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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긋는 남자 - 양장본
카롤린 봉그랑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푸르름이 상큼하게 배어드는 스물 다섯 살의 로망스
스무살 무렵, 앙드레 지드를 읽었다. 노량진 <진호서적>에서 구입한 헌책,『지상의 양식』이었다. ‘나의 책을 던져버려라. 그것은 인생에 대하여 취할 수 있는 수천의 태도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라. 그대 자신의 태도를 찾아라.’ 그 구절에 누군가가 밑줄을 그어 놓고 있었다. 『지상의 양식』의 전 주인은 내 마음이 머무는 구절에 밑줄을 그어 놓았다. ‘그대와 마찬가지로 남이 쓸 수 있는 것, 그것은 쓰지 말라. 그대 자신 속에서가 아니고는 아무 데도 없다고 느껴지는 것 외에는 집착하지 말라. 그리고 극성스럽게 또는 참을성 있게, 아아!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존재를 스스로 창조하라.’ 라는 구절에 밑줄을 그은 그는 누구일까.
내가 긋고자 한 곳에 미리 밑줄을 그은 사람, 그는 여자일까, 남자일까, 그는 몇 살이나 되었을까, 그는 지금 어떤 종류의 책을 읽고 있을까, 그의 직업은, 그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책의 발간연도로 보아 그는 나보다 십 년 전쯤의 사람이었다. 나는 밑줄이라는 기호를 통해 그와 무언의 교신을 하고 있었다. 그와의 교신은 『지상의 양식』을 더욱 양식답게 했다. 어떤 느낌을 공유한다는 것은 근사한 일이었다. 그에게 침투했던 지드가 또 다시 내 몸에 침투하고 있다는 느낌, 나는 그 느낌의 관능을 즐겼다. 그 느낌의 관능 속에서 ‘지드 읽기’는 시종일관 행복했다.
헌책의 갈피에서 나는 누군가가 끼워놓은 나팔꽃 마른 잎을 발견한 적도 있었다. 대체 언제 적의 나팔꽃이었을까. 때로 누렇게 바랜 사진을 발견한 적도 있었다. 사진에는 <우정을 위하여>라는 글씨가 박혀있었고 어머니의 십 수 년 전의 모습을 한 처녀들이 미소를 짓고 있기도 하였다. 책 속에 남겨진 흔적들을 통해 나는 시공을 건너뛰어 무언의 대화를 하고 있었다. 한 줄의 메모와 밑줄에는 그 책을 거쳐간 자들의 체온과 숨결이 배어 있었다. 그것은 그대로 책의 체온이었고 숨결이었다. 만지고 싶은 그러나 만져지지 않는 그 무엇이 헌책에는 있었다. 나는 그것을 그리워했다. 스무살은 그런 나이였다.
나는 책을 학대(?)하는 편이다. 괜찮다 싶은 구절이나 문제가 있다 싶은 구절에는 밑줄도 긋고 간단하게 내 의견도 몇 줄 써넣기도 한다. 재독(再讀)을 하는 경우, 왜 내가 이런 구절에 밑줄을 그었는지 의아해하는 수도 있고, 왜 그때 이렇게 멋진 구절에 밑줄을 긋지 안았는지 가벼운 자책을 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미 읽었던 책에서 새롭게 그어야 할 구절을 발견했다는 것은 시간이 나를 어떤 식으로든 변모시키고 성장시켰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그런 변화 없이는 나는 오직 현재의 나일 뿐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총체일 수는 없다.
카롤린 봉그랑의 『밑줄 긋는 남자』(열린책들)는 사랑스런 책이다. 매일밤 당나귀 인형 ‘레옹’을 끼고 잠드는 스물 다섯 살의 콩스탕스, 114에 전화해 존재하지도 않는 이의 이름을 대고 전화번호를 가르쳐달라고 장난을 하는 것이 취미인 이 귀엽고 매력적인 아가씨, 그녀는 밤마다 젖가슴 위에 책을 세운 채 잠드는 바람에 직각 모양의 붉은 자국이 가시지 않을 만큼 책읽기를 좋아한다.(책이 그녀의 가슴에 자국을 남긴다는 표현의 관능성이라니.) 콩스탕스에겐 따뜻한 우유 한 잔을 마신 뒤 로맹 가리의 책을 읽는 것이 유일한 낙이다. (스물 다섯 살은 로맹 가리를 좋아하기에 얼마나 적당한 나이던가. 『자기 앞의 생』이 없었다면 나의 20대 또한 얼마나 무미건조한 것이었을까.) 달리 취미도 없고 해서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기를 좋아하는 그녀, 그녀는 빌려온 책에서 그어진 밑줄을 발견한다. 그 구절은 그녀를 사로잡는다. 누굴까, 이 밑줄을 그은 남자는. 그녀는 ‘밑줄 긋는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 ‘밑줄 긋는 남자’는 친절하게도 그녀가 다음에 읽어야 할 책까지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적어 놓는다. 이런 식. <도스토예프스키의 『노름꾼』, 좋은 책입니다. 그걸 당신에게 권합니다.』다음 책에서도 계속 이어지는 밑줄, 그 밑줄을 통하여 콩스탕스는 그의 호흡과 체취를 느낀다. 부재(不在)하는 존재야말로 관능의 에너지를 최대한으로 증폭시키는 존재가 아니던가. 부재가 그녀를 달뜨게 한다.
사랑에 빠진 그녀는 돌연 자신의 몸을 거울에 비추어 본다. 거울에 비친 사랑 받기를 갈망하는 젊은 처녀의 몸. 배에는 군살이 없고, 몸의 곡선은 뚜렷하고, 젖가슴은 탱탱하다. 그러나 그녀는 뇌까린다. ‘그 위에 손을 얹어줄 사람 하나 없으니, 그것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라고. 그러나 사랑은 그녀를 변화시킨다. 그녀는 푸른색 목욕가운을 사다놓고 다리털을 정기적으로 뽑는가 하면, 될수록 소리가 작게 나게 하려고 배를 끌어당기며 소변을 본다.(이쯤 되면 독자들은 이 천진난만한 아가씨 콩스탕스를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긴다. 독자들은 『밑줄 긋는 남자』를 읽으며 콩스탕스의 욕망과 독자인 ‘나’의 욕망을 동시에 읽게 된다. 이런 독서체험은 아주 관능적이면서도 경쾌하다.)
콩스탕스는 ‘밑줄 긋는 남자’를 의식해 로맹 가리의 소설, 『그로 칼랭』에 밑줄을 긋는다.
“존재하지도 않는 것일수록 더 크게만 느껴지고 온 공간을 차지하는 법이다......나는 애정 어린 포용이 어찌나 그리웠던지 하마터면 내 목을 조를 뻔했다.” (콩스탕스의 밑줄은 『그로 칼랭』을 읽으며 내가 그어 두었던 밑줄과 일치했다. 『밑줄 긋는 남자』는 로맹 가리에 대한 독서의 기억을 새롭게 하며 내 의식을 휘저어 놓고 있었다. 하나의 책이 과거를 불러오고 의식을 들쑤셔 놓는다는 것은 기특한 일이다.)
결국 그녀는 ‘밑줄 그은 남자’를 만난다. 보이지 않는 존재와의 신화적인 사랑이 현실의 사랑이 되는 순간이다. 그 순간이 어떻게 기록되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작업은 온전히 독자의 몫이 되어야 하리라.
봄이다. 무거운 외투를 벗어 던지고 조금은 가벼워지고 경쾌해져도 좋겠다. 경쾌한 스텝으로 벚꽃 나무 그늘 아래로 걸어 들어 가보는 것도 좋으리라.『밑줄 긋는 남자』를 펴고, 푸르름이 상큼하게 배어드는 매력적인 아가씨 콩스탕스의 탄력을 느껴보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