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석의 유럽통신
고종석 지음 / 문학동네 / 199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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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과 「개미 Z」가 말하는 순수의 위험성


 뉴욕 센트럴파크의 지하에 사는 할리우드 애니매이션 「개미Z」의 주인공, 일개미 Z-4195는 아주 불온하기 짝이 없는 녀석이다. 항상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며 조직의 명령대로만 살아가는 삶에 불만을 품고 일탈을 꿈꾸는 개미 Z는 나이트클럽에서 공주개미와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후부터 Z의 생활은 모험의 연속. 공주를 보기 위해 병정개미의 열병식에 끼어 들었다가 얼떨결에 전쟁터에 보내진 Z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전쟁 영웅이 되고, 훈장을 받는 자리에서 발라 공주와 술집에서 만났다는 사실이 발각되어 얼결에 발라 공주와 함께 바깥세계로 통하는 수렁에 빠져 찾아나서는 곳이 인섹토피아-곤충의 천국이다.

 그들이 천신만고 끝에 도달한 인섹토피아는 샌드위치와 콜라와 나이키의 땅이다. 샌드위치는 비닐랩에 싸여 있다. 투명한 비닐랩은 내용물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차단한다. 번쩍이는 내용물에 압도되어 접근하려다간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비닐랩은 오염을 원천적으로 거부한다. 땅 위를 꼼지락거리는 미물들, 시궁창을 기웃거리는 벌레들과 같이 열등한 존재들에게는 비닐랩의 세계는 배타적이다. '나이키 신발바닥에 붙은 껌보다 못한' 한낱 미물에 불과한 Z에게 그 세계는 가히 폭력적이다. 번쩍거리는 광택의 세계, 그곳은 소비의 천국, 상품의 왕국이었는지는 몰라도 Z가 꿈꾸었던 벌레들의 천국, 인섹토피아는 아니었다.

 Z가 찾은 인섹토피아는 쓰레기장이다. 먹다 버린 사과의 숭숭 뚫린 구멍 사이에서 벌레들이 춤을 춘다. 온갖 너저분한 것 속에서 벌레들은 제 몸에 꿈틀거리는 약동하는 에너지를 맘껏 분출한다. 그곳에선 누구든 똑같은 방식으로 춤을 추지 않아도 좋다. 기계적인 몸의 움직임, 그것은 춤이 아니라 강요된 동작일 뿐이요, 획일과 균질을 미덕으로 아는 전체주의자들이나 좋아할 법한 매스게임에 다름 아니다. 인섹토피아 그곳은 제 안의 리듬에 따라 제각각의 방식으로 몸을 흔들 수 있는 곳이다. 억압된 에너지가 분출하는 이곳은 유희와 축제와 판타지의 공간이다. 곳곳에 바리케이트가 있어 초대장과 신분증이 없으면 들어가지 못하는 세계가 아니다. 그곳은 누구든 출입과 왕래가 자유로운 곳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라 온갖 쓰레기들이 난무하는 세상이다. '먹을 것이 널려 있고, 이래라 저래라 간섭이 없는 곳' 인섹토피아는 그런 곳이다. 죽어서도 대가리의 오와 열을 맞추어야 하는 위압적이고 일사불란한 군사문화와는 거리가 먼 땅이다. '개인은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왕국이야. 개미는 왕국을 위해 죽을 수 있어야 해'라고 으르대며 함부로 애국심을 강요하는 그런 곳이 아니다. 오스카 와일드는 말하지 않았던가. 애국심은 깡패들의 도피처라고. 돌이켜 보시라. 얼마나 많은 현대의 비극들이 '구국의 결단'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었는가를. 애국심을 동원하는 행사엔 얼마나 장중한 언어들이 동원되었을까.

고종석의 유럽통신 일개미들을 억압하고, 열등한 유전자들을 청소해버리겠다는 전투개미 사령관 멘디블의 언어를 눈여겨 보시라. 얼마나 장중하고, 얼마나 귀족적이고, 얼마나 세련된 어법인가. 열등한 언어를 가진 일개미들의 유전자를 일소하고 우수한 전투개미의 형질만을 유전시키겠다는 맨디블의 생각은 히틀러의 게르만족 우월주의, 그 비극적 인종주의(racism)와 기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고종석의 산문집, 『고종석의 유럽 통신』(문학동네)의 한 구절을 음미해봐도 좋을 것이다. "저는 말할 나위 없이 불순함의 편입니다. 순수함에 대한 열정, 순결함에 대한 광기는 결국 불순함에 대한 증오, 요컨대 타인에 대한 증오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역사상 그 순수함에 대한 집착이 가져온 가공할 만한 재해를 수없이 목격했습니다. 피의 순결함에 대한 열정은 가스실에서 6백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했고, 지난 수년간 르완다를 피바다로 만들었으며, 신앙의 순결에 대한 열정과 결합해 보스니아와 북에이레를 전쟁터로 만들었습니다" 고종석은 종교적 배타성도 정치적 배타성에 못지 않은 위험을 안고 있음을 말한다. " 인간 사이의 증오, 그리고 그것의 집단적 외화로서의 전쟁을 바라보면서, 저는 한두 가지 하찮은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 생각의 첫째는 사회 전체의 세속화의 필요성에 대한 것입니다. 단순한 정교분리를 넘어선 세속화 말이에요. …종교들이란 대체로, 특히 그것이 일신교라면 더욱더, 관용의 원칙을 배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항상 분쟁의 씨앗으로 작용합니다. 그 하찮은 생각의 둘째는, 사실 그 첫 번째 생각과 포개지며 그것을 더 확산하는 생각입니다만, 순수성 또는 순결성에 대한 열망을 포기할 필요성에 대한 것입니다. … 종교적인 것이든 정치적인 것이든 모든 교조주의, 근본주의의 심리적 뿌리는 순수(결)성에 대한 욕망입니다. "

 멘디블이 약속하는 땅은 고상한 언어가 지배하는 땅, 근엄한 이성만이 지배하는 땅이다. 음험한 욕망은 언어의 화려한 외양 뒤에 숨는다. 그런 땅에 천박한 언어를 구사하는 일개미들은 없어도 좋다. 대량살육은 이런 대목에서 기획되었으리라. 나는 이 대목에서 통신언어의 천박성 운운하는 언어순수주의자들, 언어국수주의자들을 떠올린다. '안녕하세요'라고 말하는 사람과 '안냐세요'라고 말하는 사람의 도덕성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어솨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어서 오세요'라고 말하는 사람들보다 폭력적일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차라리 '안녕하십니까'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안냐세요'라고 말하는 사람들보다 폭력적일 가능성은 훨씬 높다. '안냐세요'라고 말하는 사람들보다 '안녕하십니까'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권력이 주어질 가능성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건대 인섹토피아는 쓰레기장이다. 쓰레기장엔 모든 잡것들이 버려지고 모든 잡것들의 출입이 허용된다. 물론 쓰레기장에도 최소한의 규칙은 있다. 산업폐기물 같은 유독성 물질은 출입이 금지된다. 이래라 저래라 하는 규칙이 많아선 쓰레기장이 아니다. 그런 곳은 학교이고 감옥이고 병원이다. 오늘날 세계 최대규모의 쓰레기장은 인터넷이다. 자살 사이트, 엽기 사이트, 범죄 사이트, 포르노 사이트, 온갖 잡것들이 '약속 받은 땅의 젖과 꿀'처럼 흘러 넘치는 곳이다. 그러나 무질서는 참을 수 없어, 모든 균들은 박멸되어야 마땅하다는 구국의 사명감으로 이곳을 청소하겠다는 발상은 전투개미사령과 멘디블의 생각과 그다지 먼 곳에 있지 않음을 명심해야 한다. 인터넷을 놀만한 쓰레기장, 쓸만한 천국으로 만들어야 할 존재는 애국자들도 아니고 전투개미 사령관도 아니다. 그는 다름 아닌 네티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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