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ly Me to the Moon -Ana Caram
 
1.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을 살까 망설이던 차에 피터 메일의 <나의 프로방스>를 읽었다. 마침 어떤 친구가 여행중이었다. 나는 떠나지 못하는 내 몸을 가볍게 한탄했다. 마음의 엑소더스를 위해 <나의 프로방스>를 읽었다. 유머스럽고 경쾌하다. 감각적이기 이를 데 없다. 책을 읽으면 먼저 배가 고파진다. 프랑스의 진기한 음식들을 떠올리다가 나는 문득 일산 자유로 끝에 있다는 음식점 <프로방스>에 꼭 한번 가보겠다고 결심을 했다. 저녁에는 예전에 읽었던 김화영의 <행복의 충격>을 읽었다. 벌써 몇번째일까. 김화영의 이 아름다운 산문은 읽어도 읽어도 질리지 않는다. 그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나는 오늘 책꽂이에서 김화영의 <바람을 담은 집>과 장그르니에의 <존재의 불행>과 <지중해의 영감> 그리고 장자끄 루소의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이렇게 세 권을 뽑아서 출근했다....내 몸은 비록 내 친구와 함께 있지 못해도 내 마음은 내 몸밖에서 떠돌 것이다. 끼냐르의 말은 옳다. <모든 독서는 엑소더스다> 나의 출애급!

 
2.
프로방스에 대한 최상의 찬가는 장그르니에가 봉헌했다.
 
 
이 고장은 너무나 잘 빚어져서 장인(匠人)인 신의 작품을 보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지중해의 영감』,P.132
 
 
그러나 이는 단순한 수사학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지중해의 영감』에서 장그르니에는 프로방스를 이렇게 말한다.

 
프로방스 지방은 여행자로서가 아니라 친구로 그곳을 찾는 사람에게, 또 그곳을 잠시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살려고 오는 사람에게 무익하지 않은 애정 어린 교훈을 준다. 프로방스의 시인 미스트랄은 고향의 땅과 여행지의 땅을 분명하게 구별한다. 그곳은 고향의 당이다. 누군가 풍경의 침묵에 관심을 기울이면 그곳에서 해방되는 듯한 감정으로 감동 받지 않을 수 없다. 산봉우리에 둘러싸인 루드마랭과 카드네 사이에서는 모든 것이 이간과 가까이 있고, 인간에게 우정을 베풀려고 허락한다. 인간은 이 땅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땅이 그리워하는 것은 바로 인간이다. 인간이 언제나 고이 간직할 수 없었던 충실성을 이 땅은 인간에게 불러일으킨다. 인적 없는 이 마을과 폐허로 남은 성들이 그 슬픈 증거이다. 애정 없이 만들어진 위대한 것은 결코 없다. 『지중해의 영감』,P. 130
 
 
따지고 보면 김화영의 아름다운 산문집 『행복의 충격』의 제목도 프로방스의 매혹을 말하는 데서 빌어왔다.
 
가장 행복하고 가장 비극적인 수년을 프로방스에 와서 보낸 북구인(北歐人) 반 고흐의 소용돌이치는 태양, 그의 인상주의는 이 고장 행복의 충격을 표현 것이었다. 『행복의 충격』,P.58
 
지중해안의 따뜻한 가슴, 프로방스는 완전히 절망한 사람이 올 곳은 아니다. 오직 행복한 자, 아무 것도 소유한 것이 없이도 이 땅 위에 태어난 것이 기뻐지는 자들만이 올 곳이다. 『행복의 충격』,P.39
 
Lowell Herrero의 회화는 프로방스의 이미지를 감각적으로 호소한다. 가보지 않은 곳에 있다는 이 미묘한 착각, 예술이 불러일으키는 환영이다. 나는 이 환영에 매인다.
 
Lowell Herrero의 가을냄새


Harvest Picnic


Lavender Harvest I


Hillside Flowers



Autumn in Chianti

    
 화가 Lowell Herrero의 그림
 이탈리아와 프로방스지방을 돌며 접한 사람들의 모습,  
혹은 나파밸리에 위치한 자신의 작업실 주위에 살아가고 있는 농부들과
그들의 일하는 모습이 Herrero 그림의 주요 테마가 되어주고 있다,
나파벨리니 끼안띠니.. 모두 와인 라벨에서나 보던 지방 이름인데...
그림에서 풍기는 이미지로만 봐도 지역 이름을 내세워 와인을 생산할 만 하다.
따뜻한 햇살과 적당한 바람, 적절한 기온변화로 일구어지는 흙냄새가
코 끝을 간지럽힐 듯 하다.

온화한 영혼이 투영되고 조금은 과장된 유머가 얼핏 비치는 그림들
 

-마음이 무거운가요…여행이 힘이 되지요-함정임(소설가)

이 시간에도 누군가 먼 곳으로 가고 또 오고 있다. 항구와 철도역과 공항과 터미널로 가며오며 일으키는 바람 냄새를 맡으면 나도 모르게 그쪽으로 머리가 쏠리고 혼이 꺼들려간다. 갈 사람은 가고 돌아온 사람은 가을 속으로, 삶의 진창 속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가는 시간이다. 그러다 문득 마주친 일터 유리창을 거울삼아 지난 여름의 흔적을, 내 몸, 내 영혼에 새겨온 먼 곳의 햇빛과 바람과 구름의 자취를 은밀히 들여다보는 시간이다. 그러다 문득 나를 발견하는 시간이다. 지금 나는 이전의 그 사람인가. 지금 내가 속해 있는 곳, 여기는 이전의 그 세계인가.

어디 출신이냐는 질문을 받자 소크라테스는 ‘아테네’라 하지 않고 ‘세계’라고 대답했다. 여기 방금 여름의 뜨거운 햇빛 속을 통과해온 두 사람의 세계인이 있다. 『여행의 기술』의 알랭 드 보통과 『나의 프로방스』의 피터 메일. 둘은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이 여행의 두 측면, 예술로서의 여행과 삶으로서의 여행을 나누어 보여준다. 청년 작가 알랭 드 보통은 화가들이, 작가나 시인들이, 철학자들이 떠났던 곳, 작품화했던 곳으로, 바로 그 작가와 화가와 철학자를 동반한 여행을 떠나고, 중년의 나이를 훌쩍 넘긴 피터 메일은 그동안 살아오면서 보았던 수많은 장소 중 오직 한 곳, 언젠가 우연히 지나가다가 마음을 사로잡았던 프로방스의 한 작은 마을의 집으로 옮겨가 일 년을 살아보는 것으로 여행을 현실화한다.

여름이면 유럽으로 향하던 발길을 접고 남행 열차에 몸을 싣고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을 펼쳤다. 삶의 방식이나 여행의 방식처럼 여행서를 읽는 방식이 있다면, 이 책을 읽는 방식은 최적의 장소를 찾아 그곳에서 읽는 것이다. 안락한 거실 소파나 서재가 아닌 유동적인 임시 공간, 가령 간이 휴게소나 공항 터미널의 대기 의자, 또는 유리창이 있는 열차 칸. “여행은 생각의 산파다. 움직이는 비행기나 배나 기차보다 내적인 대화를 쉽게 이끌어내는 장소는 찾기 힘들다. (…) 때때로 큰 생각은 큰 광경을 요구하고, 새로운 생각은 새로운 장소를 요구한다. 다른 경우라면 멈칫거리기 일쑤인 내적인 사유도 흘러가는 풍경의 도움을 얻으면 술술 진행되어 나간다.”

알랭 드 보통은 일찍이 ‘여기가 아니라면 그 어디라도!’를 외친 최초의 이방인 보들레르의 피를 그대로 이어받은 듯하다. 구름의 발견자, 아니 구름의 산책자 보들레르처럼 그는 열차·비행기·배를 타고 바베이도스 섬으로, 낙타의 이집트로, 시나이 사막으로, 암스테르담 운하로, 레이크디스트릭트 골짜기로, 프로방스의 사이프러스 나무와 밀밭으로 끊임없이 떠난다. 심지어 간이식당이 있는 길가 휴게소에까지. “고속도로 옆의 언덕에 자리 잡은 이 외딴 휴게소에는 시(詩)가 있다.(…) 예기치 않게 시적인 느낌을 주는 장소들. 공항 터미널, 항구, 역, 모텔. 어느 19세기 작가의 작품과 그에게서 영감을 받은 어느 20세기 화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여기서 19세기의 작가는 프랑스의 보들레르이고, 20세기의 화가는 미국의 에드워드 호퍼다. 알랭 드 보통은 이들을 통해 휴게소와 공항과 비행기와 기차와 같은 여행을 시작하는 장소들을 새롭게 주목한다. 소설가 플로베르와 철학자 훔볼트를 앞세워 여행의 동기를 이루는 두 가지 요소, 이국적인 것과 호기심을 분석하고 여행의 풍경들, 그러니까 시골과 도시의 풍경과 사막의 숭고함을 제대로 바라보게 하기 위해서 시인 워즈워스와 사상가 에드먼드 버크, 그리고 성서의 욥을 불러낸다. 그리고 여행의 미적 체험, 그러니까 눈을 열어주는 예술을 위해서는 프로방스의 반 고흐의 스케치 여행을 그대로 따라가 보고, 여행의 끝, 귀환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나의 침실 여행기’를 쓴 프랑스의 18세기 소설가 드 메스트르의 기발한 여행 습관까지 소개한다. 전작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청미래)를 통해 시적인 언어와 철학적 사유가 빛나는 당대의 에세이스트로 인정받은 알랭 드 보통은 여행에 관한 최고의, 아니 최후의 책을 쓰고 싶었던가보다. 『여행의 기술』에서 그는 여행에 관한 모든 것, 여행에의 욕구와 동기와 기대는 물론 포기와 실망까지 여행의 일부로 끌어안음으로써 여행과 여행서의 양식을 개척한 예술가들의 반열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고 있다.

알랭 드 보통이 예술의 지향점으로 여행을 모색했다면, 피터 메일은 삶의 지향점으로 여행을 사용하고 있다. 피터 메일의 이력을 보면 영국과 미국에서 15년간 광고 카피라이터로 활동했고, 이후 관리자로 광고회사를 이끈 것으로 되어 있다. 광고인이란 욕망의 흐름을 초 단위로 읽고 전략을 바꾸는 자본주의의 첨병이다. 잿빛의 긴 겨울과 여름 내내 눅눅한 초록의 세계가 바로 영국이다. ‘마약 중독자가 마약을 갈구하듯’프로방스의 찌는 듯한 더위와 따가운 햇살을 그리워하며, ‘마을의 상점들과 포도밭을 찍은 사진들을 보고’‘침실 창을 통해 비스듬히 스며드는 햇살에 잠을 깨는 것을 꿈꾸던’영국인 피터 메일 부부는 어느 날 그 꿈을 이룬다. 모든 일이 순식간에, 거의 충동적으로 일어났다고 피터 메일은 말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그는 그 누구보다 도시에서 치열하게 살았고, 그렇기 때문에 순간순간 인공의 낙원이 아닌 자연의 소박한 삶, 사람 냄새 나는 집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이렇게 외치듯 고백하는 것이다. “순전히 집 때문이었다. 우리는 그 집을 오후에 보았지만, 저녁쯤에 마음은 벌써 그 집으로 이사를 끝낸 듯했다.”

여행 중에 본, 지워지지 않는 순간을 인생의 지도에서 시간의 점으로 표시를 한다면, 그날 그들이 본 집은 1년이라는 삶을 가능하게 한 공간의 점인 셈이다. “마스라 불리는 프로방스의 전형적인 농가. 그 지역의 돌로 지은 그 집은 바람과 햇빛을 200년 동안이나 견뎌온 탓에 옅은 꿀색도 아니고 옅은 회색도 아닌 그 중간색으로 바래 있었다.” 피터 메일의 프로방스는 18세기에 단칸방에서 시작해 아이방, 할머니방, 염소 우리, 농기구 광을 덧붙이며 확장한 탓에 이상한 삼층집이 된 이 ‘집을 둘러싼 일 년’이라 할 만큼 집이 구심점 역할을 한다. 외국인으로 구옥(?)을 소유하고 수리하고 보완하는 과정에서 프로방스의 자연과 전통과 풍습과 체제, 그리고 그곳 사람의 기질과 속내를 훤히 꿰뚫게 된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 곳에서 일 년을 살았다고 해서 누구나 통달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한 영국인 이방인이 프로방스에서 일 년을 살았던 소박한 이야기가 전세계로 폭발적으로 퍼져나간 데에는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다.

피터 메일은 굉장한 이야기꾼이다. 그의 눈이 닿는 대상, 그의 펜이 머무는 장면은 독자가 바로 그곳에 가 있는 것처럼, 직접 그 맛을 보는 것처럼 생생하다. 그의 이야기꾼으로서의 특장이 눈부시게 발휘되는 것은 단연 사람 묘사에 있다. 읽는 내내 소설이 아닌가, 하고 고개를 갸웃할 정도다. 삶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인간에 대한 탐구가 소설의 출발점이라면 피터 메일의 『나의 프로방스』는 지극한 삶의 여행기이자 진솔한 삶의 소설인 것이다. 주말 오후 집에 마련된 피크닉 테이블이나 집 근처 나무 그늘 아래 느긋이 앉아 가을 햇살의 잔광 속에 이 책을 읽으면 그만이다. 프로방스의 기후를 특징 짓는 면도날 같은 미스트랄 바람과 우리의 송이 버섯과 맞먹는 흙 속의 검은 황금덩어리 송로 버섯의 진미, 팔월의 염소 경주대회와 구월의 포도 수확, 그리고 햇살 맛 나는 십일월의 올리브기름. 우리가 저 멀리 암스테르담에 가는 대신 베르미르의 그림 속 풍경을 구경하듯이, 피터 메일의 『나의 프로방스』는 프로방스에 가지 않고도 프로방스를 더 잘 느끼도록, 그리하여 프로방스를 오래 추억하도록 만든다.

어떤 이는 집을 떠나 들판을 세 번 헤매기를, 그 길 끝에 등불이 켜지고 있는 마을을 아득히 바라보는 것을 여행이라 하고(김윤식), 또 어떤이는 삶, 흐르는 삶, 내 삶과 남의 삶이 만나 이루는 공명을 여행이라 했다(김화영). 나는 여행은 마약 같은 것, 한번 빠지면 도무지 떨칠 수 없는 무서운 유혹, 중독이라고 했다. 그리고 여행이란 인생의 사용, 하루 반나절, 한 주일, 한 달, 심지어 일 년의 시간을 적금 통장의 일부를 사용하듯이 내 생의 시간을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 살아보는 것이라고 했다. 알랭 드 보통과 피터 메일의 여행기를 독회한 소감으로 말하자면 여행은, 최근 유럽 청년들의 경전이 되고 있는 여행서 제목처럼 ‘세계의 사용(Usage du Monde)’임을 새삼 확인한다.     조인스 2004.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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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심 - '나'는 시기하지 않는다, 세상을 보는 글들 11
롤프 하우블 지음, 이미옥 옮김 / 에코리브르 / 2009년 9월
평점 :
품절


시기심을 관리하는 지혜 - 롤프 하우블, [시기심]


작가가 세속적인 부와 대중적인 인기를 멀리한다고 해서 그를 '무욕의 존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천만의 말씀. 무명 시절의 동료가 권위 있는 문학상의 수상자가 되었다면 어떨까. 그때도 그는 여전히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을까. 겉으로야 축하 운운하겠지만 나의 일처럼 기뻐해줄 수는 없을 것이다.

이비드 흄은 '철학자를 시기하는 작가는 거의 없다'는 말로 시기심의 심리적 구조를 표현했다. 데이비드 흄에 대한 한국적 버전은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쯤 될 것이다. 나와 통 관계가 없는 사람에게서는 시기심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문제는 지인들. 나와 가난을 같이 해주던 동료가 땅을 사면 '부처님 가운데 토막'같은 사람도 조금은 복통을 느낄 것이 분명하다.

기심의 대상은 다양하다. 병든 자에게는 건강이, 가난한 자에게는 부유함이, 왕비에겐 백설공주의 미모가, 살리에르에겐 모차르트의 교향곡이 시기심의 대상이 된다.

기심은 다양한 양태로 나타난다. [시기심](이미옥 옮김/에코리브르)의 저자 롤프 하우블은 시기심의 감정을 극복하기 위한 양태로 낙담, 야심, 분노의 세 가지를 든다.

'낙담'은 시기하는 대상을 결코 소유할 수 없다고 생각할 때 생긴다. "어차피 가질 수 없다면 꿈꾸지도 말자"는 식의 자포자기는 패자의 생존방식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달성할 수도 없는 과도한 욕망으로부터 자신의 프라이드를 보호하는 방책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야심'은 시기하는 대상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고, 그와 경쟁할 때 생긴다. 복수를 꿈꾸며 와신상담 내공을 쌓아가는 강호의 협객이나, 대작을 꿈꾸며 뼈를 깎는 습작에 몰두하는 문학인의 욕망이 이에 속한다고 할까. 야심의 형태로 나타나는 시기심은 대작을 만들어낼 수도 있지만, 자칫 영화 [아마데우스]의 살리에르처럼 한 사람을 파멸에 이르게 하기도 한다.

'분노'는 상대가 정당하지 못한 방식으로 소유물을 가졌다고 믿을 때 발동한다. 분노는 상대의 약점을 공격하고 폭로함으로써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킨다. 이런 분노는 홍길동으로 하여금 활빈당을 조직케 하고, 임꺽정으로 하여금 산채의 괴수가 되게도 하고, 혁명의 아지트를 구축하게도 한다. 재산신고를 누락한 의원들의 죄상을 밝히는 투서를 쓰게도 하는 것도 분노라는 이름의 시기심일 것이다.

보다 훨씬 사악한 시기심은 타인을 해치려는 시기심이다. 발자크는 시기심을 '이룰 수 없는 희망, 실패한 재능, 좌절한 성공, 거부당한 욕구들이 도망쳐서 숨는 끔찍한 도피처'라고 했다. 발자크의 경구를 음미하다보면 '아픔만큼 성숙한다'라는 말도 속빈 강정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모두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어떤 인간들은 아픔만큼 사악해지기도 하는 것이 아닌가. 제가 소유할 수 없는 것들을 파괴해버리려는 악마적 성향도 결국은 '실패의 인간'에게서 자라나는 것은 아닐까.

프 하우블은, 시기심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에 결코 감출 수 없다고 한다. 젖을 뗀 맏이가 갓난 동생을 괴롭히는 것이나, 남근을 향한 여자아이의 결핍감 등은 시기심의 원초성을 말해준다.

러나 시기심의 원초성이 시기심의 존재 당위성을 곧바로 증거해주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파괴적인 시기심. 파괴적인 시기심은 철학자 니체의 잠언집 [서광]중의 '세계 파괴자'라는 글에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이 사람은 뭔가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그는 화가 치밀어 이렇게 외친다. '세상이여, 망해버려라!' 이런 소름끼치는 감정은 시기심의 절정을 이룬다."

괴적인 시기심은 우리의 신문지상에서도 곧잘 발견된다. 소위 '막가파' '지존파' 사건. 이 사건의 주인공들은 부자들을 보면 살의를 느꼈다고 고백한 바 있다. 분배의 구조가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시기심의 한 유형이다.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에서의 난장이 아들의 살인은 이런 류의 시기심이 빚은 결과일 것이다.

런 파괴적 시기심을 운운하며, 시기심을 척결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해선 오산이다. 목표가 있을 때 그것을 달성하려는 땀은 고역이 아니라 행복일 수 있다. 야심에 찬, 고무적인 시기심은 삶의 추동력이 될 수도 있다. '억울하면 출세를 하라'라는 유행가 구절도 있지 않은가. 자기향상의 밑거름이 되는 시기심까지 탓할 일만은 아니다.

인 기형도는 '질투는 나의 힘'이라고 했다. 랄로는 어디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던 것 같다. "위대한 풍경화를 그리게 하는 것은 위대한 풍경이 아니라 위대한 풍경화"라는 것. 모든 위대한 작가란 대작을 능가하고 싶다는 시기심의 소유자가 아닌가. 그런 우월에의 욕구가 없었다면 예술사는 태작과 범작의 창고가 되었으리라. 양식 있는 예술가에게 있어서 정당한 시기심은 창조의 에너지인 셈.

치적으로 보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사람들은 '계급투쟁'을 못 가진 자들의 시기심으로 해석하지만, 롤프 하우블은 '분배가 정당하지 못할 때, 이 불평등의 구조를 바꾸는 긍정적인 힘'으로 시기심이 작용한다고 본다. 롤프 하우블은 이런 집단시기심을 극복할 방안으로서 [정의론]의 저자 존 롤스의 견해를 제시한다. 사회 구성원 간에 중요한 물질적, 비물질적 재산의 분배가 너무 불공평하여 사회 구성원들이 시기심을 품게 될 경우, 이 때의 시기심은 정당하며, 그것을 사회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정의를 세우는 것은 옳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회적 제도나 장치로서도 해결할 수 없는 시기심은 어떻게 관리해야 할까.

솝의 '신포도 이야기'도 시기심을 관리하는 데 좋은 교훈이 되겠다. 어차피 가지지 못할 바에야 "저것은 운명적으로 내 것이 아닌 것"이라고 체념하는 것도 좋으리라. 체념의 미학을 패자의 궤변으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어떠랴. 문제는 마음의 화평이 아닌가.

'당신들의 성공의 기준과 내 성공의 기준이 엄연히 다른데 내가 어째서 당신들이 땅을 산 것에 배를 아파해야 하는가' 하며 의연해보는 것도 평정심의 한 방편이리라. 당신의 동업자가 당신의 사업방면에서 성공을 했다면, 분명 무슨 술수가 있었겠지라고 비아냥거리기보다 '니는 니대로 살아라, 나는 내 길을 가면 그만 아이가?'라고 말하면 아픈 속이 좀 달래질지도 모르겠다. 좀 느긋해보자는 거다.

공한 자들이 반드시 풍족한 삶을 누린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은 성공한 자들이 가지지 못한 그 무엇이면 족하다. '군자(君子)는 의(義)에 민첩(敏捷)하고, 소인(小人)은 이(利)에 민첩하다'는 공자의 말씀을 곰곰 음미해보는 것도 좋겠다. 굳이 군자연하며 무소유를 겉으로 표나게 드러낼 필요까진 없더라도, 소유에 안달할 까닭도 없다.

본의 한 소설가의 책에서 이런 구절을 읽은 적이 있다.(오, 한심한 기억력이여!) "적들에 대한 최대의 복수는 적들보다 행복해지는 것"이라는. 그렇다. 공연히 시기심에 안달할 것 없다. 적보다 재밌게 살면 그만 아닌가. 전우익처럼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라고 뇌까려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소설가 이윤기가 어떤 출판기념회에 나타나 처음 보는 전우익 노인 앞에서 큰절을 올렸다던가. 이런 노인들의 호연지기 앞에 우리도 한번쯤 무릎을 꿇어볼 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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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10-20 0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가 이윤기가 전우익 노인에게 큰절을 올렸다고요? 재밌네요.

감각의 박물학 2004-10-20 0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랬다네요 쇼맨십은 아니겠죠.. 마음이 하고 싶은 걸 몸이 했다면 말입니다. 사진기자를 의식하는 정치인도 아니었다면 말이죠
 
내가 사랑했던 개, 율리시즈
로제 그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2년 10월
평점 :
절판


는 『내가 사랑했던 개, 율리시즈』(로제 그르니에 지음, 현대문학사 刊)을 읽으면서 ‘아주 어렸던 시절로부터 지워지지 않고 남은 유일한 영상들이 동물들인 것이다.’라는 구절에 밑줄을 그었다. 그리고 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영상들을 떠올렸다.

 타카의 왕 율리시즈는 오랜 순항 끝에 마침내 거지로 변장을 하고 자신의 조국인 섬나라로 돌아온다.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오직 그의 애견 아르고스만이 옛 주인을 단박에 알아본다. 이 대목을 『내가 사랑했던 개, 율리시즈』의 저자 로제 그르니에는 이렇게 전한다. ‘신들이 다 그렇듯이, 복수심이 강한 포세이돈이 사납게 달려들어도 끄떡도 하지 않던 율리시즈였다. 그의 눈에서 눈물을 흐르게 한 것은 오직 그의 늙은 개뿐이었다.’ 변장한 율리시즈는 다른 모든 인간들에게는 한낱 거지에 불과했지만 오직 아르고스의 눈에서만은 하나의 인간이었고 주인이었던 것이다. 로제 그르니에는 자신의 개를 ‘아르고스’가 아닌 ‘율리시즈’로 명명했다. 『내가 사랑했던 개, 율리시즈』는 그렇다고 어떤 특정한 개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다. 루소, 세르반테스, 보들레르, 발레리, 릴케, 사르트르, 라캉, 플로베르, 카뮈, 체홉, 고야, 찰리 채플린 등 수많은 예술가와 철학자들의 일화와 작품을 통해 개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이 책은 보여준다.

 제 그르니에는 마리아 릴케의 <개>라는 시 중의 네 마디를 인용한다. ‘제외되지도 않고 포함되지도 않은’. 개에 대한 이만한 철학적 통찰이 또 있을까. 개는 인간의 세계 밖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인간의 세계 속으로 확실하게 받아들여지지도 못한 어중간한 존재이다. 용변도 잘 가리고 사람의 말귀도 잘 알아듣는 것 같던 개도 때론 카페트에 제 배설물로 범벅을 하며 제 야수성을 웅변하며 인간을 경악하게 하는 것이다. 로제 그르니에는 이런 사정을 두고 이렇게 통탄한다. ‘우리가 친근하게 말을 건네며 어울리던 상대가, 그 명민한 정신과 지혜, 어쩌면 철학에 감탄해 마지않았던 그 존재가 어떻게 이 지경이 될 수 있단 말인가?’라고.

 와 관련된 그림, 사진, 시, 소설 등 풍부한 텍스트를 통해 개와 인간이 맺어온 역사적 관계를 전달하고 있는,『개와 인간의 문화사』(헬무트 브라케르트, 코라 판 클레펜스 공저, 백의출판사 刊)가 소개하는 데카르트의 견관(犬觀)은 로제 그르니에의 그것과 사뭇 양상이 다르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동물의 행동은 절대로 의식에 의해 조종되지 않으므로 순수하게 기계적인 것으로 설명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그는 짐승은 인간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간 적은 이성을 갖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 이성을 전혀 갖고 있지 않으며, 신체 기관이라는 장치에 의해 작동하는 자연에 불과하다. 이는 마치 톱니와 바늘로 구성된 시계와 마찬가지라서 우리의 모든 지혜를 동원하는 것보다 더 정확하게 시간을 재고 시각을 측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물론 데카르트의 이런 견해는 결코 경멸적인 의도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 기계들은 신의 손으로 창조된 것이라서 인간이 발명할 수 있는 그 어떤 기계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정교하게 짜여져 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성이 없는 개는 기계에 불과하다는 것이 데카르트의 주장이다. 데카르트의 주장대로라면 개에 대한 추억이나 그것을 바탕으로 한 모든 문학작품도 낭만적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밀란 쿤데라, 민음사)에서 쿤데라는 데카르트를 경멸조로 말한다. ‘짐승은 단지 생기 있는 기계에 불과하다고 데카르트는 말한다. 어떤 짐승이 비탄의 소리를 지를 때 그것은 비탄이 아니라 기능이 나쁜 기계장치가 끼익하고 내는 소리다.’ 쿤데라의 이 소설은 ‘까레닌’이라고 하는 개와 주인공 테레사와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보여준다. 쿤데라는 인간과 개의 사랑의 실체를 꼼꼼하게 분석한다. 인간의 사랑이란, 그가 나를 사랑하는가, 그가 나보다 어느 다른 누구를 사랑했는가,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그는 나를 사랑할까, 라는 질문으로 점철되어 있지만 인간과 개의 사랑이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사랑이라는 점이라는 것이 쿤데라의 첫 번째 분석이다. 두 번째 분석은 테레사는 까레닌을 있는 그대로 수락했고, 테레사는 까레닌을 그녀의 형상에 따라 변경시키고자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또 하나 개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강요된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것이라는 점이며, 개와 인간의 사랑은 갈등이 없는 사랑이며, 가슴을 찢는 듯한 장면이 없는 사랑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한 마리의 개의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 양상은 천차만별이다. 개의 죽음에서 자신의 죽음의 전조를 읽어내는 사람에게 한 개의 죽음은 통곡을 자아내기도 한다. 실제로 로제 그르니에가 그의 개, 율리시즈가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자기 앞의 생』과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의 작가 로맹 가리에게 전하자 그는 격렬한 울음을 터뜨리며 자기 집 처마밑으로 숨었다고 한다. 율리시즈가 떠나고 오래지 않아 로맹 가리도 죽었다. 그르니에는 말한다. ‘우리 셋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으니, 한데 결부시켜서 말해서 안 될 까닭은 없지 않은가?’라고. 가히 종(種)을 넘나드는 사랑의 절창이다.

 화의 포스터는 ‘사랑은 죽음을 건너뛴다’라고 말하지만 현실의 사랑은 죽음 앞에서 속수무책이다. 어린아이들은 어항 속의 물고기의 죽음을 통해, 햄스터와 다람쥐의 죽음을 통해, 개와 고양이의 죽음을 통해 슬픔을 극복하는 지혜를 터득한다. 특정의 기능을 위해 길러진 동물이 아닌 인간의 동반자로서의 동물[companion animal]의 죽음을 통해 인간은 죽음의 형이상학과 슬픔의 깊이를 배운다.

 『내가 사랑했던 개, 율리시즈』은 역자, 김화영의 말대로 ‘한 줄 한 줄 고심해서 새기며 읽을 때 비로소 마음 속 깊이 사무치는’ 책이다. 개에 대한 추억이 있는 독자라면 아련한 기억들을 떠올리며 읽어도 좋을 것이다. 추운 겨울날이라면 읽기에 제 격이다. ‘순수한 사랑’이라는 화두를 떠올리며 그 어떤 따스한 품을 그려봐도 좋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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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증보판 리라이팅 클래식 1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고미숙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그린비)은 제목 그대로 아주 유쾌하게 읽힌다. 한 번 잡은 책을 여간해서 놓을 수가 없다. 생동하는 구어, 과감한 생략과 영탄 등 저자의 발랄한 문체가 박지원을 살아있는 독서의 공간으로 불러낸다. 그 공간을 들여다보는 독자들은 시종 즐겁다. 근엄한 실학자로만 알았던 박지원이 기운생동하는 인간이었음을 이 책은 말해준다. 훤칠한 풍채, 우렁찬 목소리, 다혈질이면서도 유순한 성격, 촌철살인의 유머감각, 한마디로 연암은 매력, 그 자체였다. 연암의 매니아로서 그의 인간적 매력을 고백하는 고미숙의 어법은 지극히 날렵하지만 결코 경박하지는 않다. 고전의 엄숙주의와 고리타분함에 경쾌한 잽을 날리며 문체는 씽씽 내닫는다. 그 문체는 고미숙의 것이면서 또한 연암의 것이기도 하다.

  점잔을 빼는 학자라면 고미숙의 글쓰기에 도리질을 칠지도 모르겠다. 주관성을 배제하고, 수사를 절제하라는 것이 소위 ‘논문식 글쓰기’의 암묵적 명령이었다. 객관성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결과적으로 읽히지도 않는 몰개성적인 논문을 양산해냈다. 대한민국에서 학문을 한다는 것은 그런 몰개성적인 글쓰기에 직간접으로 참여한다는 일이기도 했다.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의 저자, 고미숙은 이런 논문식 글쓰기 방식을 그리 달갑지 않게 여긴다. 그녀의 말을 들어 보자. ‘어떤 어조와 제스처를 쓸 것인가, 혹은 어떤 장식음을 활용할 것인가, 하는 따위는 단순한 테크닉이 아니다. 그런 테크닉을 숙련하는 과정 자체가 앎의 경계를 결종한다. 말하자면, 문체는 사유가 전개되는 초험적인 장인 셈이다. .... 지금 대학에서 양산하는 학문체계는 논문이라는 표현형식을 모든 구성원들에게 부과한다. 그러므로 학위를 따기 위해서는 대학이 부과하는 코드화된 언표체계를 습득해야만 한다. 예컨대, 서론, 본론, 결론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또 결론에선 본론의 내용을 정리하면서 남는 과제를 제시한다는 식으로, 사용되는 문장형식도 몇 가지로 정해져 있다. 이런 틀에 맞추려면 당연히 담을 수 있는 내용도 한정될 수밖에 없다....만약에 논문에 네티즌들 사이에서 주고받는 문체를 사용했다고 하자. 아예 논문 제출단계에서 짤리고 만다. 그 정도까지 갈 것도 없이 약간만이라도 아카데믹한 어법에서 벗어나면, 당장 제동이 걸리는 게 대학의 현실이다....문체야말로 체제가 지식인을 길들이는 가장 첨단의 기제라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문체는 지배적인 사유를 전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서야 할 문턱이기도 하다.’ 이 문장들은 박지원의 시대를 말하고 있지만 동시에 오늘 우리의 현실을 말하고 있다. ‘과거를 말하면서 오늘을 말하기’, 바로 그것이 이 책의 서술전략이다.

  이 책은 한마디로 ‘열하일기’에 대한 유쾌한 해석서다. 고미숙이 소개하는 연암은 그 동안 우리가 알고 있었던 연암의 선입견을 단 한 방에 날려준다. 저자가 전해주는 연암은 유머와 역설로 시대를 농락해버린 웃음의 천재요, 개그의 달인이었다. ‘열하일기의 빛나는 유머와 뜨거운 패러독스를 사방팔방에 알리고 싶었다’라고 이 책의 저술동기를 저자는 말한다. 그 의도는 상당 부분 달성한 듯 보인다.

  이 책의 곳곳에는 들뢰즈의 자취가 어른거린다. 유목․탈주․배치와 같은 들뢰즈식 개념어들이 연암을 설명하는 데 맞춤한 틀이 되어주고 있다. 들뢰즈의 어법을 빌자면 연암은 지배적 코드로부터 탈주하여 전혀 다른 종류의 삶을 산 유쾌한 분열자였으며 한시(漢詩)라고 하는 형식적 틀로부터조차도 탈주하고자 했던 유목민이었다. 한마디로 그는 어떤 것에도 걸림이 없었다. 어떤 장르적 구속도 그의 생동하는 에너지를 가둘 수 없었다. 그만큼 그는 발랄한 인간이었다. ‘그에게 진정 중요한 것은 소품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문장에 생의 약동하는 기운을 불어넣을 것인가였다. 말하자면 글이란 읽는 이들을 촉발하는 공명통이어야 한다. 찬탄이든 증오든 공명을 야기하지 못하는 글은 죽은 것이다’ 연암의 문체를 잘 요약해주는 문장이다. 이를 다시 들뢰즈의 어법으로 번역하면 이렇다. ‘중요한 것은 외부와 내부를 넘나들면서 끊임없이 차이를 만들어내는 변이의 능력인 것이다. 따라서 그의 논점을 변증법적으로 영토화하는 순간 종횡무진하는 이 게릴라적인 담론은 고상하고 평온한 질서로 평정되고 만다....그의 글은 소설과 소품, 고문과 변려문 등이 자유자재로 섞이는 한편, 천고의 흥망성쇠를 다룬 거대담론과 시정의 우스갯소리, 잡다하고 황당한 이야기들이 공존하고 있다. 그것은 어떤 하나로 분류되는 순간, 그 그물망을 교묘하게 빠져나가 전혀 다른 표정을 짓곤 한다.’

  ‘열하일기’를 영화로 만든다면 예고편의 컨셉을 ‘호모루덴스가 펼치는 개그의 향연’으로 잡겠다는 식의 구절은 다소 연암을 희화화한 감이 없지 않지만 과히 틀린 말도 아닌 듯싶다. 속사포처럼 튀어나오는 연암의 달변을 찬찬히 음미하다보면 말이다. 무엇보다 이 책의 매력은 연암의 인간적 매력을 독서의 시공간 안에 탄력 있는 언어를 빌어 복원시켜 놓았다는 점. 연암과 다산을 비교한 대목도 흥미롭다. ‘그(다산)가 택한 행로는 혁명적이기는 하되, 성리학적 틀과 마찬가지로 이항대립적 마디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이 안에서 소수적이고 분열적인 욕망의 흐름이 틈입할 여지는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그 예측불가능한 흐름들은 중심적인 의미화의 장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아이로니컬하게도, 경세가인 다산이 엄청난 양의 시를 쓴 데 비해, 정작 문장가인 연암은 시의 격률이 주는 구속감을 견디지 못해 극히 적은 수의 시만을 남겼다. 전자가 시에 혁명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다면, 후자는 시의 양식적 코드화 자체로부터 탈주하고자 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신체의 파동을 지녔던 셈이다.’

  이 책에서 가장 감동적인 대목은 호곡장(好哭場)을 소개하는 대목이다. 광활하기 짝이 없는 요동벌판을 처음 본 순간 연암은 이렇게 독백한다.“ 아, 참 좋은 울음터로다. 가히 한번 울만하구나.” 연암의 도저한 내공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요동벌판이 한 번 울기에 좋은 곳이란다. 이에 일행 중의 한 사람인 정진사가 "이런 하늘과 땅 사이의 큰 안계(眼界)를 만나서 갑자기 다시금 울기를 생각함은 어찌된 것이요?"라고 물으니 이에 대한 연암의 대답이 기상천외한 걸작이다. ‘아이가 태 속에 있을 때는 캄캄하고 막힌 데다 에워싸여 답답하다가, 하루 아침에 넓은 곳으로 빠져 나와 손과 발을 주욱 펼 수 있고 마음이 시원스레 환하게 되니 어찌 참된 소리로 정을 다해서 한바탕 울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있겠소? 그런 까닭에 마땅히 어린아이를 본받아야만 소리에 거짓으로 짓는 것이 없게 될 것일세. 금강산 비로봉 꼭대기에 올라 동해를 바라보는 것이 한 바탕 울만한 곳이 될 만하고, 황해도 장연(長淵)의 금사산(金沙山)이 한 바탕 울 만한 곳이 될 만하오. 이제 요동벌에 임하매, 여기서부터 산해관(山海關)까지 일천 이백 리 길에 사방에는 모두 한 점의 산도 없어 하늘가와 땅 끝은 마치 아교풀로 붙이고 실로 꿰매 놓은 것만 같아 해묵은 비와 지금 구름이 다만 창창할 뿐이니 한 바탕 울만한 곳이 될 만하오.’ 연암의 이 거인다운 스케일에 압도당하는 즐거움을 맛보기 위해선 ‘열하일기’에 직접 부딪혀 볼 일이다. 그러나 고미숙을 읽는 독서의 시간도 충분히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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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미숙, 몸과 우주의 유쾌한 시공간 '동의보감'을 만나다
    from 그린비출판사 2011-10-20 17:00 
    리라이팅 클래식 15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출간!!! 병처럼 낯설고 병처럼 친숙한 존재가 있을까. 병이 없는 일상은 생각하기 어렵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나 역시 살아오면서 수많은 병들을 앓았다. 봄가을로 찾아오는 심한 몸살, 알레르기 비염, 복숭아 알러지로 인한 토사곽란, 임파선 결핵 등등. 하지만 한번도 병에 대해 궁금한 적이 없었다. 다만 얼른 떠나보내기에만 급급해했을 뿐. 마치 어느 먼 곳에서 실수로 들이닥친 불...
 
 
 
곰에서 왕으로 - 국가, 그리고 야만의 탄생 - 카이에 소바주 2
나카자와 신이치 지음, 김옥희 옮김 / 동아시아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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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무엇이 야만인가
곰에서 왕으로 : 국가, 그리고 야만의 탄생,
나카자와 신이치 지음, 김옥희 옮김 / 동아시아, 2003



    개조차 퍼덕일 수 없는 비좁은 닭장 안의 닭들에겐 엄청난 양의 성장호르몬제가 투여된다. 인간으로 치자면 갓 태어난 아이를 18주만에 650킬로그램의 거구로 만들 수 있는 양의 호르몬이 닭들에게 투여된단다. 말 못하는 닭들로서도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닐 게다. 스트레스 때문에 부리로 상대방을 쪼아 죽일 수도 있다는 염려 때문에 양계장의 닭들의 부리는 모두 잘라 버린다. 심신이 온전할 리가 만무하다. 그러나 그들에겐 병들 권리조차 없다. 엄청난 양의 항생제가 그들에게 투여되기 때문이다. 양계장의 조명도 닭들을 혹사한다. 몸집을 불려놓고 보자는 인간의 얄팍한 계산으로 양계장에는 불이 꺼지지 않는다. 조명이 켜져 있는 한 닭들은 밤을 낮으로 알고 모이를 먹는다.

    혹독한 문명의 시련만 있을 뿐, 양계장 어디에도 닭들을 위한 배려는 없다. 사정은 소나 돼지의 경우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인간의 폭거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자연과 인간의 힘을 재는 저울이 있다면 저울은 인간 쪽으로 기울어져도 한참 기울어져 있다. 엄청난 비대칭성이다.

일본의 유명 출판사인 고단샤(講談社)에서 발행 중인 '카이에 소바주(Cahier Sauvage:야생적 사고의 산책)' 시리즈는 신세대에게 교양인문학의 저변을 넓히기 위해 기획한 것으로, 나카자와 신이치 교수의 대학 강의를 기록한 것이다. 총 다섯 권으로 예정되어 있으며 동아시아 출판사에 모두 출간할 예정이다. 『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에 이은 두 번째 권, 『곰에서 왕으로』에서는 국가라는 야만적인 권력이 탄생하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나카자와의 책에 의하면 신화 시대에는 자연과 인간이 서로 존중하고 호혜성의 관계를 지키며 공존했다. 인간과 동물이 결혼을 하기도 하고, 곰은 언제나 자신의 가죽만 벗으면 인간으로 변할 수도 있었다. 가령, 북미의 톰슨 인디언들은 연어를 잡아 살과 내장을 깨끗이 먹은 후에 남은 뼈나 껍질도 정성스럽게 다루었다. 쓰레기장 같은 곳에 함부로 버리는 일은 결코 없었다. 그들은 예를 갖추고 가능하면 뼈를 부러뜨리지 않도록 해서 조심스럽게 강에 흘려보냈다.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받은 은혜만큼 자연에 돌려준다는 ‘대칭성’의 사고가 톰슨 인디언을 지배했다.

    신화의 시대, 인간은 결코 자연 위에 일방적으로 군림하지 않았다. 인간은 조금도 특별할 것이 없는 생명의 일원일 뿐이었다. 신화가 일상적으로 이야기되던 사회에서 인간이 동물에 비해 일방적인 우위에 있거나, 구체적인 인간 관계를 초월한 권력 같은 것이 사람들에게 강압적인 힘을 휘두르는 일도 없었다. ‘대칭성’의 사회에서는 권력은 원래 인간의 소유가 아니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연에서 빌려온 것일 뿐이었다.

    문제는 기술이었다. 신석기 후기에 새로운 문명의 도구가 만들어지자,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사이 대칭관계가 파괴되고 힘이 한쪽으로 기우는 비대칭의 관계가 형성된다. 이 위계질서 위에서 왕이 출현하고 국가가 태어났으며, 증여와 교감과 소통은 지배와 폭력과 착취로 대체됐다. 문명화 과정은 이 비대칭의 저울을 극단적으로 한쪽으로 쏠리게 했다. ‘야만’의 땅에 ‘문명’을 심어준다는 명분으로 제국주의는 식민주의의 손길을 뻗쳤지만 그 결과는 어떠했던가. 수많은 제3세계의 인민들이 학살당하고, 원시의 신화를 간직한 아름드리 수목이 잘려나가고 동식물이 떼죽음을 당하지 않았던가. 나카자와 신이치가 말하는 이른바 자연과 인간의 ‘비대칭성’이 초래한 재앙이다. 지식을 축적한 인간이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대칭성을 무시하고 권력을 독점하면서 스스로 왕이 되려는 자가 나타나고 국가를 형성하면서 ꡐ야만ꡑ의 비극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나카자와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학문적인 흥취의 문제가 아니다. 그가 말하는 신화를 읽는다는 것은 현재와 직결되는 의미를 갖는다. 우리의 시대가 절실하게 신화를 요청하고 있다는 말이다. 니카자와는 우리의 ‘문화’적인 생활이 ‘야만’의 행위의 기초 위에 성립되어 있다고 단호히 말한다. 자연과 공존하고, 서로 주고받는, 상생과 호혜의 관계가 아닌 일방적인 착취의 관계 위에 세워진 것이 우리의 문명이라는 것이다. 일부 사람들의 쾌적한 생활을 위해서 그들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과 동물들이 견디기 힘든 고통이나 죽음을 맛보아야만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 아닌가. 풍요로운 자와 가난한 자 사이에, 혹은 인간과 동물 사이에 형성된 이런 ‘비대칭성’의 현실에 현대인들은 무감각하다. 신화는 그저 까마득한 시대의 옛이야기일 뿐이다.

    신식 화기와 첨단 레이저로 무장한 사냥꾼은 진정한 사냥꾼일 수 없다. 백 전의 싸움에서 백 승을 하는 사냥꾼은 사냥꾼이 아니다. 질 수도 있고, 이길 수도 있는 것이 진정한 싸움이다. 싸움의 미학이 있다면 그것은 승패의 불확실성에서 오는 긴장의 미학이다. 일방적인 승리로 귀결되는 싸움은 싱겁기 그지없는 싸움이다. 닭싸움이나 개싸움도 그보다는 낫다. 질 수도 있고 이길 수도 있는 확률을 가진 ‘대칭적’인 싸움, 그러한 싸움만이 진정한 싸움이다. 패배를 모르는 싸움은 일방적인 테러일 뿐 진정한 싸움은 아니다. 기술과 문명으로 인간은 많은 것을 얻었지만 진정한 싸움꾼의 윤리와 야성을 잃은 지는 이미 오래다.

    신화는 인간이 잃어버린 윤리와 야성의 기록이다. 야만의 시대, 그래서 신화를 읽는 것은 아리기 그지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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