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수첩 1 알베르 카뮈 전집 11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199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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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 따스한 햇살이 술처럼 목젖을 적시는 땅


 “지중해의 따뜻한 가슴, 프로방스는 완전히 절망한 사람이 올 곳은 아니다. 오직 행복한 자, 아무 것도 소유한 것이 없이도 이 땅 위에 태어난 것이 기뻐지는 자들만이 올 곳이다. 아니 적어도 많은 절망의 한구석에 아직 저 필사의 모든 생명들이 공유하는 생명의 행복감, 우리들의 건강한 육체가, 죄없는 육체가 아는 행복감의 씨앗을 아직 죽이지 않은 자들만이 올 일이다.” 라고 김화영은 그의 아름다운 산문집, 『행복의 충격』에서 말하고 있다. 나는 대책없이 그런 구절에 매혹되었다. 한 점 그늘도 없는 유쾌한 낙천주의, 이십대의 내겐 지중해의 정신은 그런 것이었다. 알베르트 까뮈는 『작가수첩』에서 풍부한 아포리즘으로 지중해의 정신을 엄호했다. “천재는 일종의 건강한 상태이며 고등한 스타일이며 유쾌한 기분이다-그러나 찢어질 듯한 아픔의 극치이다.”라는 구절은 니체를 연상시켰지만 까뮈는 누구의 아들도 아닌 지중해의 아들, 행복의 전령사였다. “무겁기 때문에 그만큼 더 가벼운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예술의 핵심이다”라는 구절엔 까뮈의 오만함이 묻어 있지만 그 구절은 아주 유쾌하게 유머의 정신을 구현해주고 있었다. 얼마나 무거워야 새털처럼 가벼운 질량을 얻을 수 있는 것인지. 가브리엘 살바토레의 영화, ‘지중해’는 새털처럼 가벼운 영화다. 무겁기 때문에 가벼운.


 살바토레는 ‘도피를 갈망하는 모든 이들에게 바침’이란 문구를 내걸었다. 도피란 중력에의 저항이 아닌가. 잡아끄는 모든 구속의 힘으로부터의 일탈이 아닌가. 그 일탈의 땅이 ‘지중해’다. 햇볕에 마음껏 이마를 적시며 무겁고 우울한 외피를 벗어버려도 좋다. 태양의 기총소사에 속진(俗塵)일랑 말끔히 샤워해버려도 좋다. 늠실대는 그랑블루의 바다를 보면 인생은 그렇게 심각한 것이 아니다. 이런 곳에선 축구가 제격이다. 차고 달리고 내지르면 그만이다. 엄숙한 얼굴만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까뮈의 『작가수첩』이다. “ 티파사의 아침에 폐허 위로 맺히는 이슬,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것 위에 가장 젊고 싱싱한 것, 이것이 나의 신앙이고 또 내 생각으로는 예술과 삶의 원칙이다.”


 가장 젊고, 가장 싱싱한 것들을 위해선 한 잔의 따뜻한 술이 필요하다. 뜨겁게 목젖을 넘어오는 그 무엇, 젊음이란 연소할 수 있는 힘, 탕진할 수 있는 힘이 아니면 무엇인가. 술 한 잔에서마저도 굳이 교훈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지중해’엔 더운 몸이 부르는 육체가 있다. 염소들을 몰고 절벽을 오르는 처녀의 육체, 거기엔 문명의 때가 없다. 무구하고 순수하다. 전쟁의 기억도 없다. 시시덕거리며 바다로 풍덩 뛰어드는 몸의 순수한 유희가 있는 곳, 영화 ‘지중해’는 그런 곳이다. 얼쑤 하는 추임새가 필요하다면 까뮈의 책을 열면 된다. 『결혼, 여름』, 『태양의 후예』, 『작가수첩』이 그것. 이 책들을 열면 지중해의 햇볕이 가득하다. 바람이 갈피를 열어주는 곳, 어떤 페이지든 게으르게 듬성듬성 읽어도 좋다.


 ‘지중해’는 혁명가의 땅이 아니다. 애국자의 땅도 아니다. 패잔병의 땅, 탈영병의 땅, 도피자의 땅, 노새를 적으로 오인해 쏘아 버리는 오합지졸의 땅이다. 축구와 태양과 그랑블루의 땅, 염소의 수염이 하얗게 널어놓은 빨래처럼 날리는 땅이다. 계율이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는 곳에서 창녀는 사랑스런 애인일 뿐이다. ‘지중해’는 그런 곳이다. 그곳은 임무의 땅이 아니라 도피의 땅, off-duty, 휴가의 땅이다. ‘지중해’는 '통신기‘가 운 좋게 박살나는 땅이다. 명령이나 하달하는 통신기란 축제의 땅에선 쓸모 없는 퇴물이다. 이런 통신기가 고장난 건 아주 다행한 일이다. 통신기가 먹통이 되었으니 이래라 저래라 하는 명령이 먹혀들지 않는 땅, ’지중해‘는 그런 곳이다. 까뮈는 다시 『작가수첩』에서 말한다. “자연풍경은 그 어떤 불의의 대가로 얻은 것이 아니어서 나의 마음은 그 속에서 자유롭다.” 그렇다. 지중해의 풍광 앞에서 술잔을 들며 중력의 법칙에 거슬러 볼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잠시일 뿐이다. 그러나 이런 휴가나 축제도 한번쯤은 있어야 한다. 술과 함께, 살바토레와 함께. 모래 바람이 책의 갈피를 열어주는 까뮈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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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현암사 동양고전
오강남 옮기고 해설 / 현암사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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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자(莊子)는 이미 오래 전에 편리만을 추구하는 물질문명의 위기를 예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공자의 제자인 자공이 초나라를 지나다가 밭에 물을 주는 한 노인을 보았다. 땀을 뻘뻘 흘리며 물동이로 물을 길어 나르는 모습이 하도 안쓰러워 쉽게 물을 퍼 댈 수 있는 기계를 권하자 노인이 이렇게 대답했다. "기계가 있으면 반드시 꾀하는 일이 생기고, 꾀하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꾀하는 마음이 동하며, 꾀하는 마음이 발하면 순수한 마음이 사라지고, 순수한 마음이 없어지면 정신과 생명이 안정하지 못하고, 정신과 생명이 방황하면 끝내 진리를 지닐 수 없다."(<莊子> 天地편) 사람들이 기계를 쓰게 되면 기계에 얽매이는 마음이 생길 수 있으며, 그러한 마음이 생기게 되면 순박한 마음을 잃게 되어 정신이 안정되지 못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천지만물의 본체인 도에서 멀어지게 될 것이라고 장자는 지적하고 있다.

 편리가 능사는 아니다. 에베레스트산을 오른 알피니시트들은 많다. 그러나 최상의 찬사는 가장 험한 시즌에 가장 험한 코스를 통해 에베레스트를 오른 알피니스트에게 돌아가는 법이다. 최상의 찬사를 몸에 안을 알피니스트들이라면 그의 종교가 무엇이건 간에 성경의 이런 구절에도 흔쾌히 동의할 법하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너무나도 좁고, 그 길이 험해서, 그곳을 찾아오는 사람이 별로 없다.”(마태복음 7장 13-14절) 좁은 문은 편리의 문, 안락의 문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예수가 갔던, 또 알피니스트들이 갔던 형극의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길을 우리 범인(凡人)에게 강요할 수만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부(富)로 인해서 우리가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들을 상기할 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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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로운 가난
엠마뉘엘 수녀 지음, 백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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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요로운 가난 』(마음산책)의 저자이며, ‘카이로의 넝마주이’로 알려진 엠마뉘엘 수녀는 말한다. “가난은 하느님, 자기 자신,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훨씬 더 주의 깊게 귀 기울이게 해주죠.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받아들이도록, 최상의 우리를 되찾도록, 본질로 되돌아가도록 이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가난에 바쳐진 최대의 헌사(獻辭)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마디로 가난이 우리를 최고로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석가세존이나 보리달마가 아닌 바에야 이런 유혹에 혹할 사람은 많지 않다. 여전히 우린 가난이 불편할 수밖에 없다.

 이해인 수녀는 『풍요로운 가난 』을 온 국민의 필독서로 추천하고 싶다고 했다. 이해인 수녀의 욕심은 얼마든 권장받아야 한다. 에리히 프롬의 저서 『소유냐 존재냐』도 가난이 존재의 풍요로움의 토대가 됨을 알려준다. 그러나 읽기가 녹록치가 않다. 법정의 『무소유』 또한 소유에의 집착이 고뇌의 싹임을 알려준다. 하지만 가난에 대한 풍요로운 질감까지를 보여주지는 못한다. 정확히 말하면 법정의 가난은 속세의 가난이 아니다. 속세 저편 산문(山門)에서의 가난이다. 거기엔 탁발승의 깨달음은 있지만 가난한 이들의 아픔은 없다.

 이집트, 수단, 터키 등 빈한한 국가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쳤던 엠마뉘엘 수녀는 “교회는 재산을 팔고 가난해져야 한다”는 청원서를 교황에게 냈을 만큼 직선적인 언행과 정열을 가졌던 사람. 아흔을 넘겼지만 부당함을 보면 아직도 화가 부글부글 끓어오른다는 그녀의 이런 말은 두고두고 음미해볼 만하다. “나는 패러독스 한가운데에 놓여 있다. 가난이라는 불의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뿌리뽑고 싶을 만큼 나를 분노하게 만드는 이 악이 어떻게 풍요로움의 원천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런 음미는 우리 의식과 생활 속에 깃들어 있는 거품을 걷어내는 일과 함께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가볍게 속삭이는 책이 아니라 존재를 흔들어대는 책, 으르렁거리고 포효하는 책이다. 그러나 그 으르렁거림과 포효는 한없이 고요해 보인다. 그것이 성자(聖者)들의 어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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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미학산책
정민 지음 / 솔출판사 / 199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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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적 빈곤의 시대가 지나갔다고 하는 1990년대에 들어 문학은 더 이상 가난을 언급하지 않았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를 떨쳐버리려는 듯 열심히 ‘문화’를 말하기 시작했다. 가히 문화의 백화제방 시대였다. 뉴미디어 테크놀로지는 욕망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현란한 이미지들을 구축했다. 1990년대는 가볍고, 빠르고, 현란하게 우리 곁을 스쳐갔다. IMF 시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한번 부풀려진 욕망은 2000년대에 들어서도 만족을 몰랐다. 호텔 연회장의 매출액은 꾸준히 늘고, 룸살롱과 호텔나이트클럽은 흥청대고, 해외여행객은 꾸준히 늘어갔다. 절대빈곤층으로 규정된 법정 영세민이 전인구의 10%에 육박한다는 신문기사를 애써 외면하고 부동산과 금융 섹션에 시선을 모았다. 빌게이츠, 젝 웰치, 성공의 영웅들의 발언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가 베스트셀러가 되고, 경영과 처세술에 관한 책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가난은 더 이상 발붙일 곳이 없어 보였다. 가난을 말하는 영화도, 가난을 말하는 소설도 없었다. 명품이 불티나듯 팔려나간다는 신문기사, 엄청난 규모의 대형 할인매장, 밤새 붉을 밝히는 24시간 편의점, 매일 아침 조간과 함께 배달되는 광고전단들, 해마다 늘어나는 외식사업… 그 어디에도 궁색함은 없었다. 엄청난 카드빚으로 개인파산자가 늘어나도 궁색함은 여간해선 찾아보기가 힘들다.

 가난은 물질적으로는 떨쳐버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뇌리 속에 각인된 가난만은 떨칠 수 없는 것이었다.『괭이부리말 아이들』이 우리의 뇌리 속에 각인된 가난을 일깨웠다. 그 책은 적어도 386세대에게는 죄의식을 불러왔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들이 외면하려고 했던 과거가 아직도 끝나지 않았음을 이 책은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386세대, 그들의 아이들이 『괭이부리말 아이들』을 읽었다. 하지만 그들의 아이들은 가난을 추체험하기엔 지나치게 안락한 삶을 살아왔다. 「자전거 도둑」에 물큰한 감동을 느낄 아이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부모님도 없이 천식으로 고생하는 할아버지와 청소를 하며 어렵게 생계를 꾸려가고 있는 할머니를 모시고 사는 남매의 이야기인 『종이밥』(낮은산)을 읽으면서 아이들은 과연 어떤 생각을 할까. 농민들의 애환을 그렸던 「전원일기」도 이젠 TV에서 사라질 모양이다. 소재 고갈이 막을 내리는 이유라니 확실히 이 나라가 잘 사는 나라가 된 모양이다. 어쨌든 일용이, 응삼이 같이 촌스럽기에 정답던 이름들도 추억 속에서나 떠올려야 할 모양이다.

 누가 뭐라든 가난은 좋은 게 아니다. 서정주는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했지만 절대적 빈곤은 남루로 표현될 성질은 아닐 것이다. 이가 갈리는 지긋지긋한 가난이라는 것도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가난이 척결되어야 할 그 무엇이라고 해서 가난의 의미 자체가 무효화될 까닭은 없다. 가난에 의미가 없다면 저 프란시스코 아시씨의 탁발과 일체의 소유를 털어버린 원효나 경허의 무애행은 무엇이겠는가.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 했다. 아픈 자만이 아픔의 자리를 알아보는 법. 가난을 잊는다는 것은 내 이웃으로의 시선을 거두는 것은 아닐지.

 다음에 인용한 글은『한시미학산책』(정민, 솔)의 일부이다.

 한나라 때 양옹은 「축빈부逐貧賦」를 지어, 자기를 지긋지긋하게 따라다니는 '가난'이란 놈의 축출을 시도한 적이 있다. 글을 보면, 먼저 '가난'을 불러내어 내 인생을 이렇듯 고달프게 만드는 연유를 따져 묻고, 이어 잠시도 나를 가만 두지 않고 따라다니는 까닭이 무엇이냐고 물은 뒤, 지체치 말고 썩 물러가라고 호통을 친다. 자못 등등한 기세다. 그러자 ‘가난’이란 녀석이 나타나 물러가는 것은 좋으나 나도 할 말이 있다며 반발한다. 추위를 견디고 더위를 참아내는 법을 어려서부터 가르쳐 주었고, 걸桀이나 도척盜跖 같은 탐학의 무리를 거들떠보지 않는 기상을 길러주었으며, 사람들은 모두 겹겹이 둘러싸인 곳에서 지내나 그대는 홀로 툭 터진 곳에서 살게 하였고, 사람들은 근심에 싸여 지내나 그대는 홀로 근심이 없게 하였다. 이것이 모두 나의 공로이다. 이렇게 말을 마친 ‘가난’은 눈을 부릅드고 벌떡 일어나 계단을 내려가며 ‘내 맹세코 너를 떠나 저 수양산에 가서 백이 숙제와 더불어 함께 지내리라“하는 것이었다. 이에 다급해진 양웅이 자리를 피해 잘못을 정중히 사과하며, 다시는 원망치 않을 터이나 내 곁을 떠나지 말아달라고 만류하는 것으로 끌은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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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유럽통신
고종석 지음 / 문학동네 / 199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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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과 「개미 Z」가 말하는 순수의 위험성


 뉴욕 센트럴파크의 지하에 사는 할리우드 애니매이션 「개미Z」의 주인공, 일개미 Z-4195는 아주 불온하기 짝이 없는 녀석이다. 항상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며 조직의 명령대로만 살아가는 삶에 불만을 품고 일탈을 꿈꾸는 개미 Z는 나이트클럽에서 공주개미와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후부터 Z의 생활은 모험의 연속. 공주를 보기 위해 병정개미의 열병식에 끼어 들었다가 얼떨결에 전쟁터에 보내진 Z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전쟁 영웅이 되고, 훈장을 받는 자리에서 발라 공주와 술집에서 만났다는 사실이 발각되어 얼결에 발라 공주와 함께 바깥세계로 통하는 수렁에 빠져 찾아나서는 곳이 인섹토피아-곤충의 천국이다.

 그들이 천신만고 끝에 도달한 인섹토피아는 샌드위치와 콜라와 나이키의 땅이다. 샌드위치는 비닐랩에 싸여 있다. 투명한 비닐랩은 내용물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차단한다. 번쩍이는 내용물에 압도되어 접근하려다간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비닐랩은 오염을 원천적으로 거부한다. 땅 위를 꼼지락거리는 미물들, 시궁창을 기웃거리는 벌레들과 같이 열등한 존재들에게는 비닐랩의 세계는 배타적이다. '나이키 신발바닥에 붙은 껌보다 못한' 한낱 미물에 불과한 Z에게 그 세계는 가히 폭력적이다. 번쩍거리는 광택의 세계, 그곳은 소비의 천국, 상품의 왕국이었는지는 몰라도 Z가 꿈꾸었던 벌레들의 천국, 인섹토피아는 아니었다.

 Z가 찾은 인섹토피아는 쓰레기장이다. 먹다 버린 사과의 숭숭 뚫린 구멍 사이에서 벌레들이 춤을 춘다. 온갖 너저분한 것 속에서 벌레들은 제 몸에 꿈틀거리는 약동하는 에너지를 맘껏 분출한다. 그곳에선 누구든 똑같은 방식으로 춤을 추지 않아도 좋다. 기계적인 몸의 움직임, 그것은 춤이 아니라 강요된 동작일 뿐이요, 획일과 균질을 미덕으로 아는 전체주의자들이나 좋아할 법한 매스게임에 다름 아니다. 인섹토피아 그곳은 제 안의 리듬에 따라 제각각의 방식으로 몸을 흔들 수 있는 곳이다. 억압된 에너지가 분출하는 이곳은 유희와 축제와 판타지의 공간이다. 곳곳에 바리케이트가 있어 초대장과 신분증이 없으면 들어가지 못하는 세계가 아니다. 그곳은 누구든 출입과 왕래가 자유로운 곳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라 온갖 쓰레기들이 난무하는 세상이다. '먹을 것이 널려 있고, 이래라 저래라 간섭이 없는 곳' 인섹토피아는 그런 곳이다. 죽어서도 대가리의 오와 열을 맞추어야 하는 위압적이고 일사불란한 군사문화와는 거리가 먼 땅이다. '개인은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왕국이야. 개미는 왕국을 위해 죽을 수 있어야 해'라고 으르대며 함부로 애국심을 강요하는 그런 곳이 아니다. 오스카 와일드는 말하지 않았던가. 애국심은 깡패들의 도피처라고. 돌이켜 보시라. 얼마나 많은 현대의 비극들이 '구국의 결단'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었는가를. 애국심을 동원하는 행사엔 얼마나 장중한 언어들이 동원되었을까.

고종석의 유럽통신 일개미들을 억압하고, 열등한 유전자들을 청소해버리겠다는 전투개미 사령관 멘디블의 언어를 눈여겨 보시라. 얼마나 장중하고, 얼마나 귀족적이고, 얼마나 세련된 어법인가. 열등한 언어를 가진 일개미들의 유전자를 일소하고 우수한 전투개미의 형질만을 유전시키겠다는 맨디블의 생각은 히틀러의 게르만족 우월주의, 그 비극적 인종주의(racism)와 기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고종석의 산문집, 『고종석의 유럽 통신』(문학동네)의 한 구절을 음미해봐도 좋을 것이다. "저는 말할 나위 없이 불순함의 편입니다. 순수함에 대한 열정, 순결함에 대한 광기는 결국 불순함에 대한 증오, 요컨대 타인에 대한 증오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역사상 그 순수함에 대한 집착이 가져온 가공할 만한 재해를 수없이 목격했습니다. 피의 순결함에 대한 열정은 가스실에서 6백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했고, 지난 수년간 르완다를 피바다로 만들었으며, 신앙의 순결에 대한 열정과 결합해 보스니아와 북에이레를 전쟁터로 만들었습니다" 고종석은 종교적 배타성도 정치적 배타성에 못지 않은 위험을 안고 있음을 말한다. " 인간 사이의 증오, 그리고 그것의 집단적 외화로서의 전쟁을 바라보면서, 저는 한두 가지 하찮은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 생각의 첫째는 사회 전체의 세속화의 필요성에 대한 것입니다. 단순한 정교분리를 넘어선 세속화 말이에요. …종교들이란 대체로, 특히 그것이 일신교라면 더욱더, 관용의 원칙을 배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항상 분쟁의 씨앗으로 작용합니다. 그 하찮은 생각의 둘째는, 사실 그 첫 번째 생각과 포개지며 그것을 더 확산하는 생각입니다만, 순수성 또는 순결성에 대한 열망을 포기할 필요성에 대한 것입니다. … 종교적인 것이든 정치적인 것이든 모든 교조주의, 근본주의의 심리적 뿌리는 순수(결)성에 대한 욕망입니다. "

 멘디블이 약속하는 땅은 고상한 언어가 지배하는 땅, 근엄한 이성만이 지배하는 땅이다. 음험한 욕망은 언어의 화려한 외양 뒤에 숨는다. 그런 땅에 천박한 언어를 구사하는 일개미들은 없어도 좋다. 대량살육은 이런 대목에서 기획되었으리라. 나는 이 대목에서 통신언어의 천박성 운운하는 언어순수주의자들, 언어국수주의자들을 떠올린다. '안녕하세요'라고 말하는 사람과 '안냐세요'라고 말하는 사람의 도덕성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어솨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어서 오세요'라고 말하는 사람들보다 폭력적일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차라리 '안녕하십니까'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안냐세요'라고 말하는 사람들보다 폭력적일 가능성은 훨씬 높다. '안냐세요'라고 말하는 사람들보다 '안녕하십니까'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권력이 주어질 가능성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건대 인섹토피아는 쓰레기장이다. 쓰레기장엔 모든 잡것들이 버려지고 모든 잡것들의 출입이 허용된다. 물론 쓰레기장에도 최소한의 규칙은 있다. 산업폐기물 같은 유독성 물질은 출입이 금지된다. 이래라 저래라 하는 규칙이 많아선 쓰레기장이 아니다. 그런 곳은 학교이고 감옥이고 병원이다. 오늘날 세계 최대규모의 쓰레기장은 인터넷이다. 자살 사이트, 엽기 사이트, 범죄 사이트, 포르노 사이트, 온갖 잡것들이 '약속 받은 땅의 젖과 꿀'처럼 흘러 넘치는 곳이다. 그러나 무질서는 참을 수 없어, 모든 균들은 박멸되어야 마땅하다는 구국의 사명감으로 이곳을 청소하겠다는 발상은 전투개미사령과 멘디블의 생각과 그다지 먼 곳에 있지 않음을 명심해야 한다. 인터넷을 놀만한 쓰레기장, 쓸만한 천국으로 만들어야 할 존재는 애국자들도 아니고 전투개미 사령관도 아니다. 그는 다름 아닌 네티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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