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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추억 [dts] - 일반판 - [할인행사], (2disc)
봉준호 감독, 송강호 외 출연 / CJ 엔터테인먼트 / 2003년 10월
평점 :
품절
전근대의 눈으로 보니 근대의 기고만장이란 게 여간이 아니다. 과학성과 합리주의의 의상을 걸친 모습은 물찬 제비마냥 번지르르하다. 조목조목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 말 뽄새도 그런대로 봐줄 만하다. 그러나 대체 누구를 위한 과학이고 누구를 위한 합리성인지, 문제는 시도 때도 없이 과학성, 합리성의 잣대를 들이미는 데 영 밥맛이 떨어진다는 것.
대개의 문학주의는 이런 근대의 시건방짐을 매우 마뜩찮게 여겼다. 직업적 속성상 문학과는 그다지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영화감독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툭하면 근대의 시건방짐을 빌미로 삼아 전근대의 손을 들어주기 일쑤였다. 그렇다고 내놓고 전근대의 손을 들어준 것은 아니었다. 은근슬쩍 어정쩡하게 전근대쪽으로 기울었다.
강우석의 <투캅스>를 상기해보자. 부패한 고참형사와 원칙을 고집하는 신참형사의 갈등을 내러티브의 전개 속에서 심도 있게 증폭시킬 만한 연출력이 없었는지 감독은 어정쩡하게 고참형사, 전근대의 손을 들어준다. 이럴 때 전근대는 득의만만하다. 니들이 먹물 좀 먹었다고 찧고 까부는 데 세상이 니들 생각대로 호락호락한 건 아니야, 라며 요지부동인 현실에 만족한다. 여기에 백상예술대상과 대종상이 주어졌으니 전근대는 의기양양이다. 이럴 때, 합리주의, 원칙주의는 머쓱해진다. 아직은 때가 이른 것일까.
영화 <살인의 추억>은 호락호락 전근대의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 <투캅스>처럼 전근대(박두만- 송강호분)와 근대(서태윤-김상경분)의 갈등을 호들갑스럽게 희화화하지도 않는다. (이 영화의 윤리성은 바로 그 중립성에 있는 것은 아닐까.) 한마디로 말해서 봉준호는 적당히 웃길 줄 안다. 관객을 적당히 웃길 줄 아는 힘이야말로 무시할 수 없는 이 영화의 내공이다. 서태윤이 ‘서류는 거짓말을 못해요’라고 말할 때, 관객은 웃는다. 복잡다단한 현실의 다양성을 헤아릴 줄 모르는 근대의 얄팍함이여,라고 관객은 내심 조소하는 것이다.
서태윤이 사고현장에서 음악을 들으며 담배를 태우며 근대의 스타일을 한껏 뽐낼 때, 관객은 웃는다. 근대의 센티멘탈리즘이라니, 웃기지도 않는군, 관객은 내심 조소하는 것이다. 서태윤이 엽서를 찾겠다고 난지도 쓰레기 더미 위에 서있을 때 관객은 웃는다. 증거수사, 실증수사의 한계를 실감하며 심증의 한가운데서 전전긍긍하며 폭력수사의 유혹에 한걸음 다가서는 서태윤을 보며 또한 관객은 웃는다. 그러나 그 웃음은 더 이상 조롱의 웃음이 아니다. 그 웃음은 형언할 수 없는 악의 심연 앞에서 치를 떠는 근대의 창백함을 연민어린 심정으로 바라보는 자의 착잡함이다.
"여기가 강간의 왕국이야.” 뇌까리며 박두만이 서태윤에게 드롭킥을 내지를 때 관객은 웃는다. 전근대의 '무뎁뽀'성을 조롱하며 관객은 내심 조소하는 것이다. 박두만이 ’무당눈깔‘이니 ’무모증‘이니 시덥잖은 멘트를 중얼거릴 때 관객은 웃는다. 인과관계니 합리성이니를 싸그리 뭉게버리는 전근대의 비합리성에 관객은 내심 조소하는 것이다. 박두만의 ’꼬붕‘, 조용구가 툭하면 발길질을 내지를 때, 용의자를 거꾸로 매달고 온몸이 푸르둥둥하게 그들을 짓뭉갤 때 관객은 웃는다.
전근대의 폭력이 침투할 수 없는 관객석이라는 안온한 공간에서 연민어린 시선으로 희생양들을 바라볼 수 있음에 관객은 내심 안심하는 것이다. 극이 진행되어 갈수록 조바심으로 사색이 되어가는 박두만이 오히려 과학수사 쪽으로 기울어지는 듯한 모습을 보일 때 관객은 웃는다. 그러나 그 웃음은 더 이상 조롱의 웃음이 아니다. 그 웃음은 형언할 수 없는 악의 심연 앞에서 치를 떠는 전근대의 창백함을 연민어린 심정으로 바라보는 자의 착잡함이다.
웃는 자는 웃음의 대상보다 언제나 우월하다. 조롱하는 자, 연민하는 자에겐 대상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보다 높은 자리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살인의 추억>은 우리를 계속 우월한 자리에 앉히질 않는다. 이 속수무책인 연쇄살인 앞에서 대체 내가 얼마나 더 우월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영화는 영화를 보는 관객이 결국은 박두만이나 서태윤보다 한치도 나을 것이 없음을 일깨운다. 박두만과 서태윤의 무기력함을 바라볼 때 이 영화는 코미디지만 관객이 스스로의 무기력함을 바라보아야 할 때 이 영화는 비극이 된다.
평화롭기 짝이 없는 일상의 벌어진 틈에서 사건이 일어난다. 무작정 발로 뛰는 전근대의 무대포성과 인과와 합리의 근대적 치밀함이 만났지만 해결의 기미는 없다. ‘분명히 이 사이코 새끼가 범인임에 틀림이 없어’, 그러나 심증은 있는데 물증은 없다. 미국의 DNA 감식결과만 있으면 문제는 보기 좋게 해결된다. 그러나 그 결과란 허무하기 짝이 없다. 영화를 같이 보았던 내 친구 중의 하나는 바로 이 대목이 과학(물증)이란 이데올로기를 앞세우는 근대주의의 오만을 경계하는 대목이라고 역설한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대체 심증이 또 무슨 이데올로기를 빌어 물증 위에 군림할 수 있단 말인가. 물증을 동반하지 않은 심증만으로도 삼족(三族)을 멸했던 것이 전근대의 횡포가 아닌었던가. 심증만으로 물을 먹이고, 심증만으로 패대기를 치던 시절, 피의자로서 합리와 증거를 들먹이다간 대가리가 뭉개지던 시절이 아니었던가. 결국 입밖으로 꺼내지도 못하고 속으로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제대로 된 물증이라도 있었으면 이렇게 억울하지는 않을 것을.
심증으로도 물증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악, 발과 두뇌로도 해결할 수 없는 악이란 무엇인가. 평화로운 광경의 이면에 뚫려진 저 어두운 구렁은 무엇인가. 인간이 만들어낸 어떠한 상징과 공교로운 의미체계도 일시에 무화시켜버리는 죽음이라는 형이상학, 아니면 어떤 정치한 프로그램으로도 통어할 길이 없는 욕망의 부글거림?
기차가 지나가는 논둑길 주변에서 살인이 일어난다. 오직 기차는 달릴 뿐이다. 무서운 속도다. 대체 무엇이 이 기차를 세울 수 있겠는가. 사건의 유일한 증인인 백광호(박노식분)를 뭉개버린 것도 기차다. 터널을 지나쳐온 기차는 엄청난 무게로 미국에서 온 문서를 갈가리 찢어버린다. 사람들이 무참하게 죽어가도, 악의 횡포 앞에서 절망하며 두 다리가 휘청거려도 기차는 달려간다. 반성도 없이, 일말의 주저나 머뭇거림도 없이.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듯, 매일매일 굉음 소리를 내지르며 달려간다. 한가하게 영화를 보면서 내 삶이 그 기차 밖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