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기심 - '나'는 시기하지 않는다, 세상을 보는 글들 11
롤프 하우블 지음, 이미옥 옮김 / 에코리브르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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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심을 관리하는 지혜 - 롤프 하우블, [시기심]


작가가 세속적인 부와 대중적인 인기를 멀리한다고 해서 그를 '무욕의 존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천만의 말씀. 무명 시절의 동료가 권위 있는 문학상의 수상자가 되었다면 어떨까. 그때도 그는 여전히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을까. 겉으로야 축하 운운하겠지만 나의 일처럼 기뻐해줄 수는 없을 것이다.

이비드 흄은 '철학자를 시기하는 작가는 거의 없다'는 말로 시기심의 심리적 구조를 표현했다. 데이비드 흄에 대한 한국적 버전은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쯤 될 것이다. 나와 통 관계가 없는 사람에게서는 시기심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문제는 지인들. 나와 가난을 같이 해주던 동료가 땅을 사면 '부처님 가운데 토막'같은 사람도 조금은 복통을 느낄 것이 분명하다.

기심의 대상은 다양하다. 병든 자에게는 건강이, 가난한 자에게는 부유함이, 왕비에겐 백설공주의 미모가, 살리에르에겐 모차르트의 교향곡이 시기심의 대상이 된다.

기심은 다양한 양태로 나타난다. [시기심](이미옥 옮김/에코리브르)의 저자 롤프 하우블은 시기심의 감정을 극복하기 위한 양태로 낙담, 야심, 분노의 세 가지를 든다.

'낙담'은 시기하는 대상을 결코 소유할 수 없다고 생각할 때 생긴다. "어차피 가질 수 없다면 꿈꾸지도 말자"는 식의 자포자기는 패자의 생존방식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달성할 수도 없는 과도한 욕망으로부터 자신의 프라이드를 보호하는 방책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야심'은 시기하는 대상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고, 그와 경쟁할 때 생긴다. 복수를 꿈꾸며 와신상담 내공을 쌓아가는 강호의 협객이나, 대작을 꿈꾸며 뼈를 깎는 습작에 몰두하는 문학인의 욕망이 이에 속한다고 할까. 야심의 형태로 나타나는 시기심은 대작을 만들어낼 수도 있지만, 자칫 영화 [아마데우스]의 살리에르처럼 한 사람을 파멸에 이르게 하기도 한다.

'분노'는 상대가 정당하지 못한 방식으로 소유물을 가졌다고 믿을 때 발동한다. 분노는 상대의 약점을 공격하고 폭로함으로써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킨다. 이런 분노는 홍길동으로 하여금 활빈당을 조직케 하고, 임꺽정으로 하여금 산채의 괴수가 되게도 하고, 혁명의 아지트를 구축하게도 한다. 재산신고를 누락한 의원들의 죄상을 밝히는 투서를 쓰게도 하는 것도 분노라는 이름의 시기심일 것이다.

보다 훨씬 사악한 시기심은 타인을 해치려는 시기심이다. 발자크는 시기심을 '이룰 수 없는 희망, 실패한 재능, 좌절한 성공, 거부당한 욕구들이 도망쳐서 숨는 끔찍한 도피처'라고 했다. 발자크의 경구를 음미하다보면 '아픔만큼 성숙한다'라는 말도 속빈 강정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모두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어떤 인간들은 아픔만큼 사악해지기도 하는 것이 아닌가. 제가 소유할 수 없는 것들을 파괴해버리려는 악마적 성향도 결국은 '실패의 인간'에게서 자라나는 것은 아닐까.

프 하우블은, 시기심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에 결코 감출 수 없다고 한다. 젖을 뗀 맏이가 갓난 동생을 괴롭히는 것이나, 남근을 향한 여자아이의 결핍감 등은 시기심의 원초성을 말해준다.

러나 시기심의 원초성이 시기심의 존재 당위성을 곧바로 증거해주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파괴적인 시기심. 파괴적인 시기심은 철학자 니체의 잠언집 [서광]중의 '세계 파괴자'라는 글에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이 사람은 뭔가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그는 화가 치밀어 이렇게 외친다. '세상이여, 망해버려라!' 이런 소름끼치는 감정은 시기심의 절정을 이룬다."

괴적인 시기심은 우리의 신문지상에서도 곧잘 발견된다. 소위 '막가파' '지존파' 사건. 이 사건의 주인공들은 부자들을 보면 살의를 느꼈다고 고백한 바 있다. 분배의 구조가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시기심의 한 유형이다.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에서의 난장이 아들의 살인은 이런 류의 시기심이 빚은 결과일 것이다.

런 파괴적 시기심을 운운하며, 시기심을 척결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해선 오산이다. 목표가 있을 때 그것을 달성하려는 땀은 고역이 아니라 행복일 수 있다. 야심에 찬, 고무적인 시기심은 삶의 추동력이 될 수도 있다. '억울하면 출세를 하라'라는 유행가 구절도 있지 않은가. 자기향상의 밑거름이 되는 시기심까지 탓할 일만은 아니다.

인 기형도는 '질투는 나의 힘'이라고 했다. 랄로는 어디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던 것 같다. "위대한 풍경화를 그리게 하는 것은 위대한 풍경이 아니라 위대한 풍경화"라는 것. 모든 위대한 작가란 대작을 능가하고 싶다는 시기심의 소유자가 아닌가. 그런 우월에의 욕구가 없었다면 예술사는 태작과 범작의 창고가 되었으리라. 양식 있는 예술가에게 있어서 정당한 시기심은 창조의 에너지인 셈.

치적으로 보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사람들은 '계급투쟁'을 못 가진 자들의 시기심으로 해석하지만, 롤프 하우블은 '분배가 정당하지 못할 때, 이 불평등의 구조를 바꾸는 긍정적인 힘'으로 시기심이 작용한다고 본다. 롤프 하우블은 이런 집단시기심을 극복할 방안으로서 [정의론]의 저자 존 롤스의 견해를 제시한다. 사회 구성원 간에 중요한 물질적, 비물질적 재산의 분배가 너무 불공평하여 사회 구성원들이 시기심을 품게 될 경우, 이 때의 시기심은 정당하며, 그것을 사회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정의를 세우는 것은 옳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회적 제도나 장치로서도 해결할 수 없는 시기심은 어떻게 관리해야 할까.

솝의 '신포도 이야기'도 시기심을 관리하는 데 좋은 교훈이 되겠다. 어차피 가지지 못할 바에야 "저것은 운명적으로 내 것이 아닌 것"이라고 체념하는 것도 좋으리라. 체념의 미학을 패자의 궤변으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어떠랴. 문제는 마음의 화평이 아닌가.

'당신들의 성공의 기준과 내 성공의 기준이 엄연히 다른데 내가 어째서 당신들이 땅을 산 것에 배를 아파해야 하는가' 하며 의연해보는 것도 평정심의 한 방편이리라. 당신의 동업자가 당신의 사업방면에서 성공을 했다면, 분명 무슨 술수가 있었겠지라고 비아냥거리기보다 '니는 니대로 살아라, 나는 내 길을 가면 그만 아이가?'라고 말하면 아픈 속이 좀 달래질지도 모르겠다. 좀 느긋해보자는 거다.

공한 자들이 반드시 풍족한 삶을 누린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은 성공한 자들이 가지지 못한 그 무엇이면 족하다. '군자(君子)는 의(義)에 민첩(敏捷)하고, 소인(小人)은 이(利)에 민첩하다'는 공자의 말씀을 곰곰 음미해보는 것도 좋겠다. 굳이 군자연하며 무소유를 겉으로 표나게 드러낼 필요까진 없더라도, 소유에 안달할 까닭도 없다.

본의 한 소설가의 책에서 이런 구절을 읽은 적이 있다.(오, 한심한 기억력이여!) "적들에 대한 최대의 복수는 적들보다 행복해지는 것"이라는. 그렇다. 공연히 시기심에 안달할 것 없다. 적보다 재밌게 살면 그만 아닌가. 전우익처럼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라고 뇌까려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소설가 이윤기가 어떤 출판기념회에 나타나 처음 보는 전우익 노인 앞에서 큰절을 올렸다던가. 이런 노인들의 호연지기 앞에 우리도 한번쯤 무릎을 꿇어볼 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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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10-20 0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가 이윤기가 전우익 노인에게 큰절을 올렸다고요? 재밌네요.

감각의 박물학 2004-10-20 0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랬다네요 쇼맨십은 아니겠죠.. 마음이 하고 싶은 걸 몸이 했다면 말입니다. 사진기자를 의식하는 정치인도 아니었다면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