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했던 개, 율리시즈
로제 그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2년 10월
평점 :
절판


는 『내가 사랑했던 개, 율리시즈』(로제 그르니에 지음, 현대문학사 刊)을 읽으면서 ‘아주 어렸던 시절로부터 지워지지 않고 남은 유일한 영상들이 동물들인 것이다.’라는 구절에 밑줄을 그었다. 그리고 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영상들을 떠올렸다.

 타카의 왕 율리시즈는 오랜 순항 끝에 마침내 거지로 변장을 하고 자신의 조국인 섬나라로 돌아온다.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오직 그의 애견 아르고스만이 옛 주인을 단박에 알아본다. 이 대목을 『내가 사랑했던 개, 율리시즈』의 저자 로제 그르니에는 이렇게 전한다. ‘신들이 다 그렇듯이, 복수심이 강한 포세이돈이 사납게 달려들어도 끄떡도 하지 않던 율리시즈였다. 그의 눈에서 눈물을 흐르게 한 것은 오직 그의 늙은 개뿐이었다.’ 변장한 율리시즈는 다른 모든 인간들에게는 한낱 거지에 불과했지만 오직 아르고스의 눈에서만은 하나의 인간이었고 주인이었던 것이다. 로제 그르니에는 자신의 개를 ‘아르고스’가 아닌 ‘율리시즈’로 명명했다. 『내가 사랑했던 개, 율리시즈』는 그렇다고 어떤 특정한 개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다. 루소, 세르반테스, 보들레르, 발레리, 릴케, 사르트르, 라캉, 플로베르, 카뮈, 체홉, 고야, 찰리 채플린 등 수많은 예술가와 철학자들의 일화와 작품을 통해 개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이 책은 보여준다.

 제 그르니에는 마리아 릴케의 <개>라는 시 중의 네 마디를 인용한다. ‘제외되지도 않고 포함되지도 않은’. 개에 대한 이만한 철학적 통찰이 또 있을까. 개는 인간의 세계 밖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인간의 세계 속으로 확실하게 받아들여지지도 못한 어중간한 존재이다. 용변도 잘 가리고 사람의 말귀도 잘 알아듣는 것 같던 개도 때론 카페트에 제 배설물로 범벅을 하며 제 야수성을 웅변하며 인간을 경악하게 하는 것이다. 로제 그르니에는 이런 사정을 두고 이렇게 통탄한다. ‘우리가 친근하게 말을 건네며 어울리던 상대가, 그 명민한 정신과 지혜, 어쩌면 철학에 감탄해 마지않았던 그 존재가 어떻게 이 지경이 될 수 있단 말인가?’라고.

 와 관련된 그림, 사진, 시, 소설 등 풍부한 텍스트를 통해 개와 인간이 맺어온 역사적 관계를 전달하고 있는,『개와 인간의 문화사』(헬무트 브라케르트, 코라 판 클레펜스 공저, 백의출판사 刊)가 소개하는 데카르트의 견관(犬觀)은 로제 그르니에의 그것과 사뭇 양상이 다르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동물의 행동은 절대로 의식에 의해 조종되지 않으므로 순수하게 기계적인 것으로 설명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그는 짐승은 인간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간 적은 이성을 갖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 이성을 전혀 갖고 있지 않으며, 신체 기관이라는 장치에 의해 작동하는 자연에 불과하다. 이는 마치 톱니와 바늘로 구성된 시계와 마찬가지라서 우리의 모든 지혜를 동원하는 것보다 더 정확하게 시간을 재고 시각을 측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물론 데카르트의 이런 견해는 결코 경멸적인 의도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 기계들은 신의 손으로 창조된 것이라서 인간이 발명할 수 있는 그 어떤 기계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정교하게 짜여져 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성이 없는 개는 기계에 불과하다는 것이 데카르트의 주장이다. 데카르트의 주장대로라면 개에 대한 추억이나 그것을 바탕으로 한 모든 문학작품도 낭만적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밀란 쿤데라, 민음사)에서 쿤데라는 데카르트를 경멸조로 말한다. ‘짐승은 단지 생기 있는 기계에 불과하다고 데카르트는 말한다. 어떤 짐승이 비탄의 소리를 지를 때 그것은 비탄이 아니라 기능이 나쁜 기계장치가 끼익하고 내는 소리다.’ 쿤데라의 이 소설은 ‘까레닌’이라고 하는 개와 주인공 테레사와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보여준다. 쿤데라는 인간과 개의 사랑의 실체를 꼼꼼하게 분석한다. 인간의 사랑이란, 그가 나를 사랑하는가, 그가 나보다 어느 다른 누구를 사랑했는가,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그는 나를 사랑할까, 라는 질문으로 점철되어 있지만 인간과 개의 사랑이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사랑이라는 점이라는 것이 쿤데라의 첫 번째 분석이다. 두 번째 분석은 테레사는 까레닌을 있는 그대로 수락했고, 테레사는 까레닌을 그녀의 형상에 따라 변경시키고자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또 하나 개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강요된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것이라는 점이며, 개와 인간의 사랑은 갈등이 없는 사랑이며, 가슴을 찢는 듯한 장면이 없는 사랑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한 마리의 개의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 양상은 천차만별이다. 개의 죽음에서 자신의 죽음의 전조를 읽어내는 사람에게 한 개의 죽음은 통곡을 자아내기도 한다. 실제로 로제 그르니에가 그의 개, 율리시즈가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자기 앞의 생』과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의 작가 로맹 가리에게 전하자 그는 격렬한 울음을 터뜨리며 자기 집 처마밑으로 숨었다고 한다. 율리시즈가 떠나고 오래지 않아 로맹 가리도 죽었다. 그르니에는 말한다. ‘우리 셋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으니, 한데 결부시켜서 말해서 안 될 까닭은 없지 않은가?’라고. 가히 종(種)을 넘나드는 사랑의 절창이다.

 화의 포스터는 ‘사랑은 죽음을 건너뛴다’라고 말하지만 현실의 사랑은 죽음 앞에서 속수무책이다. 어린아이들은 어항 속의 물고기의 죽음을 통해, 햄스터와 다람쥐의 죽음을 통해, 개와 고양이의 죽음을 통해 슬픔을 극복하는 지혜를 터득한다. 특정의 기능을 위해 길러진 동물이 아닌 인간의 동반자로서의 동물[companion animal]의 죽음을 통해 인간은 죽음의 형이상학과 슬픔의 깊이를 배운다.

 『내가 사랑했던 개, 율리시즈』은 역자, 김화영의 말대로 ‘한 줄 한 줄 고심해서 새기며 읽을 때 비로소 마음 속 깊이 사무치는’ 책이다. 개에 대한 추억이 있는 독자라면 아련한 기억들을 떠올리며 읽어도 좋을 것이다. 추운 겨울날이라면 읽기에 제 격이다. ‘순수한 사랑’이라는 화두를 떠올리며 그 어떤 따스한 품을 그려봐도 좋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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