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밀애
변영주 감독, 김윤진 외 출연 / CJ 엔터테인먼트 / 2003년 1월
평점 :
품절
미흔의 거실에 책들이 쌓여 있다. 마르크스 관계 서적들, 막심 고리끼의 '어머니'… 소위 운동권 교양 서적들, 미흔 부부의 정치적 칼라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소위 '386세대', 그들이 누구인가. 책에서 이념적 자양분을 얻던 세대가 아니었던가. 이런 세대적 특성을 반영이라도 하듯 미흔의 남편 효경은 서점을 운영한다. '그날이 오면', '논장 서적', '풀무질', '지평'… 대학들마다 잘 나가는 운동권 서점 하나쯤은 있었다. 1980년대의 서점은 비즈니스의 영역이 아니었다. 그것은 엄격하게 이념의 영역이었다. 대학가의 서점은 이념을 제공하고 재생산하는 이데올로기의 '비트(비밀 아지트)'였다. 이곳에서 동지는 있었어도 남자와 여자는 없었다. 남자의 '호칭'은 '형'이었다. '형'은 '성'을 무화시키는 호칭이었다. 대성리 새터쯤의 엠티에서 남녀가 함께 엉키어 잠들어 있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한 여자의 둔부에 한 남자의 다리가 걸쳐져도 누구도 성의 문란을 운운하지 않았다. 이념이라는 든든한 방부제가 있었다. 육체는 늘 뒷전이었다.
'형'이라는 호칭이 '오빠'로 바뀌었다. 이는 단순한 호칭의 변화가 아니었다. 한 남자를 이념으로 보기보다는 '육체'로 보기 시작했다는 증좌. 하늘엔 영광, 땅에는 평화라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벌어진 영우의 폭력은 아이러니하다. '오빠를 내가 통째로 빨아당긴대. 오빠는 내가 조이는 그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할 거라고 했어'라고 말한다. '오빠'라고 말하는 이 당돌한 세대의 말빨 앞에서 386세대 미흔의 육체는 부르르 떤다. 젊고 싱싱한 육체, 그늘을 모르는 육체, 폭압의 기억이 없는 육체, 역사가 없는 육체 앞에서 미흔은 말문이 막힌다. 누군가를 '조이기'엔 헐거워진 나이 30대. 그녀에게 남은 것은 두통뿐이다. 미흔에게 육체는 이렇게 '열락'이 아니라 '두통거리'다. 미흔의 남편 효경은 미흔의 두통을 해결하지 못한다. 효경은 여전히 이념과잉이다. 서점을 하는 것도 모자라서 이번엔 소설을 쓰겠다지 않는가. 이 과도한 문자지향형 인간, 효경에게서 미흔의 육체가 재발견되리라는 기대는 헛되다. 미흔의 육체의 재발견을 위해서는 몸의 전문가, 인규의 출현이 요청되었다.
인규, 그는 육체의 전문가, 의사다. 이념의 과잉, 율법이나 들먹이는 바리새인들과는 얼마간 거리를 확보한 존재다. 몸의 선각자인 인규는 율법의 피곤함을 안다. 속도는 망각에 비례한다던가. 모든 율법으로 도피하려는 듯 인규는 거칠게 차를 몰아가는 속도광이다. 속도가 꿈꾸는 것은 순수한 현재일 뿐 과거나 미래는 아니다. 그런 인규는 놀 줄을 안다. 게임, 순수한 육체의 유희를 안다. '사랑'도 일부일처제를 이끌어가는 이데올로기인 이상 '사랑'도 그의 관심사는 아니다. '사랑'을 들먹이는 순간 게임은 끝난다. 과도한 에로스로 사랑의 독점을 욕망할 때 게임은 피곤해진다. 한밤중에 맨발로 집을 몰래 빠져나온 미흔을 거부하는 인규는 에로스의 욕망이 어떤 비극을 결과할지를 아는 쿨한 인간이다. 에로스의 욕망이란 두 개의 육체가 하나로 결합되어 자신의 개별성을 무화시켜버리려는 죽음의 욕망이 아니던가. 인규는 몸의 전문가답게 미흔의 욕망을 머쓱하게 한다. 이런 대목은 '밀애'를 한낱 치졸한 로맨스로 끝나지 않게 한다. 어쨌든 인규에 의해서 미흔의 육체는 순수한 육체성을 획득한다. 화장을 하고 머리를 고치고 육체에 대한 미흔의 관심은 고조된다. 치장을 몰랐던 386세대가, 청바지에 티셔츠 한 장이 코스츔의 전부인 줄 알던 세대가 모처럼 꾸밈의 즐거움을 알게 된 것이다. 인규에 의해서 미흔은 두 번 태어나게 된 것이다.
미흔의 남편 효경은 여전히 이념에 짓눌려 있다. 삶의 공간을 도시에서 남해안으로 옮긴다고 해서 그의 의식의 공간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서점을 하다가 소설을 쓴다고 해서 그의 삶이 바뀌는 것도 아니다. 그는 여전히 이념과 과거에 묶여 있다. 당돌한 신세대와의 로맨스도 그의 도저한 이념성을 바꾸어 놓지 못했다. 자신의 육체에 효경이 당당할 수 있었다면, 효경은 자신의 욕망을 긍정하는 만큼의 자유를 미흔에게 주지 않았을까. 효경이 자신의 욕망과 불륜을 죄악으로 보는 한 미흔의 욕망 또한 불륜일 수밖에 없다. 쉽게 말하면 뭐 눈에는 뭐밖에 안 보이는 법이다. 불륜을 치죄하며 미흔을 구타하는 효경에게는 구질구질한 '일상적 파시즘' 이상을 볼 수 없다. 적과 오래 싸우다보면 적을 닮는다더니, 미흔을 구타하는 효경에게서는 어떠한 휴머니즘도 찾아볼 수 없다. 불륜을 치죄하는 이념이 오히려 더 극악스럽게 보인다. 육체를 모르는 이념의 뻔뻔스러움. '남성적 서사'라는 것이 고작 그 정도였던가. 적어도 효경만은 육체에 눈뜬 미흔을 감싸안아야 했다. 그것이 동지의 윤리다. 그것이 욕망을 긍휼하게 바라보는 휴머니즘의 시선이다. 그 시선만이 상식으로 통용되는 '주류의 윤리학'을 흠집낼 수 있다. 효경의 감싸안음만이 미흔에게 쏟아지는 싸늘한 세상의 시선을 막아줄 방패막이지 않겠는지.
미흔과 인규를 바라보는 촌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미흔과 인규는 불륜이란 딱지를 떼지 못한다. 버스 차창을 통해 보여지던 촌사람들의 싸늘한 시선이 바로 우리네 상식의 윤리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바른 생활'을 통해 그런 윤리를 배우면서 자란다. 그러나 어떻게 우리가 아이들에게 '바른 생활'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해줄 것인가. 미흔은 자신의 딸아이를 목욕시키면서 속으로 오열한다. 미흔의 욕망은 이 어린아이의 시선 앞에서 망설인다. 그러나 세상 물정을 모르는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시선- 그 시선은 세상 사람들의 시선이기도 하다-만을 의식하는 한 여자의 육체와 욕망은 없다. 그런 시선을 의식하는 한 여자의 육체는 욕망의 감옥이다. 미흔은 이 감옥을 뛰쳐나간다. 그러나 변영주는 미흔의 욕망을 끝까지 밀어부칠 내공이 없었는지 인규를 갑작스런 죽음으로 내몬다. 십자가에 매달린 선각자의 육체는 부활하지 않는다. 나는 인규의 영혼이 율법으로 꽉막힌 이 땅의 여자들과 남자들의 몸 안에서 부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