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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
한상봉 지음 / 바오로딸(성바오로딸) / 2004년 4월
평점 :
품절
삶의 갈피를 살피고 도닥거리는 글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 한상봉 지음 / 바오로딸, 2004
유례없는 불황이라지만 책방에 나가보면 매일 엄청난 책들이 쏟아져 나온다. 책들은 저마다 한 말씀을 한다. 그 말씀들은 나름대로의 일리(一理)를 가진다. 그러나 다기망양(多岐亡羊)이라지 않던가. 갈림길이 많아 양을 잃었다는 말도 있듯, 너무 많은 말씀은 오히려 길을 찾는 데 방해가 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게 한다. 그런 의구심의 연장선상에서 보면 하나의 텍스트를 짓는다는 작위의 행위는 얼마간의 쓰디쓴 자의식을 지불해야 하는 고역일 수도 있다. 과연 내가 쓰는 텍스트들이 세상에 소음 하나를 더 보태지는 않을까, 크게 잘 날 것도 없는 자의식을 세상에 디밀어 어쩌자는 것일까 하는 상념들이 책상머리를 어지럽히기도 한다.
쓴다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세상에 개입하는 행위다. 글을 쓴다는 것은 세상의 행태를 잠자코 보아줄 수 없으니 어떤 식으로든 한마디 거들겠다는 계몽적 의지의 결과다. 세상이 내 식으로 돌아가 주지 않으니 어떤 식으로든 세상의 운행 방향을 돌려보겠다는 욕망이 글쓰기를 추동한다. 문제는 너나없이 한 마디 거들기 시작하면 세상의 소음은 누가 책임지며, 세상을 바로잡아야 할 구국의 임무를 누가 맡긴 것도 아닌데 왜 굳이 나서야 한다는 말인가 하는 문제도 있겠고, 대체 내가 얼마나 투명하고 명료한 의식의 소유자이기에 발언을 자처하고 나서야 한단 말인가 하는 류의 반성적 자의식도 글쓰기를 괴롭힌다. 개구착(開口錯)이라는 선가의 말씀대로 어쨌든 입을 연다는 것은 고역이다. 입 밖으로 뱉어진 말들로 맘이 편하지 않을 때도 있고, 그저 생각으로 흘려보내도 될 것을 굳이 문자를 빌어 기록으로 정착시키려는 내 업보에 혀를 끌끌 차보기도 한다.
이런 상념의 와중에서 박남수의 시, <새>는 아프게 읽힌다. 노래하는 것도 모르고 노래하는 새처럼, 부리를 서로의 죽지에 파묻고 따스한 체온을 나누어 가지는 새처럼 사랑을 말하지 않고 사랑을 살아버렸으면 하지만 인간은 아무리 생각해도 침묵으로 홀로 설 수 있는 믿음직한 나무가 아니다. 약하기 때문에 기대고 싶은 것이 인간이다. 글을 쓰고 어떤 발언을 한다는 것은 자의식을 뭉뚱그려 세상에 던지는 일이기도 하지만 또 어찌 보면 내 그리움의 대상을 입 밖으로 부르는 일이다. 내가 여기에 있으니 내 손을 잡아달라는 내 본질적 취약함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일이다. 글이란 것이 대단한 자의식으로 세상을 구하겠다는 계몽적 의지의 소산일 수도 있겠으나 내가 이렇게 살아서 당신을 부르고 있다는 미약한 숨결일 수도 있겠다.
송구스럽게도 글쓰기에 따르는 장황한 자의식으로 글의 모두(冒頭)를 어지럽힌 것은 한상봉씨의 에세이집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이 대체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새삼스런 성찰의 한 꼭지점을 마련해준다는 데 있다. 나는 한상봉씨의 글을 읽으며 그에게 있어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묻는다. 그것은 그에 대한 물음이면서 동시에 나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그는 열심히 기록한다. 어쩌면 그렇게 열심히 기록할 수 있을지 신기할 정도로 그는 부지런히 읽고 쓴다. 말을 했으면 가슴에다 묻을 일이지 뭐 그렇게 할 말이 많아서 수다한 말들을 기록하고 책으로 묶어 내느냐고 핀잔을 주는 어른들도 계실지 모르겠다. 말씀을 입으로보다는 몸으로 살아내신 큰 어른들에게야 뭐라 말씀드리겠는가. 그저 송구스런 따름이다. 그러나 달싹거리는 입술을 억지로 쥐어 틀어가며 침묵으로 간판을 내거는 것도 자연스럽지 못하다. 그런 태도가 나쁜 의미에서 부처연하고 노자연하는 가식이 아닌가. 물이 끓으면 주전자의 뚜껑이 달싹대는 것이 정한 이치다. 그 달싹임은 자연스럽다. 그것마저도 경망스럽다 내칠 일은 아니지 않은가. 어차피 욕망의 불이 식으면 절로 침묵할 것이 아닌가. 그에게서 예수나 부처를 기대할 일은 아니다. 그는 농사를 짓는 평범한 인간이다. 그러나 그는 평범 속에서 또 다른 것을 읽어낸다. 범상한 것들 속에서 초월의 기미를 읽어내는 농부, 그는 예사 농부가 아니다. 그는 고백한다
내게 접속되는 모든 사건이 내게 가르쳐주는 메시지를 읽을 것, 그 사물의 진언이 나의 의식과 영혼에 미치는 영향을 지켜볼 것, 통과비용 없이 우리가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갈 수 없음을 알 것, 그러므로 더 큰 우려곡절이 생기더라도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배후의 의미를 따져 물을 것, 뭐 이런 것들을 배우고 있다. 그러다 보면, 흠집 많은 타인의 생애를 더 깊은 곳에서 이해하게 되고, 상처 많은 나에게도 조금씩 너그러워질 수 있을 것 같다.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의 첫 꼭지는 <눈 오는 날, 아버지>라는 글이다. 욕심 없이 가난하게 살다간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잔잔하게 읽힌다. 사람이 사람을 그리워하는 일은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모든 사랑이 용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성찰이 없는 사랑은 간혹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고 상대방을 구속하는 힘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사랑해, 사랑해 하면서 우리는 상대방을 옭아매고, 내 삶의 취향과 방식, 그리고 나의 세계관을 타인에게 강요하기도 한다.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또 다른 사람을 배제한다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여타의 사람들을 소외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한상봉씨가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리며 쓴 다음과 같은 사랑의 고백은 참으로 따뜻하게 읽힌다.
눈이 내리면 아버지의 주름진 얼굴처럼 꼭 그만큼씩 그늘진 인생을 위해 ‘복 받으세요!’ 이런 말 전하고 싶다. 그 낯설지만 익숙한 얼굴을 지나치면서, 입 속에서 웅얼거리듯 혼자말로 축복의 말 한마디 남기고 싶다. 우리가 내어준 그 말이 은총이 되어 눈처럼 쌓일 것이다. 새해엔 전철 앞좌석에 앉은 사람을 보고도 마음속으로 복을 빌어주고, 공중전화기 앞에서 뭔가 하소연하고 있는 사람을 위해서도 복을 빌어주면 어떨까? 우연히 눈길이 마주친 아이를 위해서도 찰칵 사진 찍듯이 ‘복 받아라!’하면 어떨까?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은 감동을 강요하지는 않지만 가슴으로 읽힌다. 아마도 떼떼거리며 말하는 부처님, 아장아장 걸어다니는 예수님인 어린 딸아이, ‘결이’에 대한 그의 애정 어린 시선이 세상으로 확대된 결과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는 딸아이를 어찌나 예뻐하는지 그 속내를 숨기지 못한다. <흙을 담은 손길>에서 그는 결이의 ‘눈빛과 옹알거리는 소리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작은 행복을 따뜻하게 감당하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
아기들은 그 자신의 무력함으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기들이 어떤 완전함으로 어른을 설복시키고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 돌보지 않으면 목숨을 지탱할 수 없다는 절대적 무력함이 그 부모의 마음을 움직이고 행동하게 만든다. 아기들은 사기를 치지 않는다. 과장된 무력함에서 구걸의 태도가 나온다면, 참된 무력함은 사람들로 하여금 ‘생명’에 대한 투신의 태도를 낳는다.
아이를 보는 그의 시선은 그대로 세상을 보는 연민의 시선이기도 하다. 2000년에 출간된 그의 산문집 『연민』이 선언적이라면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은 그 선언의 바탕에 응당 놓여있어야 할 구체적 삶의 결, 마음의 무늬를 가감없이 보여준다. 『연민』에서 “슬픔은 안타깝고, 아쉽고, 억울하고, 가련하고, 불쌍하고, 상처입은 영혼에게서 나오며, 이 영혼의 파동에 접한 사람들은 연민과 동정심을 느낀다”라고 말하고 있지만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에서의 그의 목소리는 육친의 이름을 부르듯 더없이 정겹다. 그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이기 이전에 결이의 교육을 걱정하고 결이가 의젓하고 예쁘게 자랄 것을 소망하는 한 사람의 아버지다. 그는 결이를 사랑스럽게 응시하고 때로는 결이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기도 한다. 친구들과 토닥거리면서도 잘 노는 딸아이를 바라보며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부모들이야 어찌 생각하든지, 아이들은 다투면서도 서로를 필요로 한다. 하루에 한번은 반드시 누군가 울곤 하는데, 그래도 결이는 영현이네 집으로 간다. 엄마가 늦게 일어나는 날이면, 어느 틈엔가 혼자 아랫집에 내려가 놀고 있는 결이를 본다. 요즘 같아선 토닥거리면서도 서로를 필요로 하는 연인 같아 보인다. 아이들은 상처 속에서도, 상처 너머로 서로를 부른다. 그리고 행복해진다. 변덕스런 부모보다야 아이들의 세계가 더욱 믿음이 갈 때가 많으니 조물주의 창조하시는 조화(造化)가 이런 것인가.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돌이켜서 어린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마태복음 18장)이라는 성경의 한 말씀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아이들의 시선을 갖는다는 것은 관습과 이데올로기의 때에 물들지 않은 ‘눈’을 갖는다는 것, 세계에 대한 경이(驚異)의 시선을 회복한다는 것이 아닐까. 왜 밤은 까만가, 왜 사과는 붉고 오렌지는 노란가, 왜 늙으면 죽는가,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죽음 뒤는 무엇인가… 아이들은 끊임없이 질문을 하는 철학자요 시인이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낯설고 새롭고 신비하다. 어른들은 세상에 대한 아이들의 호기심을 적당한 답으로 얼버무린다. 그러나 아이들의 질문은 상투적인 대답에 만족하지 않는다. 아이들의 질문에 성심으로 답을 해주는 부모가 몇이나 있을까. 대충 건성으로 대답을 하고 그 답도 궁하면 “너는 왜 항상 이상한 것만 묻니?”라고 윽박지름으로써 아이들의 기를 꺾어놓기가 일쑤다. 결국 아이들은 어른들의 심상한 시선을 닮아가며 세상에 대한 경이의 시선을 잃어버린다. 습관화된 방식으로 사물을 보고, 낡은 언어로 자신의 느낌을 진술한다. 우리가 세상에 대한 신비를 회복해야 한다면 우리가 다시 찾아야 할 것은 어린아이의 시선, 곧 사물을 관습과 표피와 외양으로써만 관찰하지 않는 시인의 시선이다.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은 한상봉씨의 시에 대한 사랑의 고백이기도 하다. 그의 사유의 출발점이면서 동시에 귀착점이기도 한 시, <거칠게 또는 부드럽게, 이 사람>에서 그는 시에 대한 사랑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글쓰기를 할 때마다 나는 시집을 뒤적거리는 습관이 있다. 습관이라기보다는 ‘필요’라고 말하는 것이 정직하겠다. 영감이 떠오르지 않을 때마다 나는 시인들의 상상력에 도움을 청해야 했던 것이다. 책상 앞에 앉을 때마다 나는 시인들의 상상력에 도움을 청해야 했던 것이다. 책상 앞에 앉을 때, 나의 정신은 빈곤하거나, 복잡하게 엉켜 있는 모양이다. 나는 신탁을 기다리는 사제처럼, 시인의 언어가 나를 불러줄 때까지 때론 조급하게 때론 진득하게 의자에 앉아서 책장을 넘기며 지루해하거나 팽팽한 긴장감을 느끼며 묵상에 돌입하기도 한다.
시의 매니아들이나 읽을 법한 이성복, 김선굉, 김중식, 백석, 고정희, 박남준. 기형도…. 수많은 시인들의 시와 산문이 그의 사색을 돕는다. 그의 사유가 시에 얽혀들고 시의 메시지가 그의 글에 뿌리를 내리면서 그의 글은 사뭇 풍요로워진다. 그러나 그가 서권(書卷)에만 매달리는 서생이라고 함부로 단정해선 안 된다. 그는 누구보다도 땅 가까이에서 땅의 소리를 듣는다. 땅의 소리를 듣기 위한 그의 귀농은 아마도 ‘영화를 알면서 욕된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세상 골짜기가 되고, 세상 골짜기가 되면 한결 같은 덕이 넉넉하여 통나무로 돌아간다.’는 노자의 도덕경에 대한 실천으로 읽힌다.
고양이는 고양이대로, 아기는 아기대로, 닭은 닭대로 먹는 것도 기질도 생활양식도 다를 텐데, 그 미묘한 삶의 갈피를 살피고 도닥거리며, 사는 동안 쾌적하고 주어진 생명을 한껏 누릴 수 있도록 곁에 식구로 서 있는다는 건 고단하지만 즐거운 일이다.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이 4년 전의 『연민』과 다른 점은 생명의 ‘미묘한 삶의 갈피를 살피고 도닥거리’는 데에 저자의 눈길과 마음씨에 있는 것은 아닐까. 그의 글은 선언이기 이전에 생명에 대한 살핌이고 도닥거림이다. 마음을 움직이는 한 편의 시가 그렇듯 그의 글 또한 그 살핌과 도닥거림의 흔적들을 나누어 갖고 싶다는 소망의 표현이리라. 나는 그런 소망을 그가 접지 않기를 바란다. 모든 진실한 텍스트는 언어를 견디지 못하는 법. 진실은 말하고자 하는 욕망과 침묵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소망 사이에서 서성거리기 마련이다. 얼마나 많은 시인과 성인들이 침묵으로 귀의하고 말았던가. 나는 그의 이런 고백에 밑줄을 긋는다.
이젠 섬세하고 고른 숨결로 다시 사람에게로 가야 한다. 농사보다 이웃을 먼저 헤아리고, 사람들에게 성심으로 편지를 써야 한다. 어려운 생애에 삶을 거들어 주었던 사람들에게 안부를 묻고, 배추 한 포기라도 건네야 한다. 고난에 찬 삶을 위로하고, 도한 그들에게서 사람 사이의 아픈 틈새를 헤아리는 지혜를 배워야 한다.
나자렛 예수가 그랬듯이 그 또한 삶의 상처와 소망들을 소박하고 정갈한 언어로 드러내주길 바란다. 섣불리 침묵에 귀의하지 않기를 소망하는 마음으로 나는 그에게 정현종의 시, <상처>를 읽어주고 싶다.
한없이 기다리고
만나지 못한다
기다림조차 남의 것이 되고
비로소 그대의 것이 된다
시간도 잠도 그대까지도
오직 뜨거운 병(病)으로 흔들린 뒤
기나긴 상처의 밝은 눈을 뜨고
다시 길을 떠난다
바람은 아주 약한 불의
심장에 기름을 부어주지만
어떤 살아 있는 불꽃이 그러나
깊은 바람 소리를 들을까
그대 힘써 걸어가는 길이
한 어둠을 쓰러뜨리는 어둠이고
한 슬픔을 쓰러뜨리는 슬픔인들
찬란해라 살이 보이는 시간의 옷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