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 긋는 남자 - 양장본
카롤린 봉그랑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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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푸르름이 상큼하게 배어드는 스물 다섯 살의 로망스




  무살 무렵, 앙드레 지드를 읽었다. 노량진 <진호서적>에서 구입한 헌책,『지상의 양식』이었다. ‘나의 책을 던져버려라. 그것은 인생에 대하여 취할 수 있는 수천의 태도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라. 그대 자신의 태도를 찾아라.’ 그 구절에 누군가가 밑줄을 그어 놓고 있었다. 『지상의 양식』의 전 주인은 내 마음이 머무는 구절에 밑줄을 그어 놓았다. ‘그대와 마찬가지로 남이 쓸 수 있는 것, 그것은 쓰지 말라. 그대 자신 속에서가 아니고는 아무 데도 없다고 느껴지는 것 외에는 집착하지 말라. 그리고 극성스럽게 또는 참을성 있게, 아아!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존재를 스스로 창조하라.’ 라는 구절에 밑줄을 그은 그는 누구일까.

  내가 긋고자 한 곳에 미리 밑줄을 그은 사람, 그는 여자일까, 남자일까, 그는 몇 살이나 되었을까, 그는 지금 어떤 종류의 책을 읽고 있을까, 그의 직업은, 그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책의 발간연도로 보아 그는 나보다 십 년 전쯤의 사람이었다. 나는 밑줄이라는 기호를 통해 그와 무언의 교신을 하고 있었다. 그와의 교신은 『지상의 양식』을 더욱 양식답게 했다. 어떤 느낌을 공유한다는 것은 근사한 일이었다. 그에게 침투했던 지드가 또 다시 내 몸에 침투하고 있다는 느낌, 나는 그 느낌의 관능을 즐겼다. 그 느낌의 관능 속에서 ‘지드 읽기’는 시종일관 행복했다.

  헌책의 갈피에서 나는 누군가가 끼워놓은 나팔꽃 마른 잎을 발견한 적도 있었다. 대체 언제 적의 나팔꽃이었을까. 때로 누렇게 바랜 사진을 발견한 적도 있었다. 사진에는 <우정을 위하여>라는 글씨가 박혀있었고 어머니의 십 수 년 전의 모습을 한 처녀들이 미소를 짓고 있기도 하였다. 책 속에 남겨진 흔적들을 통해 나는 시공을 건너뛰어 무언의 대화를 하고 있었다. 한 줄의 메모와 밑줄에는 그 책을 거쳐간 자들의 체온과 숨결이 배어 있었다. 그것은 그대로 책의 체온이었고 숨결이었다. 만지고 싶은 그러나 만져지지 않는 그 무엇이 헌책에는 있었다. 나는 그것을 그리워했다. 스무살은 그런 나이였다.

  나는 책을 학대(?)하는 편이다. 괜찮다 싶은 구절이나 문제가 있다 싶은 구절에는 밑줄도 긋고 간단하게 내 의견도 몇 줄 써넣기도 한다. 재독(再讀)을 하는 경우, 왜 내가 이런 구절에 밑줄을 그었는지 의아해하는 수도 있고, 왜 그때 이렇게 멋진 구절에 밑줄을 긋지 안았는지 가벼운 자책을 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미 읽었던 책에서 새롭게 그어야 할 구절을 발견했다는 것은 시간이 나를 어떤 식으로든 변모시키고 성장시켰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그런 변화 없이는 나는 오직 현재의 나일 뿐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총체일 수는 없다.

  롤린 봉그랑의 『밑줄 긋는 남자』(열린책들)는 사랑스런 책이다. 매일밤 당나귀 인형 ‘레옹’을 끼고 잠드는 스물 다섯 살의 콩스탕스, 114에 전화해 존재하지도 않는 이의 이름을 대고 전화번호를 가르쳐달라고 장난을 하는 것이 취미인 이 귀엽고 매력적인 아가씨, 그녀는 밤마다 젖가슴 위에 책을 세운 채 잠드는 바람에 직각 모양의 붉은 자국이 가시지 않을 만큼 책읽기를 좋아한다.(책이 그녀의 가슴에 자국을 남긴다는 표현의 관능성이라니.) 콩스탕스에겐 따뜻한 우유 한 잔을 마신 뒤 로맹 가리의 책을 읽는 것이 유일한 낙이다. (스물 다섯 살은 로맹 가리를 좋아하기에 얼마나 적당한 나이던가. 『자기 앞의 생』이 없었다면 나의 20대 또한 얼마나 무미건조한 것이었을까.) 달리 취미도 없고 해서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기를 좋아하는 그녀, 그녀는 빌려온 책에서 그어진 밑줄을 발견한다. 그 구절은 그녀를 사로잡는다. 누굴까, 이 밑줄을 그은 남자는. 그녀는 ‘밑줄 긋는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 ‘밑줄 긋는 남자’는 친절하게도 그녀가 다음에 읽어야 할 책까지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적어 놓는다. 이런 식. <도스토예프스키의 『노름꾼』, 좋은 책입니다. 그걸 당신에게 권합니다.』다음 책에서도 계속 이어지는 밑줄, 그 밑줄을 통하여 콩스탕스는 그의 호흡과 체취를 느낀다. 부재(不在)하는 존재야말로 관능의 에너지를 최대한으로 증폭시키는 존재가 아니던가. 부재가 그녀를 달뜨게 한다.

  사랑에 빠진 그녀는 돌연 자신의 몸을 거울에 비추어 본다. 거울에 비친 사랑 받기를 갈망하는 젊은 처녀의 몸. 배에는 군살이 없고, 몸의 곡선은 뚜렷하고, 젖가슴은 탱탱하다. 그러나 그녀는 뇌까린다. ‘그 위에 손을 얹어줄 사람 하나 없으니, 그것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라고. 그러나 사랑은 그녀를 변화시킨다. 그녀는 푸른색 목욕가운을 사다놓고 다리털을 정기적으로 뽑는가 하면, 될수록 소리가 작게 나게 하려고 배를 끌어당기며 소변을 본다.(이쯤 되면 독자들은 이 천진난만한 아가씨 콩스탕스를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긴다. 독자들은 『밑줄 긋는 남자』를 읽으며 콩스탕스의 욕망과 독자인 ‘나’의 욕망을 동시에 읽게 된다. 이런 독서체험은 아주 관능적이면서도 경쾌하다.)

  콩스탕스는 ‘밑줄 긋는 남자’를 의식해 로맹 가리의 소설, 『그로 칼랭』에 밑줄을 긋는다.
“존재하지도 않는 것일수록 더 크게만 느껴지고 온 공간을 차지하는 법이다......나는 애정 어린 포용이 어찌나 그리웠던지 하마터면 내 목을 조를 뻔했다.” (콩스탕스의 밑줄은 『그로 칼랭』을 읽으며 내가 그어 두었던 밑줄과 일치했다. 『밑줄 긋는 남자』는 로맹 가리에 대한 독서의 기억을 새롭게 하며 내 의식을 휘저어 놓고 있었다. 하나의 책이 과거를 불러오고 의식을 들쑤셔 놓는다는 것은 기특한 일이다.)

  결국 그녀는 ‘밑줄 그은 남자’를 만난다. 보이지 않는 존재와의 신화적인 사랑이 현실의 사랑이 되는 순간이다. 그 순간이 어떻게 기록되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작업은 온전히 독자의 몫이 되어야 하리라.

  봄이다. 무거운 외투를 벗어 던지고 조금은 가벼워지고 경쾌해져도 좋겠다. 경쾌한 스텝으로 벚꽃 나무 그늘 아래로 걸어 들어 가보는 것도 좋으리라.『밑줄 긋는 남자』를 펴고, 푸르름이 상큼하게 배어드는 매력적인 아가씨 콩스탕스의 탄력을 느껴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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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 - 나이듦의 의미와 그 위대함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홍상희.박혜영 옮김 / 책세상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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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노년은 지혜와 평정의 땅인가?


 인의 것이든 젊은이의 것이든 모든 육체를 하나의 그릇으로 비유할 수 있다면, 그 육체라는 그릇은 욕망으로 하여 덜그덕거린다. 급기야는 뚜껑이 열리기까지 한다. ‘열 받기’ 쉬운 청춘의 육체는 해방과 분출의 카타르시스를 기대하며 격렬하게 덜그덕거린다. 모든 욕망은 보상을 꿈꾼다. 그러나 어떤 욕망이 쉬 달성될 수 있을까. 현실의 금기 앞에서 청춘의 육체는 아프게 뇌까린다. 이런 덜거덕거림은 참을 수 없어. 차라리 식어버린 육체이었으면 좋겠어. 불꺼진 성기의 평화로움이면 좋겠어. “내게 황새기젓 같은 꽃을 다오/ 곤쟁이젓 같은, 꼴뚜기젓 같은/ 사랑을 다오/ 젊음은 필요 없으니/ 어둠 속의 늙은이 뼈다귀빛 꿈을 다오/ 그해 그대 찾아 헤맸던/ 산 밑 기운 마을/ 뻐꾸기 울음 같은 길/ 다시는 마음 찢으며 가지 않으리/ 내게 다만 한 마리 황폐한/ 시간이 흘린 눈물을 다오(윤후명의 시,「희망」)”라는 엘레지는 청춘의 도저한 에로스의 에너지가 출구를 찾지 못해 결국 죽음으로 물꼬를 트는 비극적 추이를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너’의 끝에 닿고자 하는 에로스의 욕망이란 이렇게 자학과 파괴의 비극적 플롯과 조우하기 십상이다.

노년 노년은 불꺼진 땅, 에로스의 열기가 식어버린, 지혜와 평정의 땅이라고 젊음은 지레 판단해버린다. 시몬느 드 보부아르는 『노년 : 나이듦의 의미와 그 위대함』에서 이 점을 잘 간파하고 있다. “노인들은 청년의 연장이며, 그렇기에 예전에 그가 가졌던 인간의 자질과 결점들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바로 이 점을 여론은 모른 체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젊은이들과 똑같은 욕망, 감정, 요구 등을 표명하는 노인은 사람들의 빈축을 사게 된다. 노인들의 사랑과 질투는 추하거나 우스꽝스럽고, 성행위는 혐오스러우며, 폭력은 가소로운 것으로 여겨진다. 노인들은 모든 미덕의 본보기를 보여 주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들은 그들에게 평정함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들이 평정함을 지니고 있다고 단정한다. 이러한 사고방식 때문에 노인들의 불행에 무관심하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소비의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신선도가 떨어지지 않는 팽팽한 육체와 젊음의 약동이다. 24시간 편의점, 대형할인매장 어디에도 늙음은 없다. 번쩍거리는 도시, 쿵쾅거리는 도시, 어디에도 노인들의 자리는 없다.

 
화 <죽어도 좋아>의 첫 장면을 떠올려 보자. 담배판매대 앞에 노인이 앉아 있다. 수납구 밖으로 비죽이 나온 노인의 투박한 손. 거리엔 눈발이 흩날리고, 노인의 등 뒤에선 주전자의 물이 끓는다. 주전자는 조용히 더운 김을 내뿜는다. 늙은 육체 안에도 더운 열기가 남아 있음을 시위라도 하듯. 그렇다. 늙은 육체도 열을 받는다. 거친 호흡, 탄력을 잃은 육체의 삐걱거림, <죽어도 좋아>는 놀랍게도 늙음의 땅이 평정의 땅이 아님을 웅변한다. 다시 한번 보부아르에게 돌아가 보자. “팽창과 풍요의 여러 신화 뒤에 몸을 숨기는 그 무사태평한 의식은 노인들을 천민계급으로 취급한다” 로마시대의 귀족들은 노예들의 시선에 아랑곳없이 성행위를 했다던가. 문제가 되었던 것은 귀족의 욕망이었을 뿐, 노예들의 욕망이 아니었다. 보부아르가 『노년 : 나이듦의 의미와 그 위대함』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도 노인들을 바라보는 현대인들의 자기중심적 시선이 아니었을까. 그 오만한 시선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노인네들은 시종일관 부채질이다. 그것도 모자라 선풍기까지 동원한다. 주름진 육체에도 식지 않은 열기가 남아있음을 노인들의 부채질은 웅변한다. 깊은 육체의 고랑으로 땀이 흐른다. 땀, 살아서 열 받고 있음을 증거하는 액체. 매미소리가 시끄럽다.

 
<죽어도 좋아>는 시끄러운 영화다. 거리엔 오토바이가 질주하고 시장은 인파로 북적댄다. 할아버지의 육체는 삐걱거리고, 할머니의 호흡은 가쁘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툭하면 장고를 쳐대시며 걸쭉한 한 자락을 뽐내신다. “세월이 가기는 흐르는 물 같고 인생이 늙기는 바람결 같구나. 천금을 주어도 세월은 못 사네 못 사는 세월을 허송을 말아라” 둥기둥 얼쑤,소음(?)을 생산하는 것도 모자라 이번엔 말다툼이시다. 애들립이 가세했음이 분명한 이 부부싸움 장면은 가히 소음의 난장판이다. 이런 세상의 소음[世音]을 다 듣기 위해선 관세음(觀世音)보살의 큰 귀가 필요하겠다. 어쨌든 노년이건 청춘이건 살아 있다는 것은 끊임없이 소음을 생산해낸다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단지 우리는 늙음의 문화에서 욕망보다는 이성을, 소음보다는 평정을, 삐걱거림보다는 적멸을 필요 이상으로 기대했는지 모르겠다. 박치규, 이순예, 이 두 노인들을 그런 기대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 <죽어도 좋아>는 마땅치 않은 영화다. 그러나 보부아르의 도움을 얻어 다시 말하자. 노년의 땅은 당신들이 생각하는 대로 그렇게 만만한 평정과 적멸의 땅이 아니다. 노인들에게 평정의 땅에 있으라는 주문은 결국 욕망의 왕국은 이제는 우리 차지라는, 그러니 당신들은 이제 좀 빠져 달라는 무의식적 선포는 아닐까. 노래라는 것도 모르며 노래하는 새처럼 박치규, 이순예, 이 두 노인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다는 의식도 없이 이 선포에 반기를 든다. 이 두 노인의 반기에 60살의 보부아르가 지원 사격을 한다. 가령 이런 식. “모든 차원에서 사람들은 노인들을 젊은 사람들과 똑같이 취급한다. 그러나 노인들의 경제적인 지위를 결정할 때 보면, 사람들은 노인들을 이질적인 종류에 속하는 인간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다시 말해서 노인들도 다른 인간들과 똑같이 여러 가지 욕구를 가지고 있으며, 다른 인간들과 똑같은 여러 가지 감정을 느낀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얼마 안 되는 보잘것없는 적선을 하고는 스스로 그들에 대한 의무를 충분히 다했다고 느끼는 것이다. 편리한 환상이다.”

 
상을 깨는 길은 한 가지. 몸을 가진 중생들이라면 박치규 할아버지나 당신이나 나나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것, 남녀노소 평등하게 고루고루 관세음보살의 긍휼함을 입어야 한다는 것. 그렇다. 평정을 얻어야 한다면 그것이 왜 늙은이뿐이겠는가. -조이씨네 www.joycine.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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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 지구에서 가장 특이한 종족
디트리히 슈바니츠 지음, 인성기 옮김 / 들녘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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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적 남성, 그 안에 칭얼대는 어린아이
남자 : 지구에서 가장 특이한 종족, 디트리히 슈바니츠 저, 인성기 역 / 들녘, 2002



  학시절 농촌활동 때의 이야기. 논배미에 나타난 뱀을 잡았는데 그 몸 안에 뱀 알이 있었다. 점심시간에 누군가가 뱀 알을 삶아 오더니 먹으라고 내놓는 것이었다. 평소 기가 드센 친구들마저 비위가 상하는지 슬금슬금 피했다. 위기는 호기라던가. 내 안의 남성성이 말했다. ‘먹어 봐’ 나는 그 남성성의 지령에 따라 호기 좋게 그 알을 입에 넣었다. 오, 가련한 내 남성성은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참아내느라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떤 영웅적인 사명을 수행하고 있다는 포만감이 구역질을 인내하게 하였다. 끝내 뱀 알을 삼켰다.

  뱀 알 사건으로 내 남성성은 한 차례 고역을 치르며 약간의 자기반성을 했지만 그 반성이란 것이 한낱 형식에 그쳤다는 것을 증명한 것은 뒷날 있었던 ‘민물고기회’ 사건. 농촌 청년들과 우의를 다지기 위한 밤낚시의 결과, 희생물이 된 민물고기를 머리 부분만 잘라버리고 초장에 찍어 먹는 대목에서 많은 친구들이 발을 뒤로 뺐다. 농촌총각들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맛이 일품이라며 먹기를 권했지만 겉으로는 호랑이를 잡아먹을 기세인 우리 일행들은 따지고 보면 대부분 갈 데 없는 ‘도횟것’들이었다. 그들의 비위란 것도 따지고 보면 허술하기 짝이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더구나 민물고기를 디스토마와 곧바로 연결시킬 수 있는 그들의 건전한 보건상식이 ‘날고기’ 먹기를 한사코 주저하게 만들었다. 질병과 죽음을 담보로 용기를 과시할 순 없었다. 그 망설임의 순간, 어차피 죽어도 한 번이지,라며 내 안의 남성성이 호기 있게 나섰다. 태연함을 애써 가장하며 우물우물 씹어 넘길 때, 내 혀에 돌던 민물고기의 쫀득쫀득한 육질의 미각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이왕 엎질러진 물, 하는 체념 속에서도 주눅들지 않고 고개를 들던 그 찜찜함 또한 잊을 수가 없다. 때로 만용은 공포를 이기는 법. 끝내 열 마리 이상의 민물고기를 삼켰다.

  따지고 보면 청춘은 그런 만용 속에 있기 마련이다. 수컷다운 웅자(雄姿)를 한껏 뽐내고 싶다는 자기과시가 치기 어린 열정을 만나, 웃지 못할 스펙터클을 연출하는 때가 바로 그때다. 그러나 그 스펙터클을 연출하는 청춘의 표정은 심각하다. 운명이 실존에 부과하는 소명에 충실하게 답하고 있다는 선민의식이 그 표정에 자못 종교적 엄숙함마저 부여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는 얼굴이다. 그러나 그 얼굴은 한심하게도 제 열정에 갇혀 제 발 밑을 보지 못한다. 기억의 서랍 속에 남자들은 이런 우스꽝스런 표정 몇 개쯤은 가지고 있으리라,

  <지구에서 가장 특이한 종족>이라는 부제가 붙은 디트리히 슈바니치의 저서『남자』(들녘)가 그리고 있는 남자들은 필자가 고백한 남성성처럼 시종일관 천박하다. 슈바니츠는 여자들에게 이 가엾은 동물인 남자를 좀 잘 보아 달라고 호소하기까지 한다. 그는 서문(序文)에서 고교 동창회에서 영웅담을 늘어놓고 있는 친구들을 보며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자들은 남자들이 모두 가면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구나! 남자들이 유치한 농담들을 해대는 것은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라는 것을, 남자들은 그런 식으로 자신의 비애를 숨긴다는 것을, 기회를 놓치고 허송세월하며 실수를 저질러 학창시절의 커다란 희망에 비해 형편없이 초라하게 지낸 세월이 한스럽지만 그 모든 것을 숨기고 싶고 고독하다는 것을, 그래서 일부러 철딱서니 없는 바보의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을 여자들은 꿈에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가면, 이보다 남자의 성격을 잘 말해주고 키워드가 있을까. 뱀 알을 삼키며 어쩔 줄 몰라하는 연약함을 가장 하는 저 영웅적인 표정, 디스토마쯤 걱정될 것이 없다고 호언하면서 태연함을 가장하는 저 표정. 적어도 필자에게 가면은 늘 그런 구체적인 표정으로 왔다.

  저자는 남녀의 근본적인 차이에서 오는 갈등을 개와 고양이의 경우와 비교한다. 즉 남성과 여성은 개와 고양이처럼 태생적으로 다른 문화와 언어를 쓰고 있느니만큼 갈등은 이해관계의 상충보다는 오해에 기인하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이다. '남자는 인위적이고 여자는 자연적'이라고 해석하는 저자는 특히 ‘남자라는 존재는 아주 불안한 생활감정을 지닌 특별한 종족으로서 그 구성원들은 늘 자기 존재를 입증해야 하는 곤경에 처해 있으며 감수성이 아주 예민하다.’라고 말한다 자기존재를 입증해야만 하는 곤경 속에서 결국 남자들은 억지 춘향격으로 뱀 알과 날고기를 삼키기도 한다. 어찌 보면 우리가 칭송해 마지않는 많은 영웅적인 행동들이 그런 웃지 못할 딜레마의 산물은 아닌가 하는 의문마저 든다. 가련한 남자들, 왜 그들은 좀더 솔직해지지 못하는 것인지.

  확실히 남자들은 '문명의 덫에 걸린 존재'다. 문명은 그 구성원들에게 어떤 사회적 역할을 요구하고, 그 역할은 특정한 가면 쓰기를 요구한다. 가면을 쓰지 않으면 살아 갈 수 없게끔 만들어진 존재가 남자는 아니던가. 그러나 가면 뒤의 얼굴은 무엇인가. 군림하려는 남성 속에도 칭얼대며 위로 받기를 갈망하는 어린아이는 무엇인가. 남성문화는 애써 그 어린아이의 칭얼댐을 무시하기를 강요한다. 내면의 욕구를 얼마만큼 의연하게 배반하느냐에 따라 남성적 힘의 스케일이 증명되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내면의 욕구도 호락호락 백기(白旗)를 들지 않는다. 내면의 어린아이, 내면의 여성, 그것은 타협의 대상일 수는 없어도 억압의 대상일 수는 없다. 어떤 폭군도 무의식의 역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모든 억눌려진 무의식은 말하는 법이다. “ I will be back"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감이 없진 않지만 저자는 문명이란 여자들에 의해 고안되었고 문명의 목표는 남자를 길들이는 데에 있다고도 주장한다. 저자의 말을 들어 보자. ‘문명은 여자가 고안한 것이다. 문명의 본래 목표는 남자를 길들이는 데 있었다. 사회 안에 문명이라는 팻말을 내건 평화구역 하나가 설정되었다. 그 수단은 섹스였다. 바로 이것이 남자를 이분화시켰고 두 얼굴을 가지게 했다. 남자는 외부 세계, 즉 적들에 대해서는 강한 투사이고 야만적이어야 했다. 그러나 내부 세계, 즉 그가 원하는 여자에게는 유순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여야 했다. 따라서 자신의 거친 행동을 자제하고 야만성에 고삐를 채워야 했다. 요컨대 그는 문명인답게 행동해야 했다.’ 슈바니츠의 이분법에 의하면 사회는 냉혹한 동물의 세계다. 그 속에서 남자들은 거친 야수다. 그는 자신의 나약함을 숨겨야 한다. 그러나 여자 앞에서는 자신의 욕망을 노골화시킬 수 없다. 슈바니츠가 말하는 연애의 세계는 사랑의 소네트를 요구하는 문명의 세계다. 사랑을 얻으려면 어떤 식으로든 본능과 욕망을 억누르고 그것을 문명인답게 세련시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자의 마음과 몸을 얻기까지는 슈바니츠의 말은 진실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의 남편들을 생각해 보시라. 현실의 남편들이 과연 문명의 세계에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는 여전히 숫사자처럼 정글 속에서 군림한다. 오, 문명의 세계 속에서 백년해로(百年偕老)할 수 있는 부부는 행복하다.

  저자의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남자들이 가지는 원초적 감정은 다름 아닌 공포와 불안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남자로서 거세당할 수도 있다는 위협으로부터의 공포와 불안 말이다. 언제든 냉혹한 승부의 세계로부터 축출될지 모른다는 공포, 그런 축출로 인해 그가 가진 모든 상징적인 권력들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 바로 그 불안이 남성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가면을 뒤집어쓰게 하는 것은 아닌지. 슈바니츠는 말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통제다. 그는 자신에 대한 통제를 잃어버릴까봐 늘 염려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남자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편집증 환자다. 그 노이로제에 걸린 남자는 통제상실에 대한 두려움을 늘 가지고 있으므로 수천 가지의 회피전략을 개발한다.’ 떠들썩한 술자리를 들여다 보시라. 끊임없이 자신의 기억의 창고에서 자신의 무공(武功)을 상기해줄 수 있는 무용담을 끄집어내는 사내들, 별것도 아닌 일에 왁자지껄하게 웃는 사내들.

  남자들이 끊임없이 자신을 통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연민의 대상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부러움의 대상은 아니다. 슈바니츠는 여성 독자들에게 동정을 호소한다. 문명은 여성의 필요에 의해 만든 것이되, 문명을 지탱하는 부담은 남성이 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남자는 인위적이고 여자는 자연적이라고 말한다. 즉 여자는 태어날 때부터 여자이고 남자는 추후에 남자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여자는 어떤 일을 덧붙이지 않아도 여자 그 자체이다. 그러나 남자는 사회적으로 조직된 통과의례를 거쳐야 비로소 남자가 된다. 슈바니츠는 동․서양에 널리 퍼져 있는 성인의식을 한 예로 든다. 성인식에서 남자들은 영웅적으로 행동해야 할 처지에 곧잘 놓인다. 모든 성인식과 통과의례의 구조는 이렇다. <남자가 되려거든 고통을 이겨내라. 고통의 얼굴을 숨겨라.> 그러나 남자의 몸 속에 갇혀 칭얼거리는 어린아이는 누구인가. 남자들은 제 속에서 칭얼거리는 어린아이를 타인에게 들킬까봐 불안하다. 남자의 무의식은 그런 것이다. 의연한 표정과 불안한 표정, 한 남자는 이런 두 개의 상반된 얼굴을 지닌다.

  남자로서의 압력이 한계점을 초과하면, 남자는 고압가스통과 같이 되어 폭발한다. 폭발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외부로 향하는 공격적인 유형이고, 다른 하나는 내부로 향하는 자가 공격적인 유형이다. 전자의 남자는 화를 내거나 심지어 폭력을 행사하게 되며, 후자의 남자는 도주한다고 슈바니츠는 말한다. 억압적인 남성상이 지배적인 코드로 작용하는 대한민국에서 ‘폭발’과 ‘도주’는 도처에서 목격된다. 음주는 폭발의 한 유형이고, 예술과 외도는 후자의 한 유형이리라. 상기해보시라. 대한민국에서 소비되는 도저한 알콜의 양과 황색저널리즘의 지면을 장식하는 갖가지 기사들을. 술꾼과 바람둥이에게 연민 있을진저, 음주와 외도는 결국 가련하기 짝이 없는 일탈의 몸짓이다.

  공격적인 페미니스트들이 아니더라도 슈바니츠의 논점에 이의를 제기할 가능성은 높다. 그는 말한다. ‘남자는 자신의 몸을 어느 정도 도구로 여기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 남자가 몸을 외부의 사물처럼 체험하는 것도 그러한 태도에 속한다. 그는 자기 내면의 존재를 부인한다. 그는 몸 속에 느껴지는 고통을 이를 악물고 참아버린다. 그는 방해가 되는 유약한 것을 가능한 한 무시한다. 그 대신 그는 몸을 통제하려고 노력한다. 그에게 몸은 세상의 사물들 중 하나다. 이런 점은 유년시절의 기억 속에서 그가 자신의 몸을 낯선 대상처럼 마주보고 있었던 경험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는 우선 몸을 통제하는 것을 배워야 했으며, 이 방식을 통해 비로소 몸을 자기 것이 되게 했다.’ 자신의 몸을 도구로 여기는 남성들은 여성들의 몸조차 도구로 여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슈바니츠의 남성관은 매춘과 남성의 외도에 대해서 너그러운 태도를 보여주는 현재의 억압적 남성문화의 기원을 통찰할 수 있게 할지는 몰라도 현재의 남성적 문화를 초월할 수 있는 깊은 사유와 대안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무한한 지적 배경, 서구문명을 넓게 조감하는 문명론적 시각으로 슈바니츠의 저서들은 풍부한 읽을 거리를 제공한다. 여기에 그의 탁월한 유머감각까지 가세한다. 여러모로 아쉽기는 하지만 이만한 읽을 거리도 만나기 힘들다는 생각이다.

  남자는 남자라는 이데올로기의 어쩔 수 없는 희생물이다. 강함을 남성의 전유물쯤으로 알고 있는 남성들, 그 강함을 내던져 버리고 탈주와 일탈을 꿈꾸는 사내들 모두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 얽히지 않는다면 성(性)은 무엇이겠는가. 남성을 동정할 채비를 가지고 있든 가지고 있지 않든, 남성을 적으로서가 아니라 동반자로 알고 있는 모든 여성들에게도 일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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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플의 재발견 - 당신에게 맞는 커플의 형태를 찾아라
필리프 브르노 지음, 이수련 옮김 / 에코리브르 / 2003년 6월
평점 :
절판




부부가 일심동체라고?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한다. 1+1=1이라는 논리다. 자기를 내세우지 말고 먼저 남을 이해하도록 하라는 말은 결혼식 주례사의 상투어다. 그러나 냉정히 주위를 살펴보자. 알콩달콩 사는 부부가 의외로 많지 않다. 때론 원수도 이런 원수가 없다. 한 지붕 아래 살되, 저는 저고 나는 나다라는 식의 ‘저 홀로 부부’도 적지 않은 듯싶다. 살은 섞되 마음을 섞지 않는 부부도 있고, 마음은 섞되 몸만은 내가 알아서 한다는 부부들도 더러 있는 듯싶다. 고전적인 일부일처제를 고수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지만, 어떻든 고전적인 일부일처제는 격랑의 한 복판에 서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소설에서 드라마, 연극, 영화, 이제 불륜은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는 소재다. 동창생을 찾아주는 사이트의 성공과 더불어 소위 ‘흥신소’의 주가도 덩달아 올라간다는 웃지 못할 농담까지 나도는 판이다. 인터넷 대화방에서의 ‘애인 구함’이란 문구 정도는 이젠 애교에 불과할 정도다. 각종 채팅 사이트엔 낯뜨거운 문구가 버젓이 얼굴을 디밀고 있다. 기술이 욕망을 부추기고 욕망은 다시 기술을 증폭시킨다. 미디어는 이런 증폭을 더 뜨겁게 달군다. 매일매일 스포츠 연예신문을 달구는 저 낯뜨거운 기사들.

    ‘결혼은 미친 짓이다’라는 영화는 더 이상 여성이 성적 욕망의 대상에 머무를 수 없음을 선포한다. 케이블 TV의 외화 드라마 는 여성들도 당당하게 욕망의 주체임을 말한다. 그 어법이 하도 당돌해 ‘이건 외국의 경우야. 우리나라는 달라’라고 뇌까려 보지만 신세대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 드라마를 즐긴다는 얘기다. 하긴 남성의 욕망이 보상받아야 하는 것이라면 여성의 욕망이라고 해서 억압해야 할 이유는 없다.

    어떻든 동거, 계약결혼 등 새로운 형태의 남녀 결합이 기존의 결혼제도를 위협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쯧쯧 한숨을 내쉬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위기가 곧 기회다’라며 남녀간의 새로운 인식의 패러다임이 도래하길 은근히 희망하고 있는 눈치다.

    『일부일처제의 신화 : 자연의 짝짓기를 통해 본 인간의 욕망과 불륜』(데이비드 P. 버래쉬, 주디스 이브 립턴 저/이한음 역, 해냄)에서 저자는 일부일처제가 얼마나 취약한 제도인가를 역설한다. 한 마디로 일부일처제는 인간을 본능을 도외시한 실패한 제도이며 다수의 성적 파트너를 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본능이라는 것. 이 책은 다양한 동물의 짝짓기 연구를 통해 일부일처제가 얼마나 결점 투성이인가를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버래쉬에 의하면 4천 종이 넘는 포유동물 중 일부일처형은 박쥐 일부 종과 비단 원숭이 등 10여종에 불과하며. 일부일처제의 생물학적 증거는 백조를 비롯한 조류들의 일부일처형 번식 형태만이 유일하다는 것이며, DNA 지문 분석 결과 조류들의 새끼 중 10-40%가 혼외 수컷의 자식이었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원시부족들 사이에서 일부다처제가 선호되었던 몇 가지 이유를 든다. 먼저 성(性) 충동에 있어 남녀간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 출산 후엔 오랫동안 성교가 금지된다는 점, 일부다처제가 다산(多産)에 유리하다는 사실, 나아가 여성의 노동력이 많을수록 생계유지 및 가족부양에 공헌도가 높다는 점 등이 일부다처제를 선호된 이유로 제시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자들은 일부다처의 실질적 이유로 성적 측면보다는 경제적 요인이 더 중요하게 작용했다고 말한다.

    인류 역사 속에서 가족은 애정공동체의 성격보다는 생존공동체의 성격이 강했다. 가족학자들은 가족이 생존공동체로부터 애정공동체로 전환해 가는 과정이 근대성의 주요한 특징이라고 주장한다. 기본적인 의식주의 문제가 해결된 이후에야 비로소 부부간의 사랑과 가족 간의 정서적 유대가 인류의 관심사로 부상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부일처제는 안정적 생존을 최우선 목표로 했던 가족제도에다 부부간의 낭만적 사랑을 결합하려는 근대적 실험이라는 것이다.

    미국의 동물학 박사이자 심리학 교수인 남편(데이비드 P 버래쉬)과 정신과 의사인 아내(주디스 이브 립턴)는 일부일처제를 포기하는 것이 옳다는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저자들은 일부일처제의 신화를 깨자고 한다. 처음부터 일부일처제는 인간의 본능을 도외시한 제도였음을 인정하자는 얘기다. 그렇다고 해서 일부일처제의 대안으로서 일부다처제나, 일처다부제를 옹호하자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자연스런 욕망을 긍정적으로 수용한 바로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자는 것이 이들의 결론이다. 일부일처제의 신화를 고수하는 보수주의자들이 엄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또 그것이 도덕론자들의 엄호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일부일처제의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저자가 다소 밋밋한 결론을 제시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커플의 재발견 : 당신에게 맞는 커플의 형태를 찾아라』(필리프 브루노 저/이수련 역/에코리브르)에서 저자는 현행 결혼 제도, 일부일처제는 실패했다고 단정적으로 말한다. 이 책 역시 동물행동학과 인류학, 정신신체의학 등의 실증적인 논의를 바탕으로 일부일처제의 허점을 꼬집는다. 그렇다면 일부일처제의 대안은 없을까. 일부일처제의 대안으로서 내놓은 것이 저자가 말하는 <열린 커플>이다. 저자는 우리가 대부분 '닫힌 결혼'에 매어있음을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부부가 같은 친구를 사귀어야하고, 같은 여가를 즐겨야 하고, 다른 이성에게 눈길을 주어서는 안 되고, 마음과 몸이 하나이어야 한다는 관념이 지극히 유아적이고 퇴행적이라고 비판한다. 유아가 어떤 존재인가. 울며 떼쓰며 어머니에게서 분리됨을 두려워하는 존재가 아니던가. 성숙이란 독립과 자립임에도 불구하고 왜 우린 커플로부터 매어있기를 열망하는 것인가. 왜 스스로 속박의 굴레를 짊어지려는 것일까. 자유는 불안이기 때문일까. 누군가에게 속박되어 있다는 사실로부터 위안을 얻고자 하기 때문일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다 큰 어린아이에 불과하다. 분리와 독립을 두려워하는 식민지 근성.

    저자에 의하면 '열린 커플'은 '1+1=2'임을 인정하는 관계다. 부부는 일심동체요, 결혼(結婚)은 결혼(結魂)이라는 가짜 신화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개인의 욕망과 충동을 내 욕망으로 지배하려들지 말자는 얘기다. 부부는 모든 것이 공유된다는 환영을 품고 있기도 하지만 이것이 잘못이라는 얘기다. 각자가 은밀한 영역이나, 피난처, 비밀의 정원 등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면, 커플은 위험에 빠지게 된다는 얘기다. 엄연히 상대방의 영토를 인정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인가. 범인(凡人)들로서 무소유의 경지를 체득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말로는 쉬워도 실천은 요령부득, 도저한 자기 반성과 절제가 필요하다.

    생물학적, 사회적, 심리적 논증을 통해 일부일처제의 기원과 그 부정적 결과를 꼼꼼하게 파헤친 데 비해서 이 책의 결론은 다소 맥빠지긴 하지만, 결혼제도의 문제점을 풍부한 사례를 통해 고찰해볼 수 있게 한다는 점, 욕망의 지형도를 꼼꼼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는 점에서는 읽어볼 만한 책이다. 그러나 결혼에서 백약(百藥)이 쓸모 없다. 신뢰만이 상대방을 자유롭게 한다는 점이다. 당신은 충분히 당신 안에서 현명할 것이라는 믿음. 그 다음은 우리가 따질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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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트푸드의 제국
에릭 슐로서 지음, 김은령 옮김 / 에코리브르 / 2001년 8월
평점 :
절판


미각(味覺)의 즐거움을 일깨워주는 책들



    미 오래 전에 고인이 되신 할머니께서는 늘 말씀하셨다. "밥상머리에서 먹는 것 가지고 이렇다 저렇다 하는 사람은 벌받는다." 쌀 한 톨에도 우주가 있다고 하지 않던가. 땅과 태양, 구름과 빗방울의 협력에 농부들의 수고로움이 더해져야 비로소 쌀 한 톨이 여문다면 쌀 한 톨 앞에서의 낯 찡그림은 분명 불경일 터였다 .

    음식을 가지고 가타부타하는 사람들을 마뜩찮게 생각했던 것이 우리네 상식이었다. 주는 음식에 토달지 말고, 찡그리지 않고 먹는 남자가 진정한 사내요, 그런 사람이 건강한 사람이라고 어른들은 반찬 투정을 하는 아이들을 구슬리고는 했다. 뭘 먹든 잘 먹으면 그것이 곧 건강이요, 장수라고 어른들은 말씀하셨다. 지당한 말씀이셨다. 적어도 먹거리가 오늘날처럼 망가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패스트푸드의 제국』(에릭슐로서/ 에코리브르)을 읽고도 햄버거에 군침이 돈다면 매우 비위가 강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가령 이런 구절을 읽고도 흔쾌히 자신의 아이의 간식으로 햄버거를 권장할 부모는 많지 않을 것이다. “패티(햄거거 안의 다진 고기) 한 조각은 수십, 수백 마리로부터 모은 쇠고기로 만들어지는데, 이콜리균에 감염된 소 한 마리는 3만 2,000파운드의 다진 쇠고기를 오염시킨다”

    1997년 8월 허드슨 푸드사는 콜럼버스 공장에서 만들어진 3,500만 파운드 정도의 다진 고기를 스스로 회수했다. 보건담당 공무원들이 발병 원인을 추적했지만 리콜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리콜 명령이 내려졌을 때는 이미 2,500만 파운드의 고기가 소비되고 나서였다고 한다.

    슐로서는 지난 8년 동안 ‘O157'균 등에 오염된 햄버거 때문에 식중독에 걸리거나 숨진 사람들이 수백 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 수치가 과장이라고 할지라도 섬뜩하다. 저자는 패스트푸드의 어두운 이면을 걷어내기 위해 의회와 농림부가 나설 것을 촉구한다. 그러나 패스트푸드사의 로비 활동이 이를 묵과할 리가 없다. 결국 선택은 소비자의 몫이다. 저자는 말한다. ꡒ패스트푸드가 어디서부터 왔고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패스트푸드 음식을 하나 살 때마다 그 이면에서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 또 이 음식이 만들어내는 길고 짧은 파급효과는 무엇인지 생각해 보라. 그런 다음 주문을 하라. 아니면 돌아서서 매장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라. 우리는 패스트푸드 제국에서 살고 있지만 아직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다ꡓ

    슐로서가 지적한 어두운 이면은 단지 건강상의 문제만은 아니다. 미국 패스트푸드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사람의 약 3분의 2가 20세미만의 저임금 파트 타임의 비숙련 노동자라고 한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저임금을 감수하며 일할 수 있는 곳도 역시 패스트푸드 레스토랑이다. 최저 수준의 임금이야말로 패스트푸드의 성장전략 중의 하나다. 전국적인 체인화, 프렌차이즈화로 인한 미국의 자영농의 몰락 또한 패스트푸드의 어두운 이면 중의 하나다. 아직은 뚜렷한 의사결정 능력이 없는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마케팅 전략을 펼친다는 것 또한 문제점이라고 슐로서는 지적한다.

    하지만 이러한 은근한 위협(?)에도 불구하고 패스트푸드는 여러모로 간편한 선택이 될 수 있다. 젊은 아이들이 모인 곳에서 세련된 음악을 들으며 조금은 문화적으로 간편하게 점심을 해결할 수 있는 곳이 패스트푸드 레스토랑이 아닌가. 더구나 10대들의 미팅 장소로 맥도널드나 KFC 등의 패스트푸드 레스토랑은 그만이다. 어떤 10대가 뚝배기집이나 순대국집을 미팅의 장소로 정할 것인가. 더구나 매너니 예절이나 따질 것 없이 뚝딱 간편하게 한끼를 해치울 수 있는 곳이 패스트푸드 아닌가.

    순창 고추장, 남원 추어탕, 풍천 장어, 마포 주물럭, 이동 갈비, 포천 막걸리, 병천 순대, 목포 세발 낙지, 평양 냉면, 섬진강 재첩국, 춘천 막국수, 평창 올챙이국수, 진도 홍주, 경주 법주, 영광 굴비, 전주 비빔밥, 천안 호두과자, 서산 어리굴젓, 인천 쫄면, 장충동 족발, 신당동 떡볶이, 신림동 순대, 명동 칼국수, 동래 파전, 예로부터 어떤 고장은 ‘맛’으로 기억된다. 자본주의적 대규모 생산시스템이 문화와 생물의 다양성을 감소시키듯, 버거킹, KFC, 맥도날드 등의 대규모 프렌차이즈는 맛의 다양성을 저해한다.

    이러한 미각의 획일화에 저항하자는 것이 슬로푸드 운동이다. 패스트푸드의 선두주자인 맥도널드가 1989년 로마의 스페인 광장에 들어섰을 때 시작된 것이 ‘슬로푸드(slow food)’ 운동이다. 슬로푸드란 말 그대로 패스트푸드(fast food)의 반대. 미국의 패스트푸드의 대명사인 맥도날드가 이탈리아 로마에 진출하자, 현재 슬로푸드의 회장인 카를로스와 그의 친구들이 맛을 표준화하고 전통음식을 소멸시키는 패스트푸드의 진출에 대항하여, 식사, 미각의 즐거움, 전통음식의 보존 등의 기치를 내걸고 이 운동을 시작했다.

    1989년 11월 9일 프랑스 파리의 코믹오페라에서 채택했다는 선언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산업 문명의 이름 아래 전개된 우리의 세기에 처음으로 기계의 발명이 이루어졌습니다. 오늘날 기계는 생활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속도의 노예가 되었고, 우리 습관을 망가뜨리며, 우리 가정의 사생활을 침해하고, 우리로 하여금 패스트푸드를 먹도록 하는 빠른 생활, 곧 음흉한 바이러스에 굴복해가고 있습니다.

    호모 사피엔스라는 이름에 상응하기 위해서 사람은 종이 소멸되는 위험에 처하기 전에 속도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보편적인 어리석음인 빠른 생활에 저항하는 유일한 방법은 물질적 추구를 자제하는 것입니다. 이미 확인된 감각적 즐거움과 느리며 오래 가는 기쁨을 적절하게 누리는 것은 효율성에 대한 흥분에 의해 잘못 이끌린 군중에게서 우리가 감염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방어는 슬로푸드 식탁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역 요리의 맛과 향을 다시 발견하고, 품위를 낮추는 패스트푸드를 추방해야 합니다. 생산성 향상의 이름으로, 빠른 생활이 우리의 존재방식을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우리의 환경과 경관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지금 유일하면서도 진정한, 용기 있는 해답은 슬로푸드입니다.

    진정한 문화는 미각을 낮추기보다는 미각을 발전시켜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데는 경험, 지식, 국제적인 교환 프로젝트가 필요합니다. 슬로푸드는 보다 나은 미래를 보장합니다. 슬로푸드의 상징은 작은 달팽이이며, 이 운동이 국제 운동으로 나아가는 데 함께 할 능력이 있는 많은 지지자들을 필요로 합니다.


    슬로푸드 운동의 기본 취지는 '맛을 표준화하고 전통 음식을 소멸시키는 패스트푸드를 먹지말고, 식사와 미각의 즐거움을 보존하자'라는 데 국한됐다. 그러나 1990년대 광우병 파동과 함께 슬로푸드 운동은 단지 ‘먹는 문제’에서 벗어나 유기농 문제 등으로 관심의 폭이 넓혀졌고, 나아가 생활 속에서 여유를 찾자는 느리게 살기 즉, '슬로 라이프(slow life)'운동으로까지 이어졌다. 이후로 슬로푸드 운동은 채소, 동물, 문화의 다양성 수호를 위한 조직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페트리니의 『슬로푸드』(나무심는사람, 김종덕 역)는 슬로푸드에 관한 다양한 지식을 전한다. 이름도 생소한 각국의 다양한 음식들을 지나치게 자세하게 소개한다는 흠이 있긴 하지만, 유전자조작으로 탄생한 이른바 '프랑켄 푸드'의 문제점을 짚어내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 책이 소개하는 1996년 12월 2일에 이탈리아의 토리노에서 개최된 미각박람회의 내용은 흥미를 끈다. 만약 지구에 대홍수가 나서 방주에 음식을 태워야 한다면 어떤 음식을 승선시켜야 할 것인가, 당연히 햄버거와 같은 정크 푸드(쓰레기 음식)는 제외될 것이다. 원료가 변형된 음식이나. 종자 자체에 외부 유전자가 이식된 동물이나 식물은 방주에 들어올 수가 없단다. 음식문화는 절대로 전국적이 되거나, 세계적이 되어선 안 된다는 것이 슬로푸드 멤버들의 주장이다. 슬로푸드 미국방주위원회에서는 미국 방주에 탑승할 자격 요건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독특하고 품질이 뛰어나고 맛이 좋아야 한다.
    ․멸종 위기에 처한 식품이어야 한다. 음식이 표준화되는 세상에서 설자리를 잃은 식품이어야 한다,
    ․역사적으로 사회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뚜렷한 지역성을 가져야 한다.
    ․지역의 고유음식으로 상징적 의미를 지녀야 한다.


    페트리니의 책은 독일의 유럽의회 농업위원장 헤르만 셰어의 발언을 빌어 패스트푸드의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헤르만 셰어는 지적한다. “소규모 생산으로는 이윤을 빠르게 회수할 수 있는 패스트푸드와 경쟁할 수 없다. 결국 패스트푸드는 소규모 생산의 발전을 가로막는다. 더욱이 이러한 추세 때문에 비료와 농약의 사용이 증가하고, 물과 토양이 오염되며, 농업의 미래는 심각한 위협을 받는다. 그 결과 채소의 종류는 감소하고, 우리 모두가 공유해야 할 유산이 특정기업에 의해 사유화되며, 농산물과 음식은 다양성을 잃고 단순화된다.” 산업의 논리로 농산물 시장을 재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농산물은 지리적 조건이나 토양의 조건에 제약을 받기 때문에 생산지역이 일정하게 정해지기 마련인데, 자동차는 단 10개의 나라에서 전 세계가 타는 차량을 생산할 수 있다. 헤르만 셰어는 말한다. “슬로푸드가 만들고 있는 방주는 농산물이 빠르게 유통되는 상황을 막는 울타리가 되어야 한다. 생산과 소비라는 과정에서 생물의 다양성을 보호하려면 투쟁을 해서라도 생명공학 특허를 막아야 한다. 와인과 음식의 전통을 계속 유지하고 싶다면 농업경제를 지역화해야 한다. 음식의 질적 생산을 소중히 여긴다면 양적 생산을 중시하는 현재의 영농방식에 지원하는 보조금을 폐지하도록 투쟁해야 한다.”

    페트리니는 음식에 대한 쇼비니즘을 경계한다. 이스라엘의 팔라펠, 일본의 다코야키(낙지구이), 멕시코의 타코스, 치앙라이의 카오소이, 영국의 피시앤드칩스, 그리스의 수블라키, 모로코 훈제시장의 먹을거리 등 세계 여러 지역의 고유음식을 소개한다. 독일 맥주의 종류도 5천 여종에 이른다고 이 책은 말한다. 이렇게 다양한 음식을 ‘잘 먹자’는 것이 슬로푸드 운동이다. 먹되 제대로 먹자는 운동이다. 먹되 신선하게, 내 식으로, 네 몸에 맞게 먹자는 운동이다. 아울러 패스트푸드의 패권주의를 보고만 있지 않겠다는 운동이다.

    어른들이 할 일은 아이들의 입맛을 일깨워 주는 일이다. 햄버거, 피자, 치킨과 같은 패스트푸드가 그들의 입맛을 점령하기 전에.

    『슬로푸드』를 번역한 김종덕 경남대 사회과학부 교수의 저서 『슬로푸드 슬로라이프 』(한문화)도 읽어볼 만한 책이다. 김종덕은 우리나라에 슬로푸드 운동(www.slowfoodkorea.com)을 선도적으로 이끌어 가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먹을거리가 넘치는 세상이지만 정작 먹을거리가 없는 세상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무엇을, 어떻게 먹을 것인가에 대해 생각거리를 제공해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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