성이 없는 늙은이는 동정의 여지도 없다. 오늘날, 영화 관객의 대부분이 젊은이들일진대 어떤 영화생산자가 반성도 없는, 뻔뻔한 늙은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랴.) 슈미트의 반성은 이렇게 말한다. 여보, 미안해. 난 당신의 가치를 몰랐어. 난 당신을 식민지로만 알았어. 난 당신의 타자성을 깡그리 무시했어. 당신을, 빨래하고, 청소하고, 요리하고, 새끼 낳아주고, 밥해주는 기계로만 알았어. 계절의 변화처럼 반복되는 그 순환적 노동을 나는 무시했어. 나는 출세가도를 향해 일직선으로만 달려왔어. 그런데 그게 아니지 뭐야. 당신이 없는 날들은 너무 쓸쓸해. 피곤해. 매일 먹는 패스트푸드도 지겨워. 당신이 끓여준 스프를 먹고싶어. 당신이 구워준 빵을 먹고 싶어. 탄력을 잃은 가슴이지만 그곳에 안기고 싶어. 숨결이, 체온이, 대화가 그리워, 나는 혼자야. 그러나 혼자를 자초한 것은 누구도 아니었어. 그것은 나의 에고였어. 나는 위로 받고 싶어. 이렇게 사죄하고 있잖아.

성하는 카리스마는 동정심을 유발하기 딱 좋은 소재다. 영웅이 속인으로 격하될 때 인간적으로 공감하지 않는 냉혈한은 많지 않다. 니콜슨의 카리스마에 녹아있는 이런 호소는 관객들을 공감시킨다. 실제로 손수건을 적시는 관객들도 있다. 나는 그들이 착한 관객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부모님들이 그렇고, 나의 아내도 그렇다. 반성하고 있는데 무얼 따지느냐, 그들의 소박한 동정심은 슈미트를 심정적으로 보듬으려고 한다. 하지만 쉽게 안아주면 반성은 얕아지기 마련. 참회는 간절할수록 좋은 것이다. 쉬운 용서는 안이한 반성을 나을 뿐이다. 용서하자. 그러나 용서의 시간을 지연시켜 보자. 늙었다고, 퇴직자라고, 자식에게 버림을 받았다고, 쉽게 용서하지는 말자는 이야기다.

자를 타자로서 인정하겠다는 것, 내 욕망의 대상으로서만 타자를 바라보지 않고, 타자를 욕망하는 주체로서 인정해주겠다는 것, 내 관점과 이데올로기로서 타자를 바라보고 평가하지 않겠다는 것, 이런 것들이 카리스마들이 결여하고 있는 약점이다. 카리스마는 냉정해야 한다. 단호해야 한다. 때로는 타자를 깡그리 무시하는 위압적인 힘이 카리스마를 강화해주는 법이다. 시시콜콜하게 개체성을 인정해주다간 전체를 놓친다. 전체를 휘어잡기 위해서는 하나쯤은 없어도 그만이라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 그것이 패권주의의 상식이다.

미트의 아내는, 그리고 슈미트의 딸은, 슈미트의 반성 안에서 충분히 개체성을 인정받고 있는가. 제국으로부터 충분히 독자성을 인정받고 있는가. 슈미트는 여전히 자신의 패권을 행사하려 한다. 딸의 결혼을 방해하고(딸의 결혼까지 좌지우지하겠다니!), 넘볼 걸 넘봐야지, 아내의 옛친구를 구타하고,(망자의 추억마저도 독점하겠다는 슈미트의 욕망이라니!), 그러나 뭐든 되는 게 없다. 그는 늙은 것이다. 그의 시대는 간 것이다. 록 허드슨, 그레고리 팩, 챨톤 헤스톤, 그들이 연출하던 카리스마의 시대는 갔다. 컴퓨터를 능숙히 다루는 세대 앞에서 카리스마는 안절부절한다. 제국주의의 역사를 경험했던, 아니 몸소 전개했던 그들은 신세대들 앞에서 전전긍긍한다. 시급히 반성하지 않으면 흉물이 될 위험이 있다. 번영의 역사를 일구어 놓은 게 누군가. 바로 그들이 아닌가. 그러나 이제 흉물이 되어 망각의 역사 속으로 허무하게 사라질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참회한다. 슈미트의 간절한 목소리를 빌어. ‘아메리카의 역사’라는 조금 더 강력한 카리스마를 빌어.

미트는 제3세계의 굶주리는 아이, 엔구두에게 편지를 쓴다. 슈미트와 엔구두와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이 영화의 연출진영들은 이런 메지지를 전하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만이 희망이다’. 상식으로 보면 틀리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메시지는 지나치게 추상적이다.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라는 거다. 물론 하루 22센트를 기부할 수 있다면 추상적 메시지에 좀더 실천적인 힘을 실을 수 있겠다. 그러나 구조의 문제를 개인적 선행의 차원으로 해결하겠다는 것은 할리우드의 뻔한 말하기 방식이다. 영국식으로 하면 ‘씨티 오브 조이’에서 롤랑 조페가 말하는 방식쯤 될까. 역사는 사라지고 드라마만 남는다. 굶주림만 남고 굶주림의 배경은 사라지게 하는 것, 이것이 제국이 노리는 미디어의 힘이다.

미트가 먹어 치우는 패스트푸드, 그가 몰고 다니는 대형버스, 호화로운 결혼 피로연, 바로 그것들을 위해 필요한 것이 식민지다. 제국은 자신의 식욕을 반성하지 않는다. 욕망을 반성하지 않는 동정은 비도덕적이다. 욕망을 반성하는 길, 그것은 역사를 보여준 일이다. 굶주림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굶주림의 배경을 보여주는 일이다.

러나 제국은 드라마를 만들지만 역사는 보여주지 않는다. 드라마는 감동이 되지만 역사는 분노의 단초가 된다. 그 드라마에 감동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이렇게 애매한 심정으로 쩔쩔매는 나 또한 죄가 아니다. 그러나 대충 적절한 지점에서 참회하는 이 영화의 연출은 그 기회주의로 해서 대단히 비도덕적이다. 암만 생각해도 반성은 대충하는 게 아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귀가길은 내내 찜찜했다. 참으로 반성은 어려운 일이다. 공적으로 발언한다는 것의 지난함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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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추억 [dts] - 일반판 - [할인행사], (2disc)
봉준호 감독, 송강호 외 출연 / CJ 엔터테인먼트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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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눈으로 보니 근대의 기고만장이란 게 여간이 아니다. 과학성과 합리주의의 의상을 걸친 모습은 물찬 제비마냥 번지르르하다. 조목조목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 말 뽄새도 그런대로 봐줄 만하다. 그러나 대체 누구를 위한 과학이고 누구를 위한 합리성인지, 문제는 시도 때도 없이 과학성, 합리성의 잣대를 들이미는 데 영 밥맛이 떨어진다는 것.

개의 문학주의는 이런 근대의 시건방짐을 매우 마뜩찮게 여겼다. 직업적 속성상 문학과는 그다지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영화감독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툭하면 근대의 시건방짐을 빌미로 삼아 전근대의 손을 들어주기 일쑤였다. 그렇다고 내놓고 전근대의 손을 들어준 것은 아니었다. 은근슬쩍 어정쩡하게 전근대쪽으로 기울었다.

우석의 <투캅스>를 상기해보자. 부패한 고참형사와 원칙을 고집하는 신참형사의 갈등을 내러티브의 전개 속에서 심도 있게 증폭시킬 만한 연출력이 없었는지 감독은 어정쩡하게 고참형사, 전근대의 손을 들어준다. 이럴 때 전근대는 득의만만하다. 니들이 먹물 좀 먹었다고 찧고 까부는 데 세상이 니들 생각대로 호락호락한 건 아니야, 라며 요지부동인 현실에 만족한다. 여기에 백상예술대상과 대종상이 주어졌으니 전근대는 의기양양이다. 이럴 때, 합리주의, 원칙주의는 머쓱해진다. 아직은 때가 이른 것일까.

화 <살인의 추억>은 호락호락 전근대의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 <투캅스>처럼 전근대(박두만- 송강호분)와 근대(서태윤-김상경분)의 갈등을 호들갑스럽게 희화화하지도 않는다. (이 영화의 윤리성은 바로 그 중립성에 있는 것은 아닐까.) 한마디로 말해서 봉준호는 적당히 웃길 줄 안다. 관객을 적당히 웃길 줄 아는 힘이야말로 무시할 수 없는 이 영화의 내공이다. 서태윤이 ‘서류는 거짓말을 못해요’라고 말할 때, 관객은 웃는다. 복잡다단한 현실의 다양성을 헤아릴 줄 모르는 근대의 얄팍함이여,라고 관객은 내심 조소하는 것이다.

태윤이 사고현장에서 음악을 들으며 담배를 태우며 근대의 스타일을 한껏 뽐낼 때, 관객은 웃는다. 근대의 센티멘탈리즘이라니, 웃기지도 않는군, 관객은 내심 조소하는 것이다. 서태윤이 엽서를 찾겠다고 난지도 쓰레기 더미 위에 서있을 때 관객은 웃는다. 증거수사, 실증수사의 한계를 실감하며 심증의 한가운데서 전전긍긍하며 폭력수사의 유혹에 한걸음 다가서는 서태윤을 보며 또한 관객은 웃는다. 그러나 그 웃음은 더 이상 조롱의 웃음이 아니다. 그 웃음은 형언할 수 없는 악의 심연 앞에서 치를 떠는 근대의 창백함을 연민어린 심정으로 바라보는 자의 착잡함이다.

"여기가 강간의 왕국이야.” 뇌까리며 박두만이 서태윤에게 드롭킥을 내지를 때 관객은 웃는다. 전근대의 '무뎁뽀'성을 조롱하며 관객은 내심 조소하는 것이다. 박두만이 ’무당눈깔‘이니 ’무모증‘이니 시덥잖은 멘트를 중얼거릴 때 관객은 웃는다. 인과관계니 합리성이니를 싸그리 뭉게버리는 전근대의 비합리성에 관객은 내심 조소하는 것이다. 박두만의 ’꼬붕‘, 조용구가 툭하면 발길질을 내지를 때, 용의자를 거꾸로 매달고 온몸이 푸르둥둥하게 그들을 짓뭉갤 때 관객은 웃는다.

근대의 폭력이 침투할 수 없는 관객석이라는 안온한 공간에서 연민어린 시선으로 희생양들을 바라볼 수 있음에 관객은 내심 안심하는 것이다. 극이 진행되어 갈수록 조바심으로 사색이 되어가는 박두만이 오히려 과학수사 쪽으로 기울어지는 듯한 모습을 보일 때 관객은 웃는다. 그러나 그 웃음은 더 이상 조롱의 웃음이 아니다. 그 웃음은 형언할 수 없는 악의 심연 앞에서 치를 떠는 전근대의 창백함을 연민어린 심정으로 바라보는 자의 착잡함이다.

는 자는 웃음의 대상보다 언제나 우월하다. 조롱하는 자, 연민하는 자에겐 대상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보다 높은 자리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살인의 추억>은 우리를 계속 우월한 자리에 앉히질 않는다. 이 속수무책인 연쇄살인 앞에서 대체 내가 얼마나 더 우월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영화는 영화를 보는 관객이 결국은 박두만이나 서태윤보다 한치도 나을 것이 없음을 일깨운다. 박두만과 서태윤의 무기력함을 바라볼 때 이 영화는 코미디지만 관객이 스스로의 무기력함을 바라보아야 할 때 이 영화는 비극이 된다.

화롭기 짝이 없는 일상의 벌어진 틈에서 사건이 일어난다. 무작정 발로 뛰는 전근대의 무대포성과 인과와 합리의 근대적 치밀함이 만났지만 해결의 기미는 없다. ‘분명히 이 사이코 새끼가 범인임에 틀림이 없어’, 그러나 심증은 있는데 물증은 없다. 미국의 DNA 감식결과만 있으면 문제는 보기 좋게 해결된다. 그러나 그 결과란 허무하기 짝이 없다. 영화를 같이 보았던 내 친구 중의 하나는 바로 이 대목이 과학(물증)이란 이데올로기를 앞세우는 근대주의의 오만을 경계하는 대목이라고 역설한다.

러나 정말 그럴까. 대체 심증이 또 무슨 이데올로기를 빌어 물증 위에 군림할 수 있단 말인가. 물증을 동반하지 않은 심증만으로도 삼족(三族)을 멸했던 것이 전근대의 횡포가 아닌었던가. 심증만으로 물을 먹이고, 심증만으로 패대기를 치던 시절, 피의자로서 합리와 증거를 들먹이다간 대가리가 뭉개지던 시절이 아니었던가. 결국 입밖으로 꺼내지도 못하고 속으로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제대로 된 물증이라도 있었으면 이렇게 억울하지는 않을 것을.

증으로도 물증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악, 발과 두뇌로도 해결할 수 없는 악이란 무엇인가. 평화로운 광경의 이면에 뚫려진 저 어두운 구렁은 무엇인가. 인간이 만들어낸 어떠한 상징과 공교로운 의미체계도 일시에 무화시켜버리는 죽음이라는 형이상학, 아니면 어떤 정치한 프로그램으로도 통어할 길이 없는 욕망의 부글거림?

차가 지나가는 논둑길 주변에서 살인이 일어난다. 오직 기차는 달릴 뿐이다. 무서운 속도다. 대체 무엇이 이 기차를 세울 수 있겠는가. 사건의 유일한 증인인 백광호(박노식분)를 뭉개버린 것도 기차다. 터널을 지나쳐온 기차는 엄청난 무게로 미국에서 온 문서를 갈가리 찢어버린다. 사람들이 무참하게 죽어가도, 악의 횡포 앞에서 절망하며 두 다리가 휘청거려도 기차는 달려간다. 반성도 없이, 일말의 주저나 머뭇거림도 없이.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듯, 매일매일 굉음 소리를 내지르며 달려간다. 한가하게 영화를 보면서 내 삶이 그 기차 밖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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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아유 - [할인행사]
최호 감독, 조승우 외 출연 / CJ 엔터테인먼트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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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진정한 변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왕자는 궁중의 생활이 따분해 궁중 밖을 나가 자유롭게 살아보고 싶어한다. 반면에 거지는 자기의 맘이 내키는 곳이면 어디든 갈 수 있지만 배고픔이 지긋지긋해 한번만이라도 왕자가 돼보고 싶어한다. 왕자와 거지의 소망을 뒤바꾸어 보면 어떨까 하는 상상력에서 나온 것이 <거지와 왕자>라는 이야기의 구조다.

 이 이야기는 인간이면 누구나 자신이 어떤 곳에 처해 있든 한번쯤은 다른 삶을 꿈꾼다는 평범한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누구나 한번쯤은 다른 삶을 살아 보고 싶어한다. 부모님께서야 복에 겨워 별소리를 다하는구나, 말씀하실지 모르지만 한번쯤 고아로 태어났으면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반대로 사고무친인 고아는 따스한 부모님의 품이 절절하게 그리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삶을 바꾸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비용이 허락된다면 용모는 어떻게 해서든 바꾸어 보겠지만 용모가 바뀐다고 해서 나의 삶이 그렇게 쉽게 바뀌어지지는 않는다. 가죽 점퍼에 찢어진 청바지와 같은 반항적인 옷차림을 하면 나의 삶이 바뀔까. 호화로운 의상을 걸치고 돈을 물 쓰듯 쓰면 나의 삶이 고양되는 것일까. 그러나 최신 기종의 핸드폰을 가지고 소위 ‘럭셔리’한 명품 시계를 찼다고 해서 나의 삶이 품위 있어지는 것도 아니다. 어떤 소비도 나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주지는 않는다.

  연예 기획사는 한 가수 지망생의 실상을 감추고 이미지를 조작해서 그를 스타로 만들려는 야심을 가진다. 우리가 소위 저항적이라고 알고 있는 가수도 실상은 성격이 고분고분하고 얌전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획사는 그에게 저항적이라는 인상을 심어줄 수 있는 가죽옷을 입히고, 가급적이면 웃는 표정보다는 심각한 표정과 거칠고 투박한 어투를 요구한다. 결국 우리는 TV와 라디오를 통해 그 가수의 실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기획사에 의해서 가수 지망생에게 요구된 몸짓과 말투와 의상을 보게 된다. 
 TV와 라디오와 같은 미디어는 이렇게 실체를 실체 그대로 드러내지 않는다. 스타뿐만 아니라 정치인의 이미지도 얼마든 조작할 수 있는 것이 미디어의 힘이다. TV의 광고만 하더라도 상품의 실체를 보여주지 않는다. 어떤 상품의 광고는 현란한 이미지만 있을 뿐, 무엇을 위한 광고인지도 알기 어렵다. 

 영화 <후아유>의 주인공처럼 우리도 아바타와 아이디 속에 자신을 감출 수는 있다. 가상의 공간에서 현실의 내가 아닌 다른 나를 한번 만들어 볼 수 있다. 그러나 가상의 공간에서 만들어진 것은 실체의 내가 아니라 ‘꾸며진 나’에 불과하다. 근사한  아바타를 만들고, 채팅에서 현학적인 말을 한다고 해서 내가 달라질까. 영화 <후아유>는 존재의 진정한 변화는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를 우리에게 되묻고 있다.
 
 델리스파이스-차우차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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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키스만 50번째 (1disc) - 할인행사
피터 시걸 감독, 아담 샌들러 외 출연 / 소니픽쳐스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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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이 없으면 '나'는 없다.

기억이 없으면 약속도 없다. 약속한 내용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리는 사람과의 약속은 아무 의미도 없다. 당신과 결혼하겠다는 약속을 잊어버리는 사람이 말하는 사랑은 공허하다. 사랑한다고 말해놓고, 자신이 사랑한다는 사실을 기억해내지 못한다면 사랑은 아무 의미도 없다.
 
한 사람의 정체성은 약속을 지켜낼 수 있는 힘에서 온다. 하루에도 수십번씩 약속을 어기는 사람을 신뢰할 수는 없지 않은가. 약속을 기억할 수 있는 힘이 없다면 약속을 지켜낼 수가 없다. 아무리 어려운 순간에도 자신이 한 약속을 잊지 않는 사람, 우리는 그런 사람을 친구나 연인으로 두고 싶어한다. 자주 말을 바꾸는 사람, 자신이 한 약속을 기억해내지 못하는 사람은 한 마디로 '아웃'이다.
 
자신이 한 약속을 밥먹듯이 어기는 아름다운 여자가 있다. <첫키스만 50번째>의 주인공 루시(드류 배리모어)가 그녀. 그녀의 기억은 유통기한이 단 하루다. 루시는 1년 전 교통사고 이후 사고 당일로 기억이 멈춰버린 단기 기억상실증 환자. 그녀를 사랑하는 수의사 헨리(아담 샌들러)로서는 미칠 일이다.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장담해봐도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녀에게 키스를 한다고 해도 그녀의 입장에서 볼 때는 모든 키스가 첫 키스일 뿐이다. 분명 당신과 결혼을 하겠다고 약속을 해놓고도 뒷날 아침이면 딴소리를 한다. 당신 누구냐고 따지기까지 한다. 난 당신의 애인이라구. 이거, 미칠 일이다.
 
기억은 한 존재의 뿌리다. 가족은 같은 기억을 공유하는 작은 집단이다. 기억이 없다면 가정도 없다. 슬프거나 기쁜 추억을 공유함으로써 가족은 '내' 존재의 바탕이 된다. 기억은 한 국가의 정체성을 이루는 근본이기도 하다. 하나의 집단은 과거의 역사를 기억하고 공유함으로써 비로소 '민족'이라는 의미 있는 공동체를 이루어 간다. 하나의 민족이 공유하는 기억, 우리는 그것을 '문화'라고 부르거나 '역사'라고 부른다.
 
나쁜 기억은 지워버리고 싶어한다. 그러나 지워버리려고 해서 지워지는 것이 기억은 아니다. 히틀러의 만행도 독일 역사의 지울 수 없는 한 부분이고, 치욕스런 한 사람의 기억도 그 사람의 정체성을 이루는 소중한 요소다. 나쁜 기억마저 나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하나의 벽돌이다. 약속을 하고, 약속을 기억하고, 약속을 이루어낼 수 있는 힘! 영화 <첫 키스만 50번째>는 우리에게 그런 힘을 기르라고 말해준다.
 
<첫 키스만 50번째>  피터 시걸 감독.  아담 샌들러, 드류 배리모어 주연. 2004년 제작
 
 
"첫 키스만 50번째(50 First Dates)"의 마지막부분에 나오는 "Over The Rainbow"는 하와이 출신 가수 "이스라엘 카마카위올레(Israel Kamakawiwo'ole)"가 불렀다.
이 곡은 초반엔 "Somewhere Over the Rainbow", 후반엔 "What A Beautiful World"로 연결되어있는게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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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노 2004-10-19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브래드피트 중연의 조 블랙의 사랑에도 나왔는데 참 감칠맛 나더군요.솔직히 그 사운드트랙은 사고서는 후회를 많이 했지만^^;;

시하 2004-10-25 0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 처음 뵙네요. 사실, 이 영화 시간을 떼울려고 봤던 영화였는데 재미있어서 좋았어요. 슬프기도 했고.. 정말 기억이 없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갈지, 란 생각을 했었는데.. 잊고 싶은 기억도 평생 간직하고 싶은 기억도 다 자신을 지탱해주는 밑거름이 아닐까 생각해요. 사운드 트랙은 잘 안 들어봐서 기억이 나질 않지만 이렇게 들으니 좋네요 ㅎㅎㅎ
 
밀애
변영주 감독, 김윤진 외 출연 / CJ 엔터테인먼트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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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의 거실에 책들이 쌓여 있다. 마르크스 관계 서적들, 막심 고리끼의 '어머니'… 소위 운동권 교양 서적들, 미흔 부부의 정치적 칼라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소위 '386세대', 그들이 누구인가. 책에서 이념적 자양분을 얻던 세대가 아니었던가. 이런 세대적 특성을 반영이라도 하듯 미흔의 남편 효경은 서점을 운영한다. '그날이 오면', '논장 서적', '풀무질', '지평'… 대학들마다 잘 나가는 운동권 서점 하나쯤은 있었다. 1980년대의 서점은 비즈니스의 영역이 아니었다. 그것은 엄격하게 이념의 영역이었다. 대학가의 서점은 이념을 제공하고 재생산하는 이데올로기의 '비트(비밀 아지트)'였다. 이곳에서 동지는 있었어도 남자와 여자는 없었다. 남자의 '호칭'은 '형'이었다. '형'은 '성'을 무화시키는 호칭이었다. 대성리 새터쯤의 엠티에서 남녀가 함께 엉키어 잠들어 있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한 여자의 둔부에 한 남자의 다리가 걸쳐져도 누구도 성의 문란을 운운하지 않았다. 이념이라는 든든한 방부제가 있었다. 육체는 늘 뒷전이었다.

'형'이라는 호칭이 '오빠'로 바뀌었다. 이는 단순한 호칭의 변화가 아니었다. 한 남자를 이념으로 보기보다는 '육체'로 보기 시작했다는 증좌. 하늘엔 영광, 땅에는 평화라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벌어진 영우의 폭력은 아이러니하다. '오빠를 내가 통째로 빨아당긴대. 오빠는 내가 조이는 그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할 거라고 했어'라고 말한다. '오빠'라고 말하는 이 당돌한 세대의 말빨 앞에서 386세대 미흔의 육체는 부르르 떤다. 젊고 싱싱한 육체, 그늘을 모르는 육체, 폭압의 기억이 없는 육체, 역사가 없는 육체 앞에서 미흔은 말문이 막힌다. 누군가를 '조이기'엔 헐거워진 나이 30대. 그녀에게 남은 것은 두통뿐이다. 미흔에게 육체는 이렇게 '열락'이 아니라 '두통거리'다. 미흔의 남편 효경은 미흔의 두통을 해결하지 못한다. 효경은 여전히 이념과잉이다. 서점을 하는 것도 모자라서 이번엔 소설을 쓰겠다지 않는가. 이 과도한 문자지향형 인간, 효경에게서 미흔의 육체가 재발견되리라는 기대는 헛되다. 미흔의 육체의 재발견을 위해서는 몸의 전문가, 인규의 출현이 요청되었다.

규, 그는 육체의 전문가, 의사다. 이념의 과잉, 율법이나 들먹이는 바리새인들과는 얼마간 거리를 확보한 존재다. 몸의 선각자인 인규는 율법의 피곤함을 안다. 속도는 망각에 비례한다던가. 모든 율법으로 도피하려는 듯 인규는 거칠게 차를 몰아가는 속도광이다. 속도가 꿈꾸는 것은 순수한 현재일 뿐 과거나 미래는 아니다. 그런 인규는 놀 줄을 안다. 게임, 순수한 육체의 유희를 안다. '사랑'도 일부일처제를 이끌어가는 이데올로기인 이상 '사랑'도 그의 관심사는 아니다. '사랑'을 들먹이는 순간 게임은 끝난다. 과도한 에로스로 사랑의 독점을 욕망할 때 게임은 피곤해진다. 한밤중에 맨발로 집을 몰래 빠져나온 미흔을 거부하는 인규는 에로스의 욕망이 어떤 비극을 결과할지를 아는 쿨한 인간이다. 에로스의 욕망이란 두 개의 육체가 하나로 결합되어 자신의 개별성을 무화시켜버리려는 죽음의 욕망이 아니던가. 인규는 몸의 전문가답게 미흔의 욕망을 머쓱하게 한다. 이런 대목은 '밀애'를 한낱 치졸한 로맨스로 끝나지 않게 한다. 어쨌든 인규에 의해서 미흔의 육체는 순수한 육체성을 획득한다. 화장을 하고 머리를 고치고 육체에 대한 미흔의 관심은 고조된다. 치장을 몰랐던 386세대가, 청바지에 티셔츠 한 장이 코스츔의 전부인 줄 알던 세대가 모처럼 꾸밈의 즐거움을 알게 된 것이다. 인규에 의해서 미흔은 두 번 태어나게 된 것이다.

흔의 남편 효경은 여전히 이념에 짓눌려 있다. 삶의 공간을 도시에서 남해안으로 옮긴다고 해서 그의 의식의 공간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서점을 하다가 소설을 쓴다고 해서 그의 삶이 바뀌는 것도 아니다. 그는 여전히 이념과 과거에 묶여 있다. 당돌한 신세대와의 로맨스도 그의 도저한 이념성을 바꾸어 놓지 못했다. 자신의 육체에 효경이 당당할 수 있었다면, 효경은 자신의 욕망을 긍정하는 만큼의 자유를 미흔에게 주지 않았을까. 효경이 자신의 욕망과 불륜을 죄악으로 보는 한 미흔의 욕망 또한 불륜일 수밖에 없다. 쉽게 말하면 뭐 눈에는 뭐밖에 안 보이는 법이다. 불륜을 치죄하며 미흔을 구타하는 효경에게는 구질구질한 '일상적 파시즘' 이상을 볼 수 없다. 적과 오래 싸우다보면 적을 닮는다더니, 미흔을 구타하는 효경에게서는 어떠한 휴머니즘도 찾아볼 수 없다. 불륜을 치죄하는 이념이 오히려 더 극악스럽게 보인다. 육체를 모르는 이념의 뻔뻔스러움. '남성적 서사'라는 것이 고작 그 정도였던가. 적어도 효경만은 육체에 눈뜬 미흔을 감싸안아야 했다. 그것이 동지의 윤리다. 그것이 욕망을 긍휼하게 바라보는 휴머니즘의 시선이다. 그 시선만이 상식으로 통용되는 '주류의 윤리학'을 흠집낼 수 있다. 효경의 감싸안음만이 미흔에게 쏟아지는 싸늘한 세상의 시선을 막아줄 방패막이지 않겠는지.

흔과 인규를 바라보는 촌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미흔과 인규는 불륜이란 딱지를 떼지 못한다. 버스 차창을 통해 보여지던 촌사람들의 싸늘한 시선이 바로 우리네 상식의 윤리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바른 생활'을 통해 그런 윤리를 배우면서 자란다. 그러나 어떻게 우리가 아이들에게 '바른 생활'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해줄 것인가. 미흔은 자신의 딸아이를 목욕시키면서 속으로 오열한다. 미흔의 욕망은 이 어린아이의 시선 앞에서 망설인다. 그러나 세상 물정을 모르는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시선- 그 시선은 세상 사람들의 시선이기도 하다-만을 의식하는 한 여자의 육체와 욕망은 없다. 그런 시선을 의식하는 한 여자의 육체는 욕망의 감옥이다. 미흔은 이 감옥을 뛰쳐나간다. 그러나 변영주는 미흔의 욕망을 끝까지 밀어부칠 내공이 없었는지 인규를 갑작스런 죽음으로 내몬다. 십자가에 매달린 선각자의 육체는 부활하지 않는다. 나는 인규의 영혼이 율법으로 꽉막힌 이 땅의 여자들과 남자들의 몸 안에서 부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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