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플의 재발견 - 당신에게 맞는 커플의 형태를 찾아라
필리프 브르노 지음, 이수련 옮김 / 에코리브르 / 2003년 6월
평점 :
절판




부부가 일심동체라고?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한다. 1+1=1이라는 논리다. 자기를 내세우지 말고 먼저 남을 이해하도록 하라는 말은 결혼식 주례사의 상투어다. 그러나 냉정히 주위를 살펴보자. 알콩달콩 사는 부부가 의외로 많지 않다. 때론 원수도 이런 원수가 없다. 한 지붕 아래 살되, 저는 저고 나는 나다라는 식의 ‘저 홀로 부부’도 적지 않은 듯싶다. 살은 섞되 마음을 섞지 않는 부부도 있고, 마음은 섞되 몸만은 내가 알아서 한다는 부부들도 더러 있는 듯싶다. 고전적인 일부일처제를 고수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지만, 어떻든 고전적인 일부일처제는 격랑의 한 복판에 서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소설에서 드라마, 연극, 영화, 이제 불륜은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는 소재다. 동창생을 찾아주는 사이트의 성공과 더불어 소위 ‘흥신소’의 주가도 덩달아 올라간다는 웃지 못할 농담까지 나도는 판이다. 인터넷 대화방에서의 ‘애인 구함’이란 문구 정도는 이젠 애교에 불과할 정도다. 각종 채팅 사이트엔 낯뜨거운 문구가 버젓이 얼굴을 디밀고 있다. 기술이 욕망을 부추기고 욕망은 다시 기술을 증폭시킨다. 미디어는 이런 증폭을 더 뜨겁게 달군다. 매일매일 스포츠 연예신문을 달구는 저 낯뜨거운 기사들.

    ‘결혼은 미친 짓이다’라는 영화는 더 이상 여성이 성적 욕망의 대상에 머무를 수 없음을 선포한다. 케이블 TV의 외화 드라마 는 여성들도 당당하게 욕망의 주체임을 말한다. 그 어법이 하도 당돌해 ‘이건 외국의 경우야. 우리나라는 달라’라고 뇌까려 보지만 신세대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 드라마를 즐긴다는 얘기다. 하긴 남성의 욕망이 보상받아야 하는 것이라면 여성의 욕망이라고 해서 억압해야 할 이유는 없다.

    어떻든 동거, 계약결혼 등 새로운 형태의 남녀 결합이 기존의 결혼제도를 위협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쯧쯧 한숨을 내쉬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위기가 곧 기회다’라며 남녀간의 새로운 인식의 패러다임이 도래하길 은근히 희망하고 있는 눈치다.

    『일부일처제의 신화 : 자연의 짝짓기를 통해 본 인간의 욕망과 불륜』(데이비드 P. 버래쉬, 주디스 이브 립턴 저/이한음 역, 해냄)에서 저자는 일부일처제가 얼마나 취약한 제도인가를 역설한다. 한 마디로 일부일처제는 인간을 본능을 도외시한 실패한 제도이며 다수의 성적 파트너를 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본능이라는 것. 이 책은 다양한 동물의 짝짓기 연구를 통해 일부일처제가 얼마나 결점 투성이인가를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버래쉬에 의하면 4천 종이 넘는 포유동물 중 일부일처형은 박쥐 일부 종과 비단 원숭이 등 10여종에 불과하며. 일부일처제의 생물학적 증거는 백조를 비롯한 조류들의 일부일처형 번식 형태만이 유일하다는 것이며, DNA 지문 분석 결과 조류들의 새끼 중 10-40%가 혼외 수컷의 자식이었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원시부족들 사이에서 일부다처제가 선호되었던 몇 가지 이유를 든다. 먼저 성(性) 충동에 있어 남녀간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 출산 후엔 오랫동안 성교가 금지된다는 점, 일부다처제가 다산(多産)에 유리하다는 사실, 나아가 여성의 노동력이 많을수록 생계유지 및 가족부양에 공헌도가 높다는 점 등이 일부다처제를 선호된 이유로 제시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자들은 일부다처의 실질적 이유로 성적 측면보다는 경제적 요인이 더 중요하게 작용했다고 말한다.

    인류 역사 속에서 가족은 애정공동체의 성격보다는 생존공동체의 성격이 강했다. 가족학자들은 가족이 생존공동체로부터 애정공동체로 전환해 가는 과정이 근대성의 주요한 특징이라고 주장한다. 기본적인 의식주의 문제가 해결된 이후에야 비로소 부부간의 사랑과 가족 간의 정서적 유대가 인류의 관심사로 부상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부일처제는 안정적 생존을 최우선 목표로 했던 가족제도에다 부부간의 낭만적 사랑을 결합하려는 근대적 실험이라는 것이다.

    미국의 동물학 박사이자 심리학 교수인 남편(데이비드 P 버래쉬)과 정신과 의사인 아내(주디스 이브 립턴)는 일부일처제를 포기하는 것이 옳다는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저자들은 일부일처제의 신화를 깨자고 한다. 처음부터 일부일처제는 인간의 본능을 도외시한 제도였음을 인정하자는 얘기다. 그렇다고 해서 일부일처제의 대안으로서 일부다처제나, 일처다부제를 옹호하자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자연스런 욕망을 긍정적으로 수용한 바로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자는 것이 이들의 결론이다. 일부일처제의 신화를 고수하는 보수주의자들이 엄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또 그것이 도덕론자들의 엄호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일부일처제의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저자가 다소 밋밋한 결론을 제시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커플의 재발견 : 당신에게 맞는 커플의 형태를 찾아라』(필리프 브루노 저/이수련 역/에코리브르)에서 저자는 현행 결혼 제도, 일부일처제는 실패했다고 단정적으로 말한다. 이 책 역시 동물행동학과 인류학, 정신신체의학 등의 실증적인 논의를 바탕으로 일부일처제의 허점을 꼬집는다. 그렇다면 일부일처제의 대안은 없을까. 일부일처제의 대안으로서 내놓은 것이 저자가 말하는 <열린 커플>이다. 저자는 우리가 대부분 '닫힌 결혼'에 매어있음을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부부가 같은 친구를 사귀어야하고, 같은 여가를 즐겨야 하고, 다른 이성에게 눈길을 주어서는 안 되고, 마음과 몸이 하나이어야 한다는 관념이 지극히 유아적이고 퇴행적이라고 비판한다. 유아가 어떤 존재인가. 울며 떼쓰며 어머니에게서 분리됨을 두려워하는 존재가 아니던가. 성숙이란 독립과 자립임에도 불구하고 왜 우린 커플로부터 매어있기를 열망하는 것인가. 왜 스스로 속박의 굴레를 짊어지려는 것일까. 자유는 불안이기 때문일까. 누군가에게 속박되어 있다는 사실로부터 위안을 얻고자 하기 때문일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다 큰 어린아이에 불과하다. 분리와 독립을 두려워하는 식민지 근성.

    저자에 의하면 '열린 커플'은 '1+1=2'임을 인정하는 관계다. 부부는 일심동체요, 결혼(結婚)은 결혼(結魂)이라는 가짜 신화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개인의 욕망과 충동을 내 욕망으로 지배하려들지 말자는 얘기다. 부부는 모든 것이 공유된다는 환영을 품고 있기도 하지만 이것이 잘못이라는 얘기다. 각자가 은밀한 영역이나, 피난처, 비밀의 정원 등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면, 커플은 위험에 빠지게 된다는 얘기다. 엄연히 상대방의 영토를 인정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인가. 범인(凡人)들로서 무소유의 경지를 체득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말로는 쉬워도 실천은 요령부득, 도저한 자기 반성과 절제가 필요하다.

    생물학적, 사회적, 심리적 논증을 통해 일부일처제의 기원과 그 부정적 결과를 꼼꼼하게 파헤친 데 비해서 이 책의 결론은 다소 맥빠지긴 하지만, 결혼제도의 문제점을 풍부한 사례를 통해 고찰해볼 수 있게 한다는 점, 욕망의 지형도를 꼼꼼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는 점에서는 읽어볼 만한 책이다. 그러나 결혼에서 백약(百藥)이 쓸모 없다. 신뢰만이 상대방을 자유롭게 한다는 점이다. 당신은 충분히 당신 안에서 현명할 것이라는 믿음. 그 다음은 우리가 따질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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