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
한상봉 지음 / 바오로딸(성바오로딸) / 2004년 4월
평점 :
품절


삶의 갈피를 살피고 도닥거리는 글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 한상봉 지음 / 바오로딸, 2004




    유례없는 불황이라지만 책방에 나가보면 매일 엄청난 책들이 쏟아져 나온다. 책들은 저마다 한 말씀을 한다. 그 말씀들은 나름대로의 일리(一理)를 가진다. 그러나 다기망양(多岐亡羊)이라지 않던가. 갈림길이 많아 양을 잃었다는 말도 있듯, 너무 많은 말씀은 오히려 길을 찾는 데 방해가 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게 한다. 그런 의구심의 연장선상에서 보면 하나의 텍스트를 짓는다는 작위의 행위는 얼마간의 쓰디쓴 자의식을 지불해야 하는 고역일 수도 있다. 과연 내가 쓰는 텍스트들이 세상에 소음 하나를 더 보태지는 않을까, 크게 잘 날 것도 없는 자의식을 세상에 디밀어 어쩌자는 것일까 하는 상념들이 책상머리를 어지럽히기도 한다.

    쓴다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세상에 개입하는 행위다. 글을 쓴다는 것은 세상의 행태를 잠자코 보아줄 수 없으니 어떤 식으로든 한마디 거들겠다는 계몽적 의지의 결과다. 세상이 내 식으로 돌아가 주지 않으니 어떤 식으로든 세상의 운행 방향을 돌려보겠다는 욕망이 글쓰기를 추동한다. 문제는 너나없이 한 마디 거들기 시작하면 세상의 소음은 누가 책임지며, 세상을 바로잡아야 할 구국의 임무를 누가 맡긴 것도 아닌데 왜 굳이 나서야 한다는 말인가 하는 문제도 있겠고, 대체 내가 얼마나 투명하고 명료한 의식의 소유자이기에 발언을 자처하고 나서야 한단 말인가 하는 류의 반성적 자의식도 글쓰기를 괴롭힌다. 개구착(開口錯)이라는 선가의 말씀대로 어쨌든 입을 연다는 것은 고역이다. 입 밖으로 뱉어진 말들로 맘이 편하지 않을 때도 있고, 그저 생각으로 흘려보내도 될 것을 굳이 문자를 빌어 기록으로 정착시키려는 내 업보에 혀를 끌끌 차보기도 한다.

    이런 상념의 와중에서 박남수의 시, <새>는 아프게 읽힌다. 노래하는 것도 모르고 노래하는 새처럼, 부리를 서로의 죽지에 파묻고 따스한 체온을 나누어 가지는 새처럼 사랑을 말하지 않고 사랑을 살아버렸으면 하지만 인간은 아무리 생각해도 침묵으로 홀로 설 수 있는 믿음직한 나무가 아니다. 약하기 때문에 기대고 싶은 것이 인간이다. 글을 쓰고 어떤 발언을 한다는 것은 자의식을 뭉뚱그려 세상에 던지는 일이기도 하지만 또 어찌 보면 내 그리움의 대상을 입 밖으로 부르는 일이다. 내가 여기에 있으니 내 손을 잡아달라는 내 본질적 취약함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일이다. 글이란 것이 대단한 자의식으로 세상을 구하겠다는 계몽적 의지의 소산일 수도 있겠으나 내가 이렇게 살아서 당신을 부르고 있다는 미약한 숨결일 수도 있겠다.

    송구스럽게도 글쓰기에 따르는 장황한 자의식으로 글의 모두(冒頭)를 어지럽힌 것은 한상봉씨의 에세이집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이 대체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새삼스런 성찰의 한 꼭지점을 마련해준다는 데 있다. 나는 한상봉씨의 글을 읽으며 그에게 있어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묻는다. 그것은 그에 대한 물음이면서 동시에 나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그는 열심히 기록한다. 어쩌면 그렇게 열심히 기록할 수 있을지 신기할 정도로 그는 부지런히 읽고 쓴다. 말을 했으면 가슴에다 묻을 일이지 뭐 그렇게 할 말이 많아서 수다한 말들을 기록하고 책으로 묶어 내느냐고 핀잔을 주는 어른들도 계실지 모르겠다. 말씀을 입으로보다는 몸으로 살아내신 큰 어른들에게야 뭐라 말씀드리겠는가. 그저 송구스런 따름이다. 그러나 달싹거리는 입술을 억지로 쥐어 틀어가며 침묵으로 간판을 내거는 것도 자연스럽지 못하다. 그런 태도가 나쁜 의미에서 부처연하고 노자연하는 가식이 아닌가. 물이 끓으면 주전자의 뚜껑이 달싹대는 것이 정한 이치다. 그 달싹임은 자연스럽다. 그것마저도 경망스럽다 내칠 일은 아니지 않은가. 어차피 욕망의 불이 식으면 절로 침묵할 것이 아닌가. 그에게서 예수나 부처를 기대할 일은 아니다. 그는 농사를 짓는 평범한 인간이다. 그러나 그는 평범 속에서 또 다른 것을 읽어낸다. 범상한 것들 속에서 초월의 기미를 읽어내는 농부, 그는 예사 농부가 아니다. 그는 고백한다

    내게 접속되는 모든 사건이 내게 가르쳐주는 메시지를 읽을 것, 그 사물의 진언이 나의 의식과 영혼에 미치는 영향을 지켜볼 것, 통과비용 없이 우리가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갈 수 없음을 알 것, 그러므로 더 큰 우려곡절이 생기더라도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배후의 의미를 따져 물을 것, 뭐 이런 것들을 배우고 있다. 그러다 보면, 흠집 많은 타인의 생애를 더 깊은 곳에서 이해하게 되고, 상처 많은 나에게도 조금씩 너그러워질 수 있을 것 같다.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의 첫 꼭지는 <눈 오는 날, 아버지>라는 글이다. 욕심 없이 가난하게 살다간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잔잔하게 읽힌다. 사람이 사람을 그리워하는 일은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모든 사랑이 용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성찰이 없는 사랑은 간혹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고 상대방을 구속하는 힘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사랑해, 사랑해 하면서 우리는 상대방을 옭아매고, 내 삶의 취향과 방식, 그리고 나의 세계관을 타인에게 강요하기도 한다.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또 다른 사람을 배제한다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여타의 사람들을 소외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한상봉씨가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리며 쓴 다음과 같은 사랑의 고백은 참으로 따뜻하게 읽힌다.

    눈이 내리면 아버지의 주름진 얼굴처럼 꼭 그만큼씩 그늘진 인생을 위해 ‘복 받으세요!’ 이런 말 전하고 싶다. 그 낯설지만 익숙한 얼굴을 지나치면서, 입 속에서 웅얼거리듯 혼자말로 축복의 말 한마디 남기고 싶다. 우리가 내어준 그 말이 은총이 되어 눈처럼 쌓일 것이다. 새해엔 전철 앞좌석에 앉은 사람을 보고도 마음속으로 복을 빌어주고, 공중전화기 앞에서 뭔가 하소연하고 있는 사람을 위해서도 복을 빌어주면 어떨까? 우연히 눈길이 마주친 아이를 위해서도 찰칵 사진 찍듯이 ‘복 받아라!’하면 어떨까?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은 감동을 강요하지는 않지만 가슴으로 읽힌다. 아마도 떼떼거리며 말하는 부처님, 아장아장 걸어다니는 예수님인 어린 딸아이, ‘결이’에 대한 그의 애정 어린 시선이 세상으로 확대된 결과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는 딸아이를 어찌나 예뻐하는지 그 속내를 숨기지 못한다. <흙을 담은 손길>에서 그는 결이의 ‘눈빛과 옹알거리는 소리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작은 행복을 따뜻하게 감당하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

    아기들은 그 자신의 무력함으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기들이 어떤 완전함으로 어른을 설복시키고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 돌보지 않으면 목숨을 지탱할 수 없다는 절대적 무력함이 그 부모의 마음을 움직이고 행동하게 만든다. 아기들은 사기를 치지 않는다. 과장된 무력함에서 구걸의 태도가 나온다면, 참된 무력함은 사람들로 하여금 ‘생명’에 대한 투신의 태도를 낳는다.

    아이를 보는 그의 시선은 그대로 세상을 보는 연민의 시선이기도 하다. 2000년에 출간된 그의 산문집 『연민』이 선언적이라면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은 그 선언의 바탕에 응당 놓여있어야 할 구체적 삶의 결, 마음의 무늬를 가감없이 보여준다. 『연민』에서 “슬픔은 안타깝고, 아쉽고, 억울하고, 가련하고, 불쌍하고, 상처입은 영혼에게서 나오며, 이 영혼의 파동에 접한 사람들은 연민과 동정심을 느낀다”라고 말하고 있지만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에서의 그의 목소리는 육친의 이름을 부르듯 더없이 정겹다. 그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이기 이전에 결이의 교육을 걱정하고 결이가 의젓하고 예쁘게 자랄 것을 소망하는 한 사람의 아버지다. 그는 결이를 사랑스럽게 응시하고 때로는 결이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기도 한다. 친구들과 토닥거리면서도 잘 노는 딸아이를 바라보며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부모들이야 어찌 생각하든지, 아이들은 다투면서도 서로를 필요로 한다. 하루에 한번은 반드시 누군가 울곤 하는데, 그래도 결이는 영현이네 집으로 간다. 엄마가 늦게 일어나는 날이면, 어느 틈엔가 혼자 아랫집에 내려가 놀고 있는 결이를 본다. 요즘 같아선 토닥거리면서도 서로를 필요로 하는 연인 같아 보인다. 아이들은 상처 속에서도, 상처 너머로 서로를 부른다. 그리고 행복해진다. 변덕스런 부모보다야 아이들의 세계가 더욱 믿음이 갈 때가 많으니 조물주의 창조하시는 조화(造化)가 이런 것인가.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돌이켜서 어린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마태복음 18장)이라는 성경의 한 말씀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아이들의 시선을 갖는다는 것은 관습과 이데올로기의 때에 물들지 않은 ‘눈’을 갖는다는 것, 세계에 대한 경이(驚異)의 시선을 회복한다는 것이 아닐까. 왜 밤은 까만가, 왜 사과는 붉고 오렌지는 노란가, 왜 늙으면 죽는가,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죽음 뒤는 무엇인가… 아이들은 끊임없이 질문을 하는 철학자요 시인이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낯설고 새롭고 신비하다. 어른들은 세상에 대한 아이들의 호기심을 적당한 답으로 얼버무린다. 그러나 아이들의 질문은 상투적인 대답에 만족하지 않는다. 아이들의 질문에 성심으로 답을 해주는 부모가 몇이나 있을까. 대충 건성으로 대답을 하고 그 답도 궁하면 “너는 왜 항상 이상한 것만 묻니?”라고 윽박지름으로써 아이들의 기를 꺾어놓기가 일쑤다. 결국 아이들은 어른들의 심상한 시선을 닮아가며 세상에 대한 경이의 시선을 잃어버린다. 습관화된 방식으로 사물을 보고, 낡은 언어로 자신의 느낌을 진술한다. 우리가 세상에 대한 신비를 회복해야 한다면 우리가 다시 찾아야 할 것은 어린아이의 시선, 곧 사물을 관습과 표피와 외양으로써만 관찰하지 않는 시인의 시선이다.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은 한상봉씨의 시에 대한 사랑의 고백이기도 하다. 그의 사유의 출발점이면서 동시에 귀착점이기도 한 시, <거칠게 또는 부드럽게, 이 사람>에서 그는 시에 대한 사랑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글쓰기를 할 때마다 나는 시집을 뒤적거리는 습관이 있다. 습관이라기보다는 ‘필요’라고 말하는 것이 정직하겠다. 영감이 떠오르지 않을 때마다 나는 시인들의 상상력에 도움을 청해야 했던 것이다. 책상 앞에 앉을 때마다 나는 시인들의 상상력에 도움을 청해야 했던 것이다. 책상 앞에 앉을 때, 나의 정신은 빈곤하거나, 복잡하게 엉켜 있는 모양이다. 나는 신탁을 기다리는 사제처럼, 시인의 언어가 나를 불러줄 때까지 때론 조급하게 때론 진득하게 의자에 앉아서 책장을 넘기며 지루해하거나 팽팽한 긴장감을 느끼며 묵상에 돌입하기도 한다.

    시의 매니아들이나 읽을 법한 이성복, 김선굉, 김중식, 백석, 고정희, 박남준. 기형도…. 수많은 시인들의 시와 산문이 그의 사색을 돕는다. 그의 사유가 시에 얽혀들고 시의 메시지가 그의 글에 뿌리를 내리면서 그의 글은 사뭇 풍요로워진다. 그러나 그가 서권(書卷)에만 매달리는 서생이라고 함부로 단정해선 안 된다. 그는 누구보다도 땅 가까이에서 땅의 소리를 듣는다. 땅의 소리를 듣기 위한 그의 귀농은 아마도 ‘영화를 알면서 욕된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세상 골짜기가 되고, 세상 골짜기가 되면 한결 같은 덕이 넉넉하여 통나무로 돌아간다.’는 노자의 도덕경에 대한 실천으로 읽힌다.

    고양이는 고양이대로, 아기는 아기대로, 닭은 닭대로 먹는 것도 기질도 생활양식도 다를 텐데, 그 미묘한 삶의 갈피를 살피고 도닥거리며, 사는 동안 쾌적하고 주어진 생명을 한껏 누릴 수 있도록 곁에 식구로 서 있는다는 건 고단하지만 즐거운 일이다.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이 4년 전의 『연민』과 다른 점은 생명의 ‘미묘한 삶의 갈피를 살피고 도닥거리’는 데에 저자의 눈길과 마음씨에 있는 것은 아닐까. 그의 글은 선언이기 이전에 생명에 대한 살핌이고 도닥거림이다. 마음을 움직이는 한 편의 시가 그렇듯 그의 글 또한 그 살핌과 도닥거림의 흔적들을 나누어 갖고 싶다는 소망의 표현이리라. 나는 그런 소망을 그가 접지 않기를 바란다. 모든 진실한 텍스트는 언어를 견디지 못하는 법. 진실은 말하고자 하는 욕망과 침묵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소망 사이에서 서성거리기 마련이다. 얼마나 많은 시인과 성인들이 침묵으로 귀의하고 말았던가. 나는 그의 이런 고백에 밑줄을 긋는다.

    이젠 섬세하고 고른 숨결로 다시 사람에게로 가야 한다. 농사보다 이웃을 먼저 헤아리고, 사람들에게 성심으로 편지를 써야 한다. 어려운 생애에 삶을 거들어 주었던 사람들에게 안부를 묻고, 배추 한 포기라도 건네야 한다. 고난에 찬 삶을 위로하고, 도한 그들에게서 사람 사이의 아픈 틈새를 헤아리는 지혜를 배워야 한다.

    나자렛 예수가 그랬듯이 그 또한 삶의 상처와 소망들을 소박하고 정갈한 언어로 드러내주길 바란다. 섣불리 침묵에 귀의하지 않기를 소망하는 마음으로 나는 그에게 정현종의 시, <상처>를 읽어주고 싶다.

    한없이 기다리고
    만나지 못한다
    기다림조차 남의 것이 되고
    비로소 그대의 것이 된다

    시간도 잠도 그대까지도
    오직 뜨거운 병(病)으로 흔들린 뒤
    기나긴 상처의 밝은 눈을 뜨고
    다시 길을 떠난다

    바람은 아주 약한 불의
    심장에 기름을 부어주지만
    어떤 살아 있는 불꽃이 그러나
    깊은 바람 소리를 들을까

    그대 힘써 걸어가는 길이
    한 어둠을 쓰러뜨리는 어둠이고
    한 슬픔을 쓰러뜨리는 슬픔인들
    찬란해라 살이 보이는 시간의 옷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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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aho - To Be the One
 
 
끊을 수 없는 것들은 왜 그리 많은지
무엇엔가 끊임없이 접속해야만 마음이 놓이는 이런 분리불안증
오늘은 또 무엇에 접속해야 하는지
만만한 것이 책이라서 책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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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e Benson - This Masquerade



몽테뉴는 20년간 좁은 탑 속에 유폐되다시피 살았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었다. 스스로 성의 탑 속에 자신을 가두었다.
 
몽테뉴는 허름한 석벽 창고를 그대로 서재와 거처로 사용했다. 탑이라고 하지만 그곳은 몽테뉴의 기도실, 침실과 서재가 있는 거처였다...몽테뉴는 그 서재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몽테뉴는 <에세:수상록>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 생각으로는, 자신의 집에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자신에게만 소용이 있으며 자신을 숨길 수 있는 장소를 갖지 않은 사람은 비참하다."
 
오직 자신만을 의한 공간, 모든 집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숨쉴 수 있는 곳. 그곳은 단순한 독서의 장소만은 아니다. 그곳은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자신에게만 소용이 되며 자신을 숨길 장소'이다.
치고 빠지는 서태지의 전략처럼 은둔은 때로 명예를 겨냥한다는 사실을 몽테뉴는 간파했다.
 
"은거와 은둔에서 영광을 끌어내려고 하는 것은 비굴한 야심이다. "
 
나의 집이 정말 나의 집이 위해서는 그런 공간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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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27 2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안개 속의 풍경, 모든 길의 끝


길과 풍경과 시  7번 국도가 그 동쪽 끝에 동해의 풍경을 거느리듯 모든 길은 풍경을 거느린다, 아니다. 이 말은 옳지 않다. 정확히 길은 풍경 속에 있다. 어떤 풍경 속에 놓이느냐에 따라 길의 외연과 내포는 사뭇 달라진다. 모든 길이 나의 길일 수는 없다. 길은 어떤 풍경 속에 놓여있을 때만 비로소 나의 길이 된다. 길을 가는 자는 풍경을 본다. 그러나 내 눈 속으로 들어오는 모든 풍경이 풍경인 것은 아니다. 우리가 풍경이라고 부를 수 있는 풍경은 반드시 마음으로 흘러 들어오는 저 바깥의 풍경들이다. 마음이 읽어내는 풍경은 내 안에 들어와, 지울 수 없는 내 존재의 일부가 된다. ‘영혼이란 낯선 풍경을 만나 깨어나는 자기의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말한 이는 『길과 풍경과 시』의 시인 허만하이다. ‘교만함이 안주(安住)를 부르면 예술가에게 치명적인 해가 될까 싶어’ 또 길을 나선다는 이런 시인만이 풍경을 가슴에 담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천박한 영혼이라 할지라도 인간은 제 내부에 풍경을 간직하기 마련이다. 그 풍경들로 해서 그는 비로소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닐까.

  시의 세밑 풍경, 어디에서도 어둠을 찾아보기 힘들다. 캐롤이 울려퍼지고 나무엔 좁쌀 같은 별들이 무수히 뜬다. 교회당 꼭대기엔 커다란 별이 걸리고 도시는 디즈니의 애니매이션처럼 밝고 환하고 아름답다. 거기에 어둠은 없다. 어둠이 있다면 밝음을 더욱 밝음답게 하는 장식으로서의 어둠일 뿐이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이 도시를 벗어나면 어둠은 안데르센의 동화에서처럼 도처에 있다. 스산한 밤의 풍경들, 검은 산과 검은 들, 어디론가 무서운 속도로 달려가고 있는 밤의 검은 구름들, 그 구름들을 배경으로 하염없이 가지를 뻗고 있는 기괴한 나무들, 이런 풍경들을 거느리고 있는 길 위에 서있으면 내 안에 혹처럼 만져지는 불안을 감지하게 된다. 그 이상으로 당당할 수 없었던 사람도 이런 불안의 심연 앞에서 <허무한 삶을 사는 하찮은 달팽이>처럼 위축되고야 만다. 어디로 가야 하는가, 라는 존재론적 질문 앞에서 좀처럼 입을 떼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으리라. 대체 나의 삶은 무엇이었는가, 라는 물음 앞에서 일상은 하찮은 무게로 전락할 수도 있다. 어둠과 불안 속에서 비로소 나란 존재가 각성된다. 도시의 불빛 속에서 드러나지 않던 내가 어둠 속에서 비로소 보여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오도르 앙겔로풀로스의 <안개 속의 풍경>은 일찍이 우리의 존재론적 토대가 어둠이었음을 말해준다. 앙겔로풀로스는 이 영화에서 정오의 햇빛 속에 대리석 몸체를 빛내고 있는 그리스에 대한 우리의 기대를 여지없이 배반한다. 신선한 공기, 눈부신 태양 아래 빛나는 정오의 풍경은 없다. 하늘은 흐리고 겨울비는 차갑다. 모든 것이 뿌옇고 무겁고 차갑다. 그 영상 속에는 희망도 없고, 목적도 없다. 있다면 오직 길을 가는 자의 피로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아이들이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다. 막연한 기대가 이 아이들을 사나운 길 속으로 내몬다.

  을 뛰쳐나온 볼라와 알렉산드로스는 '독일에 살고 있는' 미지의 아버지를 찾아 아테네를 떠나는 기차를 타게 된다. 아버지를 찾아 떠나는 고행의 순례길이 열린 것이다.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를 찾아 떠나는 여행, ‘존재하지도 않는 아버지’를 찾아 떠나는 여행, 그 끝이 텅 비어있을지도 모르는 여행, 그 여행은 따스한 곳을 찾아가는 여유있는 자의 여행이 아니다. 남쪽 그리스에서 북쪽 독일로 가는 고행이다. 추운 곳으로 한발짝 한발짝 다가서는 순례의 여정이다. 피로와 곤고함이 예정되어 있는 길. 무임승차단속에 걸려 거리로 내던져진 아이들의 눈에 비치는 황량한 겨울 풍경을 보자. 검은 연기를 뿜어내는 발전소의 기괴한 실루엣, 산업사회의 표상인 거대한 기계들이 만들어내는 소음, 질주하는 차량들이 뱉어내는 굉음, 하얗게 얼어붙은 도시의 푸르스름한 야경, 입김을 내뿜으며 겨울의 밤 공기속에 버려져 죽어 가는 말, 본능적으로 제 운명을 예감해서일까, 아이는 울음을 터뜨린다. 마음을 파고드는 저 스산한 풍경들이 아니었다면 ‘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여행을 하고 있어요,’ 라는 아이의 독백이 장식적 수사 이상의 절실함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의 행운은 동반자를 만나는 데 있다. 유랑극단의 버스 운전사, 오레스테스. 유랑극단은 떠도는 자의 표상이며, 산업시대의 속도를 따라붙지 못하고 시대에 뒤쳐진 자의 표상이다. 그런 그였기에 오레스테스는 아이들을 ‘알아본다.’ 곤고한 자는 곤고한 자의 피로를 알아보는 법이 아닌가. 오레스테스는 아이들에게 줄 것이 없다. 대체로 줄 것이 없는 사람들이 줄 것이란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보이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먼저 그것은 희망이다. 안개 저 너머에 있을 한 그루의 나무. 줄 것이 없는 사람들이 줄 것이란 또 무엇인가. 위로이며 사랑이며 눈길이다. 길과 풍경은 도처에서 이들의 남루함을 감싸 안는다.

  게손가락이 잘려나간 거대한 손이 바다에서 건져진다. 앙겔로풀로스의 롱테이크는 헬기가 이 손을 매달고 점이 되어 사라지는 광경을 오래도록 보여준다. 이런 손을 가진 존재였다면 한 시대를 군림했던 존재였음이 틀림이 없다. 그런 손을 가진 존재였다면 새시대의 도래를 예언하며 뭇 대중들에게 희망을 역설했던 존재였음이 틀림이 없다. 풍요를 약속하는 이데올로기가 희망을 주었던 시대는 갔다. 안개 저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없는 아버지?

  쩌면 아버지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때론 아이들을 엄습한다. 그러나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데에 성숙함이 필요하다. 『결혼, 여름』(책세상)의 까뮈는 이렇게 말한다. ‘인류의 온갖 악들이 우글거리는 판도라의 상자에서 그리스인들은 다른 모든 악들을 쏟아놓고 난 후에 그 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악인 희망을 쏟아냈다. 이보다 더 감동적인 상징을 나는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흔히들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로 희망은 체념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은 스스로 체념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성숙함의 지혜란 희망의 헛됨을 깨닫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것을 가르쳐주는 것은 길뿐이다. 끝없는 길,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 그 길 위에서 따스한 심장을 가진 오레스테스와 같은 동반자와 이별을 하기도 한다. 영원히 같이 있어주었으면 하는 선한 마음의 살붙이들과도 길을 달리하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를 버리지 않는 것은 오직 풍경뿐인지도 모르겠다. 끝까지 추운 마음을 보듬는 풍경들.

  누이는 강 하나만 건너면 독일인 땅에 도착한다. 어둠 속, 총성이 울린다. 국경수비대의 총소리였을까. 모든 희망의 끝, 모든 길의 끝, 모든 흐느낌의 끝을 이 영화는 간결하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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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들은 자신과의 내밀한 만남을 주선한다. "전시에나 평상시에나, 나는 책을 안 가지고 여행하는 일은 없다. 그러면서도, 책 한 장 읽지 않은 채로 며칠이고 몇 달이고 지나가기 일쑤이다."라고 말하는 몽테뉴의 『수상록』은 사려 깊은 한 인간의 성찰의 기록이다. 몽테뉴에게 성찰은 고독의 시간 속에서 숙성되었다. "나는 결코 혼자 있을 수 없는 것보다는, 늘 혼자 있는 것이 어쩐지 더 견디기 쉬울 것만 같이 여겨진다."라고 말할 때의 몽테뉴는 깨침을 위해 잠을 자지도 않고 않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장좌불와로 용맹정진하는 선사(禪師)의 면모를 풍긴다. "사는 위치가 외지다는 것은 사실인즉 오히려 나를 밖으로 더욱 확산 확대시킨다. 나는 홀로 있을 때에 더욱 즐겨 나라일, 세상일에 골몰한다. 루우브르궁이나 군중 속에서는, 나는 나의 껍질 속으로 도사려 든다. 군중은 나를 나 자신 속으로 몰아 넣는 것이다."라고 말했을 때 몽테뉴의 고독은 협소한 자아를 넘어 세계의 한 가운데에 몽테뉴를 위치시킨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나 자신을 재판하기 위해, 나 자신의 법률, 나 자신의 법정을 가지고 있다"라고. 그렇다고 해서 그가 가혹하리만치 준열한 자기심판을 감행한 것은 아니다. 그는 솔직하게 인간의 부조리와 모순을 인정한다. "확고한 의견이 뚫고 들어가 거기에 깊은 뿌리를 박기에는 나의 영혼은 적당한 터전이 못 되는 만큼, 나는 아주 자유롭고 거침없이 변론과 토론에 들어간다."라고 그는 솔직하게 고백한다. "조금만 방향을 바꾸거나 관점을 바꾸면 내 안에서는 온갖 모순이 발견된다. 수줍음이 많으면서 건방지고, 정숙하면서 음탕하고, 박식하면서 무식하고, 거짓말쟁이이면서 정직하고, 관대하면서 인색하고, 구두쇠이면서 낭비가다."라고 말할 때의 몽테뉴는 천상의 인간이 아니라 피와 살을 가진 지상의 한 인간일 뿐이다. 그는 엄숙한 권위나 이론으로 자신을 포장하지 않는다. 때론 스스로를 제물로 삼는다. 치열한 반성은 곧 반성하는 자신의 자리까지를 응시하는 것이라고 할 때, 몽테뉴의 반성은 깊다. 몽테뉴는 때론 자신의 성적 무능력까지 고백한다.

 수상록의 '독자에게'의 마지막 구절은 상쾌하다. 그는 이렇게 말할 줄 아는 인간이었다 "그러므로 독자여, 나 자신이 이 책의 내용이다. 이런 시시한 주제로 인해 소중한 시간을 허비함은 정말 바보 같은 짓이다. 그럼 안녕" 그러나 때로는 우리 안에 바보가 필요하다. 실용과 이익과 계산만이라면 세상은 너무 건조하다. 때로는 아무런 목적도 없이 찾아오는 그런 친구 하나쯤은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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