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몽테뉴 지음, 정기철 옮김 / 이다미디어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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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지혜의 사람, 몽테뉴



 지식의 사람이 있고 지혜의 사람이 있다.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내 식으로 거칠게 분류하자면 아리스토텔레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같은 수재들은 전자에 속하겠고 몽테뉴와 소크라테스는 후자에 속한다고 하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 정치학, 윤리학, 동물학. 시학 등 다양한 방면에 걸쳐 자신의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반면에 우리가 몽테뉴의 지적 편력을 살펴볼 수 있는 저서는 고작해야 『수상록』 정도다. 『수상록』은 장중하지 않다. 가벼운 이야기 거리다. 현학적 이론도 없고, 헤겔에서처럼 정교한 논리적 분석도 없다. 일이관지(一以貫之), 책 전체를 하나로 꿰뚫겠다는 추상(抽象)의 의욕도 없다. 혹자는 이를 두고 깊이가 없다거니, 사유의 두께가 얇다거니 혹평을 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이런 혹평은 번지수가 틀렸다. 한 작가에게 있어서의 내용과 형식이란 그 작가의 실존의 전 무게가 걸린 문제다. 몽테뉴라는 한 개인의 실존이 선택한 '가벼움'을 그의 지적 허약함이나 불성실의 문제로 따지려 드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는 얘기다. 몽테뉴가 누군가. 떠르르한 이론을 들먹이거나 거창한 담론으로 지적인 스케일을 과시해보겠다는 의도 따위는 그에겐 멀었다.

  "돌파구를 뚫고, 외교사절을 이끌고,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분명 눈부신 행위들이다. 하지만 꾸짖고, 웃고, 물건을 사고 팔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그리고 그대 자신과 더 나아가 그대의 식솔과 마찰 없이 공평하게, 그대 자신을 속이거나 게으르지 않고, 잘 어울려 사는 것보다 더 눈부시고, 또 드물고 어려운 일은 없다. 사람들이야말로 그렇지 않은 삶들 못지 않은 긴장과 무게로 각자의 직분에 충실하다."

 몽테뉴는 시정잡배들의 삶도 대언장어(大言壯語)를 구사하는 종교가와 정치가의 삶에 필적하는 가치가 있음을 말한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박학다식이 정작 그 자신들에게는 어떤 소용이 있을까?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질병으로부터 자유롭게 했던가? 그것이 상식의 문지기에게 일어났던 불행을 덜어 주었는가? 논리학이 그들의 통풍(痛風)에 위안이 되었던가?"

 몽테뉴의 이런 발언은 독서의 지향점에 대해서 새삼스런 성찰을 제기한다. 한 선승의 죽음에 대한 성찰의 깊이가 죽음의 두려움을 상쇄하지 못한다면 그의 오랜 묵언정진(默言精進)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다고 해서 모든 학문이 반드시 어떤 현실적 필요에 응답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효용과 효율로 모든 사물의 가치를 재단하는 우리시대의 척도란 얼마나 용렬하기 짝이 없는 것인지. 그러나 지식이 우리의 삶을 성찰하게 하고 풍요롭게 하지 못한다면 몽테뉴의 이런 어법은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하다.

 "죽음이 닥칠 때 나는 양배추를 심고 있었으면 한다. 죽음에 대해서도 걱정하지 않고, 미처 끝내지도 못한 정원 손질에 대해서도 걱정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죽음에 대한 모든 담론은 결국 독배를 든 저 소크라테스 의 담대함을 위한 것이어야 하지는 않을까."


 『형제라는 이름의 타인』(양혜영, 울림) 이란 책은 '형제란 무엇인가, 형제는 얼마나 닮았고 얼마나 다른가. 나는 형제에게, 형제는 나에게 어떤 존재인가.'에 관해 신화와 문학과 역사, 과학을 아우르며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그런 책에 대한 독서가 형제간의 분란을 진정시키는 데 얼마나 일조할지는 의문이다. 그렇다고 이런 책의 백해무익을 강조하는 것 또한 어리석다. 문제는 이런 책이 주는 메시지를 일상적 삶의 차원에서 용해시킬 수 있느냐일 것이다. 어쨌든 지적인 허기를 채워주는 책이 반드시 인간에 대한 밝은 눈뜸의 지혜를 마련해주는 것 같지는 않다. 형제에 대한 지식의 증가가 형제에 대한 연민과 이해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얘기다. 몽테뉴는 말한다.

 "나는 어떠한 일로도, 심지어 그렇게 소중하다는 학식을 얻는 일로도 머리를 싸맬 생각은 없다. 책을 통해서 내가 추구하는 모든 것은 시간을 올바르게 활용하여 나 자신에게 즐거움을 안겨주는 것이다. 만약에 책을 읽다가 어려운 문장을 만나기라도 한다면 그 부분을 곰곰 생각하느라 손톱을 물어뜯는 일은 절대로 없다. 한 두 번 이해해보려고 노력하다가 안 되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만약 어떤 책이 나를 피곤하게 만들면 나는 다른 책을 집어든다."

 이런 발언이 그리스와 로마 철학에 통달한 사람, 몽테뉴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조금은 엄살 같다. 즐거움을 안겨주는 독서를 지향했던 몽테뉴의 발언은 「논어(論語)」'옹야편(雍也篇)'의 다음과 같은 구절을 연상시킨다. '안다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그것을 즐기는 것만 못하다(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知者)’어떤 실용적 목적에 응답해야 할 의무감을 벗어버리고, 독서 그 자체에 몰입하는, 몽테뉴는 독서의 쾌락주의자인 셈이었다. 알랭드 보통의 『드 보통의 삶의 철학 산책』(정진욱 역, 생각의나무 ) 183 페이지는 몽테뉴가 매우 탐욕스런 독서가였음을 말해준다. 그는 편협한 지방주의나 종족주의의 편견으로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역사서, 여행기, 선교사나 선장의 보고서, 다른 나라의 문학 등에 대한 방대한 자료들을 탐독했다.

 저술의 난해함에 대한 몽테뉴의 비판도 눈여겨 볼 만한다.

 "개인적이거나 독특한 패션으로 관심을 끌려고 드는 것이 옹졸한 마음의 상징이듯이, 연설도 그와 똑같다. 새로운 표현이나 널리 쓰이지 않는 단어들을 추구하려는 욕망은 신출내기 학교 선생 같은 야망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작금의 글쓰기 행태는 몽테뉴의 걱정을 사기에 충분하다. 학자들의 어렵고 난해한 글쓰기는 지식인들만의 '사교클럽'에서만 통용되는, 해독불가능한 암호로 전락했다는 탄식이 나온 지 이미 오래되었다. 난삽하기 짝이 없는 글이 전문성과 지적 깊이를 가장해 저자의 게으름과 무성의를 은폐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외국이론을 충분히 소화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논문이란 서구 정신문화의 정화로 수입된 상품이기 때문에 논문쓰기에서 벗어나지못하는 학자들은 서구문화의 중개상 노릇을 하는 기지촌 지식인에 불과하다."는 김영민의 『탈식민성과 우리 인문학의 글쓰기』(민음사)에도 경청할 만한 대목이 눈에 띈다. 논문이라는 글쓰기 속에서 강단과 거리, 생각과 생활, 학문과 일상, 학자와 일반인은 멀어지기만 한다는 지적이다. 요컨대 글과 삶이 따로 논다는 것이다. 대학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겠지만 대학의 내규에 따르면 전국 규모 학회지나 학술지에 발표한 논문 한 편이 1점으로 평가된다면, 계간지 등에 발표한 글은 0.1점에서 0.3점 정도로 평가된다고 한다. 우리 인문학의 편협함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들과의 소통을 중시하는 인문사회과학 에세이가 '잡문'으로 폄하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는, 한 위대한 에세이스트의 이름을 통해 지적인 허영심을 충족시키고 텍스트에 후광 효과를 주기 위해 몽테뉴를 들먹거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수다한 인용과 각주 속에는 분명 어떤 지적인 허약함이 있기 마련이지 않겠는가.

 "소개의 글과 정의, 하위 구분과 어원 설명이 그의 저작물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의 책을 한 시간 정도 읽은 뒤; 그에게서 어떤 진수와 실체를 얻었는지 돌이켜보면, 거의 언제나 공허한 이야기밖에 남는 것이 없다."

 "우리의 복부에 찬 것을 배출시키는 괄약근은 우리의 바람과는 무관하게, 심지어는 의지에 반하여 그 스스로 팽창하고 수축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라는 몽테뉴 발언은 내게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 모든 장식적 수사와 인용을 떼어버리고 "어떤 이야기든 '너'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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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 후유증인지 하루 종일 피곤하다..아비정전과 해피투게더, 왕가위 영화 두개를 연달아보았다. 해피투게더에서 장국영이 양조위를 그리워하며 터뜨리는 눈물은 참혹하다.....어떤 감정의 느닷없음 그 앞에서의 속수무책이라니......내일은 <여행의 기술>을 마저 읽고. 프로방스에 대해서 정리해야겠다. 향수, 감각의 박물학, 아로마에 관한 테마리뷰도 하나. 쿤데라의 리뷰도 하나, 영화 <빌리지> 리뷰 하나, .고릴라 이스마엘, 히포크라테스, 케테 콜비츠도 읽어야하고 한자교과서 리뷰,  일들이 밀려있다. .


 

 

Fragile - Sting


 

If blood will flow when fresh and steel are one

Drying in the colour of the evening sun

Tomorrow's rain will wash the stains away

But something in our minds will always stay

 

Perhaps this final act was meant

To clinch a lifetime's argument

That nothing comes from violence and nothing ever could

For all those born beneath an angry star

Lest we forget how fragile we are

 

On and on the rain will fall

Like tears from a star like tears from a star

On and on the rain will say

How fragile we are how fragile we are

On and on the rain will fall

Like tears from a star like tears from a star

On and on the rain will say

How fragile we are how fragile we are

How fragile we are... how fragile we 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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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uce Springsteen-Born To Run

결국 풀코스를 뛰었다..이어폰을 꽂고 뛸까 했는데 몸으로만 부딪혀보자는 생각에서 결국 음악을 포기했다. 신발이 작았는지 발톱이 빠지는 것만 같고 허벅지와 정강이에서는 쥐가 나고...드러눕는 사람도 있고..40킬로 지점에서 괜히 센티해져서 코가 시큰거리고...눈시울이 뜨거워지고...사람의 얼굴이 떠오르고, 그 얼굴이 웃고 있었고,...폴오스터의 <우연의 음악>이 떠올랐고....또 버릇처럼 프로방스가 생각났다...발톱에 째는 듯한 통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지는 순간도 있었다. 풍경은 멀리서 아득하고...

소주 몇 잔을 마시고 버스에서 잠이 들었다. 배낭 속에는 파스 몇장과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

파스칼 끼냐르 왈 <독서는 엑소더스>라던가..마라톤도 엑소더스의 한 가지는 아닐지...독서나 마라톤이나 결국 혼자 떠나는 여행아닌가. 한발짝 성큼 물러나기!!!

코 휑하니 풀고... 간다..저 불빛들의 거리...사양하고만 싶은 저 친절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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깍두기 2004-10-26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힘든 일 하셨네요. 완주하고 나면 마음이 사뭇....형언하기 힘든게....그럴 것 같아요.
5키로만 뛰어도 힘들던데....
괜히 한마디 건네고 싶어서 주절거려 봤어요^^

감각의 박물학 2004-10-26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틍도 즐길만한 일이죠..고통보다 더 견딜 수 없는 것이 불안이 아닐지요
 
바이오테크 시대
제레미 리프킨 지음, 전영택 외 옮김 / 민음사 /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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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과 몸의 요구를 거스르는 위험한 자본의 논리



    계 최대의 종자(種子)회사인 미국의 몬산토사가 개발한 ‘터미네이터’라는 유전자가 있다. 말 그대로 '끝내주는' 유전자. 이 유전자가 이식된 씨앗은 파종을 하여 수확을 할 수는 있지만 그 씨앗은 다시 얻을 수 없다. 결국 이듬해에 파종을 하려면 고가의 비용을 지불하고 그 씨앗을 몬산토사에서 다시 구입할 수밖에 없다. 이 ‘터미네이터’ 유전자는 어떤 씨앗에도 이식이 가능하단다.

    과연 이 유전자 연구는 누구에게 이익이 되는가. 소비자에게도 농민에게도 이익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 『바이오테크 시대』(민음사)의 저자 제레미 리프킨의 대답이다.

    리프킨의 『바이오테크 시대』는 국정보고서의 자료를 읽는 듯 풍부한 예시와 사례들로 유전자 연구에 따르는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어준다. 『바이오테크 시대』에서 리프킨은 대가답게 특유의 지적인 성실함과 열정으로 유전자 기술에 따르는 사회적, 경제적, 기술적, 윤리적 문제들을 총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무엇을 말하든 리프킨은 환경을 빠뜨리지 않는다. 그는 언제나 환경이라는 개념을 중심에 놓고 문명에 접근한다. ‘엔트로피’라는 개념도 그랬고, 육식에 대한 비판도 그랬다. 흔히 박식가들이 놓치기 쉬운 학문적 진정성을 리프킨은 잃지 않고 있다. 문명에 보내는 그의 경고는 예언자의 일갈에 가깝다.

    유전공학의 문제점을 대중적인 관심사로 만들어 놓았다는 점에서도 『바이오테크 시대』는 주목에 값한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독자들은 생명공학 기술이 만들어내는 놀라울 만큼 다양한 성공적 사례와 그로 인한 문제점 그리고 이에 대한 저자의 섬뜩한 경고에 직면하게 된다. 리프킨의 경고는, 그의 주장에 신뢰성을 보태고 있는 수많은 예시들로 해서 구체적 설득력을 가진다. 그 사례들을 요약해보자.

    과학자들은 나무를 고체화하는 유기 물질인 리그닌(lignin)이라는 목질소(木質素)를 파괴할 수 있도록 유전자를 조작한 효소를 만드는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다. 과학자들은 이 유전자 조작된 효소를 이용하여 제지 공장에서 흘러나오는 폐수를 정화하거나 생물 재료를 분해시켜 에너지를 얻는다면, 이 효소가 상업적으로 큰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만약 그 효소를 가진 박테리아가 다른 장소로 이주하여 숲속에 널리 퍼지게 된다면, 그 박테리아가 나무를 고체화하는 리그닌 물질을 파먹어 들어가 수백만 에이커의 숲을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유전자를 조작하여 해충을 먹이로 하는 육식성 곤충을 만들어 방출하고, 물고기가 더 빨리 더 크게 자라고 차가운 해역에서도 견딜 수 있도록 그물고기의 유전 암호 속에 성장 호르몬 유전자와 넙치류에서 추출한 부동(不凍) 유전자를 삽입하여 방출할 경우, 만약 이 유전자 조작된 물고기가 한정된 수역을 벗어난다면 그 지역의 다른 토종 물고기보다 더 월등한 경쟁력을 갖게 되어 생태계를 파괴할 수도 있다.

    1996년 취리히의 식물과학 연구소 과학자들은 ‘버실러스 투린지언시스’라는 토양 박테리아의 유전자를 인도산 벼에 이전하여, 그 벼가 ‘노란줄기좀벌레’와 ‘줄무늬좀벌레’에 대한 저항력을 갖게 하는 데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필리핀의 국제연구소가 이 자금을 지원했다. 현재 이 국제 벼 연구소는 필리핀에서 그 유전자 이식 벼 재배를 허가받을 계획이다. 어떤 곤충학자들은 그 토양 박테리아 유전자를 이식한 유전자 이식 벼가 바람에 의한 수분과정을 통하여 그 벼와 혈연관계에 있는 가까운 야생잡초로 퍼져 그 잡초가 해충에 대한 저항력을 가지며, 저항력 있는 슈퍼버그가 생길 가능성도 있다고 우려한다.

    유전자 이식 농작물이 또 다른 방법으로 세계의 유전자 자원을 서서히 고갈시킬 위험이 있다. 종래의 품종 개량 방법은 오랜 기간에 걸쳐서 식물이 저항력을 갖게 하며, 때때로 수백 개의 유전자가 그 저항 형질에 관련되는 데 반해, 유전자 조작 방법은 어떤 가능한 환경으로부터 공격을 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저항 형질을 갖는 단지 하나 또는 두 개의 유전자를 삽입하는 데 그친다. 모든 이식유전자 삽입 방법은 농작물이 적의 공격에 대해 훨씬 빨리 그리고 더 많은 독을 뿜어 반응하도록 하기 위한 일련의 해법이나, 그 수명이 짧아 곧 바로 기술적인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즉, 유전학자들이 저항 형질을 가진 단지 <하나의 유전자>에 의존함으로써, 해충, 바이러스, 버섯균류가 매우 짧은 기간 내에 그 유전자를 무용지물로 만들고 훨씬 쉽게 승리하게 된다. 그 사이에, 병을 피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상호 작용하는 수백 개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전통적인 변종은, 새로운 이식 유전자를 가진 슈퍼식물에 길을 열어 주기 위해 포기되고, 결국은 멸종한다.

    하루에도 74종의 동식물이 멸종한다고 한다. 단순히 열악해진 환경 문제 탓만은 아니다. 동식물의 멸종에도 정치․경제적 동기가 개입한다.

    아시아에는 쌀의 변종이 14만종이나 있었다. 그러나 다국적 기업들은 그중 다섯 내지 여섯 개 변종들에 대해서만 유전자를 조작해 그것들을 쌀을 주로 재배하는 지역에 집중 재배하는 모델로 강요했다. 아시아 국가에서는 이 대여섯 가지 변종 쌀들이 전체 논의 60~70%에서 재배된다고 한다. 미국식 패스트푸드가 각국의 고유의 음식을 몰아내듯 다국적 기업에 의해서 유전자 조작된 종자들이 각국의 고유한 종자들을 몰아내고 있다. 농민들은 단지 유전자 조작된 종자가 수익성, 환금성, 효율성이 뛰어나다는 이유로 토착 종자를 포기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환경의 급격한 변화에 유전자 조작된 식물들은 기민하게 적응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그러나 환금성 가치에 눈이 어두운 자들은 결코 멀리 보려 하지 않는다.

    유전자 조작 기술은 그 혜택을 만인에게 골고루 가져다 주지는 않는다. 냉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넙치류에서 추출한 부동(不凍) 단백질 유전자를 받은 토마토, 감자의 질병에 대한 저항력을 높이기 위해 병아리 유전자가 삽입된 감자를 연구하는 프로젝트는 분명 대규모의 인력과 자금을 필요로 하는 사업이다. 이익이 없는 곳에 투자가 있을 수 없는 법. 점점 증가하는 세계 제초제 시장의 점유율을 높이기 위하여, 화학 회사들은 자기들이 판매하는 제초제에 대한 내성이 강한 유전자 이식 농산물을 개발했다. 특정 상표의 제초제에 대한 내성이 강한 식물을 개발하여 그 종자에 대한 특허를 취득한 후 그 종자를 농민에게 팔면, 종자 시장과 제초제 시장에서 모두 시장 점유율을 높일 수 있으니 일거양득인 셈이다. 제초제를 뿌리는 과정에서 농작물에 해를 끼칠 염려가 적어지면 잡초를 제거하기 위해 농부들은 마음놓고 제초제를 뿌릴 수 있기 때문에 땅은 그만큼 죽어갈 수밖에 없다. 또한 제초제 사용량이 증가하게 되면 제초제에 대한 잡초의 저항력이 더 커져 어지간한 제초제에도 끄덕 않는 슈퍼잡초가 생길 수도 있다. 문제는 기업가들이 사태를 멀리 내다보지 않는다는 점. 농작물의 최종 소비자들과 농작물의 모태인 생태계의 건강에는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다. 비유하건대, 아이만 낳으면 이익이 된다면 한 해에 두 명 아니 세 명이라도 출산하라는 기세다.

    소위 ‘유전자 차별’도 문제다. 가령 유전자 검사비용이 지금보다 현저하게 낮아진다면 보험료와 보험금 지급 범위를 평가하는 데 유전자 데이터를 이용할 것이 분명하다. 결과적으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평생 동안 어떤 유전자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보험 급여를 받지 못할 수도 있다. 어떤 개인이 본래부터 존재하여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유전자의 상태를 이유로 차별을 받거나, 또는 그 유전자가 결코 발현되지 않을지도 모르거나 발현되더라도 그리 심각한 정도는 아니거나 치료가 가능한데도 단지 유전적 소인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차별을 받는다는 것은 분명히 부당하다.

    생명공학 세기에는 인종과 민족집단을 유전자형에 따라 차별할 전망이 있는데, 이도 곤란한 문제를 야기한다. 과학자들이 인간게놈의 작용에 관한 더 많은 정보를 얻게 됨에 따라 인종이다 민족 집단에 특유한 수많은 유전자 형질과 소인을 분류할 수 있게 될 것이므로 모든 민족을 유전자에 근거하여 차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인들은 극심한 빈혈을 유발하는 겸상적혈구 세포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유전자는 말라리아 모기에 대한 아프리카인들의 저항력을 높이는 데 유용하다. 그러나 미국으로 이주해간 흑인들에게는 말라리아의 위협이 사라졌으므로 이 유전자는 발생학적인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병적인 유전자로 간주되는 억울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 각종 기관이 과연 인종과 민족집단에 특유한 이 같은 유전 정보를 인종 차별, 인종 분리, 그리고 인종 학대의 수단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

    항공 관제 회사, 항공사, 경찰서와 같이 고도의 안정을 요하는 어떤 기관들이 알콜 중독, 우울증, 그리고 기분과 행동상의 이상을 유발하는 유전자 소인을 찾아내기 위한 유전자 검사에 관심을 가짐으로써 미래에는 유전자형을 이유로 근로자의 취업 기회가 박탈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되면 유전자 구성에 따라 개인들을 분리하고 차별함으로써 유전자 귀족 계급과 유전자적 하층계급이 출현할 수도 있음을 리프킨은 경고한다. 영화 <가타카>의 한 장면을 보는 듯 섬뜩하다.

    1999년 8월 12일 프랑스 미요 시(市)에서 건설 중이던 맥도날드 매장의 일부가 시민과 농민들에 의해 해체당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으로 프랑스 '농민연맹' 소속 조합원인 조제 보베는 반 세계화의 상징적인 인물로 떠올랐다. 『세계는 상품이 아니다』(울력)는 유전자 변형 농산물 파괴 활동을 주도하고 미국의 일방적인 세계화에 맞서 1999년 11월 시애틀에서 열린 WTO 회담을 무산시킨 프랑스 농민운동가 조제 보베, 프랑스와 뒤푸르의 생생한 목소리를 대담형식으로 싣고 있다. 이 책에서 두 사람은 생산주의 농업(기업형 농업)이 불러온 폐해와 신자유주의의 세계화가 어떻게 세계의 농업을 황폐화시키고 있는가를 고발하고 있다.

    보베는 자기 나라의 식량안보를 지킬 수 있고 제3세계의 가난과 빈곤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농산물 교역을 요구한다. 이를 위해 미국과, 거대 기업의 이익을 우선하는 세계무역기구(WTO)가 주도하는 신자유주의적 시장개방 흐름을 제한해야 한다며 이를 위해 WTO 시민통제위원회를 상설화하자고 제안한다.

    조제 보베는 농학 분야의 공공연구 기관들이 오직 생산량을 늘리기 위하여 어떤 식물의 질병에 관해, 유전자에 관해 연구할 뿐, 전체적인 관점에서 농업의 위치나 농업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역할에 관해서는 연구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농업에 관한 공공 연구에서의 가장 큰 문제점은 연구원들이 자신들의 직업에 관해, 사회 안에서의 그 직업의 위치에 관해 그리고 생명에 관해 전반적인 성찰을 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일찍이 『작은 것이 아름답다』(문예출판사)의 저자 슈마허는 “구두를 만드는 사람은 구두뿐만이 아니라 발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과학자들은 기술만능주의의 함정에 빠져 그 기술의 사회적 파장에 관한 성찰을 게을리 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하긴 성찰은 돈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걸림돌이 될 뿐. 돈이 되는 것은 오직 기술이며 끝없는 확장이다. 이런 맥락에서라면 세계화는 자본이 갈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길이다. 이에 저항하는 길은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구축이라고 조제 보베는 말한다.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구축을 위해서는 중국혁명의 붉은 깃발도, 체 게바라의 초상도 필요 없다고 그는 단언한다. “그런 것은 이젠 끝났고 그렇기에 희망이 있다. 사람들의 관심영역(건강, 식량, 교육, 수자원, 생명체 보호 등)을 통해서 앞으로 전진할 수 있다.”

    『세계는 상품이 아니다』에서 세계화로 상징되는 자본의 무한확장을 제지할 섬세하고 설득력 있는 대안을 기대하긴 어렵다. 그러나 미국과, 거대 기업의 이익을 우선하는 세계무역기구(WTO)가 주도하는 신자유주의적 시장개방 흐름을 제한해야 한다며 이를 위해 WTO 시민통제위원회를 상설화하자고 제안하고 있는 주장은 충분히 경청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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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봄
레이첼 카슨 지음, 김은령 옮김 / 에코리브르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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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의 목소리가 세계를 바꾸다
침묵의 봄, 레이첼 카슨 지음, 김은령 옮김, 홍옥희 감수 / 에코리브르, 2002



    직 머리칼도 세지 않은 사람이 말하기엔 좀 되바라진 얘기지만, 주량과 폐활량은 줄어들지 몰라도 사람이 나이가 들면서 차츰 느는 게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먼저 가만 멈춰 있는 시간이 늘어나게 된다. 조용히 숨을 고르는 시간, 멀거니 먼 곳을 바라보는 시간이 늘어난다는 것은 그만큼 기력이 쇠한 탓일지도 모르지만 한편으로는 사태와 추이로부터 적절한 거리를 확보할 수 있는 여유가 그만큼 늘어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격정적인 청춘에게는 그런 여유와 거리가 없다. 누구였던가. 자신에게 저항할 권능을 주지 않기 위해 신은 인간에게 청춘과 지혜를 동시에 주지 않았다고 말한 이는.

    또 하나 사람에 대한 ‘연민’이란 것도 나이가 들면서 늘기 마련이다. 빛나는 젊음의 육체는 장애를 모른다. 장애가 없으니 반성이 없다. 그러나 모든 존재는 시간 속에서 낡아가기 마련, 썩지 않는 불후(不朽)의 육체가 어디 있으랴. 잇몸이 아프고 어깨가 뻐근하고, 삐걱삐걱 육체에도 장애가 생기기 마련, 비로소 인간은 자신의 육체를 바라본다. 누구나 자신의 쇠함을 스산한 감정으로 바라보기 마련이다. 썩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육체를 연민의 감정으로 바라보는 나르시시스트의 시선은 분명 청춘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런 나르시시스트의 시선은 문득 타인의 육체를 보게 된다. 타인의 육체 속에 각인된 상처를 보게 된다. 아, 너도 몸을 가졌었구나, 너도 나처럼 욕망으로 덜걱거리는 존재였었구나, 비로소 한 인간은 타인의 육체 속에 운명처럼 깃들여 있는 고통의 무늬를 보게 된다. 동병상련(同病相憐), 연민은 그 고통의 무늬를 들여다보는 스산한 감정을 이르는 말일 터이다. 인간이란 따지고 보면 하찮은 존재에 불과하다고 넘겨짚다가도, 인간은 삼라만상을 다 긍휼히 여길 수 있는 시선의 소유자가 아닌가 하는 데 생각이 미치면, 인간도 낮춰볼 존재만은 아니구나 하는 숙연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환경 생태학 분야의 고전이며 20세기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책 중의 하나라는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에코리브르)은 한 인간이 가진 연민의 폭과 깊이가 얼마나 큰 지적 업적을 이루어낼 수 있는지를 새삼 돌아보게 하는 책이다. 이 책은 환경운동이 모든 나라의 사회정책에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도록 자극한 책이기도 하다. DDT 등의 위험한 화학물질이 어떻게 토양을 오염시키고, 녹색식물을 고사시키고, 이 잎에 붙어사는 곤충을 무차별 살육하고, 이 곤충을 먹고사는 새들을 죽게 하는가, 수생 생물을 떼죽음 당하게 하고, 인간의 건강을 파괴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가를, 이 책은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증언하고 있다. 이 사태의 배후에 생태학적 연관관계에 무지한 전문가들, 정책당국자, 그리고 산업의 이해관계가 있음을 고발한다.

    레이첼 카슨은 이 책에서 합성화학살충제 산업의 급작스러운 부상은 2차 세계대전의 산물임을 말한다. ‘화학전에서 사용할 약제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몇 종류의 물질은 곤충에 치명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런 발견은 우연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인간에게 죽음을 불러올 약제를 테스트하는 데 곤충류가 자주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이 논리를 확장하면 살충제는 살생제라는 논리가 가능하다. 이런 살충제는 유해물질로부터 신체를 보호해주는 효소를 파괴하고 에너지를 얻는 산화과정을 방해하며 각종 기관의 정상적인 기능을 억제해 불치병을 일으킨다고 카슨은 지적한다. 당연히 살충제는 벌레들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포식자인 새들의 생명까지도 위협한다. 살충제가 새들의 생명을 위협한다는 문제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 『침묵의 봄』이다. 카슨의 한 친구가 살충제 살포 이후 새들이 노래하길 멈추었다며, 이를 조사해달라고 부탁하자, 카슨은 이후 약 4년에 걸쳐 조사하고 이를 주기적으로 발표하고 묶어 펴낸 책이 다름 아닌 『침묵의 봄』이다.

    “우리가 마구 없애버리는 식물들은 사실 건강한 토양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기능을 담당한다. 흔히 ‘잡초’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는 이런 자연적 식물 군락은 토양상태를 나타내주는 지표 역할을 한다. 그런데 화학제초제를 사용하면 이런 유용한 기능이 상실되게 마련이다.‘ 이미 반 세기전에 씌어진 책이니 탁견이 아닐 수 없다. 자연에 잡스러움은 없다. 어떤 미물이든 자신의 존재 이유와 근거가 있기 마련이다. 인간은 자신의 잣대로 어떤 것은 익충이니 어떤 것은 해충이니 분류하지만 사람에게 익충인 것이 어떤 생물에겐 해충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익충, 해충 하는 식의 분류란 인간이란 종이 가질 수밖에 없는, 소위 ‘동굴의 우상’에 다름 아니다. 따지고 보면 생태계에서 가장 해로운 존재가 인간인 셈인데도,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니 하는 낯간지러운 칭호를 아무 부끄럼 없이 지닌다.

    당장 먹기는 곶감이 달다던가. 눈앞의 이익에 급급해 생태계의 진실을 보지 못해 생기는 문제점을 카슨은 보여준다. ‘돼지풀을 제거한다는 미명 하에 도로변에 수천 갤런의 화학약품이 살포되었다. 하지만 무차별적 살포로 인해 돼지풀이 오히려 증가하는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 돼지풀은 일년생 풀이다. 매년 이 풀이 다시 종자를 퍼뜨리려면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토양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돼지풀을 없애려면 관목이나 양치류, 다른 다년생 식물을 빽빽이 심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다. 자주 제초제를 뿌리면 이런 보호 역할을 하는 식물 역시 죽어버리고, 그러다 보면 아무것도 나지 않는 넓은 땅을 돼지풀이 재빨리 차지한다.’ 돼지풀은 돼지풀이고 양치류는 양치류일 수는 없다. 풀과 수목과 벌레와 강과 연어가 서로 기대어, 얽히고 설킨 생명의 그물이 곧 생태계다. ‘내’안에 ‘네’가 있고 ‘너’안에 ‘내’가 있다는 것이 생태계의 진실이다.

    ‘우리 몸 속에도 생태계가 존재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속에서는 아주 사소한 원인으로 인해 엄청난 결과가 생겨난다. 원인과 결과가 별 관계없는 듯 보일 때가 많다. 원래 상처를 입은 곳에서 한참 떨어진 어떤 곳에서 병의 징후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어떤 지점 설령 그것이 분자 하나라 할지라도 여기에 변화가 생기면 결국 전체 시스템에 영향을 주어 별 상관없는 기관이나 조직에서 변화를 일으킨다는 의학연구도 등장했다.’는 카슨의 주장은 생태계에도 역시 진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이 거대한 연결고리라는 사실을 곧잘 망각한다.

    이 책은 카슨의 분노를 담은 책이다. 진보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생태계에 어떤 폭력을 가했는지를 이 책은 줄기차게 고발하고 있다. 또 진실을 밝혀야할 과학이 이익과 생산이라는 현대적인 신을 섬기기 위해 타협점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했고, 과학계와 산업계가 어떤 이해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자세히 보여주었다. 카슨은 날카롭게 지적했다. “과학단체가 무언가 이야기할 때, 우리가 듣는 것은 진정한 과학의 소리인가 혹은 기업체의 이익을 대변하는 소리인가?” ‘선택성 살충제(우리가 제거하기를 바라는 해충에게만 선택적으로 작용하는 살충제)를 사용하면 유기물질을 분해하는 데 필수적인 ’익충‘은 죽이지 않고 농작물을 해치는 토양 속 유충만 죽인다고 주장했던 이들이 누군가? 과학자다. 그러나 토양에 침투한 살충제에 지렁이들이 죽고 그것을 먹고 새들과 오소리가 떼죽음을 당하고, 그것이 강물로 흘러 플랑크톤을 죽이고, 플랑크톤을 먹이로 하는 포식자인 연어마저 떼죽음을 당한다면 그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감정에 호소하는 단어를 사용하는 히스테릭한 여성ꡓ이니 ꡒ자신이 저주하는 살충제보다 더 독하다ꡓ다느니, 카슨은 이 책을 쓰고 언론과 화학업계로부터 엄청난 비방에 시달려야 했다고 한다. 하지만 1963년 케네디 대통령은 환경문제를 다룰 자문위원회를 구성했고, 곧이어 지구의 날(4월22일)이 제정됐다. 암연구소는 DDT가 암을 유발할 수 있다는 증거를 발표했고, 미국의 각 주는 DDT 사용을 금지하기 시작했다. 타임지는 그녀를 20세기를 변화시킨 100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뽑았다.

    『침묵의 봄』이 처음으로 출간된 것이 1962년이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났지만 레이첼 카슨의 경고는, 오직 성장만을 능사로 아는 오늘의 한국 땅에서도 여전히 의미심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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